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규 발작증 더 심해졌다, 박정희 시대 종말 시작됐다 (6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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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신 뒤 대통령의 정밀한 판단력이 흐려지는 징후는 여러 군데에서 드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생활의 균형을 잡게 한 건 육 여사였다. 그분이 세상을 뜨자 대통령은 생각과 행동의 균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분할해 통치한다는 박 대통령의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 rule)’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권력의 추는 2인자 행세를 하는 차지철 경호실장 쪽으로 쏠리고 있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대통령의 신임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박 대통령은 차지철과 김재규에게 둘러싸였다. 비서실장 김계원은 이들을 견제하지도, 조정하지도 못했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충성 경쟁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았다. 18년 정권, 종말의 무대에서 차지철은 불길했고 김재규는 불안했다.
1973년 12월 27일 서울 중앙청 국무총리 집무실로 김재규 중정 차장이 찾아와 김종필 총리에게 신임 인사를하자 김 총리가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하고 있다.
김 차장은 이때부터 동갑인 JP에게 “총리 각하”라고 호칭하기 시작했다. 김재규는 박 대통령의 동기(육사 2기)·동향(경북 구미)이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76년 12월 박 대통령은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을 김재규로 바꾸었다. ‘박동선 대미 로비 의혹’으로 미국 내 한국 여론이 악화되고 있을 때였다. 여기에 고무돼 국내의 반정부 운동이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대통령이 정권의 고삐를 바짝 죄는 인사를 단행한 것이다. 김재규는 겉으론 온건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일종의 병인데, 욱하는 성질이 지나쳐 한번 흥분하면 얼굴이 빨개가지고 전후좌우 분간을 못하고 마구 욕을 해댄다. 세상에 보이는 것이 없고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땐 발작증이라고 치부했다. 요즘 말로 분노조절 장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규는 육영수 여사 서거 뒤인 74년 9월 내가 총리로 있던 내각에 건설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는 국무회의 땐 별로 발언도 하지 않고 조용했다. 그런데 국회의 정책질의에 답변하기 위해 상임위원회에 출석하면 사고를 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