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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김창현
Ⅰ. 머리말
Ⅱ. 왕실 남성의 칭호
Ⅲ. 왕실 여성의 칭호
Ⅳ. 맺음말
*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대표 논저 : 2007『고려의 여성과 문화』; 2006『고려의 남경, 한양』; 2002『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
국문초록
본고에서는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를 비교해 상호 연관성과 차별성을 규명
하려 했다. 신라 왕위 계승의 연장자 상속, 장자 상속, 형제상속 경향은 고려에 영향
을 미쳐 고려는 왕위 장자계승 원칙을 지니면서도 형제상속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신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국왕 내지 대왕이 천자 내지 황제와 유사한 모습
을 보여주다가 당과 연합하면서 제후국 체제로 전환했지만 신라말로 가면서 천자국
의 양상을 다소 띠어 갔다. 고려는 신라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해 응용했으니 천자국
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중국이나 북방 강대국을 사대하기도 했다.
신라에서 대개 지증왕 무렵까지는 국왕의 배필과 모친이 夫人으로, 법흥왕 무렵
부터 통일 이전 무렵까지는 배필은 妃(혹은 妃·夫人)로, 모친은 태후로 불렸다. 통
일 이후에는 배필은 后(왕후)·妃·夫人으로, 모친은 后(왕후, 태후)로 이루어졌는데
하대에는 배필이 황후, 모친이 황태후로 불리기도 했다. 고려가 이를 계승해 왕의 배
필에 后妃와 夫人을 운용하다가 현종 무렵부터 后·妃를 운용했고, 왕의 모친은 고
려초부터 태후를 사용했으며, 또한 고려는 왕의 배필을 황후, 왕의 모친을 황태후라
부르기도 했다. 왕녀와 왕의 누이는 신라말에 공주 칭호가 확인되고 고려시대에 공
주 칭호가 확산되었다. 신라왕실 여성이 궁을 지녀 궁주라 불리는 모습이 더러 보이
는데 고려시대에 그러한 모습이 일반화했다. 신라는 왕실 칭호에서 중국식을 점진적
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칭호가 서로 조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부조응이
고려시대에 와서 천자국 내지 황제국 체제가 정착하면서 해결되었다.
주제어 : 왕실칭호, 신라, 고려, 천자국, 제후국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였지만 고려 건국 때 고구려는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신라의 영
향을 더 많이 받았다. 고려는 신라의 문물을 바탕으로 중국의 문물을 수용
해 새로운 문물을 창출했다. 신라는 당의 군대를 끌어들여 삼국통일을 달
성했기 때문에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지만 중국과의 교섭이 늦어 우
리 사회·문화의 원류를 풍부하게 간직한 보고이기도 하다.
왕조시대에 왕실은 국가를 대표하는 존엄한 위상을 지녔으니 왕실 구
성원의 칭호는 역사성, 정치성, 사회성을 강하게 띠었다. 왕실 구성원의
칭호는 신라, 고려, 조선이 비슷한 점도 있었고 다른 점도 있었다. 신라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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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역사적으로 이어지므로 왕실 구성원의 칭호에서 영향을 주고받은
측면이 꽤 있었을 것이다. 왕실 칭호에는 해당 왕조의 정치·사회·문화
의 여러 현상이 복합적으로 담겨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규명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구성원 칭호를 비교해 고찰하려 한
다. 고려의 경우 외세의 개입으로 왕실 칭호가 격하 변질되는 원간섭기와
그 이후는 다루지 않으려 한다. 왕실 구성원을 남성과 여성으로 나누되 남
성은 왕, 왕자, 왕의 형제를, 여성은 왕의 妃, 왕녀, 왕의 자매를 다루려고
한다.1) 신라와 고려의 왕실 칭호가 서로 어떻게 연결되었는지, 어떠한 차
이가 있었는지 드러나기를 기대하며 논의를 전개하려 한다.
1. 신라 왕실
신라 왕실 남성의 칭호를 임금, 임금의 형제, 임금의 아들에 한정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신라의 임금은『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王(大王, 太王, 國王 포함) 등의 순서로 호칭이 변
화했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寐錦으로, 울진 봉평비에는 ‘寐錦王’(牟卽智
寐錦王: 법흥왕)으로 표현되었는데 연구자들은 대개 그것을 마립간과 같
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지증 마립간 4년 10월에 신하들이 上言하여 사라, 사로, 신라 등으로 불
리던 국호를‘ 德業日新 網羅四方’의 뜻을 지닌‘ 新羅’로 고정하기를 요청
1) 금석문은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역주 한국고대금석문』, 가락국사적개
발연구원 및 김용선 편, 1993『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및
이지관 편, 1994『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가산문고를 이용하려 한다.
하고, 옛적부터 국가를 가진 자는 모두 稱帝·稱王한다며 시조 이래 22世
동안 방언으로 칭해 온 尊號를 바로잡기를 요청하면서‘ 新羅國王’이라는
칭호를 올렸다.2) 이리하여 신라의 임금은 신라국의 왕 내지 신라의 국왕으
로 탈바꿈하였다. 이후 신라의 임금은 왕, 국왕, 태왕(대왕) 등으로 불려졌
다. 태왕(대왕) 칭호는 울주 천전리 書石에 聖法興大王, 북한산·황초령·
마운령 진흥왕 순수비에 眞興太王이라 표현된 이래 신라말까지 사용되었
다.3)
『삼국사기』에 따르면 왕을 칭하기 전에 거서간을 칭한 자가 1명, 차차
웅을 칭한 자가 1명, 이사금을 칭한 자가 16명, 마립간을 칭한 자가 4명이
었다. 이사금이 압도적인 다수였고, 마립간도 이사금의 변형으로 보인다.
이는 이사금이 신라 임금의 위상을 결정지은 주요 요소였음을 시사한다.
이사금은 대개 齒理로 상징되는 나이로 결정되었다.4) 이사금 시대에 왕
족에서 사위를 포함한 연장자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곤 했다. 임금의 자리
가 부자상속보다 연장자 상속, 형제상속(자매의 남편 포함)으로 이어졌다.
이는 신라가 기본적으로 부족연합적인 정권 내지 귀족연합적인 정권이었
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었다.
신라의 왕권은 법흥왕(지증왕의 원자) 이래 진덕여왕까지 불교식 왕명
을 사용하면서 고양되어 갔다.『 삼국유사』황룡사구층탑 항목에 따르면 신
라국왕은 天竺刹利種으로 간주되었다.5) 특히 진흥왕이 고구려와 백제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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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4, 지증마립간 4년 10월.‘ 왕’은 이전에도 비공식적
으로 혼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3) 대왕(태왕) 칭호는 신라의 임금이 귀족세력에 대한 초월자로 변화했음을 의미
하며 중고 왕권도 대왕전제체제를 지향했다고 한다. 김영하, 2002『한국고대사
회의 군사와 정치』,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4)『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 1, 유리 이사금
5)『 삼국유사』권3, 塔像 4, 황룡사구층탑. 자장이 중국 五臺에서 문수보살을 만났
물리쳐 영토를 크게 확장하면서 신라 중심의 천하관이 고양되었다. 불국
토를 다스리는 신라왕은 전륜성왕 혹은 제석천(天帝)으로 인식되었고 석
가모니의 부친으로 설정되기도 했다.6) 이처럼 신라를 중심으로 보는 불교
식 천하관은 유교식으로 말하면 신라가 천자국 내지 황제국이고 국왕이 천
자 내지 황제로 인식된 것이었다. 특히 선덕여왕은 도전받는 여왕의 권위
를 높이기 위한 측면이 있지만 國人으로부터‘ 聖祖皇姑’라는 존호를 받았
고,‘ 芬皇寺’를 창건했고,7)天帝釋 즉 天帝의 분신으로 간주되었으니 바로
황제였다. 신라는 법흥왕 이래 유교식 천하관과 불교식 천하관이 혼합된
양상을 보였다.
