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 6:35∼40
제목: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니
●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의 떡이라고 믿고 그 생명의 떡을 먹고 영생하는 신앙입니다. 먹는 표현은 요6:51∼58에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요6: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6: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생명의 떡인데요. 그 생명은 육체적인 목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靈的)인 생명과 영생(永生)의 생명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생명의 떡으로 알고 먹는 것은 예수를 진정한 그리스도(구원자)로 믿고 영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되게 믿는 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요6: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 예수를 믿으라) 요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 예수를 믿고 영생을 얻으라) |
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습니다. 믿는 자가 예수께로 나아간다는 것이고 그 나아감이 가능한 것은 성부께서 그 사람(피택자)을 성자에게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성부께서 성자에게 보내 주신 자가 믿고 구원을 받는데 그 믿는 것과 믿음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 생명의 떡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 6:35∼40은 생명의 떡을 먹는 것, 예수께로 나아오는 것, 예수를 믿는 것과 마지막에 부활하는 것을 함께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
성부께서 성자에게 보내 주셔서 구원을 얻은 성도는 구원에서 절대로 이탈하거나 (시험에는 들지언정) 절대적 타락은 하지 않습니다. 성부의 뜻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성도들을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기 때문인데요. 이렇게 확실한 구원을 받은(과거)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미래). 구원을 받은 자(중생)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려지는 것을 부활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거듭난 자가 성부와 성자에 의해서 구원을 유지하고 있다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사는 것이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원의 시작은 성부의 뜻(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에서 처음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 예수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할 때의 생명은 영생(永生)을 의미합니다. 사람들의 육체가 죽은 이후 내세에 천국에서 영생하면 영생이라고 하고 지옥에서 영원히 지내며 형벌을 받으면 영벌(永罰)이라고 합니다.
마25:46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
영벌에 들어가는 자들은 끝내 회심하지 아니하고 죄인된 것을 끝까지 유지한 불의한 자들이고, 예수를 구원자로 믿고 칭의(稱義)된 자들 즉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갑니다. 개역개정 기준으로 보면 영생이라는 단어는 51회 나오는데 구약에 3회 신약에 38회로 신약에 압도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신약의 영생은 이미 익숙하므로 상대적으로 더 생소한 구약의 영생을 살펴봅니다.
시편 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다니엘 4:34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다니엘 12:2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
시133:3의 영생은 비록 구약에 나오지만 신약의 영생과 그 의미가 별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셔서 영생이 된다고 밝힙니다. 신약으로 보면 성부께서 성자에게로 보낸 자들이 복을 명령받은 것이며 영생을 합니다. 단4:34의 영생은 인간이나 피조물의 영생이 아니라 영원 전부터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영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12:2의 영생은 구약에 있지만 의인의 부활을 참 잘 설명하는 것 같습니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죽으면 모두 그들의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 티끌처럼 됩니다. 육체적으로는 잠을 자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요(영혼수면설×). 그러나 마지막 날에 의인은 부활하여 영생을 합니다. 불의한 자는 영벌을 받습니다(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 단12:1을 보면 단12:2의 영생을 받는 자들이 구원을 받는 자들임을 알 수 있고 이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단12:1 그 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큰 군주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 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 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
구원을 받을 사람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이 있다면 그것이 생명책인데요. 개역개정 기준으로 신약과 구약에 8회 등장하고 요한계시록에 6회로 제일 많이 나오지만 아래와 같이 다른 곳에도 등장을 합니다.
