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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보응
말씀/잠언 12,13장
요절/잠언 13:21
잠언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 방법이 기차를 생각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기차에서 기관차가 중요하듯이 각 장의 첫 절을 잘 살피고 이해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말들은 기관차에 연결된 차량처럼 생각하고 이해하면 됩니다. 오늘도 그러합니다. 특히 오늘 말씀은 10-11장 말씀의 후속편이라고 할 정도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창조의 지혜를 받아들인 사람, 즉 믿는 자 중에 두 부류가 있는데,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훈계를 받아들이는 자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로 나뉩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이 하나님의 훈계와 징계 앞에서 어떤 태도를 보이면서 달라지는가? 또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는가?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장, 훈계를 좋아하는 자, 징계를 싫어하는 자(12:1-28)
1절을 읽겠습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지혜로운 아들과 미련한 아들이 훈계를 좋아하는 자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로 표현됩니다. 훈계는 책망이 담긴 교훈이나 가르침입니다. 이를 통해 잘못 된 것을 바로 잡아주는 것입니다. 징계는 책망이 좀 더 강한 것입니다. 훈계나 징계의 공통점은 둘 다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야단맞는 것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지적질 당하는 것 좋아하는 사람 있습니까? 누구도 이를 듣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나를 바로잡아주는 훈계나 징계가 필요할까요? 내 스스로 내 삶을 바로 잡을 수는 없을까요? 그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게 잘 안 됩니다. 야단맞지 않아도, 똑 바로 설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실제로는 그게 잘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죄악된 본성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바로잡아 주어야만 갈 길을 제대로 갈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스키를 10년 이상 탄 베테랑입니다. 그런데도 매년 스키 시즌이 되면 스키 전문 강사에게 레슨을 받는다고 합니다. 비시즌 스키를 안타다가, 시즌에 스키를 다시 타게 되면 반드시 자기도 모르게 나쁜 습관이 하나 둘 생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스키 전문 강사에게 스키 폼 교정을 받는다고 합니다. 스키 10년탄 베테랑도 매년 폼 교정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자도 신앙의 폼 교정을 항상 받아야 합니다. 이러려면 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좀 잘못되었구나. 내가 좀 어긋났네. 하면서 깨달아야 하는데, 이것을 우리가 잘 모릅니다. 이것을 잘 알려면 내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아침에 다들 거울을 보고 나오셨지요? 거울을 보면서 스스로 감동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거울을 보면서 뭔가 잘못된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거울과 같이 내가 잘하고 있는지? 잘못하고 있는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아니면 엉뚱한 길로 가고 있는지? 살길로 가고 있는지 망할 길로 가고 있는지? 체크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런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지혜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자신의 길을 제대로 가는 사람이 지혜로운 아들입니다. 그렇지 않은 아들은 미련한 아들입니다. 이 지혜를 좀 더 내 삶에 밀착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표현하면 훈계가 되고 징계가 됩니다. 때마다 나를 지적해서 바로 잡아주는 것입니다.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데 좋아할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듣기 싫어합니다. 부담스러워하고 짜증을 냅니다.
그런데 이 훈계를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좋아한다고 했습니다. 이 지식은 세상살이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올바로 사는 길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식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믿음으로 사는 것인지 아는 지식입니다. 내가 신자인데, 정말 신자의 삶이 무엇인지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은 구원의 지식이요, 영생의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있어야 우리는 제대로 믿음의 길을 갈 수 있고, 신자다운 신자로서 살 수 있고, 마침내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결국 말씀을 통해 훈계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마치 영적인 네비게이션을 장착하는 것입니다. 제대로 잘 갈 수 있습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를 징계로 여깁니다. 나를 때리고 훈련하고 나를 괴롭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이를 듣기 싫어합니다. 이를테면 이런 것입니다. “말씀에 대해서도 또 그 소리, 맨날 똑같은 말씀, 믿으라고 하고 순종하라고 하고 정말 듣기 싫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짐승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희 집에도 강아지 짐승이 한 마리 있습니다. 이 짐승은 착하고 성격도 좋습니다. 애교도 많습니다. 그래도 짐승이라 어쩔 수 없이 본능과 본성대로 삽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런 짐승처럼 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말씀듣기를 싫어해서 말씀을 통해 삶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본성대로 살게 되면 점차 짐승같이 되고 악인이 되어 갑니다.
