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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평(西安平)에 관한 사서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삼국지위서동이전 고구려전
궁(태조왕)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 순제(順帝, 재위 125 ~ 144)와 환제(桓帝, 재위 146 ~ 167) 사이에 다시 요동군을 침범하여 신안현과 거향현을 약탈했다. 또 서안평현을 공격하고 그 길에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붙잡아갔다.
宮死, 子伯固立. 順桓之間, 復犯遼東, 寇新安居鄕, 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樂浪太守妻子. [三國志魏書東夷傳 高句麗傳]
◇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전
수성이 죽고 아들 백고가 즉위했다. 질제(質帝, 재위 145 ~ 146)와 환제(桓帝, 재위 146~167) 사이에 요동군 서안평을 다시 침범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붙잡아 갔다.
遂成死,子伯固立。質、桓之間,復犯遼東西安平,殺帶方令,掠得樂浪太守妻子。 [後漢書 東夷列傳 高句麗傳]
◇ 삼국사기
태조왕 94년(146년) 가을 8월, 왕이 장수를 보내 한나라 요동군 서안평현을 습격하여 대방현령을 죽이고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붙잡아 갔다.
太祖王 九十四年 秋八月, 王遣將, 襲遼東西安平縣, 殺帶方令, 掠得樂浪大守 妻子.
동천왕 16년(242년) 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군 서안평을 습격하여 깨트렸다.
十六年 王遣將 襲破遼東西安平
미천왕 12년(311년) 가을 8월 장수를 보내 요동군 서안평을 습격하여 빼앗았다.
美川王 十二年, 秋八月, 遣將襲取遼東西安平.
구당서(舊唐書) 안사고열전에 의하면 정관(貞觀) 11년(637년)에 당태종(唐太宗)이 안사고(顔師古, 581~645)에게 한서(漢書) 주석서의 집필을 명했다. 한서주(漢書注)는 641년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안사고(顔師古)는 한서주(漢書注)에서 서안평의 위치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한서주(漢書注)
玄菟郡 西蓋馬縣 : 馬訾水 西北入鹽難水 西南至西安平入海 過郡二 行二千一百里
현도군 서개마현 : 마자수가 서북으로 흘러 염난수로 들어가고 서남으로 흘러 서안평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2개 군을 지나 2천1백리를 간다.
안사고의 주석으로는 마자수와 염난수가 어느 강인지 분명하지 않다. 당(唐)나라 재상 두우(杜佑)가 801년에 편찬한 통전(通典)은 마자수가 압록강(鴨綠江)이고 염난수는 동가강(佟佳江)임을 명확하게 기술하고 마자수 하구에 안평성(安平城)이 있다고 했다.
◇ 통전(通典)
馬訾水則移反一名鴨綠水 水源出東北靺鞨白山 水色似鴨頭 故俗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南 又西與一水合 即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 入海 高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清澈 所經津濟 皆貯大船 其國恃此以為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通典]
마자수는 일명 압록수이다. 수원(水源)은 동북 말갈의 백산(白山)에서 나오며 강물의 색깔이 오리 머리색을 닮았기에 세상에서 부르는 이름이다. 요동군에서 5백리 떨어져 있다. 국내성 남쪽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만나 두 강이 합하여 서남으로 흘러 안평성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간다. 고구려에서 이 강이 제일 크다. 물결이 이는데 푸르고 맑으며, 나루터마다 큰 배가 서 있다. 그 나라에서 이를 천연의 참호로 여긴다. 강의 너비가 3백보이고, 평양성 서북 450리에 있다. [통전]
북송(北宋)에서 1060년에 편찬한 신당서(新唐書)는 고구려의 하천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 신당서(新唐書)
高麗 , 水有大遼、少遼 , 大遼出靺鞨西南山,南曆安市城;少遼出遼山西,亦南流,有梁水出塞外,西行與之合。有馬訾水出靺鞨之白山,色若鴨頭,號鴨淥水,曆國內城西,與鹽難水合,又西南至安市,入於海。而平壤在鴨淥東南,以巨艫濟人,因恃以爲塹 [新唐書 高麗列傳]
대요수와 소요수가 있다. 대요수는 말갈 남산에서 나와 남쪽으로 안시성을 지나간다. 소요수는 요산의 서쪽에서 나와 역시 남쪽으로 흐른다. 양수가 국경 밖에서 나와 서쪽으로 흘러 (소요수와) 합친다. 마자수가 말갈의 백산에서 나오는데 오리 머리와 같은 색이라 압록수라 부르며 국내성을 지나 서쪽으로 흘러 염난수와 합치고 다시 서남으로 흘러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평양은 압록수 동남에 있기에 큰 배로 사람을 건네니 (압록수를) 참호로 삼는다. [신당서 고려열전]
신당서도 마자수는 압록강이고 염난수는 동가강이라고 했으나 마자수가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그런데 대요수가 안시성을 지나간다고 해서 어느 한쪽을 잘못 기술했다. 안사고는 한서주에서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다.
