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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시인- 이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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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선 대표작 7편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오늘은 일찍 집에 가자
부엌에서 밥이 잦고 찌개가 끓는 동안
헐렁한 옷을 입고 아이들과 뒹굴며 장난을 치자
나는 벌서듯 너무 밖으로만 돌았다
어떤 날은 일찍 돌아가는 게
세상에 지는 것 같아서
길에서 어두워지기를 기다렸고
또 어떤 날은 상처를 감추거나
눈물자국을 안 보이려고
온몸에 어둠을 바르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일찍 돌아가자
골목길 감나무에게도 수고한다고 아는 체를 하고
언제나 바쁜 슈퍼집 아저씨에게도
이사 온 사람처럼 인사를 하자
오늘은 일찍 돌아가서
아내가 부엌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듯
어둠이 세상 골고루 스며들면
불을 있는 대로 켜놓고
숟가락을 부딪치며 저녁을 먹자
기러기 가족
- 아버지 송지호에서 좀 쉬었다 가요.
- 시베리아는 멀다.
- 아버지, 우리는 왜 이렇게 날아야 해요?
- 그런 소리 말아라]
저 밑에는 날개도 없는 것들이 많단다.
옥상의 가을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들어 있다
피는 따뜻하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禪林院址에 가서
禪林으로 가는 길은 멀다
미천골 물소리 엄하다고
초입부터 허리 구부리고 선 나무들 따라
마음의 오랜 폐허를 지나가면
거기에 정말 선림이 있는지
영덕, 서림만 지나도 벌써 세상은 보이지 않는데
닭죽지 비틀어 쥐고 양양장 버스 기다리는
파마머리 촌부들은 선림 쪽에서 나오네
천년이 가고 다시 남은 세월이
몇번이나 세상을 뒤엎었음에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근 농가 몇채는
아직 面山하고 용맹정진하는구나
좋다야, 이 아름다운 물감 같은 가을에
어지러운 나라와 마음 하나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소처럼 선림에 눕다
절 이름에 깔려 죽은 말들의 혼인지 꽃들이 지천인데
經典이 무거웠던가 중동이 부러진 비석 하나가
불편한 몸으로 햇빛을 가려준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여기까지 오는데 마흔아홉 해가 걸렸구나
선승들도 그랬을 것이다
남설악이 다 들어가고도 남는 그리움 때문에
이 큰 잣나무 밑동에 기대어 서캐를 잡듯 마음을 죽이거나
저 물소리 서러워 용두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슬픔엔들 등급이 없으랴
말이 많았구나 돌아가자
여기서 백날을 뒹군들 니 마음이 절간이라고
선림은 등을 떼밀며 문을 닫는데
깨어진 浮屠에서 떨어지는
뼛가루 같은 햇살이나 몇됫박 얻어 쓰고
나는 저 세간의 武林으로 돌아가네
혜화역 4번 출구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 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 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 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 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 메시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를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소나무 숲에는
소나무 숲에는 뭔가 있다
숨어서 밤 되기를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렇게 은근할 수가 있는가
짐승처럼 가슴을 쓸어내리며
모두 돌아오라고, 돌아와 같이 살자고 외치는
소나무 숲엔 누군가 있다
어디서나 보이라고, 먼 데서도 들으라고
소나무 숲은 횃불처럼 타오르고 함성처럼 흔들린다
이 땅에서 나 죄 없이 죽은 사람들과
다치고 서러운 혼들 모두 들어오라고
몸을 열어놓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바람 부는 날
저렇게 안 우는 것처럼 울겠는가
사람들은 살다 모두 소나무 숲으로 갔으므로
새로 오는 아이들과 먼 조상들 까지
거기서 다 만나는 것 같다
그래서 우리나라 밥 짓는 연기들은
거기 모였다가 서운하게 흩어지고
소나무 숲에는 누군가 있다
저물어 불 켜는 마을을 내려다보며
아직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누군가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날마다
저렇게 먼 데만 바라보겠는가
<초청강연>- 이상국 시인
말들의 거처, 말들의 운명에 관한 생각들
1.
