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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릭스 앞에 선 바울-
말씀: 행 24:1-27, 요절: 행 24:5-8.
바울은 총독 벨릭스 앞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고소한 사람들이 유대에서 올 때까지 재판을 연기했습니다. ‘가이사랴’로 온지 닷새 만에 유대에서 대제사장 아나니야가 장로들과 변호사 ‘더둘로’를 데리고 총독 앞으로 나왔습니다. 가이사랴의 법정은 로마식 재판이었기 때문에 변호사를 데리고 왔습니다. 바울은 국선 변호사나 조력해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데 반해 고소인들은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변호사는 ‘주님’이십니다. 이 땅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고, 부당한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우리는 저 하늘에 계신 의로운 변호인 예수 그리스도가 있음을 믿습니다.
1절입니다. [닷새 뒤에 대제사장 아나니야가 장로들과 또 더둘로라 하는 어떤 변호인과 함께 내려와 총독에게 바울을 고발하므로](1). 바울이 밤에 가이사랴로 이송된 뒤 닷새가 지났습니다. 대제사장 아나니야와 장로들은 총대장 루시아의 손에서 빠져나간 바울을 ‘총독’ 앞에서는 반드시 잡아 죽이겠다는 각오를 단단히 한 듯 보입니다.
2-4절은 대제사장이 고용한 변호사 더둘로의 고소 내용입니다. 그는 먼저 재판을 맡은 총독 벨릭스에게 아첨을 떨었습니다. [그가 불려 나오매 더둘로가 그를 고소하기 시작하여 이르되, 우리가 각하로 말미암아 크게 평온함을 누리고 또 각하의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이 민족에게 매우 귀중한 일들이 이루어졌으므로 벨릭스 각하, 우리가 전적으로 감사를 드리며 항상 모든 곳에서 그것을 인정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각하를 더 지치게 하려 하지 아니하오니 원하건대 우리의 몇 마디 말을 너그러이 들어 주옵소서.] (2-4).
보통 시민들은 재판정에 갈 일이 별로 없지만 TV를 통해 오늘날 재판정을 보면 항상 들을 수 있는 말이 ‘존경하는 재판장님’입니다. 재판장의 심기를 건드리거나 불쾌하게 만들어서 좋을 것이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극진한 존칭어와 더불어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은 검사나 변호사, 고소자나 피고인이나 매 한 가지입니다. 총대장 루시아의 편지(23:26)나 바울이 자기변호를 할 때(vs 10)도 동일한 말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법정 재판관을 무서워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세상 만물을 심판하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재판하실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마땅합니다.
5-6절은 바울을 고소하는 자들의 ‘소추 제목’입니다. 재판부에 바울을 고발하는 죄목들입니다.
[우리가 보매 이 사람은 전염병 같은 자요, 세상에 두루 퍼진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서 선동을 일으키는 자며 나사렛 사람들의 분파의 주모자인데 그가 또한 가서 성전을 더럽히려 하므로 우리가 그를 붙잡아 우리 법에 따라 재판하려 하였나이다.](5-6).
바울이 받은 고소를 보십시오.
첫째, 그는 유대인들에게 “전염병 같은 자”란 취급을 받습니다. 유대인들이 볼 때 바울은 전염병 같은 자이지만 주님이 볼 때 바울은 ‘특별한 보배’였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합니다. 바울은 어디서나 자신이 이런 취급을 받았음을 증언했습니다. [........ 우리는 이 날까지 세상의 오물같이 되고 모든 것의 찌꺼기가 되었노라.] (고전4:13b). *세상의 오물, 모든 것의 찌꺼기. 누구도 이런 인생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이 따라야 할 본으로 세우셨습니다(고전4:6, 11:1, 빌3:17). 바울은 세상에서 영광을 받고,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인기를 구가하는 오늘날 캐톨릭의 교황이나 대형 교회들의 ‘목사들’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들에게 높임을 받고, 칭찬과 영광을 구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가증한 자들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 바울은 선동을 일삼는 자란 고소를 받았습니다. 이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행17:6), 에베소에서도 똑같은 고소를 당했습니다. 바울이 지나가는 곳에는 분명한 반응이 있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든지, 배척함으로 그들을 향해 돌을 들든지 둘 중의 하나였습니다. 대부분의 성도들은 “복음으로 세상을 변화시키자”는 말을 합니다. 복음이 들어갈 때 세상은 그것을 선동, 혼란, 소동이라고 주장합니다. 복음은 선동이 아니라 ‘선포’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셋째, 바울이 받은 죄목은 ‘나사렛 종파의 주모자’입니다. 이들은 복음을 유대교의 한 이단 종파 정도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다양한 종파들이 있었는데 바울은 ‘나사렛 종파’이며 이들은 죽어 마땅한 이단이란 주장입니다.
