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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저널] 가을 호와 함께 반가운 책이 왔다.
김성달, [이사 간다](도서출판도화, 2021)
짧은 글 청탁으로 연이 닿은 잡지 주간이자
중견 소설가인 작가가 동창이라
글도 사람도 반갑고,
깊게 멀리 걸어가다 닿은 문학의 길은 더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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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시의 정서와 양상 그리고 형식에 대한 소고
– 권달웅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여국현(시인)
서정시의 정서와 양상
서정시(lyric)는 시인의 감정과 의식, 그리고 세계 내 경험을 음악성을 지닌 짧은 언어로 표현하는 전형적인 시형식이다. 기원 전 3세기 무렵 고대 이집트에서 시작되어 그리스, 로마를 거쳐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읽히고 있는 서정시는 대체적으로 시인의 목소리라고 할 수 있는 일인칭 ‘나’의 음성으로 발화된다. 시 속의 ‘나’가 언제나 시인과 일치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시인이 가상의 인물(페르소나, persona) 혹은 가공의 존재(invented character)를 대신 등장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건 서정시는 시의 화자인 ‘나’의 감정과 경험을 그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는데, ‘나’라는 주체의 감정과 경험은 내적인 동시에 외적이며 세계와 경험에서 출발한다.
우선, 시인(뿐 아니라 인간 주체)의 사고의 출발은 자기 자신에 대한 ‘성찰(Introspection)’이(여야 할 것이)다. ‘자기 살핌’이라 부를 수 있는 ‘성찰’은 주체 스스로에 대한 인식일 텐데, ‘나’라는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서부터 내가 욕망하고 꿈꾸는 것을 포함하는 존재론적 질문 전체를 포함할 것이다. 이 질문은 ‘성찰의 시’라 부를 수 있는 서정시의 바탕이 된다.
다음으로는 외부 세계에 대한 ‘관찰(Observation)’이 있다. 우리는 이 세계에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외부 세계, 대상과의 대면은 필수불가결한 삶의 조건이다. 그러나 시인의 대면은 그저 눈으로 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깊이, 오래, 찬찬히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제임스 카메룬의 영화 <아바타>에 등장하는 판도라의 세계에는 ‘사랑한다’라는 말이 없다. 그 대신 ‘본다’라고 말한다. “I see you.” 이 말이 “사랑해”를 대신한다. 시인이 본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시는 대상에 대한 사랑의 시선이다. ‘관찰의 시’가 이 과정에서 발아할 것이다.
다음은 ‘통찰(Insight)’이 있다. ‘관찰’이라는 사랑의 시선을 넘어 외부 세계의 존재 자체에 귀를 기울이고 시선을 주고 마음을 쏟는 것이다. 그는 누구/무엇인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는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나 아닌 외부 대상의 본질을 향한 이 시선과 마음의 경험을 ‘통찰’이라 부를 수 있겠다. 사랑의 마음으로 보는 관찰이 통찰로 전이될 때 대상은 더 이상 대상이나 객체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의 본질을 깨닫는 ‘통찰의 시’의 원천이 된다.
마지막으로 ‘명상(Reflection)’. 이는 나와 타자, 나와 대상, 나와 우주라는 주체와 객체의 관계 속에서 그와 나의 관계의 본질을 생각하는 것으로 주체와 우주 사이의 관계 살핌이라 할 수 있겠다. ‘성찰’의 과정에서 나라는 존재의 영혼의 움직임이, ‘관찰’의 과정에서 외부 세계의 움직임이, ‘통찰’의 과정에서 우주의 비의가 시라는 빛으로 나타날 수도 있을 것이지만, 마침내 ‘명상’을 통해 주체는 세계와 온전한 합일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나와 대상이 하나 되고, 존재의 경계가 사라지며,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 합일의 순간이 ‘명상’을 통해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꽃이 되고 꽃이 내가 되는 그런 순간, 워즈워스가 ‘자연과의 합일(unity with nature)’를 말할 때, “명상에 잠겨 고요한 순간에 / 수선화와 함께 춤을 출 때”와 같은 바로 그런 순간, ‘자연과 합일’의 순간이다.
