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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의 무죄 주장에 대한 반박(1-4)
하나님께서는 때로는 절망의 이르기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의 의지와 희망과는 무관하게 하나님께서 뜻하시고 실행하시면서 이끌어 가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서 겪는 재앙의 이유는 ‘하나님께 있다’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재앙의 문제를 사람에서 찾으려 하고, 본인에게 문제가 있다라고 판단하려 함다면, 실수하기 쉽습니다. 잘못하면 죄로 규정하고 해결 방법으로 하나같이 회개를 제시할 수 있습니다.
1나아마 사람 소발이 대답하여 이르되 2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 3네 자랑하는 말이 어떻게 사람으로 잠잠하게 하겠으며 네가 비웃으면 어찌 너를 부끄럽게 할 사람이 없겠느냐 4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1-4)
욥의 친구 소발은 앞서 빌닷과 유사하게 욥을 비판하면서 시작합니다. 빌닷이 욥의 폭풍 같이 거센 말을 비판했다면, 소발은 말이 많은 사람을 부정적으로 보는 잠언의 전통 지혜를 빌어서 욥의 ‘많은 말’을 문제 삼습니다. 2절의 “말이 많으니 어찌 대답이 없으랴”는 ‘말을 많이 하면 우리가 대답하지 못할 줄 아느냐?’라는 의미입니다. 하반절의 “말이 많은 사람”은 직역하면 ‘입술의 사람’입니다. 사람이 말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소발은 계속해서 욥의 그 많은 말들은 다 반박이 가능하다고 주장합니다(3). 소발은 욥의 말을 반박하기 위해서 그의 말을 ‘인용’합니다: “네 말에 의하면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 하는구나”(4). 사실 이것은 직접 인용이 아닙니다. 욥이 그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우선 “정결”이라는 단어는 엘리바스가 사용한 바 있습니다(8:6 “청결하고”). 후에 엘리후도 욥을 비판하면서 “나는 깨끗하여”(33:9)라고 욥이 말했다고 주장합니다. 욥은 16:17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자신의 기도가 정결하다고 할 때, 이 단어를 한 번 사용할 뿐입니다. 둘째, “깨끗하다”로 번역된 ‘바르’도 욥의 말에서 단 한 번 사용되는데, 9:30에서 자신이 “잿물로 손을 깨끗하게 할지라도”라고 말하기 때문에 소발의 인용은 욥의 말을 본뜻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닙니다.
4절이 비록 ‘너는 말했다’로 시작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욥의 말에 대한 소발 자신의 해석이 가미된 것입니다. 이것은 8장에서 빌닷이 욥의 말을 ‘하나님이 의롭지 못하다’라는 주장으로 해석해서 비판하는 것과 그 방식에서 동일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옳지 못하고 공정하지 못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인과응보에 기반한 규범적 지혜의 관점에서는 의인/지혜자에게 재앙이 임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옳지 못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결국 욥의 말 중에서 세 친구들에게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고난을 당하는 욥이 ‘자신은 이 고난을 당할 정도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무죄주장입니다. 소발이 욥의 말을 “내 도는 정결하고 나는 주께서 보시기에 깨끗하다”라고 ‘인용’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 규범적 지혜를 기반으로 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공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발의 신앙 안에서는 ‘무죄한 자의 고난’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있어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한계(반성적 지혜)(5-11)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고 자신은 그의 피조물임을 인전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 호소할 수 없습니다. 타락한 피조물인 인간이 구원의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시며 모든 피조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욥의 고백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 간구하는 믿음을 소유하기를 바랍니다.
5하나님은 말씀을 내시며 너를 향하여 입을 여시고 6지혜의 오묘함으로 네게 보이시기를 원하노니 이는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 7네가 하나님의 오묘함을 어찌 능히 측량하며 전능자를 어찌 능히 완전히 알겠느냐 8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 9그의 크심은 땅보다 길고 바다보다 넓으니라 10하나님이 두루 다니시며 사람을 잡아 가두시고 재판을 여시면 누가 능히 막을소냐 11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5-11)
5-6절 전반부를 개역개정처럼 “하나님은… 원하노니”로 번역하는 것은 욥기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지를 충분히 감안한 것이 아닙니다. 직역하면 ‘누가 주는가?’인데, 이 관용어구는 11:5 외에 6:8; 13:5; 14:4,13; 19:23; 23:3;31:35에 쓰일 만큼 상당히 자주 사용되는 표현으로 현실화하기 어려운 소망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 자네에게 입을 여셔서 그 감추어진 지혜를 직접 알려주신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문제는 그 지혜가 ‘감추어진 것’이라는 데 있습니다. “오묘함”(6)으로 번역된 ‘타알루모트’는 ‘감추어진 것’이라는 뜻이며, 오랜 옛날(태고)을 뜻하는 동시에 “영원”으로 흔히 번역되는 단어 ‘올람’과 어근이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원리(규범)는 천지를 창조하신 그 태곳적(올람)에 결정된 것이기에 그 시기까지 접근할 수 없는 인간에게는 ‘감추졌다.’ 그분의 지혜는 너무나 커서(6 “그의 지식이 광대하심이라”) 인간이 측량할 수 없고 그 지혜의 전모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7). 소발은 하나님께서 욥으로 하여금 그의 죄를 일시적으로 잊게 하셨는데도 욥은 그것도 모르고 자기 의를 과신한다고 비판합니다. 여기에 이어지는 소발의 주장은 앞 문장과 논리적 정합성을 보입니다: 인간은 "하늘보다 높으시니 네가 무엇을 하겠으며 스올보다 깊으시니 네가 어찌 알겠느냐”(8). 