성경을 믿는 성도들은 교회사를 통해 얼마나 다양하게 ‘이단’의 명칭이 붙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처음 복음이 들어왔을 때, 복음을 믿는 자들을 야수교인들, 서양교도들이란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바울은 ‘나사렛 종파의 주모자’로 불렸습니다. 로마 캐톨릭은 성경을 문자 그대로 믿는 유럽의 성경 신자들을 ‘재 침례교도들, 카타리스트, 위그노, 왈덴시안, 알비겐시안, 롤라즈, 폴리시안’ 등으로 부르며 이단 종파로 낙인 찍어 극심한 박해를 가했습니다.
7-9절입니다. [그러나 총대장 루시아가 우리를 기습하여 큰 폭력으로 우리 손에서 그를 빼앗아 데리고 가서 그의 고소인들에게 명령하여 각하께 나오라고 하였으니 각하께서 그를 심문하시면 우리가 그를 고소하는 이 모든 일에 관하여 친히 아실 수 있으리이다, 하매 유대인들도 동의하며 이 일들이 그러하다고 말하니라.]
루시아는 바울이 로마 시민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그를 구해 주었다고 편지를 썼습니다. 반면 유대인들은 그가 기습하여 폭력으로 바울을 빼앗아 갔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증언이 엇갈릴 때 증인과 증거가 필요합니다.
10-21절은 바울이 직접 행한 자기변호입니다. 총독 벨릭스는 재판관으로 대제사장 아나니야를 비롯한 유대인들의 고소에 대해서 바울에게 응답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고소자들의 고소 내용은 다 들었습니다. 재판석에 앉은 총독은 바울에게 반론을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10절, [이에 총독이 바울에게 손짓하여 말하라고 하니 그가 응답하되, 각하께서 여러 해 동안 이 민족의 재판관이 된 것을 내가 알므로 더욱 즐거이 나를 위해 답변하리이다.](10). 바울은 지은 죄가 없기 때문에 거리낌이 없고 당당합니다. 특히 유대인들이 하는 고소가 전혀 사실이 아니었기에 대제사장과 장로들이 모두 몰려와도 ‘즐거이 답변’할 수 있었습니다. 가장 훌륭한 답변은 ‘거리낌 없는 양심’에서 나옵니다. 마음속에 언제나 답변이 준비되어 있는 이들은 듣는 이들에게 ‘은혜’를 끼칩니다.
11-13절입니다. [각하께서 이해할 수 있는 바와 같이 내가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이제 겨우 열이틀밖에 되지 않았나이다. 또 그들은 내가 성전에서 누구와 논쟁하거나 회당들이나 도시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으므로 지금 나를 고소하는 일들에 대하여 증거를 댈 수도 없나이다.](11-13).
바울은 자신에 대해 접수된 고소 내용들을 논리 정연하게 반박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지 열이틀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과 성전에서 누구와도 논쟁하지 않았으며, 회당들이나 도시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을 본 증인들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증거와 증인이 없는 고소는 무효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법정에서처럼 ‘유죄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무죄 추정’이란 형법상의 원칙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사실 바울을 고소하던 사람들은 자신들이 고발한 내용에 대해 증거를 댈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재판은 불의와 불법에 따라 거짓 증인들의 거짓 증언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죄라고 한다면 ‘유대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일 뿐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 모세의 율법이 아니라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을 고소해도 증거 불충분으로 제대로 기소할 수 없었습니다.
14-16절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는 가운데 자신의 믿음을 증언했습니다. 바울은 총독 벨릭스에게 자신이 믿는 믿음의 내용 즉 “그 길(道)”을 선포했습니다. 바울이 재판정에서 선포한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이것을 각하께 고백하오니 곧 나는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그 길(道)을 따라 내 조상들의 하나님께 그렇게 경배하고 율법과 대언자들의 글에 기록된 모든 것을 다 믿나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 이 소망 속에서 나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향하여 항상 양심에 실족하게 하는 일이 없도록 스스로 힘쓰나이다.](14-16).
바울의 믿음은 무지한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의 경배는 헛된 경배가 아닙니다. 바울의 경배와 믿음은 ‘그들이 이단이라 하는 그 길(道)을 따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어떻게 성경을 믿는지 고백했습니다. 예수 없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참된 경배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배척한 채 성경을 믿는 것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남들이 이단이라고 하든지 말든지 ‘그 길을 따라- 즉 예수님을 따라서’ 믿습니다.
