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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백두대간 640km의 중심이며 우리나라 100대 명산중의 하나인 황장산을 배경으로 주산지를 이루고 있는 문경오미자는 대한민국 오미자 생산량의 45%를 차지하는 문경의 대표 농특산물입니다.
조선시대 지리서인 신동국여지승람과 조선환여승람에 문경토산품으로 기록되어 임금님께 진상되었으며, 조선시대 최고의 장수임금인 영조대왕이 가장 애용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옛 의서인 동의보감과 본초학등에 다섯가지 맛이 있어 오미자(五味子)이며, 껍질의 신맛은 간기운을 보하고, 과육의 단맛은 위장기능을 도와 소화촉진기능이 있으며, 씨앗의 쓰고 매운맛은 심장기능과 폐기능을 도우며, 오미자 전체의 맛은 짠맛으로 신장, 방광기능을 좋게 하는 효능이 있습니다.
최근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특히, 뇌졸중과 고혈압, 당뇨, 성기능개선, 특히 항산화, 항노화 기능이 뛰어나 노화를 방비하여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현대인에게 최고의 약이되는 식재료입니다.
자료 : 안내 | 문경오미자테마공원 소개 | 오미자테마공원 | 테마여행 | 추천관광 | 문경시 문화관광
관리사무소
여궁폭포(女宮瀑布 : 原名 - 파랑소)
높이 20m의 이 장엄한 폭포는 수정같이 맑은 물이 노송의 멋, 기암절벽의 풍치 등과 조화를 이루어 그 경관이 수려하다. 옛날 7선녀가 구름을 타고와 여기서 목욕을 했다는 곳으로 밑에서 쳐다보면 마치 형상이 여인의 하반신과 같다하여 여궁 또는 여심폭포라 불려지고 있다.
자료 : 새재 둘러보기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문경새재 아리랑비
신길원현감충렬비申吉元縣監忠烈碑 경북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288번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신길원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신길원은 선조 때에 사마시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 후에 태학의 추천으로 참봉을 거쳐 문경현감이 되었다. 현감을 맡아보던 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이 공격해오자, 관군을 거느리고 끝까지 항거하다가 부상을 입고 포로가 되었다. 왜적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굴복하지 않고 저항하다가 장렬히 순국하였다. 조정에서는 선생을 좌승지로 추증하고, 그 충절을 기리는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비는 사각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숙종 32년(1706)에 세웠다. 현재는 보호각을 세워 보존하고 있으며, 문경향교 앞에 충렬사를 건립하여 그의 충절을 기리고 있다.
저료 : 신길원현감충렬비 : 네이버 검색
문경새재개관
우리나라의 큰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이 태백산, 소백산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죽령을 지나 대미산, 포암산, 주흘산, 조령산, 희양산, 대야산, 청화산, 속리산으로 이어져 소백산맥을 이루어 나간다. 삼국과 고려 때에는 문경 관음리에서 충북 중원군의 수안보로 통하는 큰길인 하늘재(계립령)가 있었고, 문경 각서리에서 괴산군 연풍으로 통하는 소로인 이화령이 1925년 신작로로 개척되어 지금의 국도3호선이 되었다.
자료 : 새재개관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옛날에는 1978~1979년 확장 포장된 이우리재(이화령)와 가은에서 충북 괴산으로 연결된 불한령, 문경군 농암에서 충북 삼송으로 다니던 고모령 등이 있어 신라와 고구려, 신라와 백제의 경계를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곳이 영남에서 한양으로 통하는 조선시대의 가장 큰길[嶺南大路]이었던 곳이며 옛날의 유지(遺址)로는 원터, 교귀정, 봉수터, 성터, 대궐터 등이 잔존하고 있다. 조령로의 번성을 말해 주듯 조령로변의 마애비는 관찰사, 현감 등의 공적을 새겨 놓았으며, 주흘관 뒤에는 선정비, 불망비, 송덕비가 비군(碑群)을 이루고 있다. 주위의 주흘산, 조령산, 부봉과 각 골짜기마다 동 · 식물자원이 자연 그대로 보존된 관광명소이다.
