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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언 >은 최상의 은사인가?
1. 들어가는 말
사도행전 2장은 오늘날의 기독교계에 존재하는 가장 큰 논쟁 중 두 개의 배경이 되는 장이다. 사도행전 2:38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창시자인 알렉산더 캠벨(Alexander Campbell, 1786-1866)이 나타나기 약 13세기 전부터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가르쳐 온 교리인 침례에 의한 중생의 근거 구절로 내세우는 구절이다. 행 2:1-13 은 에이미 셈플 맥퍼슨(Amiee Semple McPherson, 1890-1944)이 처음으로 조직한 단체인 순복음 친교회(Full Gospel Fellowship) 및 로스 엔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미션(1904)에서 시작된 “글로살라야”(Glossalaia) 즉 “은사주의”(Charismatic) 운동에서 자신들의 교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한 구절이다. 이 은사주의 운동은 후에 캔자스 주 토페카에서 널리 퍼져 나갔으며(1910-1930) 현재는 “체험의 나눔”을 통해 근본주의 진영을 로마로 연합시키려는 로마카톨릭의 의도와 연계되어 있다.
사도행전 2장의 말씀을 보자【1 그후 오순절 날이 되자 그들이 다 하나가 되어 한 장소에 모였는데 2 갑자기 하늘에서 거친 강풍 같은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우더라. 3 거기에 불 같은 모양으로 갈라진 혀들이 나타나 그들 각 사람 위에 머물더니 4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신 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5 당시 예루살렘에는 신앙심이 깊은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머물고 있었는데 6 그때 이 소문이 퍼지자 무리가 함께 모여 혼란이 생겼으니 이는 각 사람이 자기 나라 말로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라. 7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이상히 여겨 서로 말하기를 "보라, 말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 각 사람이 우리가 태어난 곳의 고유 언어로 말하는 것을 듣게 된단 말인가? 9 파대인과 메데인과 엘람인과, 메소포타미아, 유대와 캅파도키아, 폰토와 아시아, 10 프루기아와 팜필리아, 이집트와 쿠레네에 가까운 리비아의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에서 온 타국인들, 즉 유대인과 유대교로 개종한 자들과 11 크레테인과 아라비아인들인 우리가 그들이 우리의 언어로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듣고 있도다." 하니 12 그들이 모두 놀라고 의아해 하며 서로 말하기를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하더라. 13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롱하며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새 포도주에 취하였다."고 하더라.】
행 2:1-13에서 생겨난 두 가지 이단 교리는 다음과 같다.
① “성령 세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또는 “성화”되지) 않은 것이다.
② “성령 세례”를 받은 첫 번째 증거는 “다른”(또는 “알지 못하는”) 말로 말하는 것이다.
본문을 주석하기에 앞서 성령께서 친히 기록하셨으며,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라면 이 진리에 대해 어떤 실수도 할 수 없도록 기록하신 분명한 진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성경에 있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에 주의를 기울이려는 우리를 사람들은 “성경을 갈기갈기 찢어 놓는다”고 비난하는데,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모든 구절과 단어를 적용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그럴듯한 비난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일 욥기 12:6, 말라키 2:7, 레위기 11장을 자신의 삶에 직접 적용시켜 보면, 성경의 모든 구절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시키는 것, 적어도 교리적으로 적용시키는 것은 미친 짓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여기서 논하는 것은 “교리”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1) 사도행전 2장 어디에도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들이 무슨 언어로 말했는지가 본문에 나열되어 있으며,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들의 말을 이해했다(8-11절).
2) 120명의 제자들 중에서(1:15) “열둘”만이 외국어의 은사를 받았으며(7절), 사도행전 4:4, 17:34 및 다른 허다한 구절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에 대한 “첫 번째 증거” 같은 것은 없다.
이러한 사실들을 살펴보고서도 왜 문맥에서 떼어낸 40구절 정도를 짜맞추어 자신의 이단 교리를 뒷받침하는 자들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인가? 그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교리가 “성경이 말씀한 바”라고 생각하도록 할 뿐이다. 성경은 “춤출 때”가 있고 “죽일 때”가 있다고도 말한다. 독주를 마시고(신 14:26),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도 괜찮다고(말 3:15) 말한다(?!)
우리는 성경 전체를 믿는다. 하지만 성경의 모든 부분을 기록된 그대로 행해야 하는가?
문맥에서 떼어내거나 적당히 속임수를 쓴다면 그 어떤 주장이라도 성경으로 뒷받침되지 못할 것이 없다. “Hang all the Law and the Prophets”[“율법과 선지자들을 목매달아라”(마 22:40)] 또 “Top not come down”[“정상에 오르고 내려오지 말아라”(마 24:17)]이라는 명령은 어떤가? 그런 것은 고린도전서 14:2을 사도행전 2:4에 맞추고, 사도행전 2:7-11을 떼어내서 사도행전 2:18을 요엘 2:23에 맞추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후자는 팔레스타인에 비를 내려 주시는 내용인 반면 전자는 환란 시대에 이스라엘과 연관된 성령의 사역을 말하고 있다. 이런 것을 바로 이해할 수 없으면서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할 때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인지 어떻게 알겠는가?
