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이 하느님의 선택을 받다
다윗 이야기를 시작하며
다윗은 성경에서 부동의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구약성경에 그 이름이 지속적으로 언급되며, 그 업적은 장엄하게 서술된다.(집회 48,2-12) 그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해 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다윗의 후손’은 예수님께 부여된 칭호로 ‘다윗’에 대한 신약의 언급 총 67회 가운데 45회가 복음서에 나온다.
‘다윗’이라는 이름은 ‘사랑받는 자, 사랑스런 자’라는 뜻으로 이름처럼 그는 하느님과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위대한 인물이다. 그런 그에게도 빛과 어두움이 있었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우리의 삶에도 그런 은총이 함께 했으면 싶다. 우리는 다윗이 등장하는 사무엘기 상권 16장부터 그의 죽음을 전하는 열왕기 하권 2장 사이에 실린 열 두 개의 이야기를 살펴보게 될 것이다. 다윗을 택하신 하느님, 그 하느님을 섬긴 다윗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신앙과 삶을 돌아보고 깊어가기를 소망해 본다.
첫 번째 다윗 이야기 : 1사무 16,1-13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사이에게 보낸다. … 너는 내가 일러 주는 이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어라.”(16,1.3)
라마에 머물던 사무엘이 주님의 명을 받는 것으로 다윗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시작된다. 베들레헴은 예루살렘 남서쪽 약 10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땅으로 옛 이름은 ‘에프랏’(창세 48,7)이다. 나자렛 북쪽에 위치한 즈불룬 지파의 베들레헴(여호 19,15)과 구분하기 위해 ‘에프라타의 베들레헴’(미카 5,1)이라고도 불린다. 폐위된 사울이 아직 왕으로 있던 상황인지라 사무엘이 주저하자, 주님은 제사를 드리러 가는 형식을 취하도록 일러주신다. 누구에게 도유(塗油)할지 알지 못한 채 사무엘은 일단 라마를 떠나 베들레헴을 향한다.
하느님께서 먼저 부르시고, 그때그때 일러 주시는 모습에서 그분의 주도권과 점진적인 실현 방식이 엿보인다. 마침내 사무엘은 베들레헴에 이르러 원로들을 만나고 주님이 일러주신 대로 이사이와 그 아들들을 제사에 초대 한다.(16,1-5)
그들이 왔을 때 사무엘은 엘리압을 보고,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바로 주님 앞에 서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겉모습이나 키 큰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 나는 이미 그를 배척하였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들은 눈에 들어오는 대로 보지만 주님은 마음을 본다.”(16,6-7)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는 히브리어 ‘야훼’와 ‘메시아’가 합쳐진 표현이다. 구약에서 ‘기름부음받은이’는 하느님께 선택된 사람을 뜻하며, 특히 왕실 인물에 대해 사용될 때 항상 ‘야훼’, 또는 그분을 가리키는 소유대명사와 함께 사용된다. 선택된 이에 대한 의무를 졌던 분은 바로 하느님이었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인 사울은 키가 크고 잘생긴 사람이었다.(1사무 9,2; 10,23) 사무엘의 눈에는 사울처럼 풍채가 뛰어난 엘리압이 눈길을 끌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주님은 사람의 마음을 보셨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에서 ‘마음(르밥)’은 지혜가 깃드는 자리(시편 90,12)로 판단과 결정까지 아우르는 곳이다. 주님께서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은 그분 뜻에 부합하는 분별력을 가진 인물을 선택하신다는 의미다. 반대로 주님께서 사울을 ‘밀어내시고’(1절), 엘리압을 ‘배척하셨다’(7절)라는 표현은 같은 히브리어 동사 ‘마아스’가 쓰였는데 ‘거부하다, 거절하다’의 뜻이다.
선택과 배척의 문제는 종종 ‘편애하시는 하느님’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듯하다. 이스라엘의 첫 임금 사울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자 하느님의 명을 저버림으로써 자기 마음을 주님을 향해 충실하게 지켜가지 못했다. 하느님께서 그를 ‘배척’하신 것은 사울 자신이 먼저 하느님 뜻을 ‘배척’함으로써 초래된 결과인 셈이다.(1사무 15,23.26; 16,1)
사무엘은 엘리압에 이어 아비나답, 삼마에게도 거듭 “주님께서 뽑으신 이가 아니오.”라고 선언한다.(16,8.9.10) 이사이의 일곱 아들이 모두 부적합하다는 이야기는 사뭇 길게 묘사되는데, 이를 통해 ‘기름부음받은이’는 사람이 아닌 하느님의 선택에 따라 이루어졌음이 강조된다.