자료 : 새재개관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옛길박물관 문경읍 상초리 244
문경은 예로부터 한반도 중부권과 영남권 사이의 교통 요충지였습니다.
우리 지역은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의 소통로(疏通路)로서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로 불리던 문경새재(명승)가 있고,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고갯길인 하늘재, 옛길의 백미(白眉)이자 한국의 차마고도로 일컬을 수 있는 토끼비리(명승), 영남대로 상의 허브 역할 담당했던 유곡역이 있습니다.
지역 내 옛길 관련 유적은 이름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길’로서 많은 사람이 즐겨 찾고 있습니다. 이에 발맞추어 문경시는 문경의 역사 · 문화적 정체성을 잘 드러내기 위하여 문경새재박물관을 리모델링하여 옛길박물관으로 재개관하였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여행을 하면서 괴나리봇짐 속에 무엇을 지니고 다녔을까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작고 앙증맞은 유물들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과거(科擧)길로 유명한 문경새재를 오가면서 남겨진 기록들과 국가민속문화유산인 출토 복식과 같은 문경의 문화유산도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옛길박물관은 다양한 유물들을 통해 옛길 위에서 펼쳐졌던 각종 문화상을 담아낸 보고(寶庫)입니다.
자료 : 인사말 | 소개마당 | 옛길박물관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1997년에 설립된 문경새재박물관을 확충하여 2009년 4월에 재개관한 박물관이다. 문경 지역의 민속자료와 향토역사 유물을 수집ㆍ전시ㆍ연구한다는 본래의 기능에 ‘옛길’이라는 역사 문화적 정체성을 더하여 박물관의 위상을 높였다. 6000여점의 소장품 중에 1571년(선조 4년)문경 대승사에서 간행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 1701년봉암사의 정원대사(淨源大師)가 집필한 『선원제전집도서과문禪源諸詮集都序科文』, 조선 후기 유곡역 관련 고문서들, 문경 지역 무덤 출토 복식유물인 「금선단 치마」, 「중치막」 등이 주요 소장품이다.
자료 : 옛길박물관
실내 전시실은 1, 2층으로 나뉘어 있다. 1층 전시실에는 문경 지역에서 출토된 토기 등 고고 역사 유물, 도화서 화원 이치(李治)가 그린 「옥소 권섭(玉所權燮) 영정」(1724년), 「선조 어필(宣祖御筆)」과 홍인걸(洪仁傑)의 투구, 주두업(周斗業)의 「묘지(墓誌)」, 평산신씨 묘와 전주최씨 묘에서 출토된 복식류 등 문경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알려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2층 전시실에서는 조선 후기 유곡역 고문서와 권섭의 『유행록(流行錄)』을 중심으로 전통시대의 길과 사람들에 대해 재현해놓았다. 야외에는 금학사지 삼층석탑을 비롯해 이 지역의 옹기 1500여점, 연자방아, 장독대, 솟대, 서낭당 등이 전시되어 있다.
자료 : 옛길박물관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主屹關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 사적 제147호. 새재 입구에 있는 성문이다. 숙종 34년(1708)에 축조하였고, 영조 때에 조령진이 설치되어 문경현감이 수성장을 겸하였다. 한말 항일의병전쟁 때에 일본군이 불태웠던 문루를 1922년에 다시 지었다.
주흘관은 정면 3칸, 측면 2칸,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가 3.6m, 폭 3.4m, 길이 5.4m이고,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좌우의 석성은 높이 4.5m, 폭 3.4mm, 길이 188m이고, 부속산성은 높이가 1∼3m, 폭 2∼4m, 길이는 동측이 500m, 서쪽이 400m이다. 개울물을 흘려 보내는 수구문이 있으며 3개의 관문 중 가장 옛 모습을 지니고 있다.
자료 : 문경 조령 관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문경새재 세 개의 관문 중에서 제일 웅장하기도 하거니와 옛 모습을 가장 많이 보존하고 있다. ‘문경새재 과거길’이라고쓰인 바위 앞에는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선정된 동판이 있다.
개성 있는 테마박물관답게 옛길과 관련된 유물과 사료가 가득 차 있다.
