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 표지석 하면 지리산 천왕봉입니다.
메달이나 페넌트 등 등산기념품에 표지석만 넣어도 어디인지 알 수 있는 산이 바로 지리산입니다.
어쩌면 유일무이한 산이라고 해도 해도 될 듯 싶은데요.
그렇다면 지리산 천왕봉 최초의 표지석은 언제 세워졌고, 누가 했을까요?
지리산 최초로 제대로 된 이정표를 세운 때는 역시 언제였고, 누가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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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천왕봉 표지석 변천사' 표지석으로 검색하면, 60년대로 추정되는 사진 몇장이 있습니다.
그 출발은 촬영 년도가 확실한 '지리산 최초의 산악회'인 구례군 '연하반' 부터입니다.
등산잡지 마운틴지는 이 사진을 두고서 아래와 같이 적고 있습니다.
사진은 1965년 연하반 지리산종주등반대가 천왕봉에 올랐던 모습이다.
당시 이정표 90개를 설치하였으며, 천왕봉 정상에 도착해 주변까지 청소했다.
그때 그들의 정상등정사진 뒤에 사각의 나무 푯대가 보입니다.
한자로 천왕봉(天王峯)으로 적혀 있는데, 과연 연하반이 세웠을까요?
자그마치 이정표 90개를 설치하였다고 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일까요?
아닙니다.
엊그제 나온 '구례소식'의 연하반 특집에 보면 그들이 세운 이정표는 아래와 같은 형태입니다.
사진설명: 1962년 연하반 회원들이 지리산 곳곳에 붙일 산행 이정표를 폐타이어로 써 놓았다.
*클릭하면 확대됩니다.
그들의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이 설명은 연도에 오기가 있어 1962년이 아니라 1965년입니다.
마운틴지에서 1965년이라고 했거니와,
노고단에서 시작, 동진을 계속해서 이정표세우기라는 대역사의 마침표를 찍을
천왕봉 폐타이어에는 1965년이라는 글자가 세겨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연하반의 사진 뒤에 있는 표지판은 그 이전부터 있었고요.
게다가 하나가 아닌걸로 추측됩니다.
같은 사진에서 '천왕봉' 뒤에 끄트머리만 보이는 것 역시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로 보여집니다.
천왕봉이라고 적혀 있는 정상표지판은 누가 세웠을까요?
그렇다면 정상 푯대는 하나가 아니었을까요?
이를 조금이라도 설명할 수 있는 두장의 사진이 있습니다.
한겨울 잔설이 있고, 아이젠과 두터운 옷을 입고 언 땅을 파고 있군요.
도대체 어떤 영문이 있어 시내도 아니고 1915m 높이의 꽁꽁 언 산정을 파내고 있을까요?
표정이 '돈받고 억지로^^'하고 있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푯대에는 '남, 천왕봉, 경상남도'가 씌여져 있습니다.
경상남도가 적혀 있는 것만 보아도 전라남도 구례군의 '연하반' 산악회 작품이 아님이 드러납니다.
위의 폐타이어를 보면 아다시피 연하반은 지역명은 고려하고 않고 있습니다.
얼핏보면 이 사진은 푯대를 처음 세우는 걸로 착각하기 쉽상이지만, 이전 작업중입니다.
2)번을 보면 아시겠지만, 푯대 밑부분은 이미 땅속에 박혀 있는 듯 흙이 잔뜩 묻어 있습니다.
3)번의 옷차림새를 유심히 보시면...
1) 이 작업하고 있는 이랑 동일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3)지금 사용하는 장비가 작고 정교한 뾰족한 망치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곳에 있던 표지판을 파내서 옮기고 있는 걸 알수 있습니다.
한글 천왕봉 옆쪽에는 영어로 MT가 적혀 있군요.
2번을 보면) 일제식 표지판 맨 밑줄에 '경상남도'라고 적혀 있습니다.
아마 그 밑에는 세운 연도가 적혀 있겠지요....보이지 않아 ㅜㅜ
이제 푯대와 푯말을 누가 세웠는지 확연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65년 이전에 세웠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1953년 한국과의 분쟁에 대비해 경찰을 대동하고 일본이 독도에 새운 푯대와 푯말입니다.