이 네 가지 감정적, 정서적 경험을 통해 시의 주체는 평범해 보이는 대상 속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거나, 새로운 무엇인가를 ‘창조’해내거나 혹은 삶의 비의를 ‘깨닫기’도 할 것이다. 각각을 ‘발견의 서정시’, ‘창조의 서정시’, 그리고 ‘깨달음의 서정시’라 명명할 수 있겠다.
언급한 네 가지 정신적 과정 가운데 ‘성찰’이 시인 자신의 내면을 지향하는 것이라면, ‘관찰’과 ‘통찰’, ‘명상’은 그와 외부 세계와 관계 속에서 발생한다. 시인이 외부 세계와 대상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고 교감하며 합일된 감정을 시에 담아낼 수 있을 때 일찍이 프레드리히 쉴러가 ‘소박한 시(Native Poetry)’라 불렀던 시가 탄생한다. 그러나 외부 세계가 언제나 동일시의 대상일 수는 없다. 시인이 세계와 불화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 시인은 자신이 동일시할 수 없는 세계를 비판적으로 그리거나, 존재하지 않는 다른 세계를 꿈꾸게 된다. 프리드리히 쉴러가 ‘감상적 시(Sentimental Poetry)’라 명명했던 시가 이런 유형의 시다. ‘소박한 시’의 시대를 지나온 쉴러를 포함한 동시대의 시인들은 그들이 상실한 세계와의 합일로 회귀하기를 열망하는 낭만적 이상이 여기에 담겨 있기도 했다. 김준오가 서정시의 특성을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 혹은 ‘자아와 세계의 일체감’으로 표현하며, 이를 ‘거리의 서정적 결핍’으로 규정한 것이 쉴러의 ‘소박한 시’에 해당된다면, 화자와 세계의 불일치를 전제한 권혁웅이 ‘불행한 서정시’라 명명한 것은 쉴러의 ‘감상적 시’와 유사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정시의 형식
서정시의 형식적 측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적 요소이며, 서정시의 언어적 요소에서 음악성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애초 서정시라는 어원이 리라 악기에 맞춘 노래에서 기인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 서정시의 음악성은 서정시의 핵심적 요소임에 틀림없다. 음악성은 운율과 리듬 혹은 글자 수나 각운 같은 외적 정형률은 물론 정형률의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시에도 내재율이라는 나름의 음악적 요소로 남아있게 된다.
서정시는 길이의 제약도 일정부분 고려해야 한다. 서사시처럼 이야기 중심의 미학보다는 압축과 완결성, 그 안의 긴장과 간결함의 미학을 바탕으로 하는 서정시는 ‘인상과 효과의 통일성’을 해치지 않는 간결성을 유지해야 한다. 최근 시의 길이가 두드러지게 길어지는 추세는 그런 점에서 진지한 논의의 필요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서정시의 언어는 기존의 언어와는 다른 새로움을 향한 본원적인 욕망을 지닌다. 100년 전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강조했던 ‘낯설게 하기(alienation, defamiliarization)’란 명제가 여전히 강력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까닭도 그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는 문학 언어와 일상 언어의 다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언어 사용의 한 방식으로, 세계 내 대상에 대한 언어 묘사의 새로운 형식을 통해 대상에 대한 감각의 새로움과 함께 지각과 인식의 생생함을 추구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던 성찰, 관찰, 통찰, 명상의 과정, 혹은 그 결과물이 평범하고 일상화된 언어와 다른 ‘낯선 언어’와 ‘언어 형식’을 통해 제시될 때, 그 정신적 행위 자체의 의미는 물론 대상과 언어에 대한 보다 생생한 경험을 환기시킬 수 있다.