법흥왕~진흥왕 때 興輪寺(大王興輪寺)가, 진흥왕 때 皇龍寺가, 선덕여
왕 때 芬皇寺와 황룡사 9층탑이 창건되었다.8)『삼국유사』에 따르면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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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데 문수가“ 너의 국왕은 天竺刹利種王으로 佛記를 預受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6) 진흥왕의 태자가 銅輪이었고 次子가 金輪(舍輪)이었으니『( 삼국사기』권4, 신라
본기 4, 진흥왕 27년·33년조;『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4, 진지왕 총서), 진흥
왕은 전륜성왕으로 자처한 것이었다. 진평왕은 자신을 제석천과 동일시해 내제
석궁(천주사)을 창건했고, 선덕여왕도 자신을 제석천과 동일시해 도리천에 해
당하는 낭산에 묻어달라 했다.『 삼국유사』권1, 紀異 2, 天賜玉帶·善德王知機
三事). 진평왕의 이름인 白淨과 배필의 칭호인 마야부인『( 삼국사기』권4, 신라
본기, 진평왕 총서)은 석가 부모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7)『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5, 善德王.‘ 聖祖皇姑’는‘ 聖祖인 여성 황제’를 의미
한다. 芬皇은 향내나는 황제 즉 여성 황제를 의미했으니, 분황사의 창건은 그녀
가 황제로서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선덕여왕은 신성화 작업의 일
환이지만 생존시에 여성 황제로 불렸을 뿐만 아니라 대개 건국자 내지 시조를
가리키는 존호인 聖祖로 불렸으니 도전 세력이 있었음에도 높은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그녀는 첫 번째 여성 임금이었으므로‘ 聖祖皇姑’라 불릴 만했다. 그녀
의 靈廟寺, 첨성대, 황룡사 9층목탑 창건도 자신의 황제로서의 권위를 고양하기
위한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8)『 삼국유사』권3, 興法 3, 阿道基羅 및 塔像 4, 迦葉佛宴坐石·皇龍寺丈六·皇龍
이 皇福寺에서 승려가 되었다.9) 문무왕의 동생 車得公이 거처한 대내(대
궐)가 皇龍寺와 皇聖寺 사이에 있다고『 삼국유사』에 되어 있는데,10) 황성
사는 聖法興大王 즉 법흥왕이 창건한 대왕흥륜사로 여겨진다. 이러한 사
원들에는 신라 국왕의 천자 내지 황제로서의 위상이 투영되었다. 특히 불
교식 임금칭호 시대인 이 시기에 신라의 독자적 연호가 각 왕마다 자주 반
포되었음이 주목된다. 이 시기는 建元을 했고, 稱帝를 한 것과 다름없었다.
신라는 태종 무열왕과 문무왕 때 삼국 통일을 이루면서 왕권이 강화되
고 유교식 천하관이 확산되었다. 문무왕은 고구려의 귀족 안승을 금마저
의 고구려왕 내지 보덕왕에 책봉해 거느렸다. 문무왕이 누이를 보덕왕 안
승과 결혼시키자 안승이 帝女와 결혼하게 되었다며 감사를 올렸다.11) 신라
국왕은 황제 내지 천자로도 인식되었던 것이다. 신라가 쇠퇴한 후삼국 시
대에도 신라는 여전히 천자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이는 고려의 왕 왕건이
후백제 왕 견훤에게 보낸 문서에 신라를 周에 비유하여 尊周·尊王을 표
명한 데12)에서 드러난다.
하지만 신라인들이 자신의 임금을 직접적으로 天子 내지 皇帝로 표현
한 사례는 잘 찾아지지 않는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 때에는 공식적
으로 칭제건원할 만한 기회였는데 그러하지 못했으며 그 이후도 그랬다.
진덕여왕 때 법흥왕 이래의 전통에 따라 독자적인 연호를 쓰다가 당으로
부터 원군을 얻기 위해 당 태종의 압력에 굴복해 독자적인 연호를 중단했
는데13) 무열왕이나 문무왕도 독자적인 연호를 쓰지 못했고 그 이후도 그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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寺九層塔·靈廟寺丈六;『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 5년·14년;『 삼국사
기』권5, 신라본기, 善德王 3년
9)『 삼국유사』권4, 義解 5, 義湘傳敎
10)『 삼국유사』권2, 紀異 2, 文虎王法敏
11)『 삼국사기』권6, 신라본기 6, 문무왕 10년·14년·20년
12)『 고려사』권1, 태조 11년 정월
다. 신라는 당과의 전쟁을 수행해 당의 세력을 몰아내긴 했지만 당에게 큰
빚을 졌고 세계를 제패한 당과의 충돌을 원하지 않았다. 삼국통일로 국가
와 국왕의 위상은 올라갔지만 그러한 사정으로 인해 신라는 공식적으로 칭
제건원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부적으로도 황제나 천자라는 표현은 잘
쓰이지 않았다.‘ 祖宗’의 표현은 생존시 선덕여왕을‘ 聖祖’, 김씨 왕의 시
조의 사후칭호를‘ 太祖’, 무열왕의 사후칭호를‘ 太宗’, 원성왕의 사후칭
호를‘ 烈祖’ 내지‘ 聖祖’라 한 정도로 사용되었다.14)
『삼국사기』에는 신라 임금의 사망을 薨이라 표현했으며, 신라 임금의
자칭을 寡人, 명령을 교敎, 존칭을 殿下라 표현했는데, 下代에는 자칭을
간간이 朕이라 했고, 中代 이후에는 문무왕의 유언을‘ 遺詔’라 표기한 사
례처럼 왕명을 간간이 詔라 표현했다. 진흥왕은 순수비에서 자신을 朕이
라 칭했다.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는 진성여왕을 大王殿
下라 표현했다. 반면『 삼국유사』에는 신라 임금의 사망이 崩, 자칭이 朕,
명령이 詔·勅, 존칭이 陛下로 표현되어 있다. 삼국의 임금을 本紀에 넣고
임금의 방언 칭호까지 수록한 김부식이 일부러 왜곡했다고는 생각되지 않
는다. 삼국유사의 그러한 표현은 고려 때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여겨진
다. 칭호 관련 사료는 금석문을 먼저 채택해야 하고, 그 다음에『 삼국사기』
를 고려해야 하는 반면『 삼국유사』는 비판적으로 이용해야 하리라 본다.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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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권5, 진덕왕 2년·4년
14) 태조는 신문왕이 7년에 大臣을 祖廟 즉 종묘에 보내 태조대왕, 眞智大王, 文興
大王(김춘추의 부친), 太宗大王, 文武大王을 제사한 데에 보인다『( 삼국사기』권
8, 신라본기). 김춘추는 사망해 시호 武烈과 존호 太宗을 받았는데, 당에서 자
신의 태종과 칭호가 같다며 개칭을 요구했지만 신라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국사기』권5, 태종무열왕 8년 및『 삼국사기』권8, 신문왕 12년조. 숭복사비
에 따르면 원성왕이 사후에 烈祖 내지 聖祖로 불렸다. 태조, 태종, 열조는 廟
號로도 사용되었을 것이다. 신라 때에는‘ 宗’이‘ 立宗’처럼 이름의 끝에 존칭
어미로 붙는 경우도 있었다.