바울의 고백은 계속됩니다. 바울의 소망은 모든 장로들과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스스로 인정하는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이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했습니다. 이 부활로 인해 우리에게 ‘산 소망, 복된 소망, 영광스런 소망’을 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부활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채 죽은 자들의 부활을 믿을 뿐이었습니다. 종교와 복음의 차이는 이렇게 큽니다.
17-18절입니다. [이제 내가 여러 해 뒤에 내 민족을 위해 구제물(救濟物)과 헌물을 가지고 와서 드릴 때에 내가 무리와 함께 있지도 아니하고 소동을 일으키지도 아니한 채 성전에서 정결하게 된 것을 아시아에서 온 어떤 유대인들이 알게 되었나이다.](17-18). 바울은 자신이 행한 선한 일을 말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고소 내용을 전면 부인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왜 자신이 고소를 당했는지, 누가 왜 고소를 했는지 말합니다.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소동을 일으켰고, 그들이 바울을 고소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이들은 대제사장과 장로들입니다. 이들은 고소할 자격도 없고, 증인이나 증거도 전혀 없습니다.
19-20절입니다. [그들이 만일 무슨 일로 나를 고소하려거든 마땅히 여기 각하 앞에 와서 항의해야 하리이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공회 앞에 서 있을 때에 여기 있는 이 사람들이 내게서 무슨 악한 소행을 보았는지 말하게 하소서.](19-20). 바울은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에 당당하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며, 오히려 고소한 이들에게 큰 소리를 칩니다. 이쯤이면 벨릭스는 바울이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21절, [오직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치기를, 이 날 내가 너희로 인하여 불려나와 죽은 자들의 부활에 관해 심문을 받노라, 한 이 한 목소리 외에는 없나이다, 하니라.](21). 이 말은 루시디아 앞에서 한 말입니다.
22절은 총독의 1차 판결입니다. 총독은 바울의 말을 들은 후에 1차 재판을 담당했던 총대장 루시아를 불러 심문을 하기로 하고 그 때까지 재판을 연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고, 친지들의 방문이나 접견, 면회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바울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아는 바가 있었습니다.
22-23절입니다. [벨릭스가 이것들을 듣고는 그 길(道)에 대해 더 완전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것들을 연기하여 이르되, 총대장 루시아가 내려오거든 내가 너희 일에 관해 끝까지 알리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령하여 바울을 지키게 하며 그에게 자유를 주게 하고 또 그의 친지들이 그를 섬기거나 그에게 오는 것을 그가 막지 못하게 하니라.](22-23). 벨릭스는 복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참된 믿음의 소유자였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그 길에 대해 더 완전한 지식이’ 있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더 듣기를 원했습니다.
24-25절입니다. [며칠 뒤에 벨릭스가 자기 아내인 유다 여자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사람을 보내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관해 그의 말을 듣거늘 바울이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하여 강론하니 벨릭스가 떨며 응답하되, 이번에는 네 길로 가라. 내게 적당한 때가 생기면 내가 너를 부르리라, 하고](24-25).
총독의 아내는 ‘드루실라’라는 유대인 여자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the faith in Christ)에 대해서 들었습니다. 바울은 “의와 절제와 다가올 심판”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의”란 하나님의 의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을 말합니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누더기 같고(사 64:6), 헛될 뿐임을 말한 것입니다. 율법에서 난 의, 자기 의는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어야 한다는 점을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0:7)는 복음의 진리를 선포했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주님을 선포했습니다.
로마서 10:3-4, [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여 자기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다니면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 “절제”란 예수를 알고 믿는 이들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삶의 방식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돈이 있고, 권력이 있고, 힘이 있고, 시간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육체를 위해 써 버리지 않고 주를 위해 쓰는 것’이 절제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고, 살든지 죽든지 주를 위해서 하며, 말에나 행실에나 주의 이름으로 하는 것이 절제입니다. 벨릭스와 같은 정치적 권력을 가진 이들은 특히 [절제]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의 절제를 모든 사람이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이 계시느니라.](빌4:5), [그러므로 땅에 있는 너희 지체(肢體)들을 죽이라. 그것들은 음행과 부정함과 무절제한 애정과 악한 욕정과 탐욕이니 탐욕은 우상 숭배니라.](골3:5).
“다가올 심판”이란 성도들이 그리스도 앞에서 각자 자신의 행위를 회계 보고하는 심판을 말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큰 흰 보좌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설 것입니다. 이 땅에서 총독이 아니라 왕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심판을 피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바울이 만약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무시하느냐?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서리라.](롬14:10), [우리가 반드시 다 그리스도의 심판석 앞에 나타나리니 이로써 각 사람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자기가 행한 것에 따라 자기 몸 안에 이루어진 것들을 받으리라.](고후5:10)는 말씀을 선포했다면 벨릭스가 양심에 찔림을 받고 떨었을 것입니다.
