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당신의 아내 차정(次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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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차정 |
당신을 두고 먼저 떠난 지 어느덧
75년이 흘렀어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참전국의 지위를 얻고자 필사적으로 대일항전을
모색하던 충칭(重慶).
자주독립은 독립전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신념으로, 당신은 조선의용대 대원들을 이끌고 임시정부와 힘을
합쳤지요. 약산(若山)이 군무부장을 맡았다는 소식에, 좌우합작 독립운동 단일전선을 염원하던 온 동포들이
기뻐했습니다.
쑨자화위안(孫家花園),
기억나세요? 민족혁명당 가족들이 함께 모여 살던 충칭 근교
창장(長江) 남쪽 강변 작은 마을. 그곳이 우리의 유일한 쉼터였습니다. 당신은 연부역강(年富力强)한 사십 중반, 저는 서른을 갓 넘긴 나이였고요. 우리가 부부가 된 게 1931년 맞지요? 단란하고 화사한 부부생활은 바라지 않았어요. 함께 싸운 게 우리 두 사람이 누린 최고의
행복이었습니다. 아주 가끔 제 볼을 어루만지며 단잠에 빠지던 당신이
생각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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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봉 |
충칭에서도 당신은 아주
바빴어요. 저는 상한 몸을 추스르고 있었지요.
1939년 곤륜산(崑崙山)에서 일본군과 전투 중 입은 총상 후유증
때문에요. 충칭 날씨는 아픈 사람에게는 최악이었습니다. 무덥고, 눅눅하고. 어서 일어나 총을 잡아야 하는데, 그만 폐병에 걸리고 말았지요. 폐병은 잘 먹어야 낫는, 돈 먹는 병. 백지장처럼 파리해진 제 손을 쓰다듬는 당신의 눈이 보일 듯 말 듯
떨렸습니다. 저는 그것으로 만족했어요.
독립운동이 영웅이라는 단어를
허락한다면, 당신은 진정 민족의 영웅이었습니다. 의열단(義烈團)
의백(義伯) 약산 김원봉. 일제는 전전긍긍, 제가 당신에게 편지를 쓰는 지금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300억원이 넘는 현상금을 걸었습니다. 친일파들은 의열단 이름 석 자만 들어도 벌벌
떨었지요. 당신은 동포 가슴에 불을 질렀습니다. 저 역시 의열단에 가입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항일의 의지를
키웠으니까요.
이성우(李誠宇, 1899~1929)
의사.
1920년 밀양경찰서를 폭파하기 위해
잠입했다가 발각되어 10년 옥고를 치르고 출소한 직후, 감상을 묻는 기자에게 “감상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잘 휴양한 것뿐입니다.”라고 답한 분. 그 말씀대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만주로 가서 독립군으로 싸우다
전사합니다.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 중국인 고서(古書) 장수로 위장해 부산경찰서장과 마주 앉아, “나는 상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트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인다.”고 일갈한 뒤, 폭탄을 터뜨렸습니다. 왜놈 서장을 처단하고 중태에 빠진 박 의사는
신문(訊問)과 치료를 일절 거부했고, 단식 아흐레 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가 나가사키에서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봉함엽서에는
“와담(臥膽)”이라는 서명이 적혀 있었지요.
최수봉(崔壽鳳, 1894~1921)
의사. 당신의 고향 선배입니다. 단군이 자기네 선조의 동생이라며 역사 왜곡을 일삼는 왜놈 교사에게
“그자는 우리 단군의 중현손(重玄孫,
까마득한 후손)이오”라고 쏘아붙여, 퇴학을 당했다는 그분입니다. 당신이 다니던 동화학교(同和學校)에 편입해 전홍표 교장의 가르침을 받았지요.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던지고, 태연하게 교수대에 올랐습니다. 1심에서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자 “좋소!”라고 외친 그 기백에 우리는 모두 주먹을 불끈
쥐었어요.
김익상(金益相, 1895~1925)
의사. 노동자였던 김 의사는 북경에서 심산 김창숙 선생의 주선으로 당신을
만났습니다. 첫 만남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지요?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결코 남의 힘으로 얻어내는 것이 아니오. 조선 민중은 능히 적과 싸워 이길 힘이 있소. 그러므로 우리는 선구가 되어 민중을 각성시켜야
하오.
이것을 위해 피를 흘려야
하오.”
조선총독부 폭파 계획을
듣고,
김 의사는 그 어렵고 힘든 일을
자청합니다. “일주일 안에 돌아올 테니 술상이나 차려 놓으소.” 호언장담에 걸맞게, 그는 총독부에 폭탄을 던지고 유유히 돌아옵니다. 술이 식기 전에 적장 화웅의 목을 베어 온 관운장
같지요?
일제는 자기들이 누구에게 응징을 당했는지도
몰랐습니다.
