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함이 있는 신앙생활 / 열왕기하2:1-12
오늘도 거룩한 주일 주님 앞에 나와 귀한 예배를 드리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마르틴 루터가 길가의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을 때 고기 냄새를 맡은 강아지 한 마리가 의자 옆에 앉았습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식사를 하는 루터를 바라봅니다. 뒤늦게 강아지를 발견한 루터가 고기를 조금 주려고 잘랐는데 강아지는 루터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루터가 장난삼아 고기를 손에 들고 이리저리 움직이자 강아지 눈도 이리저리 움직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루터는 그 일로 큰 깨달음을 얻고 친구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난 아침에 만난 강아지로부터 배운 것이 있네. 만약 그 강아지가 고기를 들고 있는 내 손을 바라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하나님은 분명히 기뻐하시고 감동하실 거라는 사실 말이네.” 여러분, 하나님을 사모하며 바라보고 계십니까? 얼마나 하나님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엘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 세상을 떠나면서 엘리사 선지자를 후계자로 삼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신이 세상을 떠날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선지자 학교를 고별 방문합니다. 당시 선지자 학교는 길갈과 벧엘과 여리고에 있었고 제자들은 기록된 숫자만 해도 50명이 넘었습니다. 많은 선지자의 제자들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엘리사가 후계자가 되어 선지자의 사역을 감당하는 귀한 일꾼으로 쓰임 받게 된 것은 물론 이미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만 한 가지 이유를 더 찾는다면 그것은 사모하는 마음이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엘리사는 여기 머물러 있으라는 스승의 말씀을 듣고서도 계속해서 엘리야를 따라갑니다.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가로 엘리야가 가는 곳마다 끝까지 따라갑니다. 엘리야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었을 때 엘리사는 지체 없이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게 하옵소서.” 간구합니다. 다른 어떤 것을 간구하지 않고 오직 엘리야의 성령의 능력을 간구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에게 있는 거룩한 영적 능력을 사모하였습니다. 그 성령의 능력을 얻기 위하여 엘리야를 떠나지 않고 끝까지 따라갔습니다. 창세기 25장을 보면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의 명분을 팔아넘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에서는 장자로 태어날 뿐 아니라 외모나 기질에서 볼 때도 영락없는 장자감입니다. 거기에 비해 야곱은 여러 가지로 장자가 되기에 결격사유가 많았습니다. 우선 차남인데다가 장자가 될 만한 기질을 갖고 있지 못했습니다. 마마보이라고 불릴만한 연약한 존재였고 또한 거짓말도 잘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이삭은 당연히 에서를 장자로 삼고자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에서에게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는 문제, 거룩한 영적인 욕망을 우습게 생각하는 문제를 갖고 있었습니다.(창25:34) 그러나 야곱에게는 영적인 거룩한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서가 사냥하고 돌아온 후 배가 많이 고팠을 때 팥죽 한 그릇을 주면서 장자의 명분을 나에게 팔라고 합니다. 야곱은 어떻게든지 장자의 명분을 사려고 하는데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소홀히 여기면서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립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에서를 버리고 야곱을 지도자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법적인 정당성이나 외적 조건, 그리고 자질 모든 것을 다 갖추었지만 거룩한 영적인 욕망을 잃어버린 에서는 버림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자격이 없었지만 거룩한 욕망을 가지고 있었던 야곱은 지도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안타깝게도 많은 성도들이 에서와 같이 거룩한 영적인 욕망을 사모하지 않고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갑절의 영감을 구하여 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이루어드리고 능력 있게 살기 보다는 그저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연약함을 즐기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엘리야의 제자들이 엘리사 외에도 50명이나 더 있었습니다. 이들도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데려가실 줄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선생님을 만나는 마당에 서 있으면서도 엘리사처럼 끝까지 스승을 따라가지도 않았고 스승님에게 무엇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멀리서 두 사람만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7절) 오늘 우리가 빠지기 쉬운 잘못가운데 하나가 이런 열심 없는 모습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는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려는 유혹입니다. 이것저것 많은 것을 시킬 것이 두려워서 열심을 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기본적인 신앙생활에 만족하고 더 이상의 시간이나 물질이나 능력을 투자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모습처럼 성장하고 성숙하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간절함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엘리사처럼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나 있기를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거룩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은혜를 사모하고 거룩한 욕망을 갖고 주님의 일을 감당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 가지가 부족해도, 자격이 없어도 거룩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 거룩한 욕망 위에 기름을 부으셔서 저들을 지도자로 세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가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고 이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시편 81편 10절 말씀에서는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의 욕망을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지 마시고 영적인 거룩한 욕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을 사모하고 주님의 능력을 사모하고 그 능력으로 사명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엘리사 선지자는 왜 당신의 성령이 하시는 역사가 갑절이나 내게 있기를 구했을까요? 먼저는, 시대가 배나 악하여졌기 때문에 시대를 이기기 위해서 성령의 충만이 필요했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시대는 날이 갈수록 악해져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요즘은 우리 주변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 우리는 불의하고 악한 시대를 극복해 나가기 위하여 성령의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충만을 구하지 않으면 우리도 세상 속에 빠져서 세상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성도의 구별된 삶을 살아갈 수 없습니다. 둘째로, 엘리사는 자기의 사명이 배나 중대함을 알았기 때문에 맡은 사명완수를 위해서 성령의 충만을 구하였습니다. 엘리야는 엘리사가 표현한대로 이스라엘의 병거와 마병이었습니다.(12절)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을 지키는 어떤 군대보다도 큰 역할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군대의 병거와 마병을 통하여 나라를 지켜주기도 하시지만 그러나 하나님 앞에 바르게 서는 한 사람의 신실한 신앙인을 통하여 나라를 지키시고 축복하시기도 합니다. 아합은 엘리야를 가리켜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고 했지만 실제로 이스라엘을 괴롭게 했던 자는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아합이었고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구원했던 선지자요 병거요 마병이었습니다. 그런 엘리야선지자가 떠나갈 때에 선지자를 대신할 누군가가 필요했습니다. 엘리사는 자신이 그런 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그러기 위하여 성령의 역사가 갑절이나 필요했던 것을 알고 갑절의 영감을 구하였습니다. @~~~~우리 속에 얼마나 많은 사모함이 남아 있습니까? 엘리사와 솔로몬처럼 사모합니까? 야곱처럼 사모합니까? 축복의 크기는 사모함의 크기입니다. ‘네 입을 크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고 말씀합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예배를 드릴 때, 기도를 드릴 때, 찬양을 드릴 때에 좀 더 간절함을 갖고 사모하며 구하시기 바랍니다. 엘리사가 길갈에서 벧엘로, 벧엘에서 여리고로, 여리고에서 요단가로 이동할 때 마다 가졌던 사모함이 우리에게도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기를 간절히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