오순절은 매년 정해진 때에 오는 한편, 성령께서는 어떤 해, 어떤 정한 때(1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유기체인 하나의 몸 안으로 침례 주시는(고전 12:13) 세대를 열고 계심을 알려 주시기 위해 강림하셨다. 이 “한 침례”(엡 4장)에는 방언들이 수반되기도 했고(여기서처럼) 수반되지 않기도 했으며(41절에서처럼)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방언들을 말했다(고전 12:30). 때로 이 “한 침례”는 안수가 수반되면서도(행 8:17) 방언들이 없을 때도 있었고(행 8:17) 때로는 안수와 방언이 다 있을 때도 있었다(행 19:1-6). 때로 “한 침례”는 물침례와 동시에 일어나기도 했고(여기서처럼) 때로는 그렇지 않기도 했다(행 10:47).
“성령 세례”를 받으면 방언을 한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이 이와 같은 혼란을 어떻게 처리하고 교리적으로 바로잡을 수 있겠는가? 상황을 바로잡는 유일한 방법은 “성경 전체”를 믿는 것이며, 그들이 끊임없이 외치는 성령님을 참으로 의지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이 바로 사도행전의 저자시기 때문이다.
2. 전개되는 말
< 방언 >은 최상의 은사인가? 방언을 알기 위하여 창세기부터 어떻게 사용되어졌는지 관련 몇 구절을 발췌하여 살펴보자.
1) 창세기 10:5.『...즉 각자 그 방언에 따라, 그들의 족속에 따라, 그들의 민
족들에 따라 나뉘었더라.』
『5 이들에 의하여 이방의 섬들이 그들의 영토에서 나뉘었으니, 즉 각자 그 방언에 따라, 그들의 족속에 따라, 그들의 민족들에 따라 나뉘었더라.』
(1) 이 구절에 다르면 이방인이란 코카사스 인종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는 유대인이 아닌 자로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을 지칭하는 말이다. 『섬들』(5절)이란 코르시카, 사르디니아, 시실리, 마요르카, 크레테, 키프러스, 로데스, 및 그리스 군도의 여러 섬들과 궁국적으로는 영국과 아일랜드까지 포함한다.
『그들의 영토에서 나뉘었으니』(5절)란 말로 미루어 창세기 10장의 내용은 창세기 11:1-8의 사건 이후에 기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창 11:9 참조). 『각자 그 방언에 따라』라는 말은 이 사실을 더욱 분명히 해준다.
여기에 열거된 14명의 야펫의 아들들과 손자들로부터 오늘날의 스페인, 그리스,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러시아, 헝가리,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루마니아, 영국, 스코트랜드 및 아일랜드 민족이 나왔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에서는 "외국 마귀"(foreibn devil)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들은 또한 아프리카 종족들의 두려운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이들은 미주 대륙의 인디안들에 의해 "창백한 얼굴"이라고 불렸고 그들끼리 끊임없이 싸웠다. 이들은 전쟁을 좋아하는 종족이요(적어도<킹제인스성경, 1611>을 거부할 때까지는 그랬다.)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WASP)와 흑인 라틴이탈리안 카톨릭교도(BLICS)로 완전히 나뉘어졌다. 이들은 뒤에서 서로를 비난한다. 이들이 사용하는 경멸적 용어는 다음과 같다.
(2) Frog(르랑스인을 경멸하는 용어, 개구리를 먹기 대문이라고 함), Frenchy(프랑스인), Limey(영국인), Kraut(독일인), Boche(독일인), Square Head(독일인, 네델란드인, 스칸디나비아인), Red Neck(무식한 백인 농장노동자), Damn Yankee( 미 북부인), chacker (미 남부인 가난한 백인), Oakie, Hunky(미국 태생의 미숙한 노동자, 특히 헝가리 사람), Polok(폴란드계), Chainks( 중국인), Gooks(중국지역의 피부색이 짙은 외국인,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출신들은 Jungle Bunnies(흑인), Sambos(흑인), Niggers(흑인)리고 야펫족속에 의해 경멸적으로 불린다.