‘낯설게 하기’의 과정은 두 가지 측면에서 시인의 정신이 작용하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감성적 차원으로, 워즈워스(William Wordsworth) 같은 낭만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상상력이 개입, 발휘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다른 한 측면은 엘리엇(Thomas S. Eliot) 같은 모더니스트가 주장하는 지적인 차원의 정신작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워즈워스는 평범한 대상 속에서 보통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것을 듣고, 보고, 느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경험하는 것을 시인이 타고난 상상력이라 간주했다. 시인의 상상력은 평범한 대상과 사건을 평범한 언어로 묘사하는 과정에 개입하여 그 평범한 대상과 언어가 비범하고 낯선 것으로 느껴지게 만든다고 보았다. 한 마디로 낯설게 다가오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동료였던 코울리지(Samuel T. Coleridge)는 상상력을 인간 모두의 보편적 정신 역량인 ‘일차적 상상력’과 시인에게 고유한 ‘이차적 상상력’을 구분했다. 그에 따르면‘이차적 상상력’은 외견상 아무 관련 없어 보이는 것들 사이의 내적 관계를 찾아내고, 그것들을‘미美’를 위한 창조물로 재생산하는 능력이며,‘구성하고 변형시키는 능력’으로, 창조하기 위해 용해하고, 발산하며, 흐트러뜨리는 ‘통합의 능력’을 말한다.
한편, 엘리엇은 이런 견해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두 사람이 주장하는 ‘상상력’을 통해 생산된 결과물인 시와 그 시의 정서는 어떤 경우라도 객관화 될 수 없으면, 생산자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의 산물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그가 제시하는 방법은 ‘객관상관물 이론’이라고 일컬어지는 방법이다. 엘리엇은 어떤 시인이 무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자신만의 주관적인 언어로 전달하려 해봐야 그것은 결국 시인 자신의 주관적인 감정에 불과할 뿐이라는 입장이다. 엘리엇의 시인은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가장 잘, 유사하게 표현한 단어와 대상을 과거의 작품들과 문화적 전통 속에서 찾아 대신 제시해주면 된다는 것이다. 시인의 주관적 감정을 읽는 이에게 객관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객관상관물’이 바로 이것이다.
엄청난 고생과 노력 끝에 성공을 쟁취한 사람이 청중들에게 자신의 힘들었던 과거를 이야기할 때, 고생한 과거의 감정을 아무리 나열해 봐야 사실 청중들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객관적 감정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저“지난 제 삶은 동굴 속의 곰 같은 시간이었습니다.”하면 된다는 것이다. 단군 신화를 알고 있는 이라면 그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충분히 객관적으로 공감하고 이해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객관상관물이 위의 예처럼 너무 뻔해지면 말하고자 하는 의미가 전달은 되겠지만 시적 장치로서는 부족한 것이니, ‘낯설게 하기’라는 시적 어법에 충실하려면, 청중들이 잘 모르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낯선’이미지를 불러와야 하는 것이다. 시가 난해해진 요인이 되고, 감상하고 공감하기보다는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이 된 것도 이런 입장이 강력한 흐름이 된 까닭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정)시의 언어가 평범한 언어와 다르고 또 달라야 한다면, 전자의 입장을 따르건 후자의 입장을 따르건‘낯설게 하기’는 여전히 강력한 시적 기제로 작용할 것이다.
권달웅 시인의 서정시 특징
권달웅 시인의 시에는 위에서 언급한 서정시의 특징이 고스란히 빛나고 있다.