시편 69:28 그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사 의인들과 함께 기록되지 말게 하소서 빌립보서 4: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
시69:28의 생명책에는 의인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이 의인들이 얻는 생명은 영생을 의미합니다. 빌4:3에는 이신칭의 된 의인들의 성숙한 모습이 나옵니다. 복음에 함께 힘쓰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성도들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요. 의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복음에 힘을 쓰는 것입니다. 개역개정 빌4:3에는 복음이라고만 나오지만 다른 번역본으로 보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공동번역) … 다른 협력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느라고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의 책에 올라 있습니다. 새번역) … 나의 동역자들과 더불어, 복음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애쓴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현대인의성경) … 나의 다른 동역자들과 함께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일에 나와 함께 수고한 사람들 입니다. 그들의 이름은 이미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생명책에 기록된 의인들의 가장 소극적인 모습은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고 가장 적극적인 모습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교회에 나오라고 안내를 하고 예수 믿고 천국 가세요! 라는 멘트를 기계적으로 발설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도 귀한 일이고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오늘 본문에 비추어 대입하면,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정확히 설명하고 복음과 진리를 진실하게 가르치고 나누어 주는 것이며 영생이 무엇인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
성자(예수)를 낳으시고 보내신 성부 하나님과, 성부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확실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구원으로의 초청을 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려고 수고하는 것일 겁니다. 혹시 말로 전도를 못하고 언변과 설득의 능력이 약한 성도들도 실망하거나 어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말이 아닌 삶으로도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아래에서 마5:13을 더욱 잘 살펴보십시오.
마5:13.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14.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15.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13.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명목상의 신자가 말로만 립 서비스로 하는 전도조차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말뿐인 전도만으로는 복음의 전파가 되지 않고 오히려 위선자로 몰릴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참 성도가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삶을 살면 복음 전파가 더 용이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길 가는 행인에게 교회홍보 전단지를 나누어주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참 성도의 빛이 사람들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성도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엄청나게 더 귀한 전도입니다.
● 성도의 착한 행실(聖化)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은 성숙한 상태에서 가능하겠지만, 그 시작은 생명의 떡을 먹고 예수를 믿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게 하는 생수를 마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영생 주시는 구원자(그리스도)로 진실하게 믿으면 그러한 신자에게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 되시고 생명을 계속해서 공급하여 영생하게 하십니다.
요6:47.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48.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
참 믿음을 떡과 음료로 표현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요6:51.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 53.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54.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55.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
참된 영생의 양식과 음료가 되시는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참된 복음과 진리로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믿음의 신앙이고 이신칭의의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 생명의 떡이신 예수를 더욱 의지하고 먹으며, 또한 더욱 성숙하여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답게 복음을 전하는 일에도 애쓰고, 마지막 날에 의인의 부활을 하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포스팅 본문의 세부내용 및 표현과 아래에 첨부하는 주석의 내용들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독자들의 풍부한 추가 이해를 위해 올립니다.
네, 잘 읽고 공부도 하겠습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35절은 예수님의 위대한 '나는⋯이다' 말씀들 가운데 첫 번째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35-51절)은 그 말씀에대한 확대된 주석이다. 그 말씀은 떡을 요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이다. 이는 그 사람들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물질적인 양식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에 대한 것이었음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생명의 떡'이라는 어구의 의미는 생명을 제공해 주는 떡이다. 그러나 그 떡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만 얻을 수 있다. 그 조건은 당시 그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이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36절). 만일 예수님의 사명이 사람들의 믿음에 의존해있는 것이었다면, 이 사실은 그 사명의 실패를 시사하는 것인가? 37절은 그에 대한 대답을 제시해 준다. 그 최종적인 결과는 아버지의 손에 있다. '내게 오는 자는 누구든지)'이라는 말은 개별적인 반응에 강조점이 있음을 보여 준다. '내가 결코 내쫓지 아니하리라'라는 강한 부정은 예수님이 그들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다짐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38-39절이 보여 주듯이.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어떠한 불일치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것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39절에 있는 '모든'(all: 개역개정판에는 '내게 주신 자'로 되어 있다- 역주)은 (37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중성이며,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모든 것을 합한 것이다. '마지막 날'에 대한 두 차례의 언급(40절)은 예수님이 모든 것이 완성될 때인 세상의 끝을 미리 생각하고 계심을 보여 준다.
『IVP성경주석: 복음서』, “요한복음 6장”.
@장코뱅 주석이 없는 초신자나 초보자에게는 더욱 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o.k.