이들 야펫족속은 "퍼져나가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일 대 일로 싸움을 잘하는 민족은 아일랜드인, 보병이나 포병이 강한 나라는 독일인, 주먹으로 치고 박는 데 뛰어난 사람은 스코트랜드인, 위치를 먼저 차지하는 데 뛰어난 사람은 영국인, 집단으로 함께 죽는데 제일 가는 민족은 러시안인이다. 각 민족은 자신의 언어를 갖고 있으며 독특한 특징과 사고방식, 식생활, 의복, 가족의 풍습 및 전통, 독특한 표현 및 유머를 갖추고 있다. 이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없애기 전에는 이들은 도저히 섞을 수가 없다. 오늘날에는 야펫족속을 셈족과 함족과 혼합시켜 그 누구도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하지 못하게 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현대인들이 전쟁을 없애는 "해결책"으로 인종통합을 택했기 때문이다(창 8:21 주석 참조). 하나님께서는 이런 해결책을 무너뜨리고,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전쟁이 계속될 것을 확증하시기 위해 창세기 11:1-8까지의 사건을 반복적으로 수행하신다(계 19장, 욜 2장 참조).
2) 창 10:20. 『 ...그들의 족속들과 그들의 방언들을 따른 것이라.』
〔 20 이들은 함의 아들들이라. 그들의 나라들과 그들의 민족들에서 그들의 족속들과 그들의 방언들을 따른 것이라.〕
(1) 함족은 출발부터 잘못되어 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도 흑인향상협회 등과 같은 단체는 "억압", "백인우얼주의", "게토", "노예제도" 등을 들먹거리면서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성경이 다루고 있는 사실은 흑인 개개인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흑색 인종을 집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10:5에서도 유럽인종을 다루었지 유럽인 개개인을 다룬 것이 아니다. 에디오피아 내시, 쿠레네인 시몬, 니켈(니그로)이라고 하는 시므온, 에벧멜렉(렘 38:7,10,11,12) 등과 같은 함의 후손들을 기꺼이 자기 의무를 다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올바른 태도를 취한 대표적인 신실한 가람들이었다. 19세기의 노예 소년 새미 노리스는 백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던 노예로 오늘날 백인들을 부리는 흑인들보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으므로써 훨씬 행복하였다.
(2) 함과 야펫의 관계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우대관계일 것이다(물론 함이 복종하면 야펫은 "그 아우를 지키는 자"로서의 책임을 다한다).
미국의 남부 사람들은 이 관계를 알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유대관계는 사라지고 말았다.
미스라임, 풋, 풋, 루딤, 등등은 아프리카로 내려갔고 정글을 뚫고 오늘날의 탄자니아, 차드, 가봉, 아이보리코스트까지 이르렀다. 쿠스의 후손들은 오늘날의 시리아, 요르단, 이라크, 이란, 사우디로 나아갔고 카나안은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
3) 사 33:19.『너는 흉포한 백성을 보지 아니하리니 그 백성의 말은 어려워서 네가 알 수 없으며, 더듬는 방언이므로 네가 깨닫지 못하리라.』
이 절에서 "그 백성의 말은 어려워서 네가 알 수 없으며, 더듬는 방언이므로 네가 깨닫지 못하리라"고 하신다. 킹제임스성경은 "of a stammering tongue," 라고 씌어 있어 방언이 "언어", "국어" 또는 외국어임을 밝히고 있다.
4) 행 2:4,『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께서 그들에게 발설하게 하
신대로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
(1)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다른 방언들로 말하기 시작하더라』(4절). 이 부분은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본문은 “충만하여”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침례”(행 1:1-5)임이 분명하다. 자신들이 “카리스마”(은사)를 가진 것을 증명하려고 서두르는 바람에 은사주의 형제들은 “충만”은 빼버리고 “침례”만 남겨 두었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서 세 장도 채 못가서 동일한 제자들이 다시 “성령으로 충만”(4:31)했는데 이번에는 방언들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성령과 거룩한 생활에 대해 말하는 해석가들에게서 이런 표리부동을 보게 된다]. 더욱이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명령인 반면(엡 5:18) 방언의 은사는 그렇지 않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으며(고전 12:13) 어떤 이들은 방언들보다 훨씬 더 나은 은사들을 받았다(고전 12:31). 방언은 성경에서 가장 작은 은사로 묘사되고 있다.
윌리엄과 벌링거는(스템, 베이커와 더불어) 이때가 그리스도의 몸의 생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순절 사건은 ‘히브리’ 교회의 “거듭남”(rebirth)이라는 것이다. 벌링거는 여기서 더 나아가 거듭남은 이스라엘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말했고(요 3:3-5 참조) 따라서 거듭남은 “이 세대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그러나 스템과 베이커는 그렇게까지 성경을 난도질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바울은 분명히 거듭났기 때문이다(고전 15:8). 그렇게 해서 현대의 벌링거 추종자들은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의 몸이 바울과 함께 시작됐다고 말한다. 윌리엄(William)은 바울 서신으로 계시된 교회는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었기 때문에 오순절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었다고 말함으로써 진리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런 말들은 창세기 3장에서 이브가 했던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윌리엄은(주석, p.822) 에베소서 3:9에서 “신비”라는 단어를 빼버리고는 어떤 것에 대한 “계시”와 그것의 “기원”(시작)은 동시적이라고 생각하게끔 한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지극히 전형적인 현대적 접근 방법, 즉 거짓말을 해서 곤경에서 빠져나가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스템 추종자들의 걸림돌은, 어떤 일이 계시되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스템 추종자들은 이 규칙을 수없이 많이 범하고 있다(행 1:3-8 주석 참조). 그러나 “한 몸 된 교회”의 문제에 있어서 그들의 한결같은 주장은 어떤 것이 누군가에게 계시되기(사도행전 9-15장의 바울처럼) 이전에 존재하는 것은(사도행전 2장에처럼)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유기체적 몸이 사도행전 2장에서 시작되었다는 근거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지역 교회(이미 세워졌다)의 모든 구성원은 “제자들”이었다.
