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싸움
임준연
나에겐 믿음이 있다. 세상은 바뀐다. 비록 속도는 느리지만 변화한다는 믿음이다. 일상의 좋은 변화는 누군가의 노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눈을 감거나 가만히 있는데 변화는 기대하기 힘들다. 세상은 어떻게 바뀌는가. 깨어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인가?
대통령 선거 분위기가 한창이다. 국가 최고 권력자의 힘은 막강하다. 그가 어떤 의지가 있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뀐다. 우리가 경험한바, 국민 다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일상 모든 곳에 영향을 미치긴 어렵다. 나와 밀접하고 일상적인 그 영역은 오히려 마을과 동네의 그것이다. 동네의 정치와 권력자들의 의지가 내 삶에 훨씬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으로 돌아간다. 돈이 있는 곳엔 연줄이 있기 마련이다. 사적 이익의 잔치가 공직자들에겐 문제가 된다. 나의 관심사는 공적인 돈, 세금이다. 세금을 쓰는 곳은 여러 곳이지만 내 삶과 가장 밀접한 곳은 자치단체다. 이것을 공정하게 쓰라고 우리 손으로 뽑아놓은 단체장은 기득권과 그 돈에 휘둘리기 쉽다. 선거법 위반이나 부정, 횡령 등이 뉴스나 미디어에 고정적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이를 제대로 견제하라는 곳이 의회다. 우리 의회는 지금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
아니다. 단체장과 같은 정당(민주당)의 정치인들만으로 구성된 의회 의원인데 제대로 견제할 수 있을까? 의회 내 민주주의도 없다. 일당으로는 야합뿐이다. 야당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지역에선 누가 견제하고 싸워야 하나. 지역 언론과 이곳에서 흔히 ‘시민사회’라고 하는 민간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돈과 권력’의 입김과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곳에서 열정과 신의를 태우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다. 친인척과 선후배, 동네 이웃 등으로 밀접하게 얽힌 농촌 지자체에는 존재하기 어렵다. 누가 힘 있는 사람들 눈치 보며 불편한 일을 하겠나? 그에 기꺼이 후원할 외부 사람을 찾는 것도 불가능에 가깝다. 오늘 우리 ‘시민단체’는 보조금을 받는 ‘위임사무단체’만 있을 뿐이다. 그러니 반대의 목소리는 나오기 어렵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지방자치가 제대로 되지 않고 최고 권력 중심으로 돌아가는 사회에 삐딱하게 행동하는 조직은 밥 먹고 살 수 없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 말자. 나의 다짐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상황에 따라 바뀌기에 더불어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외롭다. 몸담은 정당도 원외 소수, 취미 이상으로 본업처럼 하는 일인 예산감시도 전국에서 손에 꼽는 소수, 돌봄노동자, 노조 조합원 등 나를 증명하는 조직이나 공동체도 어려운 곳뿐이다.
나는 나와 싸움 중이다. 포기하면 덜 피곤할까? 포기하는 것과 그렇지 않고 싸우는 것(물리적인 것 아니다. 조직, 변화, 혁신의 그것을 뜻한다)과 어느 것에 에너지가 덜 들어가느냐를 따진다. 아니, 더 좋아하는 쪽에 몸을 던진다. 내 과거의 보통은 포기하는 것이 빨랐다. 깊게 고민하지 않은 탓이다. 그 내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의 일은 완전히 놓아버리거나 떨어뜨릴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두고두고 내 마음을 괴롭혔다.
당연히 불편한 일이다. 가시밭길이다. 이때 내가 자유로워지려면 내 안의 몇 가지 원칙을 정하는 것이 좋다. 그 원칙에 벗어날 때에 싸워야 한다. 정보공개 청구할 때를 예로 들자면, 지방정부는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는 게 원칙이다. 투기를 목적으로 오용될 수 있거나, 사회적 파장이 엄청나서 그 여파로 개인 또는 단체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완전한 개인정보로 개인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등의 정보는 공개하지 않을 수 있다.
그 외에 완전히 공개하지 않으면? 싸우는 것이다. 지난 3년간 1,500여 건의 정보공개 요청과 150여 이의신청, 7건의 행정심판이 그 일부였다. 3년간 가장 많이 상대했던 진안군의 정보공개 공개율은 덕분인지 인근 지자체에 비해 현저히 높아졌다.(고 믿는다.)
또 하나의 기준, 이 싸움은 개인을 상대로 하지 않는다. (기관이나 공동체의 대표는 개인이 아니다) 내 시간과 에너지를 사적 삶과 취향의 문제로 따지는 것은 낭비다. 권력과 싸울 때 내 삶은 더 고귀하다.
고귀한 싸움을 품격있게 하고 싶다. 악쓰고 떼쓰는 방법을 벗어날 때다.
나는 정부 문서를 보다 의문이 들면 담당 공무원에게 전화해 묻는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예의를 벗어나지 않고, 완곡하지만 적확하게 따지는 기술을 익히려고 노력한다. (노력으로 꽤 개선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불편하지만, 관계자를 소외하지 않고, 혐오나 배제의 문법을 사용하지 않는 것. 그것이 이런 대화의 원칙이 아닐까 한다.
물론 한결같을 수 없다. 어떤 때는 매달린 나무늘보가 되었다가 어떤 때는 사슴을 노리는 치타로 바뀌기도 한다. (치타는 전력으로 오래 달리지 못하는 것이 단점이다)
품격있는 싸움의 대상은 군수다. 나는 대통령보다 군수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내 삶과 우리 가족의 삶, 공동체의 삶에 훨씬 실질적이고 밀접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고로 내 싸움의 대상도 군수가 되어야 효율적이며 고귀해진다. 재난지원금이나 행복 버스 같은 정책이 대표적인 사례다. 우리에겐 케이블카나 구름다리보다 재난지원금이나 농민 기본소득이 훨씬 투자 대비 효과가 좋은 정책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대통령보다는 군수가 먼저 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