2절부터 훈계를 좋아하는 자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의 기관차에 각각 연결된 기차들이 죽 연결되어 나옵니다.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선인은 훈계를 좋아하는 자입니다. 그는 여호와께 은총을 받아 풍성한 은혜를 누립니다. 그러나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악을 꾀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의 악은 하나님보다 자기 이익과 욕심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합니다. 3절에는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굳게 서지 못한다’는 것은 한때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운전하다가 자동차 핸들을 놔도 잠깐 동안은 똑바로 갑니다. 그러나 얼마가지 못해 차가 한쪽으로 쏠립니다. 그래서 핸들을 계속 잡고 바로 잡아 주어야 하듯이, 우리도 늘 말씀으로 내 삶의 핸들링을 하면서 방향을 수정해야 합니다. 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악을 꾀하는 사람입니다. 이 악은 다른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삶의 가치와 방향과 의미를 자기 멋대로 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악은 사회적, 법적인 악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악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들은 말씀이 자신의 삶을 간섭한다고 여기고 이를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이 하는 일이 잘되기를 도와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즉 핸들은 내가 쥐고 가고 있고, 하나님은 자동차엔진이 되어서 빵빵빵 잘 밀어주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가 주인이고 스타이고, 하나님은 단지 스폰서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잠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더 잘나가는 것 같고 더 편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제대로 서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합니다. 뿌리가 견고해서 어떤 가운데서도 흔들리지 않고 잘 자랍니다.
4절.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이는 결혼을 잘 해야 한다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여기서 ‘어진 여인, 욕을 끼치는 여인’은 말씀에 대한 태도요, 또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높이는 자가 누구인가를 말합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어진 여인이요, 이런 여인은 결국 영생의 면류관을 얻지만, 그렇지 않으면 뼈가 썩음같이 망합니다.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여기서의 핵심 단어는 ‘생각’입니다. 의인과 악인은 그 생각의 출발부터 다르다는 것입니다. 의인은 생각부터 정직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약함과 어려움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갑니다. 즉 그가 의로워서 의인이 아니라 솔직해서 의인입니다. 그러나 악인은 그 생각부터 거짓이고 위선되어 자신을 속입니다.
혹자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생각을 조심해, 생각이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 말이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 행동이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 습관이 인격이 된다. 인격을 조심해, 인격이 운명이 된다.” 그런데 이미 잠언에 이와 비슷한 말이 적혀 있네요. 생각이 거짓되고 위선적이니 말도 달라집니다. 6절.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자기를 속이고 높이면서 말씀을 듣지 않는 악인은 강도와 같습니다. 강도는 강도질을 하다 결국 자신도 죽을 수 있는 치명적인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반면에 말씀 앞에서 정직하게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인정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결국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지만, 의인의 집은 서 있게 됩니다(7). 사람은 그 지혜대로 칭찬을 받지만, 마음이 굽은 자는 멸시를 받습니다. 마음이 굳은자는 자기가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존감도 높고 똑바르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속이는 왜곡된 자아를 가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멸시를 당합니다. 이 둘이 결국 어떻게 될까요?
9절을 읽겠습니다. “비천히 여김을 받을지라도 종을 부리는 자는 스스로 높은 체하고도 음식이 핍절한 자보다 나으니라.” 저는 자립을 위해 원룸을 하게 되었고 건물을 2동이나 지었습니다. 하지만 은행금리가 높고 임대가 다 되지 않아, 맥도날드에서 알바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같이 알바하는 20대 고참 알바생이 저를 무시합니다. 저에게 맥도날드의 정신을 골수에 박히도록 가르쳐 주겠다며 잔소리를 합니다. 맥도날드 정신은 주문이 없어 일거리가 없어도 끊임없이 일거리를 찾아 일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한마디로 놀면 안 됩니다. 항상 일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겨우 21살 밖에 안 된 알바생이 저에게 이런 잔소리를 때마다 하니 어이가 없습니다. 제가 목자이고, 건물주가 아니고, 진짜 아무것도 없는 50대 아저씨였다면, 이런 어린 알바생의 말에 크게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원룸경영만 조금 풀리면 얼마든지 그만둘 생각이라, 크게 상처받지 않았습니다. 잠언의 표현이라면 잠시 무시를 받고 있지만 사실은 종을 부리는 자와 같은 사람입니다. 원룸계약할 때, 학생들이나 부모들은 저에게 만원, 2만원이라도 깎아달라고 애원합니다. 자신의 부족함과 죄인된 모습을 발견하고 탄식하는 사람을 세상은 무시할 수 있습니다. “재는 왜 항상 탄식만 하고 사냐?” 반면 스스로 높은 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당당히 보이고 좋아 보입니다. “나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나는 믿음이 있는 사람이야, 나 정도만 하라고 해!” 세상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공동체 안에서 당당함과 의로움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쪽은 늘 부족하고 겸손하고, 한쪽은 늘 당당함과 의로움속에 삽니다. 그런데 결과가 다릅니다. 비천이 여김을 받은 사람은 종을 부립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우는 사람은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게 됩니다. 이것은 얼마나 하나님 앞에 깨어진 심령으로 사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말합니다. 또 의인은 가축의 생명을 돌보지만 악인은 자비를 베푼다고 하여도 잔인합니다.