(2) “방언들”이 수반되지 않고도 “성령충만”했던 예가 사도행전에서 여러 번 있었음을 주목하라(행 4:8; 4:31; 6:3,5; 7:55; 9:17; 13:52).
① 『그 때 베드로가 성령으로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기를 "백성의 관원들과 이스라엘의 장로들이여, 』(행 4:8).
이번에는 머뭇거리거나 불평하는 것도 없으며(마 26:70) 분노에서 터져 나온 저주도 없다(마 26:74). 베드로는 큰소리로 정연하고도 공식적인 입장에서 반대파를 정면으로 겨냥하여 그들의 영적 눈멈과 직무 태만, 성경에 대한 무지와 살인(10절)을 비난하고 있다. 베드로의 대답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일을 했다.”에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시편 118:22을 인용한 것이다. 그 구절은 산헤드린이 자신들이 죽였던 사람의 입에서 들었던 바로 그 구절이다. 마태복음 21:42-45을 보라.
그 때에 성령으로 충만하여 역설을 한 베드로는 방언을 하지 않았다. 성령충만하면 방언을 한다는 것은 거짓이며, 방언하지 않으면 성령이 충만하지 않다는 말도 성경 어디에도 없는 통속적인 얘기뿐이다.
② 직업 어부인 베드로가 그들을 사정없이 해치웠으며, 그들이 “숨겨진 손길”이 그와 함께함을 즉시 인지했다는 사실은 13절을 통해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누구도 시편 118:22을 인용해서 그들을 살인자로 고소한 사람이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옛 친구 시몬 베드로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5) 행 10:44-48, 『 47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44 ○ 베드로가 아직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 성령께서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시더라. 45 그러므로 베드로와 함께 온 모든 할례받은 믿는 자들이 성령의 선물을 이방인들에게도 부어 주심을 보고 놀라니 46 이는 그들이 방언으로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음이라. 그때 베드로가 대답하기를 47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어느 누가 물로 침례받는 것을 금하리요?" 하며 48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으라고 그들에게 명하더라.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간 더 머물기를 간청하더라.】(44-48절)
(1) 수많은 진리들이 여기에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① 방언들은 성경에서 두 곳, 즉 성령께서 이 시대에 그분의 사역을 시작하신 사도행전 2장과 사도행전 10장에서 주어진 처음 증거(initial evidance)이다.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방언의 은사는 결코 “처음 증거”가 아니다. 이 사실은 고린도전서 12;13; 14장에서 매우 분명해진다. 그 구절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았지만 그들 모두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 준다.
② 여기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물침례를 받지 않고서도 성령을 받는다(47절). 그들은 구원받았고 “거듭났으며,” 카톨릭 사제나 캠벨파 목사가 그들에게 안수해 주지 않았는데도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되었다. 아무리 많이 성경을 뒤틀어 놓아도 (마가복음 16:16과 사도행전 2:38을 코넬료의 상황으로 맞춰 보려는 시도도) 소용없다. 44절의 모든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받았다. 물침례도, 교리문답도, 안수나 견진성사도 없다.
③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아니라 『주』의 이름으로 침례를 받는다. 배교한 로크만 재단은 이 구절을 사도행전 2:38에 억지로 맞추려고 본문에 “주”를 빼고 “예수 그리스도”를 첨가시켰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크만 재단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침례에 의한 중생을 믿고 아기에게 물 뿌리는 “개혁가들”이란 사실이다. 오리겐도 침례에 의한 중생을 믿었으며, 유세비우스와 팜필루스가 콘스탄틴에게 보냈던 오리겐의 필사본들(알렙, A, B)에는 NASV의 본문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암흑기의 예수회 성경(1582년)에도 첨가되어 있다.
☞ 6) 그럼 『성령 충만』이란 무엇인가?
(1) 구원받은 후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다.
『그 분 안에는 신격의 모든 충만함이 몸의 형태로 거하시나니...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되느니라』(골 2:9-10). 구원받은 사람의 삶에는 부족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다면 다음 두 가지 잘못된 사실 중 하나에 해당된다.
