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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견성 만법귀일(明心見性 萬法歸一)>
‘명심견성(明心見性)’이란 선불교 핵심사상으로
자신의 본심(本心)을 밝혀 자신의 본성(本性)을 깨치는 것을 말한다.
견성의 ‘성(性)’은
본성을 가리킨다. 본성을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도 한다.
따라서 견성(見性)이란 본래의 자기면목,
즉 본시 그대로의 자기본성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망념에 물든 마음을 밝혀 자기 본연의 불성(佛性)을 본다는 뜻이므로,
선불교에서는 수행의 핵심을 명심견성(明心見性)에 두고 있다.
따라서 명심견성은 선종(禪宗)의 기본사상 가운데 하나이다. 이 명심견성은 자기 마음에 본래 갖추고 있는
반야지혜(般若智慧)로써 자심진성(自心眞性)을 깨달아서 아는 일종의 내성적(內省的)인 수행방법이다.
그래서 명심견성은 불립문자(不立文字), 이심전심(以心傳心)과 같은 맥락의 말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종파들에서 그들 간의 가장 분명한 사상적 차별이 바로 불성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구분된다고 할 때, <육조단경>은 ‘명심견성(明心見性)’으로 불성을 이해함에 따라 ‘선종 성립의 표지’가 됐다고 말한다.
이 말은 문자를 세우지 말고, 즉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불립문자(不立文字)에는 언어뿐만 아니라 언어 이전의 경계로서, 즉 어떠한 인위적인
‘사고(思考)와 생각(生覺)’을 일으키지 않는 것까지 포함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본래 있던 것을
본래 그대로 본다는 의미이다. 중국 선종에서는 때 묻지 않은 본래의 자기 마음을 깨치는 것이 성불이라고 봤다. 그래서 중국 선종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 마음을 깨쳐 성불하자는 것이었다[견성성불(見性成佛)].
그래서 선불교에서는「명심견성 만법귀일(明心見性 萬法歸一)」이라 해서,
밝은 마음으로 천성을 깨달으면 온갖 법도가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다.
‘명심견성설(明心見性)’은
중국 전통의 성명(性命)사상과 대승불교 불성(佛性)사상이 결합된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불성(佛性)이라고 하는 단어에 굉장히 매력을 느꼈다.
중국 전통적인 성명설(性命說)하고 부합되기 때문이다.
선가(仙家)에선 본성이라고 하는 성(性)은 천명(天命)으로부터 온 것이라 한다.
천명이란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란 말이다. 이와 같이 본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는 것이 성명(性命)사상이다.
선가(仙家)는 단전호흡 등의 육체적 수행(命)을 강조한 측면이 있다.
마음과 육체를 성(性)과 명(命)으로 직접 연결시키는 데는 불교 입장에서는 미묘한 문제가 있으므로,
불가는 마음의 수행을 더 강조해 마음의 핵심인 성(性)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교는 수심연성(修心煉性) 포원수일(抱元守一)이라 해서,
마음을 닦아서 성품을 연마하며 감응(感應)을 추구한다.
유교는 존심양성(存心養性) 집중관일(執中貫一)이라는 가르침이니,
정신을 집중해서 성품을 기르는 것이며,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동요되거나
치우침이 없이 마음이 중심을 지키고 인(仁)으로 용서함이다.
기독교는 세심이성(洗心移性)이며 묵도친일(默禱親一)이니
세례로 마음을 씻어 성품을 옮기며 기도로 하나의 유일신과 친함을 찾는다.
이에 비해 불교는 명심견성明心見性) 만법귀일( 萬法歸一)이라고 했다.
밝은 마음으로 천성을 깨달으면 온갖 법도가 하나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바탕엔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이라는 사상이 뒷받침하고 있다.
그런데 중생에겐 불성(佛性)이 있지만 가려 있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나 오직 번뇌에 덮여 있어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
바로 망념에 물든 내 마음이 가리고 있다.
중생과 부처의 차이는
바로 불성이 가려져 있느냐, 완전히 드러나 있느냐 하는 차이다.