사무엘이 이사이에게 “아들들이 다 모인 겁니까?” 하고 묻자, 이사이는 “막내가 아직 남아 있지만, 지금 양을 치고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이사이는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왔다. 그는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였다. 주님께서 “바로 이 아이다. 일어나 이 아이에게 기름을 부어라. ” 하고 말씀하셨다. 사무엘은 기름이 담긴 뿔을 들고 형들 한가운데에서 그에게 기름을 부었다. 그러자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들이닥쳐 그날부터 줄곧 그에게 머물렀다.(16,11-13)
이사이는 들판에서 양을 치는 아들 다윗을 ‘막내’(11절)라고 부르고 있다. 이 어휘는 ‘나이가 어린’, ‘작은’을 뜻하는데 다윗을 이름 대신 ‘막내’로 부른 것은 처음부터 제사에 초대되지 않은 데서 가족 안에 다윗의 존재가 미미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양떼와 함께 들판을 돌아다녀야 하는 다윗의 옷차림은 말쑥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볼이 불그레하고 눈매가 아름다운 잘생긴 아이’로 묘사된다. 사람 마음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대개 그 얼굴에, 무엇보다 눈동자에 담겨진다. ‘눈매가 아름다운’은 ‘눈이 빛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는 다윗의 내면을 가늠하게 해 주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마음의 중심이 잡혀있는 사람, 하나의 목표에 정향(定向)된 사람의 눈은 빛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사무엘에게 명하신 ‘기름붓다(마샤흐)’라는 동사는 이 일화에서 세 번(16,3.12-13) 나오며, 6절의 명사형 ‘메시아(기름부음받은이)’와 함께 이야기 전체의 주제가 ‘다윗이 하느님께 선택된 기름부음받은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다윗은 “주님께서 뽑으신 이”로서 마침내 사무엘의 도유를 거쳐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되었다. 이제 주님의 영이 다윗에게 내려와 머무르고, 다윗의 삶은 그분의 보호와 축복이라는 큰 그림 안에 놓이게 된다.
마음을 보시는 주님
다윗의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 이야기의 첫 구절에서 엿볼 수 있다. “내가 친히 그의 아들 가운데에서 임금이 될 사람을 하나 보아 두었다.”(16,1) 하느님은 다윗을 바라보고 계셨다. 여기 쓰인 동사 ‘라아’는 7절에도 나온다. “나는 사람들처럼 보지 않는다.… 주님은 마음을 본다.”(16,7) 이 동사는 ‘섭리하다, 마련하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는데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바치며 체험한 하느님을 표현한 ‘야훼이레’(창세 22,14)에도 같은 동사가 쓰였다. 야훼이레는 ‘주님께서 보신다, 마련하신다’의 뜻이다. 하느님은 다윗 뿐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를 바라보신다. 사람을 돌보시는 것이다.
주님이 아직 어린 다윗의 마음에서 보신 것은 무엇이었을까? 다윗은 사람들 눈에 높게 평가받는 것이 없었기에 오히려 더 하느님을 자기 마음의 기둥처럼 삼아왔을지 모른다. 사람에게는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외모, 스펙, 직업과 재산은 모두 보이는 것들로 나를 세상에서 눈에 띄게 해 준다. 다윗의 하느님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다윗은 하느님을 향하고, 하느님은 그런 다윗을 바라보셨고 그의 마음을 알아주신 듯하다. 나를 오롯이 바라보는 이가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까? 주님의 영은 다윗에게 찾아와 그 마음에 자리를 마련하신다. ‘주님의 기름부음받은이’가 된 것이다. 우리 마음을 어디로 방향 짓는지 살펴볼 일이다.
“나의 종 다윗을 찾아내어 그에게 나의 거룩한 기름을 부었노라.”(시편 89,21)
* 이번 호부터 새로 연재되는 송미경(베로니카) 수녀님의 ‘다윗 이야기’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송미경 수녀님은 성바오로딸수도회 소속으로 로마 그레고리오 대학 신학부 졸업, 동 대학원에서 성서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현재 바오로딸 성경학교 연구실 소임을 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