① 성령 충만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거나
② 하나님께 구했더라도 삶 속에서 성령님께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구원받는 순간 성령님께서는 여러분을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하셨다. 이것이 성령침례이다. 신격의 세 번째 인격이신 성령님께서는 하나님께서 피값으로 사셔서 하나님의 소유가 된 여러분의 몸에 들어와 살기 위해 오셨다.
(2)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되신다.
성령님은 주님이시다. 『이제 그 영은 주시니...』(고후 3:17). 하나님께로 회심할 때 모든 믿는 성도는 성령님을 소유하게 된다. 여러분이 구원받았을 때 여러분은 성령님으로 인쳐진다(고후 1:22, 엡 1:12,13). 이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지금 죄 가운데 있거나 아니면 입으로만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주관하는 것을 포기할 때 성령님은 우리에게 더욱 더 자신으로 채우신다. 이것이 바울이 갈라디아서 4:19에서 믿는 성도 안에 그리스도가 형성되도록 기도한다는 것이다.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지만 우리의 태도에 따라 우리를 주관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 누가복음 11:13은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한다. 우리는 성령충만을 위해 간구하라고 명령받았다. 누가복음은 오순절이 지난 오랜 후에 쓰여졌다. 오순절 사건은 성령의 내주하심을 언급하고 있는 반면 누가복음 11:13은 성령의 채우심과 충만케하심을 간구하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어쩌면 회심 후에 겪을 수도 있는 “체험”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성령이 내주하신 후 나중에 받게 될 성령충만을 성령침례와 혼동한다.
(2) 제자들은 오순절을 기다려야만 했는데(눅 24:49) 이는 오순절은 “체험”이 아니라 유대인의 명절이기 때문이다.
① 사도행전 2:4은 성령께서 내주하러 오신다는 약속의 성취이다.
성령께서는 유대인의 한 명절을 택하셔서 그 체험을 허락하셨다. 이 지구상에서 그러한 체험이 있었던 오순절은 사도행전 당시 한 번 뿐이었다(그 후 적어도 1900년 이상의 오순절이 있어 왔다). 그날 성령은 하늘로부터 이 땅에 있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모든 성도에게는 성령님이 계시지만 성령님이 모든 성도를 주관하시지는 않는다. 성도들에게는 아직도 하나님께 반역하려는 의지와 옛 성품이 있다. 기도할 수도 있지만 안할 수도 있다. 주님을 증거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순종할 수도 있지만 불순종할 수도 있다. 즉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성령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아니면 저항하거나 성령님을 슬프시게 할 수도 있다. 믿음에 의한 가장 훌륭한 행위는 성도가 그의 삶을 포기하고 성령님께 내어드리는 것이다. 사탄은 성도의 생애를 장악하기 위해 성령을 흉내낸다.
②성도가 구원받고 성령님께 헌신할 준비가 되자마자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은 성령님을 흉내내는 일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믿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2천만 명 이상의 “영접기도”가 있었는데도 실제로 성령이 말씀하는 대로 행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50만 명도 채 안된다. 이것은 사탄이 성령을 흉내내어 이들을 낚아채 버렸기 때문이다. 독립침례교회, 근본주의교회, 초교파교회, 잭반임프와 빌리 그래함의 복음집회, 제리 팔웰의 T.V.사역, 잭 하일스와 기타 유명한 목사들의 엄청난 집회들을 통해 매년 백만 명 이상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지만 신약성경의 기준에 반정도의 자격을 갖춘 사람은 10분의 1도 채 안된다. 이들 10분의 9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갖고 있다는 사실조차 믿지 않는다.
(3) 성령님은 고린도전서 14장을 기록하셨고 그 장 전체에서 방언에 관해 말씀하실 때 한 번도 침례를 언급하지 않으셨다.
① 그 장을 기록하시고 보존하신 성령님께서 “알지 못하는 방언”이 성령침례와 관계가 있다고 가르치시지 않는다. 성령님은 사도행전 2장을 기록하셨고 보존하셨으며 거기에는 어떤 알지 못하는 방언도 없었다고 분명하게 해 주신다. 알지 못하는 방언이 성령침례의 표적이라고 가르치는 사람은 틀림없이 그의 삶을 성경을 기록하고 보존하신 신격의 세 번째 인격이신 분께 내어드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는 어떤 다른 영과 관련되어 일하는 것이지 성령님과 연관되어 일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충만하라는 것은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다. 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험해야 한다. 에베소서 5:18은 선택적인 명령이 아니라 반드시 지켜야 되는 명령이다.
사도 베드로는 사도행전 2:4, 4:8, 4:31에서 성령으로 충만했다. 사도행전 4:8에서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그는 방언을 말하지 않은 것에 유념해야 한다. 사도행전 4:31에서도 성도가 성령으로 충만했을 때 방언을 말하지 않았음을 유념해야 한다. 사도행전 4:8과 4:31에서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의 현저한 특징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공개적으로 하나님의 적들에게 선포한 것이다.