◇ 한서주(漢書注)
遼東郡 望平縣 :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요동군 망평현 : 대요수가 국경 밖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안시현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1,250 리다.
신당서가 마자수의 하구를 안시라고 한 것은 오기(誤記)다. 압록강의 하구를 안사고는 서안평이라 하고, 통전은 안평성이라고 했는데 현대 주류학계는 안사고를 따른다.
주류학계는 서안평이 압록강 하구라는 안사고의 주석에 근거하여 지금의 단동(丹東)이 서안평이며 고구려가 311년에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비로소 서해에 접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 ~ 248) 시대에 중국은 위(魏), 촉(蜀), 오(吳) 삼국이 서로 싸우고 있었다. 요동지역에는 공손씨(公孫氏)가 반독립적인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역사 교과서의 삼국 형세도
공손씨 세력권 - 주류설
228년에 공손연(公孫淵)이 요동의 군주가 되었다. 진수가 저술한 삼국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위서 명제기(魏書 明帝紀)
청룡 원년(233년) 12월, 공손연은 손권이 보낸 사신 장미와 허안의 머리를 베어 보냈다. 이에 공손연을 대사마 낙랑공으로 삼았다.
靑龍元年 十二月,公孫淵斬送孫權所遣使張彌、許晏首,以淵爲大司馬樂浪公。
◇ 오서 손권전(吳書 孫權傳)
가화(嘉禾) 원년(232년) 3월 장군 주하, 교위 배잠을 바다 건너 요동으로 파견했다. 가을 9월 위나라 장수 전예가 요격하여 성산에서 주하를 죽였다. 겨울 10월, 魏나라 요동태수 공손연(公孫淵)이 교위(校尉) 숙서(宿舒)와 낭중령(閬中令) 손종(孫宗)을 (吳나라 황제 손권에게) 보내 번(藩)이라 칭하고 아울러 모피와 준마를 바치니 손권은 매우 기뻐하고 공손연에게 작위를 주었다. 2년(233년) 봄 정월, 손권이 다음과 같이 조서를 내렸다. "지금 요동태수연왕(燕王 ; 공손연)은 오랫동안 魏나라의 핍박을 받고 멀리 한쪽에 떨어져 있어 비록 마음은 우리 나라에 있어도 그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다. 이제 천명에 따라 멀리서 사신 두 명을 보내왔다. 그가 올린 글에 충성스런 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 있다. 짐이 이것을 얻었으니, 어떤 기쁨이 이와 같으리오. (233년) 3월에 숙서와 손종을 돌려보내고, 태상 장미(張彌), 집금오 허안(許晏), 장군 하달(賀達) 등을 시켜 병사 1만 명을 인솔하고 금은보화와 구석(九錫)의 물품을 갖추어 배에 실어 공손연에게 주도록 하라." 승상 고옹 이하 오나라 조정의 대신들 모두가 공손연은 아직 믿을 만하지 못한데 총애와 대우가 지나치게 후하니, 관리와 병사 수백 명으로 숙서와 손종을 호송하는 것이 옳다고 간언했으나 손권은 끝내 듣지 않았다. 과연 공손연은 장미 등의 목을 베어 그들의 머리를 위나라로 보내고 병사와 물자를 몰수했다. 손권은 대노하여 직접 공손연을 정벌하려고 했으나 상서복야 설종(薛綜) 등이 간절히 간하여 그만두었다.