둘을 함께 세우는 예를 일본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천왕봉도 이와 유사하다고 보겠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정상표지판은 경상남도(도청 또는 도청이 후원한 단체)에서 만들어 세운겁니다.
누구일까요?
1956년 8월 한국산악회 경남지부가 지리산 종주등반을 합니다. 이때 후원이 쟁쟁합니다.
이때 사단법인체인 경남문화업협회가 전적으로 후원했으며, 그 외에도 경상남도, 군기사, 부산일보사, 국제신보사, KBS부산방송국, 동명목제상사 등의 기관에서 적극적으로 후원해 부산 산악인들은 물론 시민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얻었다고 합니다.
시조시인 이영도는 이때 함께 하면서 사진과 함께 글을 남깁니다.
지리산 천왕봉에서...
당시 등산기와 등산 사진 을 더 보시려면....
이영도의 산행기와 위의 사진에서는 '표지판에 대한 이야기가 없습니다.
그때 세워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니라면 그 이전 또는 그 이후 후속작업으로 경상남도청이 후원, 작업 가능성도 없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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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산악회원 11명은 1958년 7월 25일~8월 4일까지 하계 지리산 종주를 합니다.
서울공대산악회 OB인 서립규는 그때의 산행기를 남기고 있는데,
1956년 1월 공과대학 산악부가 동계등반을 가진 후 계속 입산 통제를 받다가,
58년 여름에야 우리 팀이 처음 지리산을 밟는 행운을 얻었고, 내내 경찰의 호위를 받았다
라고 적고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지리산을 찾으려면 관공서의 협조가 필수적이었나 봅니다.
협조라는 뜻이지 등반의 강제조항은 아니었습니다.
서울대치대산악회 OB 이병태는 방황하던 고등학교 시절인 1958년 지리산을 찾습니다.
천왕봉에서 바로 위의 서울대산악회원들을 만나고, 서울대를 목표로 하고 공부에 매진했다죠.
아래는 그 중 천왕봉에서의 이야기입니다.
이 문장 중 몇문장에 집중해 봅니다.
몇개의 케른이 보인다.
우리도 등정을 기념하는 케른을 쌓았다.
금년 들어서는 마산 산악회가 지나간 것과 며칠 전 3명이 왔다간 흔적이 보인다.
우리 공대 6명은 1956년 1월 공대 동계등반대가 세운 케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그러니까 설악산과 마찬가지로 최소한 1950년대에는 지리산도 케른을 쌓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케른 중 연대가 확실한 것은 1956년 1월 서울공대 팀입니다.
"금년 들어서는 마산 산악회가 지나간 것과 며칠 전 3명이 왔다간 흔적이 보인다.'라는 문장은
지금 이 천왕봉 기록에서 누가 다녀갔는지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요?
자기가 쌓은 케른에나, 남의 푯대에 무언가 표식을 해 놓았을 겁니다.
아마도 대규모 팀이나, '경상남도'를 새겨 넣을 팀은
1953년 독도에서와 같이 푯대에 정보를 담아 세웠을 거로 보입니다.
1956년 서울공대팀이 케른을 쌓았다면,
같은 시기 경상남도급 팀이 표지판을 세울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지금 이 사진처럼 케른은 물론이거니와 푯대도 하나가 아닌 적도 있었습니다.
그럴 급의 원정대는 세웠겠죠.
조금만 더 선명했으면 얼마나 좋으랴마는..
지금 이 사진은 흐릿해서 어떤 팀이 언제 세웠는지는 불명확합니다만, 1965년 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뒷쪽에 '남 경상남도 천왕봉'의 위치가 보이는걸 보면 말이죠.
어랏... 둘사이의 위치와 고저를 염두에 두면 이제 하나더 매칭이 되는 게 있습니다.
애초에 1965년 연하반의 사진 뒤에 있는 푯대가 이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로 만든 표지판에 대한 기록은 곧 발굴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빨치산이 활동하던 1956년 이전으로는 올라가지 않겠죠.....
70년대 이후의 대략은 이렇습니다.
엊그제 나영석pd가 '알쓸신잡'프로그램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 류의 프로그램은 질색이라 그의 작품을 한번도 제대로 본적 없어 왜 나영석하는지 모르지만,
이 프로그램의 출연진을 보자 마음에 들더군요.