김 의사는 상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사살하려다 실패하고 붙들렸습니다. 피고에게 이익되는 증거가 있거든 말하라는
판사에게, 고개를 꼿꼿이 들고 “나의 이익이 되는 점은 오직 조선독립뿐이오”라던 김 의사. 20년이나 옥에 갇혔다가 풀려났지만, 왜놈 순사에게 다시 끌려가 끝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몽골의 이태준 선생님이 보낸 헝가리인
폭탄제조 전문가, 마자르. 구사일생으로 북경에 나타난 그는 미친 사람처럼 조선인들만 만나면
김원봉이 어디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지요? 당신은 그와 상해 프랑스조계에 비밀 폭탄제조공장을
차립니다. 폭탄 실험을 지켜본 단재 신채호 선생은 용기백배해
<조선혁명선언>을 쓰시고, 아일랜드인 조지 쇼우가 이륭양행의 배편으로 폭탄과 단총을
실어날랐습니다. 의열단은 피압박 민족의 국제연대에 바탕을 둔
조직이었어요.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고
1천 명이 넘는 왜경에 맞서 시가전을 벌이다가
자결·순국한 김상옥(金相玉, 1989~1923)
의사. 왜놈 왕궁 앞 다리(二重橋)에 폭탄을 던지고 옥중 순국한 김지섭(金祉燮, 1885~1928)
의사.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왜경들을 쏘아죽이며 분전하다
자결·순국한 나석주(羅錫疇, 1892~1926)
의사. 이름만 불러도 심장이 쾅쾅 뛰는 그분들을 우리가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독립운동을 입으로 하는 사람들은 의열단을
단순하고 무식한 과격분자들이라며 고개를 돌렸지만, 민족은 알고 있었습니다.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
의열단이 추구한 건 낡고 썩은 사회를 부수고
민중의 나라를 건설하는 대혁명이었습니다. “여자의 권리를 정치·경제·교육·사회상에서 남자와 동등으로 할 것.” 의열단 강령 제9조입니다. 누가 감히 당신들을 세상 물정 모르는 한낱 테러리스트로 깎아내린단
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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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포군관학교 |
당신의 목표는
독립전쟁,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1927년, 당신은 ‘최림(崔林)’이라는 가명으로 황포군관학교에 입교했어요. 천하를 울리는 의열단 의백이 중국 군관학교의 일개 생도가 되려
하다니?
다들 놀라고 말렸지만, 당신은 동지들을 아우르며 군인의 길을 선택했어요. 장개석의 북벌에 참여해 남경에 선봉으로 입성하고, 민족해방의 간성(干城)을 기를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웠습니다.
당신이 황포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을
무렵,
저는 부산 일신여학교(동래여고 전신)에서 독서회를 조직해 항일운동을 시작했어요. 옥살이를 몇 번 겪고, 좌우합작 여성민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에 몸담았다가, 광주학생운동 배후로 몰려 혹독한 고문을 받아 만신창이가
되었지요. 병보석으로 풀려난 제가 둘째 오빠의 부축을 받으며 중국으로 온 게
1930년입니다. 곧바로 저는 의열단에 가입했어요.
우리는 띠동갑, 열두 살 차이. 열정으로 돌진하는 당신이 처음엔 조금
얼떨떨했습니다. 내가 시집가려고 망명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고개를 살래살래 흔드니까 어린아이처럼 풀이 죽던 당신 표정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그 모습이 왠지 살짝 지쳐 보였어요. 남자는 자기가 진짜 좋아하는 여자는 못 속이는
법이랍니다. 그게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기를 결심한 이유 중 하나라는 걸
아세요?
의열단 동지들의 축복 속에 우리는
결혼했습니다. 주례는 백범 선생이 서주셨지요. 아빠가 결혼식에 오셨으면 얼마나 흐뭇해하셨을까…. 당신의 장인어른은 애지중지하던 막내딸이 아홉 살 때 조국의 현실에
비분강개하는 유서를 남기고 세상을 뜨셨습니다. 당신은 저를 어린 아내 이전에 한 명의 혁명가로
존중했지요. 때로는 그것이 당신을 힘들게 한 적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습니다. 고맙고 미안해요, 여보.
당신의 관심은 오로지 독립전쟁과
좌우합작이었습니다.
1935년 김규식 선생 등과 함께
신한독립당·한국독립당·대한독립당·의열단 등 5개 조직을 통합해 한국민족혁명당(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개칭)을 창당하고, 중일전쟁 다음 해인 1938년에는 중국국민당 정부의 동의를 얻어 조선의용대를 창립해 본격적으로
항일무장투쟁의 깃발을 올렸지요. 하지만, 대원들 가운데는 항일보다 반공을 우선하는 장개석의 노선에 동의할 수
없다는 동지들이 많았어요. 그들은 당신과 결별하고 북상해, 팔로군과 합세했습니다.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 1900~1942)
동지가 우리 곁을 떠나던 날을 잊지
못합니다. 당신은 천군만마를 잃은 듯 낙담했지요. 위로할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현실을 직시해야 했어요. 좌우합작을 실행한 순간, 당신은 이미 정치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은 겁니다. 이념으로 갈라진 남의 땅에서 민족의 중심을 잡는 일은
탁류(濁流)에 몸을 담그는 걸 마다해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과업입니다.