11절. “자기의 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거니와 방탕한 것을 따르는 자는 지혜가 없느니라.” 농부가 열매를 얻고자 자기 토지를 부지런히 경작하듯이 부지런히 말씀을 듣는 자는 영적으로 풍족한 수확을 얻습니다. 그러나 헛된 것을 즉 자기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은 지혜가 없습니다. 12절.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합니다. 별로 고생하지 않고 반짝 빛나는 이익을 얻고자 합니다. 그러나 반짝이는 것이 다 금은 아니듯이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의인은 뿌리가 있어 시간과 노력이 들지만 제대로 열매를 얻습니다. 이 삶의 열매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말입니다. 악인은 입술의 허물로 말미암아 그물에 걸립니다. 나는 살만해, 나는 잘하고 있어, 하는 자기 착각이 결국 그 사람을 죄에 빠지게 합니다. 그러나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말씀에 자신을 맞춰가는 의인은 환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입의 열매로 말미암아 복록에 족하며 그 손이 행하는 대로 자기가 받습니다(14).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말씀을 통해 권고를 듣습니다(15).
왜 이런 차이가 날까요? 16절.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이 분노는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피하는 것입니다. 이는 미련한 자라고 했습니다. 사실 잘못을 지적당하는 것은 다 힘듭니다. 슬기로운 자도 이것은 수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슬기로운 자는 이 수욕을 참고 말씀을 받아들입니다. 17절. “진리를 말하는 자는 의를 나타내어도 거짓 증인은 속이는 말을 하느니라.” 일상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신에 대한 인식에 따라 진실한 증인과 거짓된 증인으로 나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엄밀한 판단 기준에 비취어 볼 때, 자신이 죽을 죄인임을 고백한 자가 진실한 자요, 자기 의를 내세우는 자는 거짓된 자입니다. 나야 말로 천국 가는 것이 당연해! 나 정도만 믿고 살라고 해! 이런 사람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입니다. 결국 그 칼로 자신을 찌릅니다. 내가 나를 자랑하고 내세우는 말을 하면, 그 말이 두 귀로 들어옵니다. 두 배로 증폭되어 들어옵니다. 그래서 내 마음의 의로움이 두 배로 쌓입니다. 내 자랑을 하면 할수록 내 마음에 자랑의 마일리지가 쌓입니다. 그런데 의로움의 마일리지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결국 칼로 자신을 찌르는 것입니다. 그러니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거짓 혀는 잠시 동안만 있을 뿐입니다. 악을 꾀하는 자의 마음에는 속임이 있고, 화평을 의논하는 자에게는 희락이 있습니다. 의인에게는 심판의 재앙이 임하지 않지만 자신을 속이는 악인에게는 온갖 심판과 재앙이 따릅니다. 거짓입술은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진실하게 행하는 자는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인과 악인의 처지는 전혀 다릅니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사람을 다스리게 되어도 게으른 자는 부림을 받느니라.”(24)고 했습니다. 이것은 부지런하게 살아서 사람을 부리는 사장이 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구원과 심판이 부지런함과 게으름으로 좌우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그 삶의 자세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부지런하게 할까요? 25절을 읽겠습니다.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 선한 말은 그것을 즐겁게 하느니라.” 근심과 염려가 내게서 떠날 일이 있을까요? 안타깝게도 없습니다. 그런데 근심과 염려가 많으면 제대로 할 일을 못합니다. 중국에 기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늘이 무너지면 어떻게 하지? 하며 늘 근심하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 헛된 근심이라는 기우라는 단어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한 말’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이 근심 많은 세상에서 나를 올바로 살게 하고 즐겁게 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우리는 염려와 근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의인은 이웃의 인도자가 되지만 악인의 소행은 자신을 미혹합니다. 게으른 자는 잡을 것도 사냥하지 않지만 사람의 부귀는 부지런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사람 앞에 ‘존귀한’이 생략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에 부지런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사람이 되어 구원과 생명을 얻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을 고치는 사람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질을 내고 듣기 싫어하는 사람, 이 두 사람의 인생길이 전혀 달라지게 됩니다.