신라의 왕들은 하대로 가면서 황제와 관련된 용어를 때때로 썼는데, 잦
은 정변과 잦은 보위 교체로 권위가 도전받고 당이 쇠퇴하자 권위와 정통
을 과시하려 했다고 여겨진다. 애장왕 때 건립된 高仙寺 서당화상비에는
궁궐이 帝闕로, 경문왕의 명령에 의해 세워진 대안사 적인선사탑비에는 신
라 왕경이 京師로 표현되었다. 금석문에 왕명이 敎로 표현되어 왔는데, 헌
강왕 10년에 건립된 건립된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에는 헌강왕의 명령을 敎
와 詔로 표현하였다. 정강왕 때 건립된 사림사 홍각선사비, 진성여왕 때
건립된 월광사 원랑선사탑비에는 임금의 명령이 詔로 되어 있다. 최치원
이 찬술한 숭복사비는 헌강왕과 진성여왕 오누이를 日弟兄과 月姉妹라 표
현했고, 寶雨經과 大雲經을 인용하면서 여왕의 즉위를 합리화했다.
신라는 불교식 왕명 시대에 건원을 했고 사실상의 칭제도 했다. 하지
만 진덕여왕이 독자적인 연호를 포기하고 제후국 체제를 수용한 이래 칭
제건원을 하지 못했고, 폐하·천자·황제·崩 용어를 사용하지 못했다. 김
씨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 종묘 제도를 도입했지만 제후국의 5廟를 사용해
야 했다.16) 당 황제는 신라 임금을 책봉하면서『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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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김창겸은 다양한 자료를 조사하고 분석해 신라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녔고 신
라의 국왕이 황제적 지위를 지녔다는 주목할만한 연구를 수행했다. 2004「신라
국왕의 황제적 지위」『신라사학보』2. 단,『 삼국유사』에 나오는 칭호를 그대로
받아들여 논지를 전개했다는 점은 문제가 되지 않나 싶다. 한편, 미륵사 사리
기문에 백제 무왕이 ‘대왕폐하’라 표현된 점으로 보아 신라 임금이 독자연호 시
절에 ‘폐하’로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16) 신라 종묘는 혜공왕 때 도입되었는데 金姓始祖인 미추왕, 백제와 고구려를 평
정한 태종대왕과 문무대왕을 不毁의 신주로 하고, 親廟(祖廟와 考廟) 2개를 합
친 것이었다『( 삼국사기』권32, 雜志 1, 祭祀). 원성왕은 즉위하자 종묘에서 성
덕대왕과 개성대왕 2廟를 毁하는 대신에 자신의 조부 흥평대왕과 부친 명덕대
왕을 들여 5묘를 운영했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10, 원성왕 원년). 이러
한 5묘제는 재임 왕의 2代만 봉안할 수 있어 문제였다. 애장왕은 始祖廟를 알
이듯이‘ 신라국왕’이 아니라‘ 신라왕’이라 칭했으니 신라를 국가로 인정
하지 않으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면서도 신라는 하대로 가면서 잦은 정변
으로 인한 임금의 권위강화 필요와 당의 영향력 감소에 따라 황제·천자
를 연상하는 용어의 사용이 점차 늘어갔다.17)
신라에서 임금의 형제는 어떻게 불렸을까? 나이를 중시한 신라에서 형
을 제치고 동생이 임금이 되는 경우는 잘 확인되지 않으니 임금의 동생이
무슨 칭호를 받았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임금의 동생은『 삼국사기』신라
본기에 따르면‘ 王弟’로 불렸는데 자동적인 호칭이었다. 또한 太弟로도 불
렸는데18) 자동적인 호칭이었을 수도 있고 책봉이었을 수도 있다. 임금의 동
생은 통일 이전에는 葛文王에 책봉되었다. 대개 갈문왕은 왕이 되지 못한
왕의 부친, 王母의 부친, 왕비의 부친, 왕의 동생에게 주어졌다고 한다.19)
신라에는 국왕 외에도 여러 왕이 존재했으니 이는 신라의 국왕이 천자의
위상을 지녔음을 시사한다.
신라 임금의 아들은 어떻게 불렸을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임금의 아들은 王子로, 왕자들 중의 첫째는 長子·元子로 불리고 적통을
강조해 嫡子로 불리기도 했으며, 왕자들 중의 제일 연장자는 대개 太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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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하고 태종대왕과 문무대왕 2廟를 別立했으니 不毁 신주였던 그 2廟를 종묘
에서 빼어내 옮긴 것이었다. 그리고는 유일하게 不毁 신주로 남은 始祖大王에
다가 자신의 4代 즉 고조 명덕대왕, 증조 원성대왕, 조부 혜충대왕, 부친 소성
대왕을 합친 5묘를 운영했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10, 애장왕 2년). 이는
신라가 종묘 운영에서 천자국·황제국이 사용하는 7廟 이상의 제도가 아니라
제후국이 사용하는 5묘 제도를 채용했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였다.
17) 김창겸은 신라 하대 원성왕계 왕과 친족이 황제·황족의 지위와 의식을 가졌다
고 보았다. 1999「신라 원성왕계 왕의 황제·황족적 지위와 골품 초월화」『백산
학보』52.
18) 숭복사비에 따르면 경문왕의 동생 魏弘(尊諡 惠成大王)이 太弟로 불렸다.
19) 이기백, 1974「신라시대의 갈문왕」『신라정치사회사연구』, 일조각.
지 王太子에 책봉되었다.20)‘王子’는 책봉되는 것이 아니라 왕의 아들을 의
미해 자동적으로 불려지는 것이었다. 왕자들 서열에 嫡庶가 구별되었는지
는 확실하지 않다. 드물지만 효성왕이 王弟인 파진찬 憲英(후의 경덕왕)을
태자에 책봉하고, 헌덕왕이 母弟 秀宗(흥덕왕)을 副君(태자의 별칭)으로 삼
아 月池宮에 들이고, 진성여왕이 헌강왕의 庶子인 조카 嶢(후의 효공왕)를
태자에 책봉한 예처럼,21) 국왕의 동생이나 조카가 태자에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경우 왕과 태자가 擬制的으로 부모와 자식이 되었다고 볼 수
도 있고, 태자가 자식의 의미보다 왕위후계자로서의 의미를 더 지녔다고
도 볼 수 있다.
신라에서 태자는 국왕 계승권자였지만 그 위상이 절대적·초월적이지
는 못했다. 국왕의 태자가 나이가 어리면 국왕의 동생이나 사위가 태자를
제치고 다음 국왕에 올랐다. 중대로 가면서 태자의 위상이 상승하지만 하
대로 가면서 하락한다. 태자의 위상이 이러했으니 다른 왕자들의 위상은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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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김창겸에 따르면, 신라의 태자 책봉은 진흥왕이 銅輪을 태자로 책봉한 데에서
비롯되었고 무열왕이 원자 法敏을 태자로 책봉하면서 본격화했는데, 법민 태
자책봉은 嫡長子 왕위계승 원칙의 확립을 의미했다고 한다. 신라 하대에는 태
자가 법제·정치적 의미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는데 父子 왕위계승을 원칙으로
하면서도 왕위 형제계승의 양상이 있었다고 한다. 1993,「 신라시대 태자제도의
성격」『한국상고사학보』13
21)『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효성왕 3년 5월; 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정월;
권11, 신라본기 진성왕 9년 10월. 월지궁 즉 안압지 일대는 東宮으로 불리지만
태자궁은 아니었다. 이는 경덕왕 4년 7월에 東宮을 修葺하고 11년 8월에 東宮
衙官을 설치한 반면 17년 7월에야 滿月夫人이 경덕왕의 왕자(혜공왕)를 낳은
것『( 삼국사기』권9), 애장왕 5년 7월에 臨海殿을 重修하고 東宮 萬壽房을 新作
한 것『( 삼국사기』권10)에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태자가 존재하지도 않은데
東宮이 수리되고 衙官이 설치되었으며 東宮에 천자에 해당하는 국왕의 만수를
염원하는 萬壽房이 신축되었기 때문이다. 월지궁 즉 東宮은 기본적으로 왕궁
이었으니 규모가 방대하고 국왕 관련 행사가 종종 열렸던 점도 그것을 뒷받침
한다. 단, 그 일부가 태자궁으로 사용되었던 점은 인정된다.