따라서 선(禪)수행 목적은 번뇌를 걷어내고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심을 밝혀 체달 증득하는 것으로서
이를 명심견성(明心見性)이라 한다. 그래서 팔만대장경 요지를 일언(一言)으로 요약하면
명심견성(明心見性)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밝히면 성품 자리, 즉 본래 진면목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그리하여 자신의 때 묻지 않은 진정한 모습을 만나고,
그 본래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수행이다.
중국 당나라시대 백장 회해(百丈悔海, 720~814) 선사가 특히 강조한 바 있다.
밝은 마음으로 타고난 천성을 안다는 것이 명심견성이다.
그리하여 여래(如來)를 보고,
불광(佛光)을 보며,
내면의 소리를 듣고,
지혜의 경지를 얻는 것,
그러한 것이 바로 명심견성이다.
불립문자(不立文字)란 이런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문자를 세우지 않고, 즉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마음을 깨친다는 말이다. 성(性)이란 우리 본성, 우리 본래면목, 또는 우리 본래의 힘을 가리킨다. 우리가 본래의 힘을 찾게 되면, 우리는 모든 지혜와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의 수행을 통해 마음의 핵심인
성(性)을 꿰뚫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참선의 목적도 마음을 밝혀 성품을 보는 것(明心見性)이다. 자기 마음의 오염(汚染)이 없어지면 진실로 자기
마음의 참모습을 본다. 오염이란 바로 망상과 집착이다. 여래(如來)의 지혜와 덕상(德相)은 모든 부처님과
중생이다 같이 갖추고 있는 것으로 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다. 만약 망상과 집착을 여의면,
자기의 여래 지혜와덕상을 증득(證得)해 곧 성불할 것이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곧 중생인 것이다.
다만 우리는 무량겁(無量劫)을 내려오면서 어리석게 생사(生死)의 구렁텅이에 빠져 오염된 지 오래이므로 능히
그 자리에서 단박에 망상을 벗어나 실답게 본래 성품(本性)을 보기 힘들다. 그래서 참선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참선의 최대 과제는 바로 망상을 떨쳐버려야 하는 것이다.
선종은 명심견성(明心見性)과 식심견성(識心見性)을 주장하는데, 명심(明心)은 마음작용을 명철하게 밝히면서
본성을 드러내는 것(見性)을 가리키며, 식심견성은 육조 자신의 법문인 마음을 알아 성품을 보면 스스로
부처님 도를 성취함[識心見性 自成佛道]을 강조한 것이다.
그리고 명심견성과 식심견성은 돈오설(頓悟說)에 맞닿아 있는 어구들로서 선종사에서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단어들이다. 명심견성의 관건은 본을 버리고 말을 좇는(捨本逐末) 중생들의 미(迷)함를 타파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것으로, 전범입성(轉凡入聖)이라,범인(凡人)을 교화시켜 성인(聖人)의 경지로 이끄는
것이다. 즉 범부가 성인이 됨을 말하는 방편으로 수행 근본의 취를 삼았다.
심(心)은 성(性)의 작용이며, 성은 심의 체(體)가 되며, 성을 여읜 심도 없으며 심(心)을 여읜 성도 없기 때문에
심성불이(心性不二)가 되며, 확철히 각오하는 것을 가리켜 명심견성이라 이른다. 불성을 보면 중생이라 칭하지
않으며,
견성은 성(性)의 작용으로 행주좌와(行住坐臥) 어묵동정(語默動靜)
일상생활 속에서 번뇌에 물들지 않고 자유자재한 경계를 가리킨다.
때문에 성을 본즉 불(佛)을 보는 것으로(見性即見佛),
“불(佛)은 내 마음으로 짓는 것이므로,
심을 여의고 달리 부처를 구하지 말고,
부처를 여의고 다른 심(心)이 없으며,
심과 불(佛)이 평등해서 마음이 곧 부처이고,
부처가 곧 마음이다”라는 것이다.
중생이 성(性, 본질)을 보지 못하고,
시종 성을 여의고 밖에서 성을 찾으면
무수겁이 지나도 부처를 볼 수도 없고 만나지도 못한다는 것이다.
때문에 선종은 먼저 명확하게 당하심작용(當下心作用, 현재 마음작용)을 파악하기를 강조하면서
먼저 당하 마음을 알지 못하면, 확실한 명심견성을 요지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즉심즉불(即心即佛),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돈견성불(頓見成佛),
일문천오(一聞千悟),
견성성불(見性成佛) 등 어구가 함축하고 있는 깊은 의미를 숙지할 수가 없다고 여겼다.