개역개정은 이 문장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해석했지만, 원문을 번역하면 ‘하늘만큼 높은 것을 네가 만들 수 있겠는가? 스올보다 더 깊은 것을 네가 알 수 있겠는가?’가 됩니다. 욥이 하늘과 스올의 일까지 통달한 것처럼 말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의 지혜는(9절의 주어는 여성 단수로서 문법적으로 하나님이 될 수는 없다) 이 지구의 육지보다 더 길고 바다보다 더 넓으니(9) 한낱 인간이 그 지혜를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소발은 창조주의 크심을 그분의 절대주권(자유)으로 연결합니다: ‘그분이 순화시키고 닫으시고 모으시면 누가 그것을 원래대로 돌려놓을 수 있겠는가?’(10) 절대 전지 공평하신 하나님의 재판을 아무도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두루 다니다가 욥의 죄를 발견하고 심판처분을 위해 재판을 여셨다는 뜻입니다. 지금까지의 소발의 말은 정확히 반성적 지혜의 주장과 일치합니다. 욥이 한 얘기가 이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크신 분이라 피조물인 인간이 그분을 다 알 수 없고, 창조주 하나님은 주권자로서 자신의 뜻을 (어떤 원칙에 매임이 없이) 주권적으로 행사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자유)과 인간의 한계를 연결하는 것은 욥의 반성적 지혜입니다. 그런데 소발은 동일한 주장의 끝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얘기를 하나씩 덧붙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로 하여금 너의 죄를 잊게 하여 주셨음을 알라”(6b)와, “하나님은 허망한 사람을 아시나니 악한 일은 상관하지 않으시는 듯하나 다 보시느니라”(11)입니다. 이 두 문장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아시고 어떻게 움직이시는지를 욥에게 설명하는 문장입니다. 대체 소발이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소발 역시 피조물인 한낱 인간으로서, 소발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소발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가지고 있다면, 그 자신은 피조물의 한계를 벗어난 존재라는 말이 됩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할 줄 알아야 한다던 소발의 훈계는 소발 자신부터 적용해야 합니다. 6절의 끝 문장과 11절에서만 “죄”와 “악”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나머지는 선악 개념과 인과응보의 원리를 초월한 진술이라는 사실을 파악하는 것이 소발의 주장을 이해하는 핵심입니다.
의인/지혜자에게 임하는 복(규범적 지혜)(12-20)
무고한 사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도 억울한 고통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모든 고난이 죄의 결과입니까? 또는 모든 부귀가 선의 결과입니까? 우리가 의로워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화평하므로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복을 누리고 화평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을 함부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모든 고통을 공감하고 위로할 수 없는 부족한 자들입니다.
12허망한 사람은 지각이 없나니 그의 출생함이 들나귀 새끼 같으니라 13만일 네가 마음을 바로 정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들 때에 14네 손에 죄악이 있거든 멀리 버리라 불의가 네 장막에 있지 못하게 하라 15그리하면 네가 반드시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 굳게 서서 두려움이 없으리니 16곧 네 환난을 잊을 것이라 네가 기억할지라도 물이 흘러감 같을 것이며 17네 생명의 날이 대낮보다 밝으리니 어둠이 있다 할지라도 아침과 같이 될 것이요 18네가 희망이 있으므로 안전할 것이며 두루 살펴보고 평안히 쉬리라 19네가 누워도 두렵게 할 자가 없겠고 많은 사람이 네게 은혜를 구하리라 20그러나 악한 자들은 눈이 어두워서 도망할 곳을 찾지 못하리니 그들의 희망은 숨을 거두는 것이니라(12-20)
5-11절까지의 소발의 말이 반성적 지혜의 주장 끝에 규범적 지혜의 주장을 엉성하게 덧붙이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면, 12-20절은 다시 전형적인 규범적 지혜의 언어로 회귀합니다.
소발은 다시 욥에게 회복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는 욥을 허망한 사람이라고 여기며 자신에게 닥친 재앙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욥을 비판합니다. 그러나 마음을 하나님께로 바로 세운다면(13), 즉 죄악과 불의에서 멀어지고(14), 잘못된 길에서 벗어나면 다시 굳게 서서 두려움 없이 사는 의인/지혜자의 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15). 그러면 고난은 이미 지나간 물처럼 여겨질 것이고(16), 욥의 인생은 대낮처럼 화창할 것이며 어둡던 것은 밝게 빛나게 될 것입니다(17). 여기서 한 가지, 15절의 “흠 없는 얼굴을 들게 되고”라는 표현을 통해 소발은 욥의 현재 상태가 죄의 결과이고 흠/결함이 있는 상태라는 것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뭄’은 ‘흠’, ‘결함’, ‘장애’를 나타내는 말로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은 죄악의 결과이며 하나님의 징벌이라는 신학을 반영합니다. 소발의 규범적 지혜가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의인/지혜자에게 “희망”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18). 누워 있어도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이 없고,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욥에게 잘 보이려고 몰려들 것입니다(19). 이와는 반대로 악인은 도망칠 곳이 없고 앞을 볼 수 없는 지경이어서 오직 바랄 것은 죽음뿐입니다(20). 욥기의 성실한 독자라면, 5-10절의 반성적 지혜와 12-20절의 규범적 지혜가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고개를 갸우뚱할 것입니다.
성도는 적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자로서 그 하나님의 사람과 영광을 세상에 선포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사랑을 몸소 실천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전하여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올려 드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