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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려사도 흐른다. 75
ㅡ 고려 '원 간섭기' 시대 8 ㅡ
(희대의 강간왕 충혜왕)
(한국통사를 끝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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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초롱초롱 박철홍의 역사는 흐른다> '한국통사'를 끝내고 ㅡ
저는 집요하거나 끈질긴 성격이 아닙니다. 부지런하고 성실한 편도 아닙니다. 적당히 융통성 있고, 즐길 줄 알며, 때로는 조금 게으르기까지 합니다.
만약 제가 끈질기고 집요한 사람이었다면, 10년 넘게 지겨운 고시족 생활을 해온 저로서 ‘고시 3관왕’도 가능했을 겁니다
그런 제가 스스로도 놀랄 만큼 1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을 들여, 결국 한 가지 일을 해냈습니다.
오늘 연재한 <희대의 강간왕 충혜왕>편은 이미 출간 된바있는 <초롱초롱 박철홍, 조선 오백년도 흐른다>의 시작이자, 동시에 ‘초롱초롱 역사는 흐른다’ 시리즈 대장정을 마무리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즉, 오늘을 기점으로
<단군부터 6·25전쟁까지>
기나긴 한국사 전체 흐름을 나름 제 방식으로 정리해낸 것입니다.
그 여정은 이러했습니다.
처음 <조선사도 흐른다> 150여 편 부터 시작했습니다.
이후 쓰다보니,
<구한말도 흐른다> 120여 편, <일제강점기도 흐른다> 50여 편 <해방전후사도 흐른다> 70여 편
을 정리해 냈습니다.
이왕 시작 한 거 한국사 전체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고대사는 흐른다> 140여 편
<고려사도 흐른다> 80여 편
총 600여 편이 넘는 글이 오늘로써 마무리 된 것입니다.
이중 일부는 이미 <조선오백년도 흐른다> 상편과 <구한말도 흐른다> 중편으로 책으로 엮어 냈습니다.
다만, 두 권 모두 내 정치일정 출판기념회에 맞춰 급히 제작 하느라 여러 면에서 아쉬움이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젠가 꼭
<초롱초롱 박철홍의 한국사는 흐른다> 전집을 멋진 양장본으로 만들어 내고 싶습니다.
5~6권 분량, 각 500쪽 내외가 될 것 같습니다.
출판 시점은 아직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런 많은 분량의 책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제 자비로 출판해야겠지요.
그 비용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꼭 해내고 싶습니다.
제 자비로라도 아름다운 양장판 전집을 만들어, 제 곁 지인들께 한 질씩 드리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사실 요즘 저는 아침식사 때마다 제가 쓴 책 중 한 편씩 읽습니다.
읽을수록 새롭고, 다시 배우게 되는 것도 많습니다.
제가 썼지만 진짜 재미있고 배움도 있는 좋은 글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넘 자화자찬인가요. ㅎㅎ
근디 좀 어설픈 부분도 있겠지만 읽기쉽고 재미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세상에 역사책은 넘쳐납니다.
저의 글은 ‘전문 역사서’라고 말하기도 어렵습니다.
저는 역사 전공자도 아니고, 학문적으로 깊은 탐구를 한 사람도 아닙니다.
그저 내가 궁금한 것을 배우면서, 내 방식으로 정리해온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반인들 눈높이에 맞고,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책은 한 번 읽고 버릴 책이 아니라, 언제든 생각날 때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볼 수 있는 책입니다.
집집마다 한 질쯤 두고, 자자손손 자녀들에게도 물려줄 수 있는 책!
그게 제 희망입니다.
10년 넘게 이어온 이 여정이
오늘로 일단락된 것을 생각하니, 감회가 참 깊습니다.
전혀 나답지 않은 인내와 끈기로 이뤄낸 이 결실이 저 스스로도 신기하고 고맙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단 하나,
출판비용 마련입니다.
그 벽을 넘어서, <초롱초롱 박철홍의 한국사는 흐른다> 전집은 반드시 세상에 내 놓을 것입니다.
ㅡ 초롱박철홍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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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희대의 강간왕 고려충혜왕 ㅡ
고려 제28대 왕 '충혜왕'
(1315~1344)은 공민왕 친형 이자 충숙왕의 아들이다.
하지만 그에 대한 '고려사'의 기록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충격적이다.
폭군과 색마로 유명한 '연산군' 이나 로마황제 '네로'조차도 '고려사'에 따르면 충혜왕 앞 에서는 ‘새 발의 피’ 수준으로 보일 정도다.
기록 속 충혜왕은 말 그대로 <희대의 패륜군주>이다.
