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묵상: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마무리하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고백했다.
바울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무엇이었을까?
왜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자랑거리가 되었을까?
먼저 본문에 나오는 "자랑"라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과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찬양'한다는 의미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갈라디아서에 십자가라는 단어가 5번 나온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사용한 십자가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실 때,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음으로,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값이 치러졌다는 것이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실제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것처럼 우리의 죄값이 대신 지불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더 이상 받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바울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찬양한 첫 번째 이유였다.
2)
갈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 구절에서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너무나 확실한 것이기 때문에 누가 꾀어도 그 꾀임에 속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역사적 사실로 단순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록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직접 목격했다고 하더라도, 목격한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려 돌아가시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이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 너희를 꾀더라도
즉,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꾀더라도 그 꾀임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이다.
3)
갈 5: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바울은 선교하러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왜냐하면 조상 때부터 내려오던 할례를 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할례가 구원의 방편이 될 수 없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울은 할례를 행함으로 구원을 받으려고 한다면,
할례뿐만 아니라 구약의 모든 율법을 지켜야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모든 율법을 다 지킴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만약 바울이 예수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타협적인 복음을 전했다면,
바울은 박해를 심하게 받지는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십자가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십자가의 걸림돌"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문맥을 잘 보자.
본문은 만일 바울이 할례를 전했다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을 것이고 말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례는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전하면, 십자가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지 않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자신의 공로로 구원을 받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
"내가 이 정도 했으니 인정해 주시겠지..." 이런 마음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십자가는 인간의 공로를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인간의 무능함을 받아들이도록 한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십자가의 걸림돌은
인간이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생각이거나
최소한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데 어느 정도 보탬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말한다.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
4)
갈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리스도인들은 정욕과 탐심에 이끌려 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모든 정욕과 탐심을 내려놓도록 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 보좌의 영광을 버리시고 친히 인간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
그것도 자신의 죄가 아닌 우리의 죄를 위하여...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를 사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의 방향을 이끌어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5)
갈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3번과 비슷한 내용이다.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전한 자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 중에는 할례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결국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율법(할례)를 혼합해서 전했던 것이었다.
바울은 이에 대해서 분명히 말했다.
그들이 그러한 다른 복음을 전했던 이유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혼합 복음, 다른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할례가 섞인 복음,
이런 복음은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훼손하는 복음일 뿐이다.
그리고 바울은 이러한 복음에 대해서 갈라디아서 초두에서 분명히 선포했다.
갈 1:8,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는 어떠한가?
복음을 전하다가 상대방이 무서워 타협하는 복음을 전한 적은 없는가?
그리스도는 우리의 구원자이시자 주님이시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공로를 의지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순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주님이심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야 한다는 순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뿐 아니라, 다른 종교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거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따라 살아야 하지만, 때로는 우리 마음대로 살아도 주님께서 이해해 주실 거라는 타협적인 말을 하고 있지는 않는가?
이것은 다른 복음도 아니고 "내가 복음"이다.
"내가 말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말이다.
다른 복음, 내가 복음을 전하지 말자.
순수 복음,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전하자.
그러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알도록 힘쓰자.
주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더 깊이 알기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저희에게 진정한 자유를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저희의 모든 공로를 내려 놓고, 저희의 모든 의를 내려 놓고,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붙드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만을 따라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옵시고, 세상을 구원하는 그리스도의 순수한 복음이 저희를 통하여 나타나게 하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