<요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그리스도께서는 먼저 그들이 조롱하듯이 구한 그 떡이 그들의 눈앞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런 후에 그들을 책망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배은망덕(背恩忘德)의 죄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하여 가르치시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신다. 이 가르침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우리가 어디에서 생명을 찾아야 하고, 어떻게 해야 생명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만나"와 "일용할 양식"이라는 비유들을 사용하신 것은 그런 말들이 앞에서 거론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무지한 자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그러한 비유들을 사용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직설적으로 말씀하시는 것보다 더 적합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떡"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은 채로 단지 하나님께서 비밀한 능력을 베푸셔서 우리의 몸에 자양분을 공급해 주신다고 말할 때보다도 우리가 우리의 몸에 자양분을 공급하기 위하여 "떡"을 먹는다고 말할 때에 우리 자신의 연약함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도 더 분명하게 알게 된다. 이렇게 몸에서 영혼으로 옮겨가는 유비(類比)가 사용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혼이 먹어야 하는 "떡"이라는 말씀이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우리의 생명이라고 말씀하신 것보다 우리의 마음속에 더 깊이 들어와 박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떡"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경험하는 그리스도의 살리시는 능력(vis Christi vivifica)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떡은 단지 이미 존재해 있는 생명을 유지시켜 주고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것일 뿐이고, 생명을 창출해 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은혜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명을 시작되게 하기도 하는 까닭에, "떡"이라는 비유는 부분적으로는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이 설교를 하시게 된 앞서의 상황에 맞춰서 거기에 적절한 표현들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이 비유가 불합리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리고 앞에서, 모세와 그리스도, 이 둘 중에서 누가 사람들을 더 잘 먹였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되었었는데, 이것도 그리스도께서 단지 "떡"이라는 비유만을 사용하신 이유였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에 반론을 제기할 때에 오직 "만나"만을 언급하였던 까닭에, 그리스도께서는 "만나"와 대비되는 또 다른 종류의 "떡"을 말씀하시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가르치시고자 하신 것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리의 영혼은 내재적인 힘(intrinseca vimus)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생명(vita a Christo mutuari)으로 산다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그리스도께서는 이제 이 "떡“을 먹을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는데,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지 않는 자들은 늘 공복(空)인 상태인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까닭에,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배가 고파서 우리를 배부르게 해주시라고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면, 그는 우리의 떡이 되어 주신다. 이 구절에서 "그리스도에게 오는" 것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동일한 의미이지만, 전자는 믿음의 결과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명을 얻으려고 그리스도에게로 피하는 것은
배가 고파서 죽을 것 같아서이기 때문이다.
또한, 누가 이 구절로부터 그리스도를 먹는 것이 다름 아닌 믿음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낸다면, 그는 충분히 제대로 된 추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나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 외에 다른 방식으로는 그리스도를 먹을 수 없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먹는 것은 믿음 자체라기보다는 믿음의 결과이자 열매이다. 왜냐하면, 믿음은 단지 멀리서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꼭 붙잡아서, 그가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 안에 거하시게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의 몸에 연합되고, 그의 생명에 참여해서, 그와 "하나가 된다"(요 17:21). 그러므로 믿음이 우리를 어떤 식으로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지 를알고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다면,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먹는다는 것은 옳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떡"의 용도는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는 것이 아니라 굶주림을 없애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말씀을 여기에 덧붙이신 것은 왠지 어색해 보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에서 "떡"이라는 말을 원래의 떡이 의미하는 것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고 계시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생명 가운데 유지시켜 주는 하늘에 속한 자신의 능력을 "만나"와 대비시켜야 하는 상황에 계셨기 때문에 단지 "떡"이라는 단어만을 사용하셨다는 것에 대해서는 내가 이미 앞에서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아울러,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민족의 통상적인 관례에 따라서 자양분을 공급해 주는 모든 것을 “떡”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표현하신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제유법(提喩法)을 사용해서 "식사하다"라는 의미로 "떡을 먹다"라는 표현을 사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에게 "일용할 떡"(개역에는 "양식"으로 번역됨 - 역주)을 주시라고 기도할 때(마 6:11), "떡"이라는 단어 속에는 마실 것을 비롯해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꼭 필요한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에게서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그에게로 나아가는 자는 누구든지 아무것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히 얻게 될 것이다.