嘉禾元年 三月,遣將軍周賀、校尉裴潛乘海之遼東。秋九月,魏將田豫要擊,斬賀於成山。冬十月,魏遼東太守公孫淵遣校尉宿舒、閬中令孫綜稱藩於權,幷獻貂馬。權大悅,加淵爵位. 二年春正月,詔曰:今使持節督幽州領青州牧遼東太守燕王,久脅賊虜,隔在一方,雖乃心於國,其路靡緣。今因天命,遠遣二使,款誠顯露,章表殷勤,朕之得此,何喜如之 , 三月,遣舒綜還,使太常張彌、執金吾許晏、將軍賀達等將兵萬人,金寶珍貨,九錫備物,乘海授淵。舉朝大臣,自丞相雍已下皆諫,以為淵未可信,而寵待太厚,但可遣吏兵數百護送舒、綜,權終不聽。淵果斬彌等,送其首于魏,沒其兵資。權大怒,欲自征淵. 尚書僕射薛綜等切諫乃止
◇ 배송지(372 ~ 451)의 주석
당초 장미(張彌), 허안(許晏) 등과 함께 양평(공손연의 도읍)에 도착한 관속과 종자가 사백여 명에 달했다. 공손연(公孫淵)이 장미, 허안을 도모하고자 먼저 그들 무리를 요동군의 여러 현(縣)에 나누어 두고, 중간급 사신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및 관리와 병사 60명을 현도군(玄菟郡)에 두었다. 현도군은 요동군 북쪽에 있고 서로 2백리 떨어져 있다. (현도)태수 왕찬(王贊)은 2백 호(戶)와 또한 삼사백 명쯤을 거느리고 있었다. 진단(秦旦) 등은 민가에 머물며 먹고 마시는 것을 여기에 의존했다. 40여 일이 지나 진단이 황강 등과 더불어 의논하기를, “우리가 멀리 와서 국명(國命)을 욕되게 하고 이곳에 버려졌으니 이미 죽은 것과 어찌 다를 바 있겠소? 이제 이 군(郡)의 형세(形勢)를 보니 심히 미약하오. 만약 (우리가) 마음을 합해 어느 날 성곽을 불태우고 그 우두머리와 관리들을 죽여 나라를 위해 설욕한다면 그 연후에 비록 죽음을 당하더라도 족히 여한이 없을 것이오. 구차하게 살아남아 오래도록 죄수가 되는 것과 비교해 어떠하오?” 하니 황강 등이 이를 옳게 여겼다. 그리하여 몰래 서로 약속하여 8월 19일 밤에 거사하기로 하였다. 그날 낮에 부중(部中)의 장송(張松)이 이를 고하니 왕찬이 곧바로 사졸들을 모으고 성문을 닫았다. 진단(秦旦), 장군(張羣), 두덕(杜德), 황강(黃疆) 등은 모두 성을 넘어 달아났다. 당시 장군(張羣)의 무릎에 종기가 발병해 일행을 잘 뒤따르지 못하자 두덕(杜德)이 늘 그를 부축하여 함께 갔다. 험한 산골짜기로 육칠백리 길을 가 상처가 더욱 심해져서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풀숲에 누워 서로 지켜보며 비통해하며 흐느꼈다. 장군(張羣)이 말했다, “내가 불행히 상처가 심해 죽을 날이 멀지 않았소. 경들이 속히 길을 나아가면 도착할 곳이 있으리라 믿소. 헛되이 서로 지키다 깊은 골짜기에서 함께 죽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소?” 두덕(杜德)이 말하기를 “만 리를 떠돌며 생사를 함께 했으니 차마 내버릴 수 없소.” 그리고는 진단(秦旦), 황강(黃疆)을 떠밀어 앞서 가도록 하고는 두덕 자신은 홀로 남아 장군(張羣)을 지키며 과일과 나물을 따서 먹었다. 진단, 황강이 헤어진지 며칠만에 구려(句驪)에 도착해서, (손권이) 구려왕(句驪王) 궁(宮)과 그 나라의 주부(主簿)에게 내린 조령을 밝히고 사여품이 있었으나 요동의 공손연에게 빼앗겼다고 속여서 말했다. 