아버지 충숙왕 후궁들과 장인의 후처, 신하들과 내시의 아내들, 심지어는 길거리의 일반 부녀자 들까지 욕정이 이는 대로 강간 했고, 충숙왕 정실부인이자 몽골 출신 ‘경화공주’까지 팔다리를 묶고 능욕했다고 전해진다.
또 다른 부인 ‘수빈 권씨’는 충혜왕 강간 끝에 자살했다는 기록도 있다.
후궁은 100명이 넘었다고 하며, 내전에서는 난잡한 성적 유희와 음란한 파티가 반복되었다는 등의 내용도 '고려사'에 실려 있다.
이 진위는 후대의 역사학자들이 검토해야겠지만, 이처럼 극단적인 서술이 관찬 '고려사' 정사에 실렸다는 것만으로도 충혜왕의 평가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한편, 충혜왕은 드라마 <기황후> 에서 ‘왕유’라는 이름으로 등장 했으며, 배우 주진모가 그 역할을 맡았다.
드라마에서는 주유모가 정의롭고 매력적인 군주로 묘사되어 기황후와 애절한 사랑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방영 당시, 실존인물인 충혜왕과 괴리감 때문에 '역사 왜곡'이라는 비판이 적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고려사'는 충혜왕이 즉위 초기에는 개혁적인 정치를 시도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물자유통망을 장악해 실크로드를 통한 국제교역으로 부를 축적 했고, 화폐제도 및 행정조직 개편, 소금 전매를 담당하는 ‘염장도감’ 설치등 실용적인 정책도 시행 했다.
또한 요양, 심양등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 귀환을 추진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한 면모도 있다.
이처럼 충혜왕은 한편으로는 음란과 폭정의 상징으로, 또 한편으로는 초기 개혁군주로서 모순된 평가가 공존하는 특이한 왕이다.
그러나 결국 그의 치세는 파탄에 이르렀고, 그의 이름은 고려 왕조 말기의 몰락과 부패를 상징하는 존재로 남게 되었다.
나는 충혜왕의 변태적이고 색마적 행태나, 그가 남긴 치적 유무를 떠나, 그가 왕으로서 비참한 말로를 통해 당시 고려가 처한 현실, 나아가 우리 역사 깊은 슬픔 과 비극을 본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나라를 빼앗겼던 치욕의 역사를 가슴 깊이 새기며 끊임없이 되새기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고려가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던 100년간 ‘원 간섭기’에 대해서는 놀라울 만큼 무관심 하거나, 그 실체조차 잘 알지 못한다.
물론 원나라는 일제처럼 고려왕조 자체를 없애버리진 않았다. 대신 고려를 ‘부마국’으로 삼아, 자국 황실 공주들을 시집보냈고, 그 공주들은 고려에서 왕을 능가하는 권력을 휘둘렀다. 원 공주들은 자신 아들이 고려왕위에 오르면, 실질적으로 고려 정치를 좌지우지 하며 고려를 간접 통치했다.
원 간섭기 동안 고려에서 즉위한 왕은 총 7명(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이다. 이 중 충목왕과 충정왕은 어린 나이에 요절해 혼인하지 못했고, 나머지 5명 고려왕은 모두 몽골황실 출신 공주와 혼인했다.
이들 왕은 공주 앞에서 왕이 아니라 신하처럼 살아야 했다. 몽골공주 앞에서 고려 왕은 무력 했고, 심지어 고려 최초로 원 공주 와 혼인한 충렬왕은 쿠빌라이 칸 딸인 제국대장공주에게 지팡이로 맞고 살았다고 '고려사'는 전한다.
[충렬왕이 제국대장공주보다 먼저 자리에 들었다고 그녀가 욕을 하고 지팡이로 때렸다.]
— 고려사 제국대장공주 열전ㅡ
원나라는 고려 왕을 임명하고 폐위하는 것을 자기 권한처럼 여겼다. 고려 왕위는 하루아침에 바뀌었고, 공민왕 아버지인 충숙왕과 형 충혜왕은 원나라의 결정에 따라 왕위를 서로 주고받는 기행까지 겪어야 했다.
충숙왕: 1313, 1339
충혜왕: 1330, 1344
이는 충렬왕과 충선왕에 이어 두 번째 였다.
이처럼 원 간섭기 속에서 고려 왕권은 존엄을 잃었고, 고려는 사실상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한 나라였다. 왕이 아닌 꼭두각시로 전락한 고려 국왕의 모습에서, 한 시대의 비극과 민족사의 굴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중에서도 충혜왕 사건은, 그래도 한 나라의 군주였던 사람 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충격과 참담함을 안겨준다.
충혜왕은 몽골에서 시집 온 정비 (충숙왕의 왕비)까지 겁탈했을 정도로 방종하고 패륜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원나라는 결국 사신 6명을 고려로 파견한다.