아득히 먼 산등성이에 / 낮달이 걸렸다 // 벗어놓은 지게에 / 낫이 꽂혔다. // 희미한 낮달도 닳은 낫도 / 등이 휘어졌다 // 푸른 산등성이도 아버지도 / 등이 휘어졌다 // 낫은 창백하고 낮달은 애달프다 // 아버지는 고달프고 / 산등성이는 가파르다 // 모두 등이 휘어지도록 / 무거운 짐을 졌다 // 가도 가도 멀고 험준한 / 생의 비탈길 (「휘어진 낮달과 낫과 푸른 산등성이」 전문)
이 시에는 자연 대상을 통해 삶을 바라보는 성찰의 정서가 두드러진다. 시인은 “낮달”과 “지게”의 외형의 상동성에서 “산등성이”를 오르는 “낮달”과 아버지의 삶의 고단함의 유비를 이끌어낸다. 제 시간이 아닌데도 나와 산등성이를 오르는“희미한 낮달”이나 “벗어놓은 지게”에 꽂힌 “닳은 낫”을 지게와 함께 지고 가야만 하는 아버지, 둘 다 “등이 휘어지도록 무거운 짐을” 지고 자신에게 주어진“생의 비탈길”을 걸어가기는 매한가지다. 밤에 빛을 발하는 낮달이 낮에 쉬는 모습 보이는 것처럼, 지게를 벗어놓고 잠시 쉬고 있는 아버지도 그러하지만, “생의 비탈길”에서 둘의 걸음은 멈춤이 없는 걸음인 것을 시인도 우리도 안다. 이처럼 시인에게 자연의 대상은 그저 눈에 보이는 자연물이 아니라 삶의 비의를 보여주는 ‘성찰’의 매개가 된다. 이런 성찰의 서정은 “소똥을 뭉쳐 안간힘을 쓰다가 / 언덕 아래로 놓쳐버린”쇠똥구리에게서 “내 새끼 낳아 살 집 한 채 얻기가 / 이렇게 힘들”다는 녹록치 않은 현실을 읽어내는 「언덕길」같은 시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다.
한편, 시인의 성찰은 삶의 방향을 향하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라는 사실을 그는 놓치지 않는다.
걷지 않아도 길은 이어진다. 떠나간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서, 흔들리는 풀꽃은 내일이면 하얗게 쓰러질 것이고 내일이면 흰 풀꽃 같은 사람들이 산으로 가 살 것이지만 사람들은 모든 길이 망우리로 이어져 있음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오늘 걸어온 만큼 짧아진 길을 버려도 하루해는 영원한 길을 버리지 않는다. 길을 서두르지 마라. 삶이란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오늘 하루 망우리 산기슭엔 누구를 위한 돌을 쪼는지, 아름다운 이름을 새기는 정소리가 가득하구나.
고향으로 가는
장님으로 가는
망우리 길. (「망우리 길」 전문)
길은 삶의 가장 일반적인 비유로 사용된다. 그 길 위의 “풀꽃”은 또한 민중의 유비가 된 지 오래다. “풀꽃 같은 사람들”이라는 직유로 직접 연결된 것에서 암시되듯 “내일이면 하얗게 쓰러질” “흔들리는 풀꽃”은 “망우리로 이어져” 있는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들”과 하나가 된다. “삶이란 죽음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은유에서 “삶”과 “죽음”은 “길” 위에 존재하는 하나의 이미지가 된다. “돌아가는”이라는 구절이 이 길이 편도가 아닐 수도 있겠구나, 생각하게 하고, ‘떠나온 곳’ 그래서 “고향”이라 불리는 그곳을 통해 죽음의 세계는 끝이 아니겠구나, 짐작하게 된다. 쓰러진 꽃이 봄이 되면 다시 피듯, 삶을 돌아 죽음으로 가는 인간은 “고향” 같은 그곳에서 “아름다운 이름”으로 살아갈 것이다. 자연의 대상은 시인에게 삶과 죽음의 생각하게 하는 성찰의 매개가 된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연과의 동일시는 많은 서정시가 공유하는 특성이다. 권달웅의 시에서도 인간과 자연의 동일시, 혹은 합일의 교감은 시의 중요한 모티프가 된다.