욱 절대적이지 못했다. 왕자들은 고위이지만 관등을 띠었고 관직도 맡았는
데, 정치에 참여하는 달콤한 맛을 보았지만 다른 귀족들과 경쟁해야 했다.
왕자들보다 관등과 관직이 높은 귀족들이 꽤 존재했다. 이러한 특징들은 신
라가 연장자와 공로가 중시되는 귀족연합적인 사회였기 때문에 생겨났다.
진흥왕은 법흥왕의 조카이자 외손으로서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모친인
태후가 섭정해 국왕의 역할을 대리함으로써 나이의 문제를 해결했다.
王子와 王弟의 위상은 태종 무열왕의 왕자들을 통해 엿볼 수 있다.22) 무
열왕 김춘추는 즉위하자 원자인 法敏을 파진찬 병부령으로 삼았다. 둘째
아들인 仁問은 진덕여왕 이래 파진찬(4등)을 띠고 당에서 숙위하고 있었
다. 무열왕은 2년에 元子 법민을 태자에 책봉하고, 庶子 文王을 伊.(2등)
으로, 老且(老旦)를 海.(4등)으로, 仁泰를 角.(1등)으로, 智鏡·愷元을 각
각 伊.(2등)으로 삼았다. 5년에 文王을 中侍로 삼았다. 7년 6월에 파진찬
金仁問과 당의 蘇定方이 당나라 군사 13만을 이끌고 왔다. 왕이 태자와 대
장군 이찬 庾信, 장군 品日 등에게 명령해 병력 5만으로 백제를 공격하도
록 했다. 8년에 백제의‘ 殘賊’이 사비성을 공격하니 이찬 品日을 大幢將軍
으로, ..(3등) 文王 등을 副로 삼았다.
문무왕 원년에 왕이 백제의 餘衆을 없애기 위해 이찬 品日, 蘇判(3등)
文王 등에게 공격하기를 명령했다. 문무왕 5년에 이찬 文王이 卒하니 王子
禮로 장례했다. 7년에 당 황제가 智鏡과 愷元으로 장군을 삼아 遼東의 役
에 나아가게 하니, 왕이 智鏡으로 파진찬(4등)을, 愷元으로 대아찬(5등)을
삼았다. 8년 3월에 파진찬 智鏡으로 中侍를 삼았다. 8년 6월에 劉仁軌가 당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63
22)『 삼국사기』신라본기, 김유신전, 김인문전.『 삼국유사』太宗春秋公 항목에는
태종대왕이 龍樹(一作 龍春) 각간, 追封 文興大王의 아들이고 .는 진평대왕의
딸 天明夫人이고, 妃는 文明皇后 文姬였는데 유신공의 季妹였다. 태자 법민,
각간 인문, 각간 文王, 각간 老且, 각간 智鏡, 각간 愷元 등은 모두 文姬가 낳
았고, 庶子 皆知文 級干·車得令公·馬得 阿干, 아울러 女 5인이었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당항진에 이르니 왕이 角干(1등) 김인문에게 맞이하
게 했다. 大角干 김유신으로 大幢大摠管을 삼고, 각간 金仁問·欽純 등과
파진찬 智鏡, 대아찬 良圖·愷元·欽突로 大幢摠管을 삼고, 이찬 仁泰로
卑列道摠管을 삼았다. 신문왕이 3년에 이찬 文潁·愷元을 一吉.金欽運
의 宅에 보내 그 少女를 자신의 夫人으로 책봉했다.
무열왕 2년에 김인문은 파진찬(4등), 김문왕은 이찬(2등), 김노차는 해
찬(4등), 김인태는 각찬(1등), 김지경과 김개원은 각각 이찬(2등)으로 기록
되어 있다. 그런데 김문왕이 무열왕 8년에 잡찬(3등), 문무왕 원년에 소판
(3등)으로 나타나니 기록대로라면 이찬(2등)에서 강등된 것이 된다. 김문
왕이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 것일까. 무열왕이 아들 김문왕을 멀리했던 것
일까.
문무왕 7년에 김지경이 파진찬(4등)을, 김개원이 대아찬(5등)을 받았고
8년에도 이 관등을 띠고 있었으며, 김인태는 8년에 이찬으로 나타난다. 기
록대로라면 김지경은 이찬(2등)에서 파진찬(4등)으로, 김개원은 이찬(2등)
에서 대아찬(5등)으로, 김인태는 각찬(1등)에서 이찬(2등)으로 강등된 것이
된다. 문무왕이 자신의 태자를 위해 이들 동생들을 격하시켰던 것일까. 아
무리 중대에 王弟의 위상이 이전보다 하락했다고 하지만 그들의 경우 지
나치다.
무열왕 2년에 왕자들에게 부여한 관등은 그들이 후대에 띠는 관등과 혼
동되어 기록된 것으로 판단된다. 무열왕의 둘째 아들로 중국에서 활약한
김인문이 파진찬으로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당시 김인
문·김문왕·김고차·김인태는 4등인 파진찬(해찬) 정도를, 김지경과 김
개원은 5등인 대아찬 혹은 6등인 아찬 정도를 띠었을 것이다. 물론 이들은
이후에 승진을 했다. 김인문은 문무왕 때 각간에 올랐고, 김문왕은 잡찬
(소판)을 거쳐 문무왕 때 이찬에 올랐고, 김인태는 문무왕 때 이찬에 올랐
고, 김개원은 문무왕 말엽 내지 신문왕 초엽에 이찬에 올랐다. 王弟는 통
264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일기에 갈문왕을 받지는 못했지만23) 일반 왕자보다는 서열이 높았다.
갈문왕은 王爵이므로 신라에 封爵 제도가 시행된 것이고 그 대상에 王
弟가 포함되었지만 일반 왕자들은 王爵을 받지도 않았고 公·侯 작위를 받
지도 않았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인명 뒤에 붙은‘ 公’이 자주 등장하
지만 작위이기보다 존칭으로 보여진다. 王弟는 王子보다 서열이 높았으며,
통일기에는 태자보다 서열이 낮았다. 갈문왕을 받는 시절의 王弟가 태자
와 서열이 어떠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영일 냉수리비에 의하면, 斯羅의 喙 斯夫智王과 乃智王, 이 二王이 敎
하여 珍而麻村의 節居利에게 재물을 주라고 했고, 계미년에 沙喙의 至都
盧 갈문왕·斯德智 阿干支·子宿智 居伐干支와 喙의 .夫智 壹干支·只
心智 居伐干支와 本彼의 頭腹智 干支와 斯彼의 暮斯智 干支, 이‘ 七王等’
이 함께 논하여 前世 二王의 敎로써 증명하여 節居利에게 재물을 주라고
敎하였다.‘ 七王等’의‘ 王等’을 왕들로 보는 시각, 왕과 等(관직)으로 보
는 시각이 있다. 전자를 따른다면, 신라의 국왕은 갈문왕과 여러 왕(干)을
거느리는 천자의 지위를 가진다.