원 사신들은 충혜왕에게 직접 출영(出迎, 나와서 맞이함)을 요구했으나, 충혜왕은 이를 거부하다 마지못해 '정동행성' 으로 나갔다.
하지만 정동행성에 수행원 몇 명만을 대동한 채 들어선 순간, 몽골사신들은 돌연 충혜왕에게 달려들어 발길질을 하고, 포박 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호위무장 두 명이 저항했으나, 사신들이 휘두른 칼에 그 자리 에서 살해당했다.
이를 지켜보던 고려신하들은 감히 맞서지도 못하고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충혜왕은 곧장 말에 실려 원나라 로 납치되었고, 대도(지금 북경)로 압송되었다.
원 황제는 충혜왕을 본래 이름인 ‘왕정(王禎, 드라마 '기황후' 에서 ‘왕유’로 묘사)’ 으로 부르며 아이 다루듯 조롱했고, 끝내 남중국의 먼 지방인 계양현(현 중국 광동성 조주 지역)으로 유배를 보냈다. 충혜왕은 유배도중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고려사'등 기록에 따르면, 고려 백성들은 충혜왕이 원나라에 끌려간 일을 두고 '환호했다'고 전한다.
충혜왕이 백성을 수탈하고 온갖 악행과 향락에만 빠져 살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악행이 많았다 해도, 한 나라 왕이 외국사신에게 대낮에 폭행당하고 납치되어 끌려 가는 장면을 환호하며 바라봤다는 기록은, 당시 고려 현실이 얼마나 피폐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과거 항몽전쟁에서 보여준 고려인들 불굴의 투지는 과연 진심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그것은 단지 ‘몽골의 지배에 저항하는 민족’이라는 역사적 프레임을 넘어서, 현실 속 에서 고려왕조가 얼마나 무너져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참담한 단면이다.
이 사건의 배후에는 기황후의 ‘사적감정’이 작용했다는 뒷 이야기도 전해진다. 충혜왕이 사소한 다툼 끝에 기황후 다섯째 오빠 '기윤' 집을 강제로 허물어 버리자, 이에 분노한 기황후가 직접 움직였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드라마 '기황후' 에서는 충혜왕과 기황후 사이를 애틋한 사랑으로 그려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 에서 충혜왕은 원 황실과 부원 세력 사이에서 고립된, 무능하고 패륜적인 군주에 불과했다.
당시 고려조정은 이미 부원세력 손아귀에 있었고, 왕권은 무기력 하게 허물어져 있었다. 충혜왕 납치사건은 단순한 한 왕 추락이 아니라, 고려 왕실과 국가체제가 원나라에 얼마나 철저히 종속되어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비극 이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세력이, 고려시대에는 부원세력이 득세 했던 우리 역사 속 비극은 시대 마다 반복되어온 권력의 왜곡된 단면이다.
이와 같은 역사적 맥락에서 보면, 충혜왕 일탈적 행위도 단순히
한 인간의 도덕적 타락으로만 볼 수는 없다.
고려시대 왕실 풍속과 권력구조는 오늘날 우리가 가진 상식이나 윤리관과는 상당히 달랐다. 충혜왕 행적을 지금 기준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시대 맥락을 무시하는 오류일 수도 있다.
실제로 고려후기 왕실풍속은 충혜왕뿐 아니라 고려초기 근친혼 이나 공민왕이나 충숙왕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가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종종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충혜왕만 유독 나쁘게 기록될 필요에 따라, 과장되거나 악의적으로 묘사된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이 든다.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만약 '고려사'에 기록된 내용들이 사실이라면, 충혜왕은 즉위 초기 에는 새로운 정치를 꿈꾸었지만, 곧 원나라 간섭과 부원세력 전횡 앞에 좌절하고 말았던 것이 아닐까 한다.
이에 충혜왕은 결국 국정을 포기 하고 방탕한 삶으로 스스로를 내던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충혜왕 몰락이, 조선건국 이후 고려 말 혼탁함을 부각 시키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더욱 왜곡되어 후대에 ‘희대의 강간 왕’으로 각인된 것은 아닌지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사관은 충혜왕을 이렇게 평가했다.
“좋은 머리와 무예를 엉뚱한 데만 썼다. 그래서 안으로는 부왕에게 꾸중을 듣고, 위로는 천자에게 죄를 지었으니, 객지에서 비참 하게 죽은 것도 자업자득이다.”
이 기록에서 보듯, 충혜왕은 분명 뛰어난 두뇌와 무예 실력을 갖춘 인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능력을 올바르게 쓰지 못하고 방황하다 결국 역사에 악인으로 남게 된, 시대를 잘못 타고난 비운의 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어서 공민왕 편이 계속됩니다.
ㅡ초롱박철홍 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