어느 해 사월초파일 이성선 시인과 신흥사 조실스님이 무슨 이야기 끝에 스님이 나는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시자 이성선 시인은 스님 제가 먼저 세상을 뜰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는 말을 나는 무심하게 들었다. 그리고 며칠 안 돼 시인은 정말 세상을 버렸다.
말은 다 안다. 그러니까 말을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말에게 자신을 들키거나 잘 못 보이면 그 안에 갇히거나 따라 다닐 수밖에 없다. 또 한 번 한 말을 없었던 일로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누굴 영원히 사랑한다던가, 좋아 죽겠다던가 하는 치명적인 말은 조심하는 게 좋다. 말이 서투를 땐 어디든 직접 전달되고 바로 가 닿고자 한다. 그러나 말도 철이 들면 은근해지고 표현이 애매모호해 지기도 한다. 말이 에돈다는 것은 그것이 이 세계에 대하여 예의를 차리고 사물들을 존중한다는 것이다.
나는 10년도 넘게 타고 다니던 자동차를 내다 버리며 그간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는 걸 알았다. 허기를 호소해야만 먹이를 주고 종처럼 부려먹었으니 그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외진 골목길에 홀로 선 가로등, 중국집 주방이나 공중변소 천정에서 먼지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힘을 다해 돌아가는 환풍기, 이런 것들에 대하여서도 마땅한 대우를 해 줘야한다. 안도현은 일찍이 연탄재의 고뇌를 대변해 주고 연탄재 비슷한 사람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는데 하물며 생명에 대하여서는 더 할 나위도 없다.
시인이 전통사회에서 벼슬을 했거나 어느 때는 지사적 대우를 받았던 적도 있으나 산업사회에 이르러서는 그 지위가 변변치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하여 말로 극진한 예의를 지키고자 하는 천성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우할까 저렇게 모실까 하는 고투 끝에 대게는 20행 내외의 틀 속에 100 여 마디의 말로 세계를 구현해 내는 게 한 편의 시다. 그런데 그것이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거나 기분을 나쁘게 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한 편의 시가 사람의 운명을 바꿔놓기도 하고 어떤 때는 짧은 구절 하나로 전광석화 같은 감동을 선사하기도 한다.
말의 궁극적 목적은 생각을 전달하는 데 있다.
언젠가 누군가 나를 우리나라에서 가장 쉬운 시를 쓰는 시인이라고 한 적이 있다. 여기서 쉽다라는 것은 뭘까?. 전달이 잘 된다는 말일까, 고투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일까.
2.
지난 늦여름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시집 60여 권 읽은 적이 있었다.
등단 10년 미만의 시인들이었다. 대체적으로 자가 목소리를 내거나 문단 분위기나 조류에 민감한 시기이기도 하다. 읽어야 할 의무가 있어서 꼼꼼하게 읽기는 했지만 읽고 난 소감은 대략난감 그것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은 감각적 언어의 과잉 같은 것으로 가능한 한 대상이나 의미를 복잡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이유로 가독이 불편했고 그러다 보니 뭘 읽었는지 의미 파악이 어려웠다. 그들 대부분은 언어로 표현되는 대상에 대한 예의나 전달에 대한 배려 같은 건 별로 고려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실험은 어느 때나 불온한 것이라고는 하지만 새로운 시인들은 새로운 서정과 표현방법을 들고 나와 기존의 질서를 흔들고자 하는 열정을 갖기 마련이다. 그들이 이 세계를 겪고 받아들이는 감수성이나 그 것을 담아내는 방법은 그 이전과는 뭐가 달라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어가 전달의 기능을 상실하거나 독자들의 이해를 의도적으로 헷갈리게 하는 데 치중하다보면 결국은 그 언어들의 상호 불신이나 자가 중독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말 따라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스마트 폰을 써보니까 별거 아니었다. 인간의 존엄이나 행복과는 별 상관이 없는 물건이었다. 손바닥 보다 작은 물건 하나에 그렇잖아도 복잡한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들어 넣은 데 불과했다. 하긴 실제보다 더 리얼한 가상공간을 통하여 언제 어디서나 현상과 현장의 교환이 가능하고 보면 그 진화의 끝이 어디가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긴 하다.