강단에서만 설교하고 공개적으로 거리에서 설교하기를 두려워하는 모든 사람들은 성령충만의 사실을 알지 못하며, 경험하지 못한 것이다. 성령으로 충만할 때 문 밖으로 나가 예수 그리스도를 곳곳에 전하게 된다. 결코 강대상 뒤에 머물러 있지 않는다.
②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성도는 성령으로 충만해질 필요가 있다. 성령충만은 사도들, 교사들, 설교자들, 부모들, 젊은이들, 노동자들, 운전수들, 그 밖의 모든 종류의 사람들에게 다 해당된다.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개인의 유익을 위해서도 성령 충만은 필요하다. 성령으로 충만하지 않고서는 주님의 뜻과 축복을 바랄 수 없다. 성령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개인의 축복이자 주위 사회의 축복이다. 왜냐하면 성령으로 충만해지면 그 사회에서 악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거리설교는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그 지역의 “평화를 깨뜨린다.” 미국의 모든 도시는 올바른 진리로 충격을 받아야 한다. 오늘날 미국의 모든 마을은 어린 아이에게 성폭행을 하려드는 동성연애자들과 남자들의 직업을 차지하려는 여자들과 “평등”의 이름으로 가정에서의 권위를 찬탈하려는 여자들로 인해(이들이 원하는 것은 가정을 통제하는 것이다) 몹시 불안정하다.
③ 성령으로 충만해진 성도는 곳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집을 방문하고, 공장에서, 가게에서, 호텔로비에서, 식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님은 스스로를 말하기 위해 오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성령님은 오셔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성령으로 충만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하게 증거하는 그리스도인은 결코 교회연합운동이나 “사랑” 혹은 성령을 증거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못 박히심, 죽으심, 장사되심, 부활하심을 증거한다. 교회연합, 사랑, 경험을 나누는 것 등만을 말하는 사람은 불결한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이들은 오늘날 성령님께서 증거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장사, 부활의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지성을 밝혀 주시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시며 우리의 양심을 정결케 하시고 우리가 순종할 때까지 의지를 격려하신다.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 계속해서 순종하도록 지켜 주신다.
7) 고전 12:10,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들을 말함을, 어떤 사람
에게는 방언들을 통역함을 주시느니라.』
(1) 『또 어떤 사람에게는 기적들을 행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예언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영들을 분별함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들을 말함을,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을 통역함을 주시느니라』(10절).
『기적들』은 말할 것도 없이 이스라엘을 위한 표적으로만 주어졌다. 기적들은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믿게 하려는 방편으로 주어진 표적이었다. 그러나 『예언』은 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예언은 교회에 주어진 은사이다. 예언은 성경 그 어디를 보아도 표적으로 주어진 은사가 아니었다. 신약성경이 완성되기 전의 사도행전까지는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고 말씀하셨음을 사도들이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러나 신약성경이 완성된 다음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예언의 영』(계 19:10)이라고 선포되었다. 이 말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각기 어떤 유형의 예언의 은사를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시는 성령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인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사람에 비하여 훨씬 더 많은 예언의 은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성경 말씀에 대한 지식이 훨씬 더 풍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들에 비추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그만큼 더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클라렌스 라킨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예언의 은사를 갖고 있었던 사람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만은 아주 틀림없는 사실이다. 클리브렌드, 림지, 디한, 테오도르 엡, 밥 존스, 빌리 그래함, 찰리 풀러 같은 사람들은 분명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예언의 은사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던 것이다.
(2) 『영들을 분별함』 역시 성경 어디에서도 표적으로 주어진 적이 없다. 영들을 분별하는 능력은 지금도 교회에 주어지는 은사이다. 영들을 분별한다는 것은 어떤 영이 하나님의 영인가 아닌가를 구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성령인가 마귀인가를 분별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방언들을 말함을』(10절). 『방언』이란 무엇인가? 고린도전서 14:22을 보라.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라고 분명하고 정의를 내리고 있다! 그러니까 방언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위에서도 언급하였듯이 교회는 표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 표적을 보여 주시지 않으신다. 교회는 믿음으로 행하는 사람들이지 눈으로 보고 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다(고후 5:7). “방언”은 교리적으로 적용하면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이었고, 영적으로 적용하면 교회를 위한 외국어 능력을 말한다.
『어떤 사람에게는 방언들을 통역함을』(10절).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외국어를 통역할 줄 아는 영적인 은사를 갖고 있다. 이 때 『방언』이라 함은 물론 영적으로 적용된 외국어 능력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외국어를 할 줄 알고 통역할 줄 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특별한 목적에 쓰시기 위함이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다른 사람들보다 외국어에 능통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방언의 영적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다.
8) 고전 13:1,『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1) 『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내는
놋이나 시끄러운 꽹과리가 되고』(1절).