아버지에게 논은 목숨이었다 // 극한 한발을 견디다 못해 / 척척 갈라진 엉그름 논바닥 벼에는 / 목숨처럼 엉겨 붙는 / 진흙의 피가 묻어있었다 // 물 퍼 넣고 엎드려 논매고 / 등뼈가 휘어지도록 일해 / 거둔 누런 벼가 / 가마니 째 정미소로 들어가 / 드디어 쌀이 되어 / 와아아 쏟아져 나올 때 // 그 윤기 자르르 도는 하얀 쌀을 / 돌덩이 같은 손으로 받아들고 /이로 꼭 깨물어 보고는 / 흐느끼듯 가슴으로 씩 웃으시던 // 아버지의 그 쌀 한 톨 (「아버지의 쌀 한 톨」 전문)
“논”은 아버지의 목숨이었다.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에 고인 “진흙의 피”는 아버지의 피였고, “누런 벼가 정미소로 들어가” 나온 “쌀 한 톨”은 그대로 아버지였다. 농부인 아버지는 땅과 함께 속 타고, 땅과 함께 쌀을 키워낸다. 아버지와 땅과 쌀은 한 몸으로 존재한다. 이 같은 합일의 서정은 다음 시에서는 강과 은어와 하나 되는 것으로 표현된다.
나 여기 떠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청량산 육육봉 끌어안고
굽이굽이 돌아나가는 낙동강 상류 물 되리.
어머니 쪽진 비녀만한 은어가 되리.
하얀 외씨버선만한 은어가 되리.
나 여기 떠나 자라난 곳으로 돌아간다면
달밤에 올 고운 안동포 짜는 어머니 바디소리 만나리.
저 아득한 바다로 항해하는 수만 척의 배처럼
힘차게 물살을 가르며 거슬러 올라가,
가슴을 비추던 반짝이는 물 만나리.
꿈처럼 이슬 머금고 핀 들꽃 만나리.
나 여기 떠나 다시 살 곳으로 돌아간다면
원앙이 새끼쳐나가는 저 먼 비나리 지나
명경처럼 맑은 명호천 지나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
내 혈관이 가을 물처럼 맑아지도록
강바닥 속 은모래 환히 비치는 청정한 마음으로 살리.
은어처럼 수박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리. (「은어」 전문)
세상의 삶이 녹록할까. 화자는 “나 여기 떠나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 다시 한 생 살 수 있다면, “낙동강 상류 물”이 되고, “은어가 되리”라 한다. 은어의 귀소본능은 익히 아는 바, 화자의 귀소 처는 어머니다. 자신의 난 자리를 찾아가는 은어처럼 그도 “달밤에 올 고운 안동포 짜는 어머니 바디소리 만나”고 싶어 한다. 세상의 진애 다 벗고 “더 이상 올라갈 수 없는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청정한 마음으로”“은어처럼 수박향기 나는 사람으로” 살고자 한다. 은어는 귀소본능으로도 유명하지만 1급수의 청정수에서만 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자가 지금 발 딛고 선 “여기”가 세상을 의미한다면, 그는 은어가 사는 1급 청정수처럼 “강바닥 속 은모래 환히 비치는” 그런 마음으로 은어처럼 살고자 한다. 자연과 교감을 넘어선 합일의 서정이 은어 비늘처럼 빛난다.
이 같은 자연과의 교감은 권달웅의 시 곳곳에 편재해 있는데, 가령 “간밤 내린 서리에 떨어진 / 감잎은 쓸지 말고 그대로 두”고, “새가 먹을 물을 / 접시에 떠놓”으면서 “새와 사람이 먹을 물과 열매를 /나누어 가질” 그런 세상을 그리는 「새와 사람」 같은 시편, 혹은 “닳고 닳은 호미를 들고 걸어오시는 / 우리 어머니 한숨 같은 꽃이여...// 어머니의 눈물 같은 꽃이여”라며 안개꽃과 어머니를 동일시하는 시편 등이 그렇다.
권달웅 시의 합일의 대상이 자연만은 아니다. 그는 사람들의 세상에 피어나는 공감과 사랑의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겨울 남대문시장
국밥집 아주머니가
소뼈를 고아 우려낸 국물을
밥에 부었다 따랐다 부었다 따랐다
토렴을 한다.
새벽 일찍부터 나와 일하다가
끼니를 거른 사람들이
언 손 불면서 깍두기 집어먹고
뜨끈뜨끈한 국물을
후루룩 들이마신다.