언제부턴가 가독이 불편한 시라든가 함량미달의 시인의 양산을 우려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런 현상이 상업적이라든가 일종의 센세이널리즘 이라고 더러는 흥분한다. 그러나 어느 때고 새 것과 헌것은 갈등하고 싸우기 마련이다. 이승훈 시인은 어디선가 시의 본질이 무엇이냐, 시도 시적인 것도 없다. 제도가 사라고 불러주면 그게 시다. 라고 요즘 시에 대하여 다소 냉소적 반응을 보였는데 이 모든 기대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시는 번성할 것이고 말을 남을 것이다
3.
김수영은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자기는 왜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느냐고 자조했다.
“저 王宮 대신에 王宮의 음탕 대신에/ 五十 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그리고 “방 두간과 마루 한 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라고 한탄한다.
얼마 전 리비아의 카다피가 죽었다. 그러고 나서 누군가 시인 고은이 카다피를 미화했다고 비난하는 칼럼을 중앙일보에서 읽은 적이 있다. 한 대목 인용하면 이렇다.
“고은은 카다피를 옹호하고 미화했다. ‘당신이 아직도 대령 계급장을 고수하는 괴벽을 퍽 고무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가 글을 쓴 89년 이면 카다피 집권 20년이다. 고은은 박정희 18년 집권은 비난하면서 테러리스트 독재자 20년은 우호적으로 평가했다. 수백 명을 죽인 카다피와 김정일 테러에는 침묵하면서 미국의 응징과 한미 연합훈련은 매도했다”
박정희 18년은 비난하는 시인이 반미노선의 세기적 독재자는 왜 옹호하며 또 북한의 독재자에게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느냐, 이런 얘긴데 적어도 글쓴이가 고은 시인과 사적인 감정이 없다면 이쯤 되면 시인이란 인류의 평화와 공존에 관계하는 위대한 존재이거나 고작 자기 말의 덫에 치여 시시비비의 진창에 나뒹구는 존재일 수밖에 없다.
말은 남을 찌르기도 하지만 자신에게 상처를 내기도 한다. 그래서 말은 무섭다. 말은 살아있다. 멀리 4.19 혁명 때는 내가 중학생이었으니까 접어두고라도 가까이는 광우병 촛불집회나 대추리 혹은 용산 참사현장 같은 곳에 나는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못간 건 아니다. 늘 그랬다. 지금도 김진숙은 여자의 몸으로 한진중공업 고공 타워에서 300일을 넘겼다. 참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도 남의 일이고 나는 희망버스를 한 번도 타지 않았다. 안탔다고 누가 뭐라 한 적도 없다. 가능하면 문인들이 많이 모이는 자리는 안가고 술은 혼자 마시고 몸에 좋다는 건 열심히 구해 먹는다.
나의 시는 언제나 나 개인적인 정서로 가득하고 대강 농사꾼 선대나 농업적 정서를 자산으로 운영되어 왔으나 그 것이 대체적으로 남루하고 수적 열세이거나 계급적으로도 형편없는 계급이 되었으므로 요즘은 대처로 나간 아들딸이나 혹은 도시의 골목으로 말의 거처를 옮겼다.
어느 날 춘천 102보충대에 아들을 집어넣고 돌아오는 차 속에서 나는 안도했다. 입대해서 재수 없으면 그 애비의 신상도 들춘다는데 나는 나날이 오르는 기름 값에 분개하거나 우리 집 뒤란에 낙엽을 떨구는 뒷집 감나무를 욕할 뿐이다. 고작 노무현 전 대통령이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렸을 때 불쌍해서 눈이 퉁퉁 붓도록 울거나 언젠가 평양 망경대에 갔다가 흰저고리 검정치마 안내원에게 악수를 청하고는 누가 보았을까봐 아직도 꺼림칙해 하는 정도다. 고은 시인처럼 반미하는 남의 나라 대통령을 옹호한 적도 없고 불온한 시를 쓴 적도 없었다. 더구나 권력을 불편하게 한 전과도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나에게 고은은 정말 대시인이다.