자료 : 문경새재 과거길
** 선정비(善政碑) 및 불망비(不忘碑) 1관문 뒤?
비는 왕이 승하하면 장사 지내고 신하들이 임금의 덕과 공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우는 것이 원칙이다. 이 돌은 공덕을 표하기 위한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고인들은 왕의 송덕비를 세웠다. 이것을 모방하여 군수나 현감에 대하여 참으로 그들의 시책이 잘 되어야만 비를 세워 공덕을 잊지 않게 하였다.
중국의 후한 때 오장이 군의 태수로 선정을 하였기 때문에 그가 죽은 뒤 묘 앞에 선정비를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선정비의 시초가 아닌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때 양리(良吏) 최석이 선정을 하여 팔마비(八馬碑)를 세웠다고 하는데 이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선정비의 시초인 듯 하다.
선정비의 글은 대개 일치하여 전 군수 누구의 영세불망(永世不忘)이니 송덕이니 하는 문자를 새겼다. 그 중 크고 글도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이 어쩌면 백성을 많이 울린 표본이 되기도 한다.어느 곳을 막론하고 예전 읍자리에 아직 십여개 혹은 수십개의 비석이 서 있어 선정의 허욕을 장식하고 있다. 선정비를 더욱 간수하고 옥석(玉石)을 가려 보관할 것을 보관하면 그래도 선인들의 뜻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1관문 뒤에는 당초 있던 비석과 관내에서 발견된 몇 기의 비석을 옮겨 20여기가 있다.
자료 : 각종비석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주흘관을 지나 ‘제2관’인 조곡관(鳥谷關)까지는 3㎞.
문경새재오픈세트장
드라마 , , 등을 촬영한 세트장으로 문경 도립공원과 연결되어 있다. 광화문을 생생히 구현해놓은 광화문 세트가 가장 유명한 스폿 중 하나. 한옥촌, 저잣거리, 서민 마을 등 여러 가지 분위기의 세트장이 넓은 부지 위에 펼쳐져 있어 마치 조선시대로 시간 여행하는 기분이 든다. 촬영장을 문경새재에 설치하게 된 동기는 무엇보다도 조령산과 주흘산의 산세가 고려의 수도 개성의 송악산과 흡사할 뿐만 아니라 옛길이 잘 보존되어 있어 사극 촬영장으로 매우 적합하기 때문이었다. 이 세트장의 배경은 조선시대로 드라마 속 조선시대가 궁금했던 사람이라면 과거 속으로 들어온 듯 생생한 현실감에 놀라게 될 것이다. 사극 드라마 속에 들어온 듯한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에 방문해 보길 추천한다.
자료 : 문경새재 오픈세트장
KBS촬영장이 보인다. 2만여 평의 부지에 [태조왕건], [대왕세종], [천추태후]의 세트장을 조성했다. 광화문, 근정문, 시접전, 교태전 등 조선조 건물 126동을 건립했으니,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촬영장이라 할 만하다.
자료 : 문경새재 과거길
관문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에 출장을 가는 관료 및 관리들에게 숙·식·의를 제공했던 조령원터, 도적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덮쳤다는 마당바위, 조선 시대 구 경상감사가 신 감사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해주던 교귀정이 있다. 또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불됴심(산불조심)’이 적힌 표지석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어로 된, 한글 비석 4점 가운데 국한문 혼용이 아닌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
조령원터
문경새재(조령)에서 출장 가는 관리들에게 숙식과 의복 등을 제공하던 공공 숙박 시설(원)의 터입니다
무주암
마당바위
도적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는 사람들을 덮쳤다는
교귀정(交龜亭)에서 전임 관찰사와 업무 인수인계를 하다
1751년 6월 15일, 조재호 일행이 안보역(安保驛)을 출발하여 식사 후에 경상도 도계(道界)인 조령관(鳥嶺關) 서문(西門) 밖에 이르니 조령관별장(鳥嶺關別將) 조세대(趙世大)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마중을 나와 있었다. 문루(門樓)에 올라 잠시 휴식한 뒤에 쌍가마를 타고 교귀정(交龜亭)에 오르니 전임 관찰사인 민백상(閔百祥)이 벌써 도착해 있었다. 민백상은 대사간으로 제수 받은 상태다. 관인(官印)과 병부(兵符)를 절차에 따라서 전하고 받은 뒤에 내려왔다.
