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24] 이소담(李小淡) - 내 인생 외길에 걸고 3. 통일교회 문을 두드리다 - 3
1 서울 교회(세대문집)에서 처음 주일 예배를 보게 되었다. 불도 피우지 않은 좁은 마루에 7~8명이 모여 앉았는데 선생님께서 예배 인도를 하시며 찬송을 수차 부르고 기도하시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눈물이다. 2 내용은 예수님과 하나님이 불쌍하시다는 것이다. 나도 서럽게 따라 울면서도 왜 두 분이 불쌍한지를 몰랐으나 은혜가 많았다. 예배가 끝나자 나에게 명함을 준 분의 얼굴이 보이자 “유 선생 오래간만이오” 하니까 반가워 웃으며 악수를 했다.
3 그동안 강의를 듣고 은혜를 많이 받아서 고맙습니다, 인사하면서 “문 선생님이 선지자가 아닙니까?” 하고 질문하자 웃으면서 “생각대로 하세요” 하고 시원한 답을 안 해 준다. 4 예배에 참석하고 은혜를 받고 나니 나의 영혼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나의 인생관, 기독관, 세계관에 180도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5 지금까지 나와 내 가정을 위해 살았고 불쌍한 이 민족을 돕겠다는 생각뿐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국가, 세계,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다. 이제 방황을 끝내고, 찾고 싶고, 보고 싶었던 분이 문 선생님이라는 사실이 확신되었다. 6 1954년 12월 18일, 몇 개 안 되는 감투를 미련 없이 버리고 입교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큰일을 치른 것 같이 마음이 흐뭇하다. 내 인생이 새로 시작되는 입교일이다. 7 성동구 북학동 391번지 조그만 초가집에 세 들어 교회로 사용하고 있으나 드나드는 사람은 저명인사들이다. 네모진 널판에 흰 페인트를 칠한 간판에는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서울교회라고 나지막이 달려 있었다.
8 누구나 뜻길을 나서면서부터 당하는 핍박이 나에게도 시작되었다. 그것은 사촌 올케인 이신덕 씨를 교회에서 만나고부터이다. 대구에서 들어온 이신덕써는 통일교회 나오는 것을 친척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며, 자기는 미쳤다고 영감(사촌동생)에게 죽도록 맞았다고 한다.
9 어떻게 알았던지 사촌 남동생은 나의 부친을 찾아가서 “큰 아버님, 소담이 누이 통일교회에 나간다는데 못 나가게 하세요” 하자 하나님과 교회밖에 모르시는 부친이 교회에 못 나가게 하라는 말에 화가 나셔서 “야, 남의 걱정 말고 네 걱정이나 해라. 네가 무슨 상관이야?” 하고 소리를 치시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뒤 그는 우리 형제들을 찾아 누이가 미치는 교회에 다니니 손 좀 쓰라고 집집마다 다니며 소문을 냈다.
10 그래서 형제들은 가족회의를 열고 나의 남편을 만나기로 했다. 대표로 찾아간 셋째 오빠가 “매부, 원민(장남)이 어머니 어디 나가는지 알고 있느냐”라고 따져 물었다. ‘통일교회에 열심히 나간다’라고 하자 “거기 못 나가게 하시오. 음란교회랍니다. 교육자요, 종교인이 남이 나가도 못 나가게 막을 터인데 그런 데를 왜 나가요? 나는 못 믿어요” 하는 것이었다.
11 오빠는 또 “그 교회에 나가면 미친답니다. 완기 엄마(이신덕 씨)가 그 교회에 나가다 미쳤답니다” 하고 나쁜 소문을 그대로 전했다. 남편은 미친다는 말에 급히 차를 몰고 집에 돌아오며 이제까지 여러 현상을 좋게만 보아왔는데 그것이 정말 미치는 초기 현상인가 의심하며 집문 앞에 도착하였다.
12 집 안에서 노랫소리가 들려 나오자 가만가만 샛문을 열고 들어온 남편은 밥을 지으면서 “예루살렘 예루살렘 호산나 높이 부르며 만왕의 왕 맞으라” 하며 두 손을 번쩍 드는 나를 보고 미쳤긴 정말 미쳤구나 하고 문을 활짝 여는 것이었다.
13 내가 “당신 빨리 왔네요” 하며 반가이 맞아주니 눈이 휘둥그레 가지고 고개만 끄덕거린다. 그 후 일주일을 이상한 눈으로 감시를 하고 일주일 후 “당신 미쳐도 그렇게 미치면 괜찮아” 하면서 둘이 웃었다.
14 남편은 원리를 듣고 나서 선생님은 기독교의 큰 혁명가라 말하고 좋은 것이나 맛있는 것이 있으면 문 선생님에게 드리라고 했다. 그러나 유감인 것은 시간이 없어 원리를 다 듣지 못하여 끝까지 믿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