궁(宮) 등이 크게 기뻐하며 곧바로 조령을 받들고 사람을 시켜 진단(秦旦) 등을 따라가서 장군(張羣), 두덕(杜德)을 맞아 오라 명했다. 그 해(234년)에 궁(宮)이 조의(皂衣) 25명을 보내 진단 등을 호송해 (오나라로) 돌려보내고 표문(表文)을 올리며 칭신(稱臣)하고 초피(貂皮,담비가죽) 천 매(枚), 할계피(鶡雞皮) 10구(具)를 바쳤다. (鶡雞皮, 할계 가죽. 산해경 곽박 주에 ‘할계는 꿩을 닮았고 몸집이 크고 푸른색이며 모각(毛角)이 있는데 적과 싸울 때는 죽어서야 멈춘다’ 고 했다). 진단 등이 손권을 만나자 슬프면서도 기뻐하며 스스로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했다. 손권이 이들을 의롭게 여겨 모두 교위(校尉)로 임명했다. 1년 뒤(235년) 사자(使者) 사굉(謝宏), 중서(中書)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보내 궁(宮)을 선우(單于)로 삼고 의물(衣物)과 진귀한 보물을 사여했다. 진순(陳恂) 등이 안평구(安平口)에 도착한 뒤 먼저 교위 진봉(陳奉)을 보내 궁(宮)을 만나게 했다. 그런데 궁(宮)이 위나라 유주자사(幽州刺史)의 풍지(諷旨, 애둘러서 넌지시 권하는 교지)를 받았는데 오나라 사자를 붙잡아 공을 세우라는 내용이었다. 진봉(陳奉)이 이를 듣고 (안평구로) 되돌아가자 궁(宮)이 주부(主簿) 착자(笮咨), 대고(帶固) 등을 보내 안평(安平)으로 나가게 하여 사굉(謝宏)과 서로 만났다. 사굉이 곧바로 이들 30여 명을 묶어서 볼모로 삼았다. 그러자 궁(宮)이 사죄하고 말(馬) 수백 필을 바치니, 사굉이 착자, 대고를 풀어주고 조서와 사여품을 지니고 가서 궁(宮)에게 전하게 했다. 이때 사굉의 배가 작아 말 수백 필을 다 싣지 못하고 80 필만 싣고 돌아왔다.
初, 張彌,許晏等俱到襄平,官屬從者四百許人。淵欲圖彌,晏,先分其人眾,置遼東諸縣,以中便秦旦,張群,杜德,黄疆,等及吏兵六十人,置玄菟郡。玄莬郡在遼東北,相去二百里,太守王贊領户二百,兼重可三四百人。旦等皆舍於民家,仰其飲食。積四十許日,旦與疆等議曰. 「吾人遠辱國命,自棄於此,與死亡何異?今觀此郡,形勢甚弱。若一旦同心,焚燒城郭,殺其長吏,為國報恥,然么後伏死,足以無恨。孰與偷生苟活長為囚虜乎?」疆等然之。於是陰相約結,當用八月十九日夜發。其日中時,為部中张松所告,贊便會七眾閉城門。旦,群,德,疆等皆踰城得走。時群病疸創著膝,不及輩旅,德常扶接與俱,崎嶇山谷。行六七百里,創益困,不復能前,臥草中,相守悲泣。群曰。「吾不幸創甚,死亡無日,卿諸人宜速進道,冀有所達。空相守,俱死於窮谷之中,何益也?」 德曰: 「萬里流離,死生共之,不忍相委。」於是推旦,疆使前,德獨留守群,捕菜果食之。旦,疆别數日,得達句驪王官,因宣詔於句驪王宮及其主簿,詔言有賜為遼東所攻奪。宮等大喜,即受詔,命便人隨旦還迎群,德。其年,宮遣皂衣二十五人送旦等還,奉表稱臣,貢貂皮千板,鶡雞皮十具。旦等見權,悲喜不能自勝。權義之,皆拜校尉。閒一年,遣使者謝宏,中書陳恂拜宮為單于,加賜衣物珍賓。恂等到安平口,先遣校尉陳奉前見宫,而宮受魏幽州刺史諷旨,令以吳使自效。奉聞之,倒還。宮遣主簿笮咨,以市固等出安平,舆宏相見。宏即縛得三十餘人質之,宮於是謝罪,上馬數百匹。宏乃遣咨,固三年詔書賜物與宫。是時宏船小,載馬八十匹而還 〔三國志吳書孫權傳〕
궁(宮)은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248)이다.