2. 고려 왕실
고려왕실 남성의 칭호를 살펴보자. 임금의 칭호로는 왕, 대왕, 국왕은
물론 천자, 황제 등도 쓰였다. 천자와 황제 칭호가『 고려사』와『 고려사절
요』에는 조선초 편찬과정에서 삭제되어 버렸지만 고려시대 금석문과 문집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65
23) 갈문왕은 통일기에 소멸하지만 왕의 부친(생존시 왕이 되지 못한 경우) 등에게
추봉되는‘ 大王’ 칭호로 계승되었다고 한다. 이기백, 앞의 논문
24) 敎雄 묘지명; 王.묘지명; 왕효 묘지명; 張忠義 묘지명; 王瑛 묘지명; 유공권
묘지명; 최보순 묘지명; 이규보 묘지명. 신라 경순왕이 태조 18년에 고려에 來
朝해 上書한 글이 실린『 보한집』상권에는‘ 幸觀天子之光’이라는 부분이 있었
는데 같은 내용이 실린 『고려사』태조세가에는 노명호가 뒤의 1999 논문에서
에는 풍부하게 남아 있다.24) 고려의 임금이 천자 내지 황제로 즐겨 불린 것
은 고려가 천자국 내지 황제국 체제를 운영했기 때문이었다.25) 광종은 자
신의 광덕과 준풍 연호를 사용하고 皇帝陛下로 불리고 개경을‘ 皇都’라 칭
한 것26)으로 보아 공식적 혹은 대외적으로 稱帝를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
는 대개 내부적으로 칭제를 했을 뿐만 아니라 사대를 해 고려국왕을 책봉
받는 중국과 북방강국을 제외한 여진, 일본, 탐라 등에 대해서는 대외적으
로도 칭제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27)고려의 신하들은 임금을 칭할 때에‘ 神
聖帝王’이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했는데 금을 사대하는 인종 시절에 한 때
266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지적했듯이 의도적으로 삭제되었다.
25) 김기덕은 고려가 황제국 체제를 지향했음을 본격적으로 설파했다. 그는 고려
가 봉작받은 왕족을 諸王·親王이라 하고, 詔勅·폐하·짐·태자·태후·節
日 등의 명칭을 사용하고, 3성 6부·七廟·五軍을 운영하고, 皇都와 皇城을 지
녔던 것 등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 1997「고려의 諸王制와 황제국체제」『국사
관논총』78. 이어서 노명호가 고려에서 천자·황제 및 그와 관련된 용어가 광
범위하게 쓰였고 고려 전·중기 대부분의 시기에 稱王과 稱帝가 공존했음을 밝
혀 고려가 나름대로의 천하관을 지녔음을 제시했다. 1999「고려시대의 다원적
천하관과 해동천자」『한국사연구』105.
26)『 고려사』권2, 광종 원년 정월·11년 3월; 고달원 원종대사 비문; 용두사 당간기
27) 이승휴는 금이 고려와 형제관계를 맺으려 했음을 노래하면서, 자신이 식목도
감에서 근무할 적에 열람한 문서 중에 금국황제의 친서 2통이 있었는데 모두
그 서두에“ 大金國皇帝 寄書于高麗國皇帝”라고 적혀 있었다고 설명했다『( 제왕
운기』상권). 그런데『 고려사』권14, 예종 12년 3월조에는 金主 阿骨打가 阿只
등 5인을 파견해 寄書하기를,“ 兄大女眞金國皇帝 致書于弟高麗國王 自我祖考
介在一方 謂契丹爲大國 高麗爲父母之邦 小心事之 契丹無道 陵轢我疆 奴隸我
人民 屢加無名之師 我不得已拒之 蒙天之祐 獲殄滅之 惟王許我和親 結爲兄弟
以成世世無窮之好”라고 했다고 되어 있다. 원래‘ 高麗國皇帝’로 표기된 것이
조선초 『고려사』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高麗國王’으로 수정되었다고 여겨진
다. 고려 임금은 인종 때 금을 사대하는 결정을 내리기 이전까지는 여진족에
보낸 문서에서 황제를 칭했으리라 생각된다.
그 호칭을 중단한 적도 있었다.28)
고려 임금의 자칭은 朕, 존칭은 陛下였고, 명령은 詔와 制를 사용했다.
유교화 정책을 폈던 성종 무렵에 한 때 敎를 사용한 적이 있지만 곧 詔와
制를 사용했다.29) 왕의 사망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는 모조리‘ 薨’
으로 되어 있지만 조선초 편찬과정에서‘ 崩’을 없애고 대신으로 집어넣은
것이었다. 고려 때는 국왕의 사망은 물론 태후의 사망도 崩 혹은 升遐로
표현되었다.30) 신라의 왕은 眞興王처럼 생시의 명칭인 경우가 있지만 고려
에서는 그러한 예는 발견되지 않는다. 고려의 임금은 사망하면 왕건이 시
호‘ 神聖(神聖大王)’과 묘호‘ 太祖’를 받고, 王徽(王緖)가 시호‘ 仁孝大王’
과 묘호‘ 文宗’을 받은 예처럼 諡號와 廟號를 받았다.31) 신라의 태조와 태
종 사례를 참고했을 것이다.
독자적인 연호는 고려를 처음 세운 궁예 임금이 즐겨 사용했다. 武泰,
聖冊, 水德萬歲, 政開 등이 그것이다.32) 그는 稱王했다고 나오지만 稱帝했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67
28)『 고려사』권16, 인종 16년 2월
29) 이는『 고려사』곳곳에서 확인된다. 특히『 고려사』범례에는‘ 宗’,‘ 폐하’,‘ 太
后’, ‘太子’, ‘節日’, ‘制詔’의 類는 비록 .踰하지만 지금 당시 칭하는 바를
따라 표기해 그 사실을 존속시켰다고 되어 있다. 조선초에 그러한 표현을 격하
하려다가 그나마 남은 것이었다. 충렬왕 2년 3월에 원의 압력으로 宣旨가 王旨
로, 朕이 孤로, 赦가 宥로, 奏가 呈으로 개칭되었다『( 고려사』권28).
30) 고려시대에는 일반인의 사망이‘ 卒’로 표기된 경우가 많지만, 李.·崔思諏·
崔繼芳·朴景仁·李公壽·許載·林光(林完)·朴.·金公.妻 梁氏·文公
元·崔.·崔允儀·金永錫·최유청 처 鄭氏·金永夫·崔惟淸·李文著·朴康
壽·崔忠獻 등의 사례(각자의 묘지명)에 보이듯이 꽤‘ 薨’으로 표기되기도 했
다. 그러하니 고려 때 대개 임금이나 태후의 죽음을‘ 薨’이라 하지 않았다. 효
숙인혜 태후(현종의 모후)가 崩『( 한국금석문』현 화사비), 문종과 순종이 차례
대로 昇遐와 崩(혜덕왕사 비문), 宣王(宣宗)이 垂崩(승려 昶雲 묘지명), 인종이
崩(王.묘미명), 숙종·모후(명의태후)·예종이 升遐(왕효 묘지명), 공예태후
가 崩(진광인 묘지명), 강종이 崩(이세화 묘지명)했다고 되어 있다.