성경에서 “천사들의 방언”이란 곧 히브리어로 기록된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보라. 천사들이 바빌론의 멸망을 보고 기뻐서 하나님의 영광과 존귀와 권세를 찬양하면서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할렐루야”는 분명한 히브리어다. 『이 일들 후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많은 사람의 큰 음성이 있어 말하기를 “할렐루야, 구원과 영광과 존귀와 권세가 주 우리 하나님께 있도다』(계 19:1). 『또 그들이 다시 말하기를 “할렐루야.”라고 하니 그녀의 연기가 영원 무궁토록 올라가더라. 그때에 스물 네 장로와 네 짐승이 엎드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께 경배드리며 말하기를 “아멘, 할렐루야.”라고 하니』(계 19:3,4). 이처럼 하늘에 있는 사람들과 천사들은 히브리어로 말하고 있음을 본다. 출애굽기 9장을 보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히브리인의 주 하나님이 이같이 말하노라.』고 파라오에게 전하도록 명령하신다.
“히브리인의 주 하나님께서” 전하는 말씀이었으니 히브리어였음이 분명하지 않은가? 또 마태복음 22:31,32에 보면, 『그러나 죽은 자의 부활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말씀하시기를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하셨으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볼 수 있다. 이들 히브리인들의 하나님께서 히브리인들을 향하여 하늘에서 말씀하셨다면, 사용하신 언어가 히브리어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구약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 이러한 모든 사실들로 미루어 볼 때, 히브리어는 하늘의 언어가 아닐 수 없다. 이 지구 상에서 무엇인가를 최초로 기록한 언어는 히브리어였다.
(2) “사람들의 방언”이란 다른 언어, 즉 외국어들을 말한다(행 2:4).
① 방언의 은사란 외국어를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일시적으로 외국어를 말함으로써 성령의 역사하심을 “표적”으로 나타냈던 것을 의미한다(행 2:7,8).
“표적”으로서의 방언의 은사가 사도들에게 주어졌던 기적은 그 외국어를 알아듣는 사람들이 모여 있던 자리에서였다. 지금 이 시대에는 누가 외국어를 말할 줄 아는 능력이 있더라도 그것은 표적으로서의 은사가 아니며,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의 일을 수행하는 한 방편으로 주어진 은사이다. 그러나 자기가 외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해서 그것을 알아듣는 사람도 없는 자리에서 자기 나라말 대신 외국어로 말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짓이다. 따라서 누가 방언을 말하고자 할 때면, 그 외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때는 반드시 그 언어를 통역해 줄 사람이 옆에 있어야만 했다(고전 14:13,28 ).
②이처럼 방언은 은사주의자들이 주장하듯 아무 뜻도 없고 알아들을 수 없는 무의미한 “소리”를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외국어를 배운 적도 없는 사람이 어떤 외국어를 말한다는 것은 정말 깜짝 놀랄 만한 표적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도 이 구절 바로 앞의 고린도전서 12:31 에서는 『최상의 은사들을 열망하라.』고 명령하고 있고, 또 은사들을 그 중요성의 경중에 따라 순서대로 나열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2:28 에서는 방언이 맨 마지막에 손꼽히고 있음을 본다. 그러니까, 방언은 “최상의 은사”가 아님이 분명하다. 이처럼 방언은 결코 일류는커녕 이류도 못되는 삼류, 사류의 저급 은사이다.
③『내가 사람들과 천사들의 방언들로 말한다 해도』(1절).
바울은 결코 알아듣지도 못하는 방언을 함부로 말하지 않았다. 그는 그 따위 저급 은사를 열망하지도 않았고, 필요없이 아무데서나 말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 누구보다도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대단한 외국어 실력자였다. 『내가 너희 모두보다 더 많은 방언들을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4:18)고 그는 말한다. 외국어로 복음을 전파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리에서 그는 그 사람들이 알아듣도록 그 사람들의 언어로 복음을 전파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외국어를 자기는 많이 알고 있다고 해서 함부로 아무데서나 말하지도 않았지만, 설사 말한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뭐 그리 대수냐고 그는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소리내는 놋이나 시끄러운 꽹과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④ 13장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란 현대인들이 영어로 흔히 말하는 “러브”(love)가 아니라 “자애심, 자비심, 자선” 등의 뜻을 가진 “채리티”(charity)란 점에 주목하라. 성경에서 “사랑”(love)을 이야기 할 때는 “자애로우심, 자비로우심”(charity)이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거룩하시고 선하신 사랑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love)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한 것처럼 하나님의 사랑은 숭고한 사랑이요, 자비로우신 사랑이며, “주시는” 사랑이다. 그러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반영하는 인간의 사랑 또한 그처럼 숭고한 사랑이 되려면 “주는 것”이 내포된 사랑이어야 한다.
