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계룡 모원재와 김국광 사당
모원재는 충청남도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에 있는 조선시대 문신 김국광의 재실입니다. 김국광은 세조 때 좌의정을 역임했던 인물로, 경국대전 편찬에도 참여했습니다. 모원재는 1623년(인조 원년)에 지어졌으며, 앞면 4칸 옆면 3칸 규모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김국광 사당은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고정리에 있는 김국광을 모신 사당입니다. 1483년(성종 13년)에 건립된 후 여러 차례 보수되었으며, 현재는 논산시 향토유적 제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당 안에는 김국광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음력 10월과 12월에 후손들이 제사를 지냅니다.
김국광은 1415년에 태어나 1480년에 사망했습니다. 세종 20년(1438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성균관 유생이 되었고, 1441년(세종 23년) 식년문과에 급제한 후 삼사의 요직을 거쳤습니다. 1455년 교리로 재직 중 세조의 즉위를 지지하여 탄탄한 길을 올랐으며, 함경도에 여진족이 침투하자 함경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적군을 회유하여 되돌려보냈습니다.
1467년 5월 이시애의 난 진압에도 참여했습니다. 세조 사후에는 신숙주, 한명회 등과 함께 서정을 처리하였고, 예종 사후 원상의 한 사람으로 의경세자의 차남이었던 자을산군 이혈의 즉위를 지지했습니다. 1470년(성종 1년) 보국숭록대부로 승진했다가 다시 대광보국숭록대부 우의정으로 승진, 성종의 책봉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좌의정을 지냈습니다.
1471년(성종 2년) 좌리공신 1등이 되고 광산부원군으로 진봉되었습니다. 1477년 영중추부사를 거쳐 이듬해 우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의 동생과 사위의 부정부패 사건으로 탄핵을 받고 사직했습니다.
김국광은 문장력으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으며 세조의 명으로 한계희, 신숙주, 최항, 노사신 등과 아울러 경국대전 편찬과 국조보감 증보 등에 참여했습니다.
모원재와 김국광 사당은 조선시대 문신 김국광의 업적을 기리는 중요한 문화유산입니다. 김국광의 뛰어난 정치적 재능과 탁월한 학문적 성취를 엿볼 수 있는 곳이며, 조선시대 초기 정치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