※즉심즉불(即心即佛)---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한번 뛰어 부처님 지위에 오른다는 뜻.
※돈견성불(頓見成佛)---본성을 단박에 봄으로써 성불한다는 말,
돈견(頓見)하면 일념(一念-한 생각)에 성불(成佛) 한다는 말.
※일문천오(一聞千悟)---하나를 들으면 천 가지를 깨닫는다는 뜻.
※견성성불(見性成佛)---자기 본래 성품[참나]을 깨치면 부처가 된다는 말.
선종은 마음 작용에 중점을 두며 마음(心, 動, 용)으로 성(性, 체) 삼으면,
― 본질로 삼으면서, 한번 동념(動念-일어나는 생각)은 만 가지 망상을 일으키며,
한 번의 무념(無念)은 만 가지 망상을 소멸시킨다고 하는 일념(一念)의 작용을 매우 강조하기도 한다.
<육조단경>에서도 “하나의 등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하나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소멸할 수 있으며, 또 일념의 악보(惡報)는 도리어 천년의 선심을 잃게 하고, 일념의 선보(善報)는
천년의 악을 멸(滅)하게 한다.”고 했는데, 바로 일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하겠다.
여기서 일념(一念)은 곧 일심(一心)을 가리키며 각자 현재 마음작용의 표명으로
일념의 순간작용이 지옥과 극락을 만들기도 한다는 것으로,
<육조단경>에서 “일체만법이 모두 자신 중에 있다(一切萬法盡在自身中)”는 것과
<화엄경>에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하는 것은 모두 마음작용처의 극대화 표현이라고 하겠다.
이와 같이 선종은 유독 마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부처 마음을 쓰면 바로 부처가 되고,
도둑의 마음을 쓰면 바로 도둑이 된다(作佛用 作賊用)”고 했다.
마음작용을 최대로 활용한 조사로는 마조(馬祖道一, 709∼788) 선사를 꼽을 수가 있다.
마조 선사는 일찍이 “평상심이 바로 이 도이다(平常心是道)”라고 하는 구호를 들어서
일상에 직면한 현실 속에서 어떤 상태로 마음을 챙겨야 하는가를 제시했다.
대개 선종은 일념의 내외경계 작용을 말할 때 직접적인 표현을 삼가는 측면이 있었으며,
간접적인 표현과 직접적인 표현을 오가며 선경(禪境)을 설명하곤 했다.
또 <열반경>에서 “불성을 보면 중생이 아니고, 불성을 보지 못하면 중생이라고” 했듯이,
지위고하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누구라도 명심견성(明心見性) 하는
그날이 바로 삼계 윤회에 종지부를 찍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런데 불성(佛性)에 대한 비판의 소리도 있다.
선불교 혹은 오늘날의 한국불교를 지배하고 있는 근본적인 개념의 하나는 불성(佛性)이다.
명심견성도 이 불성이라는 데에서 나오고, 본래 부처라는 것도 불성에서 나오고,
성불(成佛)이라는 개념도 다 여기서 나오는데, 불성이라고 하는 용어 자체가 비불교적 사상이라는 것이다.
불성론은 브라만의 아트만(atman) 사상에 유사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불성사상은 불교 기본사상인 무아사상(無我思想)과 양립하지 못한다는 주장이다.
불멸 이후, 부파불교시대에 많은 인도 스님들이 이 아트만 사상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리하여 불성이라는 것은
독자부의 뿌드갈라(個我, pudgala)라는 것, 설일체유부의 법체(法體)라는 것, 이런 것들과 맥을 같이 한다는 것이다. 무아인데 불성이라는 것이 언제나 청정하게 존재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성이라고 하는 것은
아트만 사상의 변종이지 불교사상 아니라는 주장이다.
헌데 <열반경>에서, 「불성 비유비무 역유역무 유무합고 명위중도
(佛性 非有非無 亦有亦無 有無合故 名爲中道) -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합하는 까닭에 중도라고 한다.」라고 했다.