2장. 지혜로운 아들, 거만한 자(13:1-25)
1절을 읽겠습니다.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의 훈계를 들으나 거만한 자는 꾸지람을 즐겨 듣지 아니하느니라.” 이 말씀을 거실에 크게 써서 붙여놓고 애들을 야단칠 때마다 사용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지혜로운 아들, 거만한 자는 12:1절의 훈계를 좋아하는 자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와 같은 표현입니다. 여기서의 강조점도 말씀을 듣느냐 안 듣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이 들음에 따라서 입의 열매가 달라집니다. 2절. “사람은 입의 열매로 인하여 복록을 누리거니와 마음이 궤사한 자는 강포를 당하느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추수 때에 복이냐 파멸이냐로 나뉘게 됩니다. 그래서 입을 지키는 자는 자기의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옵니다. 이는 단지 말조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는 일명 빅-마우스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교훈이나 훈계를 전혀 따르지 않고 자기 기분대로, 자기 의로움을 함부로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멸망을 당합니다. 왜냐하면 말이 곧 마음의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4절. “게으른 자는 마음으로 원하여도 얻지 못하나 부지런한 자의 마음은 풍족함을 얻느니라.”
게으른 자는 주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생각하는데 게으른 자를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영적 일에 무관심하고 신경 안 쓰고 쉽고 단순하게 자기 일만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자나 게으른 자나 똑 같이 신자입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구원과 주님의 은혜를 바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다릅니다. 게으른 자의 결과는 그의 기대와 달리 멸망입니다. 반면 부지런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배우며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결국 멸망과 구원이 단지 마음이 원하는가에 달려있지 않고 말씀을 받아 순종하는 일에 게으른가 아니면 부지런한 가로 나눠집니다. 이를 ‘열처녀 비유’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열처녀 모두 신랑을 다 기다렸습니다. 나름대로 다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부지런한 처녀는 더 준비했습니다. 게으른 처녀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이 정도면 충분해, 이 정도면 나름 많이 했어! 하며 자기 의가 있었습니다.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5절. 의인은 거짓말하기를 싫어하지만, 악인은 염치도 없이 수치스러운 일을 합니다. 공의는 행실이 정직한 자를 보호하고 악은 죄인을 패망하게 합니다(6). 7절. “스스로 부한 체하여도 아무 것도 없는 자가 있고 스스로 가난한 체하여도 재물이 많은 자가 있느니라.” 스스로 부한 체 하는 사람은 자신은 나름대로 말씀도 많이 듣고 믿음의 수고도 많이 한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높이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실제로 아무것도 없는 영적인 가난뱅이입니다. 그러나 자신은 아무것도 한 일이 없고, 무익한 종으로 살았다고 하는 사람은 실제로 하나님의 은혜에 풍성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치명적이 결과의 차이를 가져옵니다. 8절. “사람의 재물이 자기 생명의 속전일 수 있으나 가난한 자는 협박을 받을 일이 없느니라.” 속전은 죄의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몸값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재물’은 내가 수고해서 이 속전을 마련했다고 여기는 의로움이 가득한 사람입니다. 즉 내가 구원받고,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는 것은 내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기 때문에 받은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가난한 사람은 자기 힘으로 전혀 이를 마련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은 별로 한 일도 없고 무익한 종으로 여기며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의지합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와 같은 차이를 보입니다. 그런데 누가 인정을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것처럼 자신은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다는 가난한 사람을 인정하십니다. 그는 협박, 즉 꾸지람을 들을 일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만을 의지하는 의인의 빛은 환하게 빛나고 자기를 자랑하는 악인의 등불은 꺼지게 됩니다.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10절. “교만에서는 다툼만 일어날 뿐이라 권면을 듣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또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줄어가고 손으로 모은 것은 늘어가느니라.” ‘망령되이 얻은 재물’은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은 재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의인으로 인정받는 것은 내가 어떤 노력을 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은혜로 얻는 재물이요 그것도 너무나 쉽게 얻은 막대한 재물입니다. 그런데 쉽게 얻었으니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고 적당히 살게 되면 점점 그 막대했던 은혜의 재물도 줄어가게 되고 나중에는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나 받은 은혜를 알고 은혜를 잘 지키게 되면 그 재물이 더 늘어갑니다. 은혜위에 은혜를 누립니다. 갈수록 풍성한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12절을 읽겠습니다. “소망이 더디 이루어지면 그것이 마음을 상하게 하거니와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은 곧 생명나무니라.” 이는 주님이 주신 은혜를 헛되이 하지 않고 나름대로 애를 쓰는데 잘 안됩니다. 나름대로 은혜를 붙잡고 살고자 했고, 믿음으로 살려고 애를 썼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해를 돌아보니 영적으로도 별로 성장한 것도 없는 것 같고, 자랑 할만한 특별한 열매가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상할 수 있습니다.우리가 그렇습니다. 잘하고자 하면 오히려 더 부족한 내 모습이 크게만 보입니다. 그러면 이게 과연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인지, 성령이 내 안에 계신다는데 이럴 수 있는지 탄식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사도바울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런 탄식 가운데서도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을 계속하게 되면 결국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마음이 상하지만, 그래도 그 마음을 지키는 사람은 소원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이 곧 생명나무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말씀을 멸시하는 자는 자기에게 패망을 이루고 계명을 두려워하는 자는 상을 받습니다.