◇삼국사기 동천왕본기
東川王 十年, 春二月, 吳王孫權, 遣使者胡衛通和. 王留其使, 至秋七月, 斬之, 傳首於魏[三國史記 高句麗本紀]
동천왕 10년(236년) 봄 2월 오왕 손권은 고구려에 사신 호위(胡衛)를 보내 화친을 청했다. 동천왕은 사신을 잡아두었다가 7월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위(魏)나라에 보냈다.
동천왕이 오나라를 버리고 위나라와 화친을 도모한 것은 단지 오나라 사신의 무례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천왕은 공손연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오나라보다 위나라와 협력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고구려 사절단이 234년에 오(吳)나라 수도 건업(남경)까지 해상으로 왕래했고 235년과 236년에 오(吳)나라 사절단이 안평에 도착하여 고구려를 방문했다. 안평의 위치는 압록강 하구이고 234년에 이미 고구려의 영토였다. 주류학계는 이같은 기록을 외면하고 압록강 하구는 안평이 아니라 서안평이며 미천왕이 311년에 서안평을 점령함으로써 고구려가 비로소 바다에 접했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은 너무나 명백한 거짓이라 1978년도 고등학교 국정교과서는 궁여지책으로 아래와 같은 형세도를 수록했다.
1978년도 국정교과서
국정교과서에서 고구려가 요동군과 낙랑군 사이의 비좁은 틈새로 간신히 바다에 접한 모습이 참으로 옹색하고 구차스럽다. 더구나 압록강 하구를 여전히 서안평으로 표시했는데 삼국사기는 고구려가 242년에 서안평을 습격하여 깨트렸다고 기록했다. 고구려가 자국 영토를 공격했다는 말인가? 서안평의 위치는 압록강 하구가 아니다. 국정교과서가 폐지된 후에는 이마저도 사라지고 압록강 하구는 다시 중국 영토에 포함되었다. 그러나 삼국지 오서손권전(吳書 孫權傳)에 의하면 고구려는 234년에 이미 압록강 하구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 ~ 248) 시대의 형세는 아래와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 삼국지위서 공손연열전(三國志魏書 公孫淵列傳)
景初元年 乃遣幽州刺史毌丘儉等齎璽書徵淵。淵遂發兵逆, 於遼隧,與儉等戰。儉等不利而還。淵遂自立為燕王,置百官有司……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壬午,淵眾潰,與其子脩將數百騎突圍東南走,大兵急擊之,當流星所墜處,斬淵父子。城破,斬相國以下首級以千數,傳淵首洛陽,遼東帶方樂浪玄菟悉平
위(魏)나라 경초(景初) 원년(237년) 유주자사 관구검을 보내 황제의 새서(璽書:옥새 찍힌 문서)로 공손연을 불렀다. 공손연은 군사를 동원하여 반역했고 요수(遼隧)에서 관구검과 싸웠다. 관구검 등이 불리해서 돌아왔다. 공손연은 자립해서 연왕(燕王)이 되어 百官과 有司를 설치했다. 2년(238) 봄 태위 사마선왕을 보내 공손연을 정벌하게 했다. 6월에 군이 요동에 이르자 공손연이 장군 비연(卑衍), 양조(楊祚)등에게 보병과 기병 수 만 명을 주어 요수(遼隧)에 주둔시키고 이십여 리에 참호를 둘러쌌다. 사마선왕의 군사가 도착하자 공손연이 비연에게 역습해서 싸우라고 명했다. 사마선왕은 장군 호준(胡遵)등을 보내 격파했다. 선왕은 포위망을 파라고 명령하고 군사를 이끌고 동남쪽을 향해 가다가 급히 동북쪽 양평(襄平)으로 갔다. 비연 등은 양평에 수비가 없는 것이 두려워서 밤에 도주했다.
