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산책 긴 여운(둘둘 둘레길 3)/정동윤
충무로역 3 번 출구
혹한이 전철처럼 몰고 지나가지만
그 혹한의 끝을 잡고
정한 시간에 우리 9명이 만나
남산골 한옥 마을로 들어섰습니다
간단하게 한옥 마을의 유래와
요즘 장안의 화제가 된 '서울의 봄'
수경사 장태완 장군의 이야기,
충무로와 돈화문 이야기를 나누고
한옥 마을의 기와집 5 채를
특징만 짚어가며 돌아보았습니다
민영휘의 고택 사랑 마당에서
봉근이가 챙겨온 커피와 과자를 나누며
겨울 햇살의 포근함을 만끽하며
옛날을 배경으로
오늘의 우리 삶이 풍경으로 묶였습니다
그리고 고고한 국문학자인
일석 이희성 기념비를 챙겨보고
그의 겸손한 삶과
깐깐한 학자적 모습을 잠깐 나누고
천 년 타임캡슐이 묻힌 곳으로
안내하며 천천히 둘러보고 난 뒤
옛 안기부 영역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슬 퍼런 안기부 5국 터널 앞에서
잠시 머물다
지금은 유스호스텔로 변신한
안기부 본관를 거쳐
안기부장 관사까지 둘러보며
역사의 명암을 들춰보았지요
중간에 옛 안기부장 사택 근처의
톨스토이 흉상 앞에서
말년의 톨스토이 모습을 비춰보며
그때의 악처가 오늘날엔
현모양처의 모습으로 다가왔지요
톨스토이의 부인 소피아,
소크라테스의 부인 크산티페,
모차르트의 부인 콘스탄체를
3대 악처라는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의 기준으로는
참 납득하기 어려운 낙인 같았습니다
계단을 타고 남산 둘레길로 올라
남향의 긴 벤치에 앉아
정선이가 챙겨준 수프를 마시며
아침 단톡에서 들은 장윤정의 노래
'초혼' 이 생각났고
안기부의 고문으로 허물어진
고 천상병 시인을 누군가 떠올리기에
김소월의 '초혼'과
천상병의 '귀천'을 아련하게 공유하였습니다
목멱산방에서 점심을 하고
인근 카페에서
차를 나누려든 당초의 생각을 바꾸어
북창동에서 술도 곁들이자는
의견으로 모아졌기에
조지훈 시비에서 '파초우'를 읽어보고는
곧장 백범 광장 지나 북창동으로 향했지요
북창동은 우리들 젊은 시절의 한 때,
추억이 서린 곳이라 모두 한군데쯤
맛집을 추천할 수 있는 익숙한 지역이지만
굳이 내가 맘먹은 한식 식당인
'처갓집'으로 안내하였지요
막걸리 잔이 한 순배 돌 즈음
식당의 손님은 우리 밖에 없기에
다른 모임에서 들려주었던
박인환과 박인희의 시를 다시 소환하여
우리들 젊은 시절의 한때를 돌아보았고
그 분위기를 잡고 광수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노래를
굵직한 중저음으로 들려주었습니다
이때
종업원은 결재 완료의 사실을 알려주어
모두 광권이에게 고마운 박수를 안겼지요
그리고 인근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봉근이의 앵코르 시 낭송을 받아들여
'17c 어느 수녀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덕담을 나누고, 새해 첫 일정은
'서울 속의 유럽'이라는 이름으로
정동 일대를 둘러보기로 동의를 구하고
지하철로 향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