지혜 있는 자의 교훈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합니다. 지혜로운 자와 동행하면 지혜를 얻고 미련한 자와 사귀면 해를 받습니다. 누구와 함께 하는 가에 따라 지혜를 얻기도 하고 해를 받기도 합니다. 왜 이런 결말이 올까요? 21절. “재앙은 죄인을 따르고 선한 보응은 의인에게 이르니니라.” 말씀을 듣기보다 자기 마음대로 사는 것을 좋아하는 죄인은 재앙을 당합니다. 재앙을 당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나도 재앙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자 하고 지혜로운 자를 따르면 그에 합당한 보응을 얻습니다. 은혜에서 풍성해지고 기쁨을 얻습니다. 또한 그 산업이 자손에게 끼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삶이 이삭과 야곱과 요셉으로 이어지면서 큰 믿음의 떼를 이루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믿음으로 살게 되면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열매가 내 자손들에게 영향력을 끼치게 됩니다. 가난한 자는 밭을 경작함으로 양식이 많아지는 것처럼 그 풍성한 은혜가 쌓이게 됩니다. 그러나 불의로 말미암아 가산을 탕진하는 자도 있습니다. 여기서 가난한 자는 주님의 은혜 앞에 겸손한 자입니다. 말씀을 통해 훈계를 듣고 돌이키는 자입니다. 불의한 자는 징계를 싫어하고 은혜를 당연히 여기고 사는 자입니다. 이런 자는 받은 은혜마저도 다 날려버립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겸손하게 은혜를 붙잡고 살도록 때마다 말씀으로 권면하십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를 말씀으로 징계하실까요? 24절을 읽겠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이는 자녀교육이라는 원리를 통해 영적인 진리를 전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훈계를 하시고 징계를 하시는지? 또 우리는 말씀 때문에 힘든데, 이를 어떻게 여겨야 하는지를 알려줍니다. 훈계나 징계의 공통점은 다 듣기 싫어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말도 세 번 이상 들으면 싫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훈계나 징계는 처음 들을 때부터 부담스럽습니다. 그래서 이를 매를 맞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매를 대는데, 이는 미워서가 아니라 자식을 향한 사랑인 것처럼, 훈계나 징계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훈계나 징계가 없으면 자식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잘 감당하고 받는 의인은 포식합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사랑의 뷔페를 누립니다. 즉 훈계와 징계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알고 잘 감당하는 사람은 포식합니다. 하나님의 징계를 잘 받아 드리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도우심에서 포식을 하게 됩니다. 풍성함을 누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를 거부하고 징계를 싫어하는 사람은 악인의 되어 배를 주리게 됩니다. 은혜도 갈수록 말라가고 영적으로 주리게 됩니다.
‘마음을 따르지 않을 용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는 자아 숭배교의 십계명이 나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을 움직이는 새로운 십계명이라는 것입니다. 첫째, 내가 행복하면 된다. 둘째, 꼰대는 사절이다. 셋째, 내 마음을 따른다. 넷째, 나에게 충실할 뿐이다. 다섯 째, 내 인생은 내 것이다... 어떻습니까? 귀에 솔깃하지 않습니까? 이 영향이 오늘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에게도 있습니다. 내가 가는 길이 곧 진리이고, 내가 택하는 것이 내게 가장 좋고, 내가 잘 되는 것은 곧 행복으로 여기는 일종의 자아도취 교가 모두에게 있습니다. 예전에는 이를 내가 복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요즘은 자기 교입니다. 내가 교주입니다. 내가 신입니다. 우리가 이런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고 잘못을 깨닫고 돌이킨다. 이것은 엄청난 자기 포기이고, 자기 도전입니다.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나를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없으면, 말씀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돌이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사람에게는 잠언 기자가 말하기를 하나님의 선한 보응이 반드시 있습니다. 말씀을 통해 자기를 바로잡고 의인으로서 선한 보응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빛과 즐거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누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