자료 : 테마스토리
용추龍湫 각자 교귀정 아래 계곡? 소나무?
새재 길 옆에 위치하며 예로부터 시인(詩人)이나 묵객(墨客)이 즐겨 찾는 경승지(景勝地)이다. 『동국여지승람』 「문경현편(聞慶縣篇)」에 의하면 새재 밑의 동화원 서북쪽 1리에 있다. 폭포가 있는데 사면과 밑이 모두 돌이고,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으며, 용이 오른 곳이라고 전한다.
『在鳥嶺桐院西北一里, 有瀑布四面及底背石, 其瀑不可測, 俗傳龍騰處』
바위에 새겨진 용추(龍湫)라는 큰 글씨는 "구지정(具志禎) 숙종(肅宗) 25년(己卯, 1699)에 쓰다(己卯具志禎書)"라고 새겨져 있다. 이 곳의 경관을 읊은 시(詩)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료 : 새재 둘러보기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꾸꾸리 바위 교귀정 아래 계곡
조령 산불됴심 표석(鳥嶺 山-操心 標石) 문경읍 상초리 산42-8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을 못미쳐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 있다.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자료 : 각종비석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산불을 경계하기 위하여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돌비석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상초리의 문경새재 조령(鳥嶺)에 소재한다. 1990년 8월 7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이후 한말까지 세워진 비석 중 유일하게 한글로만 새겨진 비석이다.
자료 : 조령 산불됴심 표석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또 조선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산불됴심(산불조심)’이 적힌 표지석도 있다. 현재 남아 있는 고어로 된, 한글 비석 4점 가운데 국한문 혼용이 아닌 것은 이 비석이 유일하다.
조곡폭포鳥谷瀑布
산불됴심비에서 200m 위치에 있는 조곡폭포는 산수 수려한 주흘산 깊은 계곡에서 떨어지는 20m의 3단폭포이다.
자료 : 새재 둘러보기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조곡관(鳥谷關)(조령2관문)
선조 27년(1594)에 충주인 신충원이 축성하였다. 숙종조에 관방을 설치할 때 옛 성을 개축하였으나 관은 영성(3관문)과 초곡성(1관문)에만 설치하고 이 곳에는 조동문을 설치하였다. 1907년 훼손되어 1978년에 복원하고 문루를 옛 이름 '조동문'이라 하지 않고 조곡관이라 개칭하였다.
누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며 홍예문은 높이 3.6m, 길이 65.8m이다. 대문의 높이는 3.6m, 폭 3.56m, 두께 11cm이다.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3mm, 길이 73m이고, 좌우에 부속된 산성의 높이는 2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100m이다.
자료 : 문경 조령 관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안동부사 김수근 추사 타루비(安東府使 金洙根 追思 墮淚碑) 문경새재 제2관문옆
타루비(墮淚碑)란 옛날 진나라 때 양양 사람들이 양고(羊枯)를 생각하고 그 비를 보기만 하면 눈물을 흘렸으므로 고사(故事)에서 타루비라 하였다. 이 양고야 말로 양양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원근 사람들에게 선정한 인물이다. 그가 오(吳)나라를 치다가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양 사람들은 저자를 파하고 길거리에서 울었다고 한다. 이것을 모방하여 선조 36년에 영(營)의 수졸(水卒)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여수에 타루비를 세우고 이순신 장군을 사모한 것이 처음이다. 문경읍 상초리 초점(草岾) 교귀정(交龜亭) 부근에 세워진 김수근의 타루비는 비신(碑身) 높이 143㎝, 길이 55㎝, 두께 30㎝이고 비부(碑趺)는 높이 48㎝, 가로 108㎝, 세로 84㎝이다. 팔작형이며 비개(碑蓋)는 비신과 함께 6.25의 총흔이 남아 비문도 일부가 훼손되어 있으나 이 비는 1855년(철종6) 9월에 안동부사로 재직 시 주휼(周恤) 선정한 공로로 안동의 38방(坊)의 소민(小民)들이 세운 비이다.