윤 동지는 대원들을 이끌고 산시성으로
이동해 팔로군 작전구역에서 일본군 토벌작전에 맞서 격렬한 전투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1942년 6월 3일, 타이항산(太行山)에서 일본군 포위망을 뚫다가 대원 일곱 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습니다. 덕분에, 펑더화이(彭德懷)와 덩샤오핑(鄧小平)
동지가 탈출할 수
있었지요. 윤 동지들 대신 차라리 우리가 그곳에 뼈를
묻었더라면…. 가슴이 찢어집니다.
윤 동지의 전사 소식이
전해지자, 충칭에서는 정중하고 엄숙한 추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이념과 노선을 달리하던 모든 정파가 다
참석했지요. 당신은 무섭도록 굳은 얼굴이었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셨어요, 여보. 윤 동지를 끝까지 막지 못한 자신을 질책하고
계셨나요? 아니면, 앞으로 닥칠 이념전쟁 동족상잔의 피비린내를
맡으셨나요?
당신은 좌든 우든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끌려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지요. 무슨 주의자나 무슨 파라고 불리기에는 너무 깔끔한 사람이
당신입니다. 암계(暗計)를 성사시킬 만큼 엉큼하지도 못해요. 속셈을 숨길 줄도 몰라요. 내 남편 김원봉은 담백한 사람. 그런 당신에게 외줄 타기를 요구한 우리 역사가
원망스럽습니다. 우리는 대체 언제까지 남의 눈치를 보고 살아야
하나요?
광복군은 어느 한 정파의 군대가 아닌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대라는 백범 선생의 간곡한 설득을, 당신은 받아들였습니다. 일본의 패전은 불을 보듯 환한 일. 대륙의 국민당과 공산당, 시베리아의 소련과 태평양의 미국 틈바구니에서 우리 민족이 상처받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좌우합작 독립군이 연합군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1943년 버마전선에서 영국군과 연합작전을
펴던 우리 용사들. 그들은 당신이 길러낸 조선의용대의 정예였지요.
그러나 광복군이 왜놈들에게 결전의 총탄을
퍼붓기도 전에 일본의 무조건항복으로 전쟁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갑오농민전쟁 이래, 의병과 독립군, 의열단과 한인애국단, 조 의용대와 동북항일연군이 수십 수백만의 피를
쏟고서도, 우리는 참전국의 지위를 얻지 못했습니다. 이 원통하고 비참한 역사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어야
하겠습니까.
제 유골을 품에 안고, 당신은 고향 밀양 땅을 밟았습니다. 감격과 환대는 열렬했습니다. 경남 각지에서 20만이 넘는 인파가 모였지요. 밀양 사람들은 밀양역에서 환영식이 열린 밀양국민학교 운동장까지 당신이
걸을 길을 가마니로 덮고도 성에 안 찼든지, 교문에서 연단까지 흰 광목을 깔았어요. 그것이야말로 민족의 영웅을 맞이하는 인민의 ‘레드카펫’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불안했어요. 한반도의 정세는 우리가 마주쳐야 했던 대륙의 살얼음판과 같던 공기와
비슷했습니다. 아니, 더 위험했어요. 냉전의 사슬이 한반도를 칭칭 동여매고, 38선이 삼천리강산의 허리를 분질렀습니다. 참전국의 지위를 쟁취하지 못한 대가가 이토록 클
줄이야…. 거꾸로, 친일파에게는 분단과 미군의 진주가 부활의 복음으로
들렸겠지요. 궁지에 몰린 친일파들이 미군을 업고 죽기 살기로 독립운동가들을 죽이려
들었으니까요
왜놈도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한
당신을,
해방된 조국에서 왜놈의 개 노릇을 하던 노덕술
따위가 고문하다니! 치가 떨렸어요. 여운형 선생이 비명에 가시고, 당신은 목숨조차 부지하기 힘든 위태로운 상황에
몰렸습니다. 당신은 피눈물을 뿌리고 북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당신에게는 민족혁명당 동지이고, 제게는 외당숙인 김두봉 선생이 계셨지요. 그 뒤 남쪽이 저지른 몸서리쳐지는 악행들…. 시동생 네 분과 시사촌동생 다섯 분을 학살하고, 시아버님을 굶겨 죽였습니다.
당신은 민족이 함께 살 길을 찾기 위해
단정에 반대했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죄라면, 백범 김구 선생님과 우사 김규식 선생님도 반역자라는
말입니까. 당신은 이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예상하셨지요? 당신은 그쪽 그룹이 아니었고, 목숨을 부지하자고 고개 수그릴 분도 아니니까요. 당신의 최후, 공식적으로 알려진 바는 전혀 없습니다. 저는 당신이 밀양 시댁 선영에 묻어주었건만, 당신은 무덤도 없이 60년째 구천을 떠돌고 있습니다.
여보, 어디 계셔요?
아직도 눈을 못 감고
계시나요?
제 목소리를 한 번만이라도
들어주세요.
남은 짐과 해원(解冤)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맡기고,
여보, 우리 용서하기로 해요.
당신이 몸을 일으킨 3·1운동 100주년에
아내 차정(次貞)이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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