군이 전진하여 수산(首山)에 이르자 공손연은 비연 등을 다시 보내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게 했지만 다시 공격해서 대파했다. 마침내 군사가 성에 진격하여 참호로 둘러쌌다. 때마침 큰비가 삼십여 일 내렸다. 요수(遼水)의 물이 엄청나게 늘어나서 선박으로 요수 입구로부터 성 아래에 이를 수 있었다. 비가 그쳐 토산(土山)을 세우고 망루를 수리하여 화살과 돌을 성안으로 연달아 발사하자 공손연이 궁박하고 급해졌다. 식량이 떨어져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어서 죽은 자가 무척 많았다. 장군 양조 등이 투항했다.
8월 병인일 밤에 길이가 수십 장되는 큰 유성이 수산 동북에서 양평성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임오일에 공손연 무리가 궤멸하자 그 아들 공손수와 함께 수백 기가 포위망을 뚫고 동남쪽으로 도주했다. 대군이 급하게 추격해서 유성이 떨어진 곳에서 공손연 부자의 목을 베었다. 성을 깨트리고 상국(相國)이하 천여 명의 목을 베었다. 공손연의 머리를 낙양으로 보내고 요동군, 대방군, 낙랑군, 현도군을 모두 평정했다.
◇ 삼국지위서동이전 고구려전
景初二年,太尉司馬王率衆討公孫淵,宮遣主簿大加將數千人助軍
경초 2년(238)에 태위(太尉) 사마왕(司馬王)이 무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했다. 궁(宮)은 주부 대가와 군사 수천 명을 보내 도왔다.
◇ 진서 선제기(晉書 宣帝紀)
景初二年, 帥牛金、胡遵等步騎四萬, 發自京都.
遂進師, 經孤竹, 越碣石, 次于遼水.
文懿攻南圍突出,帝縱兵擊敗之,斬于梁水之上星墜之所。既入城,立兩標以別新舊焉。男子年十五已上七千餘人皆殺之,以為京觀。偽公卿已下皆伏誅,戮其將軍畢盛等二千餘人
경초 2년(238년), 우금, 호준 등과 보병과 기병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 : 낙양)를 출발했다.
마침내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거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공손연이 포위망의 남쪽을 공격하여 돌파하고 탈출하자 선제는 병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격파하고 유성이 떨어진 곳 양수(梁水)에서 공손연을 참수했다. 양평성에 입성해서 두 개의 표지를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나누고 15세 이상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여 큰 무덤을 만들었다. 공경 이하 관리를 모두 죽이고 장군 필성 등 2천여 명을 죽였다.
선제, 사마선왕, 사마왕은 사마의(司馬懿)이고 궁(宮)은 고구려 동천왕이다. 안사고의 한서주에 따르면 양평은 오늘날의 요양이고 양수(梁水)는 지금의 태자하(太子河)다. 이 당시 고구려는 압록강 하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마의가 고구려 영토를 지나 낙랑군과 대방군을 평정했다는 것인가? 이건 말이 안 된다. 동천왕(東川王, 재위 227 ~ 248) 시대의 형세는 아래와 같이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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