4.
국민학교 시절부터 문필가가(?) 되겠다고 하여 선생님이 문필가가 뭔지나 아느냐며 어이없어 하던 아이가 커서 시인이 되었다. 시인은 대표작이라는 것을 내놓아야 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마다 나는 첫시집은 물론 번째 시집 까지에서는 작품을 선택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문학에 뜻을 두고 오랜 습작기를 거쳐 마침내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수줍은 처녀시집에서나 80년대와 90년대 초를 살아오며 낸 두 권의 시집, 그 속에 일테면 나를 대표할만한 시가 한 편도 없다는 게 말이 되는지. 누군가 시인에게 수작과 타작이 있을 뿐 대표작이 어디 있냐고도 했지만 그러면 거기에 실린 수많은 시편들은 나의 무엇이었을까?. 그것들은 나의 존재가 소멸하면 같이 사라져버릴 말의 쓰레기들일까? 혹은 지독한 실패이거나 일종의 자기부정 같은 것일까.
다시 시집을 준비하면서 원고 정리작업을 했다.
저 번 시집을 낸지 상당한 기간이 지났으니 작품 수가 제법 많았다. 그러나 그 중 시집 한 권 분량의 시를 선하기 힘들었다. 그렇게 나에게 미달하는 상당한 시편들의 운명은 또 어떻게 되는 것일까?. 물론 그 작품들을 쓰고 발표할 때는 적어도 이만하면 되었다고 회심의 미소를 지었던 것들이다.
김춘수 시인이 어딘가 쓴 시작노트를 보면 알베르 까뮈는 “많은 여자를 사랑한다고 그 깊이가 달라지는 건 아니다” 라고 했다고 한다.
나도 한 편 한 편을 똑같이 사랑했으니 위안은 되지만 불안하기 그지없다.
2011 불교문예
마가목의 노래
이홍섭 (시인)
마가목(馬駕木)이라는 나무가 있다. 원래 명칭은 마아목(馬牙木)으로, 새순이 말의 이빨처럼 힘차게 돋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예로부터 풀 중에는 산삼, 나무 중에는 마가목을 으뜸으로 쳤다. 마가목 껍질로 말채찍을 만들어 말을 한 대 때리면 말이 금세 쓰러져 죽을 정도라 하여 귀신도 쫒을 수 있는 신통한 나무라 했다. 이 마가목은 찬바람이 매섭게 몰아치는 높은 산정에서 많이 자란다.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랄 수 있는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옛날 어르신들이 마가목으로 지팡이를 만들어 쓴 것에는 이러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이상국 시인은 마가목을 닮았다. 금세 말의 이빨 같은 새순이 힘차게 돋아날 듯 늘 젊음을 유지하고 있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높은 산꼭대기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처럼 늘 의연하다.
마가목은 실제 이번 시집의 많은 공간적 배경이 된 내설악 백담사 아래 인제군 북면 용대리의 대표적 수종이다. 마가목이 붉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면 이 마을에서는 마가목을 상징으로 하는 문화축제가 열릴 정도이다. “면(面)에서 심은 코스모스 길로/ 젊은 여자들이 꽁지머리를 하고 달리기를 한다/ 그들이 지나가면 그리운 냄새가 난다/ 마가목 붉은 열매들이 따라가보지만/ 올해도 세월은 그들을 넘어간다/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여름이 또 가고 나니까 민박집 간판처럼 허술하게/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그냥 있었다 (<용대리에서 보낸 가을>)
나도 이상국 시인처럼 이 용대리에서 마가목 붉은 열매가 되어 그리운 냄새를 따라가 본적이 있다.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 떠내려가다 걸린 나뭇등걸처럼 우두커니 그냥 세월을 보낸 적이 있다. 그런 탓인지 나는 이번 시집 곳곳에서 걸려 넘어진다.