을 가능성도 있다. 왕씨 고려에서는 태조 왕건이 天授,33) 광종이 光德과 峻
豊 연호를 반포했다. 인종 때 금에 대한 사대를 반대하고 금을 정벌하기를
주장하면서 서경세력과 윤언이에 의해 칭제건원이 제기되었다.34) 윤언이
는 칭제건원을 반대하는 김부식 등의 견해를 반박하는 근거로 태조와 광
종의 建元과 신라와 발해의 建元을 들었다. 신라의 建元이 발해의 건원과
더불어 고려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고려 임금의 아들은 왕자·皇子로, 동생은 王弟·皇太弟로 표현되었
다.35) 고려는 왕위계승에서 부자상속, 장자상속을 원칙으로 했지만 형제상
속의 경향이 강했다. 태조 왕건은 訓要36)에 왕위 계승권을 嫡子가 우선적
으로 가짐을 밝히면서도 왕의 元子가 不肖하면 次子가, 次子도 不肖하면
왕의 兄弟들 중에서 추대받은 자가 가짐을 밝혔다. 定宗과 광종이 전왕의
형제로 왕위를 계승했고, 성종과 현종이 전왕의 사촌형제로 계승했고, 靖
宗과 문종, 선종과 숙종, 명종과 신종이 전왕의 형제로 계승했다. 어린 아
들을 후계자로 삼으려 하면 정변이 종종 발생했다. 이제현의 贊에 따르
면,37) 현종의 세 아들 형제(덕종, 靖宗, 문종)가 서로 이어받았음에 익숙한
고려인들은 선종이 다섯 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孺子(헌종)를 세운 것
을 잘못이라고 인식했다. 이처럼 고려인들은 형제 계승, 연장자 계승의 사
고방식을 지녔는데, 이는 신라 때의 그러한 관습을 이어받은 것으로 여겨
268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31)『 고려사』역대 왕의 세가
32)『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12, 효공왕·신덕왕;『 삼국사기』권50, 열전, 궁예
33)『 고려사』권1, 태조 원년 6월
34)『 고려사』권96, 윤관전 첨부 윤언이;『 고려사』권127, 묘청전
35) 王子, 王弟는『 고려사』에 나타나는 표현이다. 금석문에서는 황자, 황태제가 확
인된다. 極世僧統이 皇子(이식 묘지명)로, 잠저시 신종이 황태제(최충헌 묘지
명)로 나타난다.
36)『 고려사』권2, 태조 26년 4월조
37)『 고려사』권10, 헌종 세가 끝 부분
진다.
왕위 계승자는‘ 太子’ 즉 王太子 혹은 皇太子(儲皇)로 불렸다.38) 그런
데 초기에는 태자가 여러 명이어서 왕위 계승자는 별도로‘ 正胤’이라 칭
해졌다.39) 태조 왕건의 아들 25명은 太子 혹은 大君·君·郞君 등으로 불
렸다. 정윤은 武(혜종)였고, 태자는 태자 泰(신명순성태후 劉氏 소생), 元
莊太子(정덕왕후 柳氏 소생), 壽命太子(헌목대부인 평씨 소생), 孝穆太
子·孝隱太子(동양원부인 庾氏 소생), 元寧太子(숙목부인 소생), 孝成太
子·孝祗太子(천안부원부인 林氏 소생), 太子 稷(흥복원부인 홍씨 소생),
孝悌太子·孝明太子(성무부인 박씨 소생) 등 11명이었다. 君 유형은 王堯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69
38)『 고려사』에는 대개 太子 내지 王太子로 나타난다. 황태자(저황)의 사례는 잠저
시 순종이 儲皇으로, 잠저시 예종이 황태자로 불린 데에서 확인된다(이정 묘지
명; 이공수 묘지명).
39) 태조 왕건의 아들 王武가 태조 4년 12월에 정윤에 책봉되었고『( 고려사』권1),
광종의 아들 王.가 광종 16년 2월에 태자 및 정윤에 책봉되었는데『( 고려사』권
2), 왕무는 태자로도 불린 점『( 고려사』권2, 태조 26년 5월조)으로 보아 태자도
띠었을 가능성이 크다. 혜종은 興化君(義和王后 林氏 소생)과 태자 濟(宮人 哀
伊主 소생)를 두었는데『( 고려사』후비전), 흥화군은 정윤에 책봉되었을 가능성
이 크다. 경종은 6년 7월에 사촌인 정윤 開寧君 治(성종)에게 보위를 넘겼는데
『( 고려사』권2), 왕치가 정윤에 책봉되면서 후계자로 된 것이었다. 김기덕은 태
자라는 공적인 명칭을 여러 왕자들이 사용했으므로 혈연적인 내용을 갖는 사
적인 정윤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여러 태자 중에서의 정통계승자를 뜻하도록 했
다고 보았으며, 광종이 16년에 아들 .(경종)를‘ 立爲王太子內史諸軍事內議令
正胤’했다는『 고려사』의 기록을 중시해 태자만이 왕위계승자로 되었고 이 정
윤과 경종의 유언에 나타나는 정윤(성종)은 遺習에 불과하다고 보면서 광종이
16년에 .를‘ 立爲正胤 內史諸軍事內議令’ 했다는『 고려사절요』의 기록은 착
오라 했다. 1992「고려 광종대 왕권강화와 태자책봉」『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
념 한국사학논총』(상). 하지만 정윤도 공적인 명칭으로 정윤이 성종~목종 무
렵까지 왕위 정통계승자였다고 보고 싶다. 정윤을 내세운 『고려사절요』의 기
록이 정곡을 찌른 것이다.
君·王昭君(신명순성태후 劉氏 소생), 王位君·仁愛君·助位君(정덕왕후
柳氏 소생), 황주원낭군(신정태후 황보씨 소생), 광주원군(소광주원부인
왕씨 소생), 法登君·資利君(성무부인 박씨), 義城府院大君(의성원부인 홍
씨) 등이었다.40) 정윤은 책봉을 거쳤고, 태자와 君도 그러했을 것이다. 효
은태자는 혹은 東陽君이라 칭해졌다는 것으로 보아 동양군이라 불리다가
효은태자로 격상된 것으로 보인다.41)
태조 왕건의 정윤과 태자는 왕건과의 친밀도, 각 외가의 세력 크기와
지역 중요도 등이 고려되어 책봉되었다고 생각된다. 정윤과 태자를 배출
한 가문이 貞州 신혜왕후 柳氏처럼 아들이 없는 경우를 예외로 하고 세력
을 지녔다.42) 왕무의 외가는 원래 세력이 약했지만 長子라는 위상과 나주
의 중요성이 작용해서 왕무를 정윤으로 만들 수 있었다. 11개 가문의 장자
(형이 요절한 경우 포함)가 태자를 띠었고, 이 중에서 3개 가문이 차자까
지 포함해 2명의 태자를 배출했다.43) 이 3개 가문, 즉 동양원부인(유금필의
딸)의 평주 庾氏와 천안부원부인(林彦의 딸)의 천안(←경주) 林氏와 성무
270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40)『 고려사』권88, 후비전 태조의 배필 ;『 고려사』권90, 종실전 태조의 아들. 王
堯君(정종 王堯)과 王昭君(광종 王昭)은 興寧寺 澄曉大師 비문에 나타나는데 아
마 충주원군 내지 충주원낭군으로 불렸지 않았나 싶다. 黃州院郞君(王旭)은 大
安寺 광자대사 비문에 나타나는데 정용숙이 1988『고려왕실족내혼연구』, 새문
사에서 지적한 바 있다. 김기덕은 앞의 1992 논문에서, 고려초기 왕자 칭호를
君類, 太子類, 其他로 분류해 분석했다.