그가 총독으로 재직하면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한 일보다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살피고, 정치적 야망과 이익에 따라 움직였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바울이 총독 앞에서 ‘의와 절제와 심판’이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한 것은 그의 마음 속 깊은 곳을 들추어내고, 그의 삶의 방식과 마음에 변화를 일으켜 주려는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총독 벨릭스는 무엇보다 자신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계산되고, 보고된다는 점에 눈을 떠야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세상과 사람들의 시선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고 보고해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이 자신에 관하여 하나님께 회계 보고를 하리라.](롬14:12), [그들은 산 자들과 죽은 자들을 심판할 준비가 되신 분에게 회계 보고를 하리라.](벧전4:5). 이것이 성도의 삶입니다.
26절입니다. [또 바울에게서 돈을 받고 그를 풀어 주기를 바랐으므로 더 자주 사람을 보내어 그를 부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누니라.](26). 총독 벨릭스는 바울에게 돈을 바랐습니다. 바울이 돈을 주었다면 금방 석방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총독은 바울의 설교에 떨기까지 했지만 진정한 마음의 변화를 받지 못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뿌리입니다(딤전6:10). 교회를 감독하는 목자는 물론이요 통치자들은 더러운 이익을 탐해서는 안 됩니다. 벨릭스는 공의에 따라 판결하면 그만인데 ‘무죄’임을 알고도 아무 대가없이 풀어 주는 것을 손해로 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당한 법 집행을 하는 일에도 뇌물이나 뒷돈을 요구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부정부패(不正腐敗)라고 합니다. 재판을 굽게 하는 가장 큰 죄의 배후에는 언제나 이런 뇌물, 부정한 돈 거래가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입니다.
27절입니다. [그러나 두 해가 지난 뒤에 보르기오 베스도가 벨릭스의 자리로 오매 벨릭스가 유대인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바울을 결박한 채로 두니라.](27). 세월은 흘러 재판이 시작된 지 2년이 지났습니다. 바울은 벨릭스가 그리스도를 알고, 또 자주 불러 믿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기에 무사히 풀려나리라는 기대를 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벨릭스는 무죄 석방의 판결을 내리지 않고 시간만 끌 뿐이었습니다. 덕분에 이 지역 총독 벨릭스 후임으로 다른 총독이 이 곳에 파견되어 올 때까지 이 사건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재판 문제를 후임 총독인 ‘보르기오 베스도’에게로 넘겨 버렸습니다.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느라 재판을 끌다가 마침내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를 결박한 채로 두었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님은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게 넘겨주었습니다(막15:15). 헤롯(안티파스)은 자기 딸을 기쁘게 해 주기 위해 침례 요한의 목을 베었습니다(막6:22). 헤롯(아그립바 1세)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야고보를 죽인 후에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행12:3).
벨릭스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울을 결박해 두었습니다(행24:27). 후임 총독인 베스도는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바울을 다시 예루살렘에 가서 재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행25:10). 이 말은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게 맞아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사람들을 두려워해서 주님을 대적하는 일이나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주님을 대적하는 일은 우리 주변에서도 흔히 볼 수 있지만 ‘정치인들, 권력자들’ 사이에서는 더욱 흔한 일입니다. 거짓의 아비요 살인자 마귀의 자녀들(요8:44)은 언제나 ‘성도들의 피’를 요구합니다. 벨릭스가 주님을 알고, 바울을 불러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을 듣고, 두려워 떨기까지 했으면서도 마지막으로 보여준 그의 행위는 너무나 이율배반적이고 충격적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아내가 ‘유대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합니다(24). 유대인 아내가 남편의 믿음과 판결에 모두 영향을 미쳤음은 불문가지(不問可知)입니다. 물어보나마나 입니다. 많은 경우에 부인은 남편의 마음에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막6:24, 마27:19, 고전7:33). 이것은 왕이나 총독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이로써 바울의 2차 재판은 벨릭스 총독의 손에서 끝을 맺지 못하고 베스도로 넘어갑니다. 2년의 세월은 고집을 부린 바울에게 잃어버린 2년일 수도 있고, 신약 교회에는 큰 손실이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은혜로 재판 과정에서 부득이 하게 총독을 비롯한 위정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를 얻긴 했지만 단 한명의 회심자도 얻지 못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는 성령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던 결과 그는 감금 생활을 한 것이 전부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이 확신하고 한 일이 인생을 허비하는 일이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 시간 중에 많은 배움이 있고, 성숙의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소극적인 일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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