장에서 돌아온 어머니가 나에게 젖을 물리고 산그늘을 바라본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
해 지고 어두우면 큰 소리로 부르던 나의 노래들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
닿을 수 없는 내 안의 어느 곳에서 기러기처럼 살았다
살다가 외로우면 산그늘을 바라보았다
-<산그늘> 전문
앞의 시에서 “나는 늘 다른 사람이 되고자 했으나”라고 노래했던 시인은, 이 작품에서 “나는 늘 다른 세상으로 가고자 했으나”라고 노래하고 있다. 시는 늘 다른 사람, 다른 세상을 꿈꾸고, 그것의 성취와 좌절을 노래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 시집은 유달리 세월 앞에 무상한 좌절의 노래들이 많다. “가도 가도 그곳인데 나는 냇물처럼 멀리 왔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그래서 애잔하고, 서러운 감정을 자아낸다. “사철나무 울타리에 몸을 감추고/누군가를 기다리던 한 소년”(<먼 배후>)이 “누구를 제대로 사랑한단 말도 못했는데/어느새 가을이 깊어서/나는 자구 섶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는 자조에 이르기까지의 일생을 유장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이상국 시인이 보여준 시세계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살림 우선주의’를 바탕으로 한 ‘인본주의적(人本主義的)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시는 늘 ‘살림의 공간’을 배경으로 삼아왔고, 이 살림의 공간에서 부대끼는 서민들의 삶을 연민과 애정으로 끌어안아 왔다.『우리는 읍으로 간다』 『집은 아직 따뜻하다』 『어느 농사꾼의 별에서』 등 그가 펴낸 시집의 제목들이 이를 잘 입증해준다.
시인의 이러한 살림 우선주의, 인본주의적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우리가 상실해가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와, 인간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조화에 관하여 숙고하게 만들었다. 그의 시가 개성적인 것은 이 같은 세계를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가 늘 남성적이고, 그만큼 늘 의연했다는데 있다. 그의 시가 풍기는 강건함과 질박함, 그리고 시적 기교를 뛰어넘는 진솔함은 여기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었다.
이번 시집에서도 이러한 세계는 변함없이 이어진다. 특히 ‘먹는 일’을 소재로 삼는 작품들에서 이러한 세계는 도드라진다. 먹는 일은 생명과 살림의 기본이고, 그만큼 산다는 것의 원초적 본질을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동서울터미널 늦은 포장마차에 들어가
2천 원을 시주하고 한 그릇의 국수 공양을 받았다
가다꾸리가 풀어진 국수발이 지렁이처럼 굵었다
그러나 나는 그 힘으로 심야버스에 몸을 앉히고
천릿길 영을 넘어 동해까지 갈 것이다
오늘 밤에도 어딘가 가야하는 거리의 도반(道伴)들이
더운 김 속에 얼굴을 묻고 있다
-<국수공양 (供養)> 전문
공양(供養)은 원래 불교에서 시주할 물건을 올리는 의식을 일컫는 말이었는데 음식을 먹는 행위를 일컫는 말로 번져갔다. 그만큼 음식의 소중함, 먹는 일의 성스러움, 그리고 시은(施恩)의 귀함을 잊지 말아야 함을 보여주는 말이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불교 용어인 도반(道伴)이 자연스러운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은 비록 2천 원짜리 국수 한 그릇이지만, 이것이 주는 힘과 이것으로 말미암은 인간세의 도반의식을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먹는 일’이 그만큼 성스러운 일이라는 것이다. 포장마차 (<포장마차>) 국밥집 (<군산 가서>) 막국수집 (<참 쓸쓸한 봄날>)등의 공간과 라면(<라면 먹는 저녁>), 감자밥 (<감자밥>), 장떡 (<뿔을 적시며>), 모두부 (<참 쓸쓸한 봄날>) 등 음식 이름들이 줄줄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시인은 <라면 먹는 저녁>에서 라면을 먹으며 “괜히 눈 내리는 고향을 생각한다”라고 했는데 이는 음식이 환기하는 감각이 그만큼 삶의 원초성과 닿아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는 우리 시사(詩史)에서 음식을 즐겨 시의 소재로 삼은 대표적 시인인 백석과 닮았다. 시인이 받은 백석문학상이 시인의 시세계와 어울려 보이는 이유 중에 하나도 여기에 있다.