이를 좀 더 풀어보면, 불성(佛性)은 비유비무(非有非無),
즉 있는 것도 아니며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완전히 떠나면[양변을 버리면],
[나머지는] 또한 있는 것이며 또한 없는 것이니[亦有亦無],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된다.
그러므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융합하게 되면
그것은 결국 서로 통하는 것이므로 중도(中道)가 된다.
여기서 유(有)와 무(無)는 중도를 바르게 설명하기 위해
세간의 모든 편견 가운데 대표적 견해인 유와 무를 거론한 것이다.
그러므로 불성을 있다거나 없다는 측면에서 접근하면 그 실상을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비유비무(非有非無)는 유무 어느 한쪽에 얽매이지 말라는 뜻이니
변견을 버리라는 말이고[쌍차(雙遮)],
역유역무(亦有亦無)는 불성이 두 가지 측면을 다 갖추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어느 한쪽에만 치우지치 않고 양쪽을 다 보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쌍조(雙照)],
역유역무(亦有亦無)에 공과 불공의 모습이 다 들어 있다고 한다.
즉, 원융무애(圓融無碍)하게하나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청화(靑華)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우리가 부처님을 어떻게 볼 것인가?
소승에서는 석가모니만 부처님으로 본다.
그러나 대승에서 참다운 부처님은 바로 부처님이 하신 말씀대로 석가모니가 세상에 나오고 안 나오고
상관없이 영원히 우주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른바 법신부처(法身佛)님 말이다. 법신부처님을 깨닫게 되면
누구나 다 산 부처님이다. 그런 의미에서 달마(達磨) 스님이나 원효(元曉) 스님, 서산(西山) 스님 등 수 많은
선지식들은 다 산 부처님들이다. 믿음이 지극한 사람에겐 불성이 있는 것이고, 수행도 아니 된 주제에 있느니
없느니 하는 이에겐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항시 의심하기 때문에 우리에게서 아무런 힘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믿게 되면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 순식간에 우리한테서도 위대한
힘이 나온다. 따라서 온전하게 믿는 마음이 필요하다. 신앙이란 의심 없이 온전히 믿는 것,
믿어야 부처님 공덕이 발휘가 된다.』
그리고『대승불교에서는 말하는 불성은 모든 생명체에게 잠재돼 있다고 본다. 부처님의 성질을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선지식들에게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웃에 사는 보통 사람들 누구에게서나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성철 큰스님이 돌아가시기 몇 해 전 법어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술집에서 일하는 아가씨에게서도 부처님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 세상 그대로가 정토가 될 날이 머지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형상만을 보기 때문에, 그 안에 감추어진 잠재력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불성이 있느니 없느니 시비를 하는 것이다.
불성은 영혼과 같은 실체가 아니라 삶의 구조와 과정을 의미한다. 대승불교에서 본 생명은 생명체가 소유하고 있는 그 무엇이 아니라 인지의 구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구조와 과정이다. 이러한 '삶의 구조와 과정'을 불성이라고 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체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대승불교의 주장은 모든 생명은 연기적 삶의 구조를 가지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중표.
이에 대한 홍창성 교수의 의견이다.
삶의 과정이 불도다우면 그 과정이 불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성을 어떤 실체로 보면 안 된다.
불성을 실체로 보기 때문에 아트만 같다는 말이 나온다. 불성은 그런 실체가 아니라 어떤 성향을 말한다.
『불성이나 여래장을 성향(disposition) 또는 가능성(potential)으로 이해해야 한다. 무상(無常)과 무아(無我)
그리고 연기(緣起)와 공(空)의 가르침인 불교 안에서 불성이 어떤 영구불변의 고정된 본질 또는 자성으로
이해될 수는 없다.…
일부 초기불교 연구자들과 비판불교론자들이 비(非)불교적이라고 주장하는,
여래장 사상으로부터 비롯된 동아시아 대승불교의 불성(佛性) 사상을
모든 유정물이 가지고 있는 어떤 고정불변한 본성 또는 자성(自性)으로 보면 안 된다.
다만 불성을 ‘깨달을 수 있는 가능성
또는 성향’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래서 ‘불성’과 ‘여래장’이라는 개념에 해당되는 직접적인 대상이
존재세계에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불성과 여래장은 단지 가능성과 성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