김수근은 1798년(정조22)에 태어나서 1854년(철종5)까지 생존했던 현종 때의 중신으로 자(字)는 회부(晦夫) 호(號)는 계산노초(溪山老樵) 시호는 문정, 본관은 안동이다. 목사 인순의 아들, 철종의 장인 문근의 형으로 진사가 되어 문벌로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고 1834년(순조34) 문과에 장원급제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죽은 뒤 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그의 아들 병국, 병학은 재상이 되고 동생 문근은 영은(永恩) 부원군에 봉군되었다. 저서로는 삼연연보(三淵年譜)가 있다.
자료 : 각종비석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조곡약수(鳥谷藥水)
이 약수는 기암절벽으로 둘러싸인 청산계곡 사이로 흐르는 용천수로서 물이 맑으며 맛이 좋아 길손들의 갈증과 피로를 풀어주는 영약수(靈藥水)로 널리 알려지고 있다.
자료 : 새재 둘러보기 | 유적 | 문경새재도립공원 | 문경자랑 | 문경시 문화관광
문경새재민요비
조곡관을 지나 약 500m가면 도로 변에 자연석을 깎아 새긴 비(문경새재민요비)로 민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홍두깨 방망이 팔자 좋아 큰 애기
손질에 놀아난다.
문경새재 넘어갈 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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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밭 서들
제2관문에서 조곡계곡을 따라 약 4km 올라가면 산허리를 돌무더기와 긴 돌로 세워 놓고 그 위에 작고 넓적한 돌을 얹어 마치 장승처럼 세운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꽃밭 서들이다. 오가는 사람들이 소원성취를 위하여 이렇게 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들을 못 낳는 여인이 여기 와서 빌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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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령관 답사.. 대간 17-2(거인25회차) : 조령산 구간 .. : 네이버블로그
** 문경새재 과거길 ** 조령약수 ** 조령산성
조령관 문경새재(조령3관문)
새재 정상에 북쪽의 적을 막기 위해 선조 때 쌓고 숙종 초(숙종 34년:1708)에 중창하였다. 1907년에 훼손되어 육축만 남고 불탄 것을 1976년에 홍예문과 석성, 그리고 누각을 복원했다. 조령관을 기준으로 남쪽은 문경 지역이고 북쪽은 충주 지역이다. 이곳에서 북쪽으로는 마폐봉을 지나 북암·동암문·부봉·주흘산으로 가고 남쪽으로는 깃대봉·조령산 공산진·이화령으로 이어진다.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좌우에 협문이 2개가 있고 팔작지붕이다. 홍예문은 높이 3.88m, 폭 2.98m, 길이 6.12m이며, 좌우의 석성 높이는 4,5m, 폭 3,2mm, 길이 185m이고, 부속산성의 높이는 2∼3m, 폭 2∼3m, 길이는 동측이 400m, 서측이 400m이며 대문의 높이는 3.9m, 높이는 3.9m, 폭 3.56m, 두께 19cm이다.
자료 : 문경 조령 관문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조령약수(鳥嶺藥水)
이 약수는 조선 숙종 34년에 조령성을 구축 시 발견된 약수터이며 우리 조상들이 청운의 꿈을 안고 한양길을 넘나들 때 이 감로수(甘露水)로 갈증과 피로를 풀었으며 춘하추동 수온이 일정하여 한 겨울에도 얼지 않는 백수영천(白壽靈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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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원급제길
문경 땅 바로 이 길은 조선조 선비들이 장원급제를 꿈꾸며 과거차 한양으로 넘나 들던 옛적 그대로의 길이다. 영남대로인 문경새재는 문경의 옛 지명인 문희에서 드러나듯 "기쁜 소식을 듣게 된다. 하여 영남은 물론 호남의 선비들까지 굳이 먼 길을 돌아 이 길을 택하기도 하였다. 또한 택리지에 ·조선 선비의 반이 영남에서 배출되었다"라는 구절이 있음을 볼 때 참으로 수많은 선비와 길손들이 이 곳을 왕래 하였음을 헤아릴 수 있고, 아울러 장원급제한 선비들도 상당하였음에 연유하여 이 길을 "장원급제길"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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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막(酒幕)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1983년 11월 조국순례자연보도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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