41) 태조의 아들들 중에서 처음부터 태자에 책봉된 경우도 있었을 수 있지만, 대개
는 어느 정도 자라면 군에 책봉되었고, 그 이후 일정한 기간이 흐른 후에 세력
관계 등이 고려되어 일부가 태자에 책봉되었을 것이다. 천안부원부인 林氏와
숙목부인 林氏 소생도 각각 郞君이라 불리다가『( 고려사』권93, 최승로전 ;『 고
려사』권2, 경종 원년조) 태자가 되었다.
42) 아들이 요절해 태자를 배출하지 못한 경우도 고려되어야 한다.
43) 정덕왕후 柳氏의 아들은 王位君, 仁愛君, 元莊太子, 助位君이었다. 셋째인 원
장태자가 태자가 된 것은 형 왕위군과 인애군이 요절했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부인(박지윤의 딸)의 평주 박씨가 각각 2명의 태자를 배출한 것은 세력과
위상이 특별히 크고 높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태자가 되지 못한 君들은 세
력이 약하거나 주류가 아닌 경우와 나이로 인한 경우로 생각된다.44) 태자
와 군은 부왕의 사후에도 그대로 유지되었으니 王弟의 명칭, 王叔의 명칭
으로도 사용되었다.
君, 태자, 정윤 체제는 태조 사후에도 성종 무렵까지 유지되었다. 혜종
은 태조의 정윤으로서, 경종은 광종의 정윤으로서, 성종(경종의 사촌)은 정
윤으로서 즉위했다. 광종 때에도 정윤(경종) 외에 孝和太子(경종의 친형
제)가 있었다.45) 광종은 치세 16년에 아들 .(11살)를 元服을 입히고 王太子
內史諸軍事 內議令 正胤에 책봉했다. .는 태자이자 정윤이었는데 정윤이
보위계승권자로 더 중요했다. 정윤이 꼭 태자를 띠거나 거쳐야 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종대에는 君은 유지되지만 정윤은 사라지고 오직 1명의
태자가 후계자의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君이 현종 이전에는 대개 모친의
고향 명칭에서 유래한 궁원의 칭호를 붙여 정해져 왔는데, 현종 이후에는
대개 국호 등을 붙여 정해진다.46) 현종의 장자는 모친 延慶宮主의 호칭에
서 유래한 延慶君(덕종)에 책봉되었다가 태자에 책봉되었고, 다른 아들들
은 平壤君(靖宗), 樂浪君(문종) 등에 책봉되었다.47)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71
44) 김창겸은 고려 초기의 태자를 왕의 모든 아들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로 파악했
지만(앞의 1993 논문) 의문이 간다. 태조의 아들들 중에서 태자가 아닌‘ 君’의
칭호를 가진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45)『 고려사』권88, 후비전 광종의 배필 ;『 고려사』권90, 종실전 광종의 아들
46) 하현강, 1988『한국중세사연구』, 일조각; 정용숙, 1988『고려왕실족내혼연구』,
새문사 ; 김기덕, 앞의 1992 논문 및 1998『고려시대 봉작제 연구』, 청년사. 한
편, 현종 이후 封君, 封爵에는 국호와 더불어 도읍 명칭도 애용된다.
47)『 고려사』덕종 총서, 靖宗 총서, 문종 총서;『 고려사』권4, 현종 7년 5월·9년
7월·11년 4월·12년 5월. 정윤 혹은 태자가 되는 나이를 무신정변 이전까지 살
펴보면, 혜종은 7살에 정윤에 책봉되려다가 실패하고 10살에 박술희의 도움으
고려의 왕자, 王弟·王兄의 칭호는 문종 때에 가서 封爵制로 전환한
다.48) 문종은 동생 基를 平壤公에, 조카(靖宗의 아들)를 상서령 낙랑후와
상서령 개성후에, 아들들을 상서령 國原侯, 상서령 朝鮮侯, 鷄林侯, 상서
령 平壤侯, 金官侯, 卞韓侯, 扶餘侯, 樂浪侯(追封)에 책봉했다.49) 문종대에
아들 국원후는 國原公으로, 아들 조선후는 朝鮮公으로, 아들 계림후는 .
林公으로 승진한다. 국원공은 형 순종이 즉위하자 중서령을 받았고, 계림
공은 조카 헌종이 즉위하자 상서령을 받았고, 정변에서 승리하자 중서령
을 받았다. 문종이 조카를 책봉한 것은 특수한 경우이다. 靖宗이 11년 동
안 재위하다가 아들들을 미처 封君하지 못하고 세상을 뜨자 문종이 그들
을 封爵했던 것이니, 정종의 아들들은 문종의 조카로서보다 정종의 아들
로서 봉작되었다고 보여진다. 인종의 둘째 아들 暻과 셋째 아들 晧(명종)
는 부왕대에 미처 봉작되지 못하고 형인 의종의 치세 2년에 大寧侯와 翼陽
侯에 책봉되지만50) 형의 꺼림을 받아 公으로 승진하지 못했다.
272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로 책봉되었다.『 고려사』권88, 후비전, 태조의 장화왕후;『 고려사』권1 및『 고
려사절요』권1, 태조 4년 12월. 경종은 11살에 태자·정윤에 책봉되었고, 성종
은 경종이 위독하자 22살에 正胤 開寧君에 책봉되면서 보위에 올랐고, 덕종은
7살에, 순종은 8살에, 예종은 21살에, 인종은 7살에 태자에 책봉되었다『( 고려
사』세가). 의종은 7살에 태자에 책봉되었지만 취소되었다가 17살에 다시 책봉
되었다『( 고려사』인종세가 및 의종 총서). 대개 정국 안정을 위해 될 수 있으면
10살을 넘기지 않고 책봉하려는 경향이 대세였다. 예종의 경우는 부친 숙종이
정변을 통해 즉위한 점과 숙종이 강한 권력욕을 지닌 점이, 의종의 경우는 서
경파와 개경파의 갈등, 왕실 안의 갈등이 작용했을 것이다.
48) 고려의 봉작제가 문종 때 성립하고 그것의 내용이 어떠했는지는 김기덕, 앞의
1998 책에 자세히 밝혀져 있다. 다만 책봉 받는 구체적인 시기와 승진이 애매
한 부분이 있어 좀더 살펴보려 한다.
49)『 고려사』문종 세가 ;『 고려사』선종·숙종 총서 ;『 고려사』권90, 종실전 현
종·靖宗·문종 아들.
50)『 고려사』권17, 의종 2년 11월.
태자가 아닌 왕자는 처음에 侯를 받았는데, 부왕의 치세가 길면 부왕
때에 公으로 승진하기도 했고, 부왕대에 미처 侯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
었다. 왕자는 부왕의 사후에 태자·원자 혹은 다른 왕자가 국왕에 오르면
王弟·王兄이 되는데 봉작이 없으면 侯를 받았고, 아직 侯인 경우 큰 갈등
이 없으면 대개 公으로 승진했다. 왕제는 대개 侯보다 公을 띠게 되는 것
이다. 왕의 부마는 公·侯가 아닌 경우 伯을 띠었는데, 侯·公으로 승진할
수 있었다. 公侯伯의 아들은 司徒·司空(정1품)을 받았다.51)
고려 왕실의 公侯伯은 諸王·親王으로 불려졌는데, 여기에 넓게는 공
후백의 아들인 사도·사공까지 포함될 수 있다.52) 諸王인 公侯伯은 宮과 府
를 지녔고,53) 宮院田과 녹봉을 받았고54), 宮院의 예(뒤에 언급)에 따라 노비
등을 지급받았다. 왕자, 왕제, 부마는 공후백이면서 제왕·친왕으로서 왕
이기도 했다. 고려 국왕은 제왕·친왕을 거느렸으니 천자 내지 황제의 위
상을 지니게 되었다.