9) 고전 14:9, 『너희도 마찬가지라. 만일 너희가 방언으로 쉽게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한다면 무슨 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느냐? 이는 너희가 허공
에다 말하고 있는 것이라』(9절). 9절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없다.
10) 고전 14:22, 『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
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1) 『그러므로 방언들은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표적이지만 예언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믿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22절).
은사주의자들은 고린도전서 14장 전체에서 방언에 관하여 부정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4, 5, 6, 7, 8, 9, 10, 11, 13, 19, 21, 23, 26, 28, 34, 35, 39절 등 모든 구절들을 왜곡하고 이리저리 둘러대면서 방언의 정당성을 증명하면서도, 21절, 22절에 관해서는 아예 없는 구절들인 양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다. 두 인용 구절은 『율법』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백성』은 ‘유대인들’이지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다. 이 두 구절은 방언이 누구를 위한 것인지를 너무나도 분명하게 밝혀 주고 있고, 그것이 결코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님을 확실하게 못박고 있다.
(2) 『믿지 않는 사람들』 이란 유대인들을 말한다.
사도행전 10:44-47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있던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의 선물』(행 10:45)이 부어지는 것을 보고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도무지 믿지 않던 자들이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유대인들이 보는 앞에서 이방인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부어 주심으로써 표적을 보여 주신다. 그리고 나서야 유대인들은 『이 사람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행 10:47)라는 베드로의 말에 수긍한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표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지어 방언의 표적을 보고도 믿지 않을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그 모든 것으로도 내게 듣지 않을 것이라.』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사람들』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 곧 믿지 않는 유대인들을 위한 『표적』일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표적들은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다. 그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병 고치는 은사를 행하던 표적도 사도들과 함께 사라졌고, 방언이라는 표적도 얼마간 지속되다가 사도들의 시대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교회사 전체를 통틀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수행하던 위대한 사역자들이나 목사들, 또는 선교사들 쳐놓고 그 누구도 방언을 말하거나 방언에 대해 언급하거나 방언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말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오랄 로버츠나 삼바드나 캐서린 쿨만처럼 어떤 자들은 교회사를 고쳐 쓰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교회사에도 그런 이야기는 발견되지 않는다. 사도 시대 후기에도, 니케아 공회 이전 시대에도, 그 이후 시대에도, 암흑시대 동안에도, 종교개혁 시대에도, 대부흥 시대에도, 제2차 대부흥 시대에도, 그 이후 지금까지 신실한 사역자들 중 그 누구도 스스로 방언을 하거나 방언에 대해서 좋게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빌리 선데이도, 무디도, 토레이도 방언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성경 말씀을 잘 알고 있었고, 말씀에 순종했던 신실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에서 성령을 받기 위하여 기도원에서 합숙을 하면서 기도하는 그들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또 방언을 한다고 예배 시간에 수 십명의 집사, 장로들, 성도(?)들이 나와서 쉘라 쉘라하는데 그들도 모르는 말을 내 밷고, 통역자도 없으니 전혀 모르는 소리를 크게 웨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사실 이것은 마귀 짓인 것을 그들만은 모르고 있다!
11) 고전 14:39, 『그러므로 형제들아, 예언하기를 열망하고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
바울은 여기서 방언하기를 결코 열망하지 말라고 또 한 번 권면하고 있다.
그 대신 예언하기를 열망하라고 명령한다. 성경 말씀이 구원에 대해서, 미래에 대해서, 영원한 세상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를 배우고 그것을 세상에 알려 주기를 열망하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에는 일부 유대인 회원들이 섞여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표적이 필요한 사람들이었고 따라서 방언을 전면 금지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바울은 구태여 방언을 금하지는 말되, 정해진 규칙에 따라 적절히 하도록 놓아두라고 권면한다. 무엇을 하든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품위와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40절)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품위 있고 질서 있는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지 못하는 교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불경건한 것일지 한번 짐작해 보라.
3. 마치는 말
고리도전서 14:40 은『모든 일을 품위 있게 하고 또 질서 있게 하라.』고 명령하고 있는 것이다. 품위 있고 질서 있는 교회가 아니라면, 그것은 성경적인 교회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는 성경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혼란의 창시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지 못하는 교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런 곳에서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무질서하고 불경건한 것일지 한번 짐작해 보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본 장에서는 방언을 하더라도 그에 대한 엄격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꼭 알아 두어야 할 규칙은 27절, 28절, 34절에 명시되어 있거니와, 그 내용을 종합하면, “많아도 세 사람 이상은 하지 말 것, 질서 있게 할 것, 반드시 통역할 것, 그리고 여자는 하지 말 것” 등이다. 그리고 22절에서 방언들은 믿는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는 사실도 꼭 기억해 두어야 한다. 그리고 12장과 함께 14장에서는 최상의 은사가 예언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출처] < 방언 >은 최상의 은사인가?|작성자 셋째하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