이상국 시인의 고향은 속초와 인접한 강원도 양양군 강현면 강선리이다. 시인은 이곳에서 자라났고, 시 역시 양양과 속초를 주 무대로 삼아왔다. 특이한 점은 그가 바다와 가까운 이들 지역에서 생의 대부분을 보냈지만 늘 ‘농사꾼의 아들’임을 자임한다는 점이다. 그의 시에 바다가 등장하지 않고 주로 ‘땅’이 등장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령 시인이 “논도 밭도 없으면서/ 농협 앞 난전을 지날 때면/ 나는 괜히 호미나 낫을 샀지/ 마치 농사께나 짓는 사람처럼”(<원통>)이라고 노래할 때, 그는 영락없는 농사꾼의 아들이다. 아래 시는 앞서 말한 살림 우선주의, 자연과 인간의 우주적 조화, 그리고 전형적인 농사꾼의 상상력 등이 아름다운 화음을 이룬 작품이다.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널었다
나의 잠들이 좋아라 하고
햇빛 속으로 달아난다
우리나라 붉은 메밀대궁에는
흙의 피가 묻어있다
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는 가을이 더 잘 보이고
나는 늘 높은 데가 좋다
어쨌든 세상의 모든 옥상은
아이들처럼 거미처럼 몰래
혼자서 놀기 좋은 곳이다
이런 걸 누가 알기나 하는지
어머니 같았으면 벌써 달밤에
깨를 터는 가을이다
-<옥상의 가을> 부분
이 작품은 옥상에 올라가 메밀 베갯속을 너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되어 달밤에 깨를 터는 어머니를 회상하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붉은 메밀대궁에서 ‘흙의 피’를 떠올리며 이를 “지구도 흙으로 되어 있다”는 잠언으로 연결 짓고 마침내 달밤에 깨를 터는 어머니를 연상해내는 과정 속에서 농사꾼의 상상력과 살림 우선주의, 그리고 자연과 인간의 조화가 자연스러운 화음을 만들어낸다.
농사꾼의 상상력은 자연의 질서와 순환을 인간세의 질서, 순환과 등가에 놓는다. <부자유친><아버지가 보고 싶다>등의 작품이 대표적이다. “들에서 돌아오는 당신의/ 모자나 옷을 받아들면/ 거기서 나던 땀내음 같은 것/ 그게 아버지 생의 냄새였다면/ 지금 내게선 무슨 냄새가 나는지”(<아버지가 보고 싶다>) 아버지의 세계는 어른의 세계이지만, 또한 외로운 세계이기도 하다. 아버지가 외로운 것이 아니라, 내가 어느덧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게 외로운 것이다. 아버지가 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 이미 내 앞의 아버지는 채울 수 없는 결핍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추우니까 집에 가고 싶다”(<집에 가고 싶다>)라는 시인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번 시집은 ‘집’이 화두가 된 드문 예로 기억될 것이다. ‘집’이란, 한곳에 머물며 경작을 해야 하는 농사꾼의 아들이 꿈꾸는 최고의 성(城)이다. 시집의 표제작인 <혜화역 4번 출구>는 제목과 달리 기실 집에 관한 노래이다.