『칼빈주석: 요한복음』, “요한복음 6장”.
@장코뱅 주석에 나온 칼빈의 말을 보면 옛날 사람이지만 보수적이지만 않고 의외로 신박합니다. 좋은 내용입니다.
@노베 공감합니다.
<6:32-36 생명의 떡> 이 부분은 27-29절의 재해석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자세히 음미해 보면 예수께서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추론해낼 수 있다. 즉 예수께서 생명의 양식을 사람들에게 주신다는 27절과 하나님 아버지께서 생명의 떡을 주신다는 32절이 그것이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셨으나 군들은 아직 이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6:34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이 말은 영적으로 무지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요구를 상기시킨다(4:15). 그래도 그녀는 자기가 시야를 만났음을 깨닫고 마을 주민들에게 그를 증거했다. 그리하여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몰려와 예수를 믿게 되었다(4:39-42). 하지만 이 무리는 사마리아인들도 경험하지 못한 표적을 목격하고도 결국에는 예수 곁을 떠난다(66절).
<6:35 나는 생명의 떡이니> 이 말씀은 본서에 등장하는 ‘나는 ... 이다' 선언 중 첫 번째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은 27절의 말씀과 비교해 볼 때 예수께서 자가당착(自家撞着)에 빠지신 것처럼 느껴진다. 예수께서 생명의 양식을 주신다고 선언하신 직후 다시 자신이 생명의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모순이 아닌가?
그러나 사실은 27절과 본절의 말씀이 성육신의 신비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태초에 계신 말씀이 하나님이시라는 것(1:1)과고 말씀이 육신을 입으셨다는 저자의 증언(1:14)을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면, 27절과 본절이 말하는 바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예수께서는 태초부터 선재하신 하나님이시지만,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떡으로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6:36> 생명의 떡은 오직 믿음으로 먹을 수 있을 뿐이다(29,35절).
<6:37-40 생명의 양식 되신 예수님> 여기서는 35절에 나타난 '생명의 떡‘으로 초대함 이 반복된다. 생명의 양식이신 예수께 나아오는 자들은 박대를 받지 않을 것이다(37절). 그리고 그들은 생명의 떡을 먹음으로써 마지막 날에 부활할 것 결국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40절).
<6:37>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택하심과 부르심 및 성도의 자발적 신앙의 결단을 모두 함축한 구절이다.
<6:38,39>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과 사역을 밝혀야 할 때마다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강조하셨다
(39절;4:34;5:30;7:16,18,29;8:16,29,42;12:44,45). 여기서 '보내다‘의 헬, '펨포'는 '위임하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아버지로부터 구원사역의 모든 권세를 위임받고(13:3;마 28:18) 이 세상에 오신 것을 공언하신 셈이다. 히브리서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파송된 분임을 그에게 믿는 도리의 사도' (히 3:1)주지시키며 명칭을 적용시켰다.
<나를 보내신 이의 뜻>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① 택한 자들에 대한 완전한 구원 ② 그들의 부활 ③ 그들이 영생을 누리는 것 등이다.
<마지막 날> 요엘서, 여호와의 날
『톰슨3 성경주석』, “요한복음”.
@장코뱅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간단히 잘 요약했네요. 잘 참고합니다.
오늘도 이 성경묵상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댓글의 주석을 통해서 좋은 지식도 얻습니다.
공감합니다.
예수님의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인류의 대속을 위해 희생하신 것을 알고 믿는 것인데, 그가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영접하는 것을 말하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쏟아져 내렸던 것과 같이 예수님은 성부께서 보내주신 생명의 떡이셨네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보내주신 자들을 성자께서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아버지께로 다 이끌겠다고 하신 것이 엄청난 복음이고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오늘 묵상을 통해서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로서 "복음에 힘쓰는 자"라는 글귀를 마음에 새깁니다. 감사합니다.
요약, 추가설명과 풍성한 댓글에 매우 공감합니다.
네, 공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