썰렁한 몸이 후끈해진다.
춥고 쓰린 허기를 덮여주는
국물의 온기,
하수구 얼어붙은 밥알을 쪼아 먹다가
날아오르는 비둘기 떼들이
후루룩 소리를 낸다.
살아가는 사람들 냄새가 와글거리는
겨울 남대문 시장,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국밥 한 그릇이
노동의 고단함을 데워준다. (「토렴하는 국밥」 전문)
“끼니를 거른”새벽시장의 상인들과 노동자들에게“언 손 불면서”들이마시는“뜨끈뜨끈한 국물”은“춥고 쓰린 허기를 덮여주는”생명이 된다.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솟아오르는 / 국밥 한 그릇이”세상을“살아가는 사람들”의“노동의 고단함을 데워준다.”국밥집 아주머니와 새벽시장의 일꾼들, 그 안에서 와글와글 살아가는 사람들은 국밥 한 그릇에 하나가 된다. 이런 순간이야말로 서정시가 놓쳐서는 안 되는 장면이라 할 것이다.
이처럼 권달웅의 시에는 자연과 주체의 합일, 교감에서부터 삶에 대한 성찰은 물론 공동체의 삶과 주체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까지 오늘날 서정시가 보여 마땅할 그윽한 시선이 옹골지게 담겨 있다.
다시 불화의 서정성을 제안하며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권달웅의 시에는 자연과의 교감, 합일, 혹은 성찰의 서정이 자기 자리를 찾아 빛나고 있다. 그러나 인간과 자연은 언제나 교감과 합일의 관계를 맺지만은 않는다. 19세기에 쉴러는 이미 자연과 불화한 시인들의 서정을 언급했다. 그 이후 우리는 주체와 자연의 불화와 불일치가 더욱 심화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연과 주체가 조화하고 동일시하기 힘든 시대에 합일을 꿈꾸는 이상적 서정만이 시가 담아낼 서정은 아닐 것이다. 쉴러가 언급했던 것처럼 사라진 자연과의 합일을 꿈꾸고 희구하는 이상적 소망의 시가 한 방향이라면, 보다 적극적인 시선도 필요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합일과 동일시가 불가능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함으로써 분열된 세계와 주체의 관계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그 드러냄을 통해 현실과 주체의 균열의 지점들을 명확하게 인식함으로써 주체와 현실, 주체와 세계 사이의 또 다른 관계맺음의 가능성을 꿈꾸는 일 같은 것 말이다. 그런 점에서 권혁웅이 ‘불행한 서정시’라 불렀고, 이상의 시에서 그 전형을 찾았던 세계와 불화하는 주체의 현실에 대한 진솔한 시각과 함께 그 불화의 균열을 메울 수 있는 가능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모색해보는 것이 오늘날 서정시의 한 방향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아울러 주체의 감수성은 변화했고 또 끊임없이 변화해간다는 점을 생각해 볼 때, 변화한 주체의 감수성을 서정시에 반영할 효과적인 방안을 찾는 것도 지금의 서정시가 노력해야 할 방향인 것처럼 보인다. 사라진 과거로의 회귀와 고전적 정서와 감수성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현재 세계와 주체의 정서와 감수성을 담기에 적합한 서정시의 형식과 내용을 고민해 보는 태도가 필요하다. 불화의 감수성, 불화의 서정성이라고 잠정적으로 명명할 수 있을 그 서정성을 위해 시인은 보다 굳건하게 현실의 토대 위에 발을 붙이고 더울 날카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면서 자연과 일치할 수 없는 자신의 존재 조건과 불합리한 세상을 직시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시 말해, 합일의 서정이 사라진 세계의 모순을 반성, 혹은 비판하는 제3이 서정과 변화하는 세계 내 주체들의 변화하는 감수성에 착목하는 시각이 필요하다. 권달웅의 시에서 우리가 더 보고 싶은 양상이 바로 그러한 면이며, 서정시 전체에서도 그것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