딸애는 침대에서 자고
나는 바닥에서 잔다
그애는 몸을 바꾸자고 하지만
내가 널 어떻게 낳았는데……
그냥 고향 여름 밤나무 그늘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바닥이 편하다
그럴 때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다
내 조상은 수백 년이나 소를 길렀는데
그애는 재벌이 운영하는 대학에서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거나
일하는 것보다는 부리는 걸 배운다
그애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
내가 우는 저를 업고
별하늘 아래 불러준 노래나
내가 심은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알겠는가
그래도 어떤 날은 서울에 눈이 온다고 문자메씨지가 온다
그러면 그거 다 애비가 만들어 보낸 거니 그리 알라고 한다
모든 아버지는 촌스럽다
나는 그전에 서울 가면 인사동 여관에서 잤다
그러나 지금은 딸애의 원룸에 가 잔다
물론 거저는 아니다 자발적으로
아침에 숙박비 얼마는 낸다
그것은 나의 마지막 농사다
그리고 헤어지는 혜화역 4번 출구 앞에서
그 애는 나를 안아준다 아빠 잘 가
- <혜화역 4번 출구> 전문
이 작품에서 시인은 자신을 “나는 아직 대지의 소작”이라고 정의한 뒤, “한국의 대 유럽 경제정책을 공부”하는 딸이 “집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그리고 딸애의 집에서 자고 난 뒤 숙박비 얼마를 내는 행위를 “나의 마지막 농사”라고 표현한다. 물론 이 시는 딸에 대한 애정을 배면에 깔고 있는 작품이지만, 동시에 집을 최고의 성으로 여기던 ‘농사꾼의 시대’가 이제 끝나가고 있음을 쓸쓸하게 노래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집을 그리워하지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만큼 시인이 꿈꾸었던, 집이 지닌 따뜻함과 그리움, 그리고 소박하지만 훈훈한 공동체 의식이 사라진 시대가 온 것이다.
마가목의 흰 꽃은 마치 하얀 눈꽃송이처럼, 꿈 많은 소년처럼 소복하게 핀다. 식물도감에서는 마가목의 이러한 모양을 두고 복산방꽃차례(複揀房花序)를 이루며 핀다고 설명한다. 이 하얀 꽃들은 초여름이 되면 눈 녹듯이 져버린다. 그러면 소엽들은 더욱 짙은 초록을 발산하다가 가을이 되면 다른 나무들보다 일찍 단풍이 든다. 또 그러면 가지가 휘어져라 붉은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린다. 이 열매들은 잎이 모두 떨어지고 흰 눈이 천지를 덮어도 여전히 붉게 매달려 있다. 눈 덮인 겨울 산정에서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마가목을 보면, 장관은 장관인데 왠지 모르게 ‘슬프게 서러운 장관’이라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이상국 시인의 이번 시집도 그렇다. 이번 시집에는 늘 다른 사람, 늘 다른 세상을 꿈꾸며 꽃산방꽃차례를 이루며 피어났으나, 다른 나무보다 일찍 단풍이 든 비애가 서려있다. 그리고 눈이 내리는데도 여전히 붉은 열매를 달고 있는 서러움이 배어나온다. 외로운 아버지처럼 슬프게 서러운 장관을 보는 듯하다.
텅 빈 겨울산에는 마가목 열매만이 남아 있다, 눈이 얼어붙어 있는 이 열매들이 먹을 게 없는 겨울 철새들을 먹여 살린다. 마가목 열매는 입안에서 마취성분으로 발효되는 성분을 함유하고 있어서 이를 쪼아 먹은 겨울 철새가 이따금 술 취한 듯 비틀거리곤 한다. 이상국 시인의 이번 시집을 읽는 나의 모습이 꼭 그 겨울 철새를 닮았다.
프로필
1946년 강원도 양양출생
1972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1976년 <심상>에 ‘겨울 추상화’를 발표하며 등단
시집 <동해별곡><내일로 가는 소><우리는 읍으로 간다><집은 아직 따뜻하다><어느 농사꾼의 별에서><뿔을 적시며>
시선집 <국수가 먹고 싶다><박재삼문학상 수상시선집>
수상 백석문학상 민족예술상 유심작품상 정지용문학상 박재삼문학상 강원문화예술상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민예총강원지회장/작가회의강원지회장/한국작가회의 부이사장/만해마을 운영위원장 만해문학박물관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