알쓸신잡은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의 준말이라는데,
지리산에 관한 이 글은 '알쓸아잡'이라고 해야 할까요.
'알아두어도 쓸데없는 아무렇지도 않은 잡설'..
So What ?^^
덧붙여1)
작금의 천왕봉에는 흙한톨 없습니다.
그 이유는....
대체로 이렇게 설명합니다만...
1차적인 계기는 케른이라고 보아야겠죠.
위에서 서립규의 회고에도 그렇듯이 수없이 많은 케른이 정상에 있었습니다.
케른을 쌓는다고 돌을 들어내면 그부분의 흙은 유실되고, 이게 악순환을 일으키게 되죠..
이런 케른은 1967년에도 있었습니다.
서울치대산악회 OB 이병태는 1967년 11월 제1회 서울대산악회 연합등반때 천왕봉을 찾습니다.
나는 그해 여름 등반 때 정상 케른 옆에다 묻어놓고 갔던 물건을 찾기 시작했다.
.....빨간 1원짜리 지폐 한장을 조그만 병에다 넣어 깊숙히 묻어 두었던 것이다.
많은 대원들이 보는 가운데 열심히 돌무덤과 흙속을 파헤쳐 뒤지다가 드디어 그 병을 찾았다.
'깍두기로 통하는 나(1978)'에서
그때 이런 기록을 남깁니다.
그때까지도 흙은 상당히 많았나 봅니다.
흙이 없어졌다고 해서 그리 안타까워 할 일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2)
위의 푯대 이전작업하는 사진중에서...
아래쪽에 진고 하태ㅁ. ㅁ종철 로 보이는 유색 페인트와,
그 옆에 세로로 전주(全州) 박형ㅁ, 김두ㅁ 라는 흰색 글자가 새겨져 있군요.
어느것이 먼저 나중에 새겨진 걸까요?
내기를 하라면 검은색에 걸겠습니다.
장난도 뒤에 하는 놈이 더 크게 하는 법이고,
그리고 치기어릴 고등학생(진주고등학교)나이라, 좀더 화려한 색으로 글자를 새길 가능성이 높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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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반이 폐타이어(-> 자전거 바퀴 물받이)를 이용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식별도 쉽고 내구성 때문이겠죠.. 그들의 열정에 다시한번 경의를...
아래는 그 중 몇몇 재미있는 이정표를 소개합니다.
그들이 설치한 게 총 90개라면, 지금 보이는게 반정도 될 것 같습니다.
나머지 반은 뱀사골 쪽. 남원쪽, 산청쪽 등등이겠죠....
여러명이 작업을 했습니다.
한글로 적은 것. 한자로 적은 것.
왼쪽 가운데에는 연하봉. 천왕봉 구례연하반이 한자로 적혀 있군요....~~~
등산객들도 한글 일색인것보다 더 재미있어했을 것 같습니다...
주의 이길은 산내로 가는 길
노고단 쪽의 지명들 무네ㅁ. 코재.
토끼봉. 날나리봉이라는 이름이 저시절에도 .~
한번 지도를 보아야겠군요...
첫댓글 지리산 최초 표지석은 '마고할매' 아닐까...
지리산 최초로 Leave No Trace를 어긴 할매이군요^^
@모자이크-등산박물관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54161
@여름날 오랫만에 보는 할매입니다...
정상에 이게 계속 있었어도 좋았을 법 한데요...
1번째 사진과 10번째 사진이 같은 팀 즉 연하반팀이네요. 그건 그렇고 1번째 사진에 맨 위 흰 아놀락 입은 분 우측에 그들이 타이어로 만든 이정표가 있네요(첨부한 사진 붉은 원, 푸른 원은 흰옷입은 분의 허리춤 수건).
^^ 저는 1965년 연하반의 천왕봉 사진에서 폐타이어 흔적을 찾으려 노력했고,
지금 말씀하신 '붉은 원' 부분이 뭘까 한참동안 생각했지만 폐타이어인줄 몰랐습니다.
지금의 자료로서 'CSI 천왕봉'이 어느정도 완성된 것 같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