국왕의 형제 중에서 대개 사후이지만 실제로 王爵을 받은 사례도 발견
된다. 광종의 친동생 貞은 文元大王인데, 封贈한 이유를 역사에서 빠뜨려
모르겠다고『 고려사』종실전에 적혀 있다.55)處女 왕씨는 그의 묘지명에 따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73
51)『 고려사』권90, 종실전.
52) 고려왕실에서 태자를 제외한 모든 왕자는 侯에 初封되고 공주의 부마는 伯에
初封되고 이들이 公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며, 公侯伯의 子와 女壻는 司徒나 司
空이 수여되었으며, 公侯伯과 그들의 아들인 司徒·司空을 총칭해 諸王이라 했
음을 김기덕이 앞의 1998 저서에서 제시했다.
53) 문종이 諸王府를 설치해 典籤(종8품) 1인, 錄事(종9품) 1인, 書藝 1인을 두었다.
妃父는 물론 공주와 결혼한 자도 立府해 典籤과 녹사를 두었다. 『고려사』권
77, 백관지 諸妃主府 첨부 諸王子府. 왕의 子弟가 거처하는 곳도『 고려도경』권
6, 궁전에 따르면 宮이라 했다.
54) 김기덕, 앞의 1998 책, 3장 3절.
55)『 고려사』권90, 종실전 문원대왕 貞. 문원대왕의 아들 千秋殿君은 광종의 딸
르면, 定懿公 梓의 處子(딸)이고, 良僖公의 손녀, 낙랑공 瑛의 증손녀, 현
종 第四子‘ 靖簡王’의 5世孫, 숙종 第三子 大原公의 外孫으로 마땅히 王者
妃가 되어야 했지만 적당한 짝이 없어 혼인하지 않고 지내다가 43세로 卒
했다.56)‘靖簡王’은 현종의 아들이자 문종의 동생인 평양공 基의 추증이었
다. 평양공 基는 문종 23년에 卒하고 후에 靖簡王으로 追封되었다.57) 源은
그의 묘지명에 따르면 문종의 손자이고, 朝鮮國‘ 禳憲王’의 둘째 아들이
었다. 그는 숙종의 第三女인 順貞公主와 결혼해 숙종 때 廣平伯에 책봉되
고, 인종 때 廣平侯를 거쳐 廣平公에 책봉되었다. 문종의 아들 조선공 燾
가 숙종 4년에 卒해 시호‘ 襄憲’을 받았으니58), 朝鮮國 禳憲王은 숙종의 형
제 朝鮮公 燾의 추증이었다.
이처럼 고려 국왕의 형제로서 왕작을 받은 사례들은 그들의 높은 위상
을 말해준다.59) 이러한 사례와 친왕(제왕)의 존재는 고려가 천자국·황제
국 체제를 운영한 데에서도 기인하지만, 신라 때 왕제가 갈문왕을 받았던
데에서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특히 부친이 왕이 아닌 국왕이 선조를 왕
으로 추증한 것60)과 왕의 형제를 왕으로 추증한 것은 신라의 전통을 이어
받은 측면이 크다. 고려의 왕자, 왕의 형제는 관직체계를 벗어난 초월적인
274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과, 딸(獻懿王后 劉氏)은 광종의 아들 경종과 결혼했다『( 고려사』종실전 태조
의 아들, 후비전 경종의 배필). 貞은 형 광종의 치세 혹은 사위 경종의 치세에
‘文元大王’이라 불려졌을 것인데, 원래‘ 君’이었으리라 여겨진다.‘ 문원대왕’
이 생존시 칭호였을 가능성도 있다.
56) 王.女 王氏 묘지명
57)『 고려사』권90, 종실전 현종의 아들
58)『 고려사』권90, 종실전 문종의 아들
59) 흥녕사 징효대사 비문의 陰記에 ‘□□大王’ ‘弼榮大王’이 새겨져 있는데, 여
기의‘ 大王’이 王爵인지, 大匡과 같은 것인지 불확실하다.
60) 성종은 부친 王旭에게 시호 睿聖宣慶太王과 廟號 戴宗을, 현종은 부친 王郁에
게 시호 孝穆大王과 묘호 安宗을 추증했다.『 고려사』권90, 종실전 태조의 아들
존재여서 일반 관료와 경쟁하지 않았다. 관직을 갖더라도 명예 최고직인
내사령, 중서령 등을 띠었다. 태자를 제외하면 원칙적으로는 정치 참여가
제한되었다. 물론 중서령 계림공(숙종)이 조카 국왕을 무력화시켜 권력을
행사한 예처럼 때때로 정치에 참여한 경우도 있었다.
고려는 중국이나 북방강국을 형식적으로 사대하면서도 고려 중심의 천
하관을 지녔다.61) 고려 임금은 천명을 받은 天子, 용의 자손인 龍孫62)으로
간주되어 신성시되었다. 왕실 칭호는 물론 궁궐과 대묘(태묘) 제도, 3성 6
부를 핵심으로 한 관직 제도, 팔관회를 대표로 하는 의례 등 여러 면에서
황제국 내지 천자국 체제를 운영했다.63) 여기에는 중국 제도의 영향을 받
은 측면도 있고, 신라 중심의 천하관이 일정하게 수용된 측면도 있고, 고
려 나름의 측면도 있다.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75
61) 노명호는 앞의 1999 논문에서 고려인이 自國中心 천하관, 華夷論的 천하관, 多
元的 천하관을 지녔는데 무신집권기까지 다원적 천하관이 다수를 이루었다고
보았는데, 고려를 포함해 여러 천하를 설정하는 다원적 천하관과 고려를 천하
중심으로 설정하는 자국중심 천하관은 서로 포함될 수 있다.
62) 龍孫 의식은『 고려사』앞에 실린『 高麗世系』및『 고려사』권128, 이의민전 및
권130, 김준·임연·배중손전 등에 나타나 있다.
63) 고려가 성종 때 종묘 제도를 처음 도입한 때에는 제후국의 5廟를 운영했는데
신라 5묘 제도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고려는 곧 천자국의 대묘 제도
로 전환해 9廟를 운영했다.『 고려사』권61, 예지 태묘;『 고려사』권7, 문종 10
년 10월. 팔관회에 대해서는『 고려사』권69, 예지 仲冬八關會儀 참조. 궁궐에
대해서는 김창현, 2002『고려 개경의 구조와 그 이념』, 신서원 참조.
1. 신라 왕실
신라 왕실 여성의 칭호를 살펴보기로 하자.『 삼국사기』에 신라 임금의
딸은‘ 王女’, 누이는‘ 王妹·王.’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자동적인 칭호이
다. 신라 임금의 딸과 누이가 公主에 책봉되었을까?『 삼국사기』에는 신라
의 공주가 확인되지 않는다.
『삼국유사』탈해왕 항목에서는 남해왕이 長公主를 탈해의 妻로 삼았는
데 이가 阿尼夫人이라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승려 아도가 미추왕
의 成國公主의 질병을 치료한 이야기, 진평왕의 第三公主 善花 즉 宣化公
主가 백제의 薯童(武王)과 결혼한 이야기, 태종 무열왕 때 瑤石宮의 寡公
主가 원효를 궁으로 들여 관계하여 薛聰을 낳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64) 하
지만 금석문과『 삼국사기』에서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공주’ 칭호가 당시
에 실제로 사용되었는지 아직 확실하지 않다.
그런데, 최치원이 정강왕 원년(886) 무렵에 찬술한「 華嚴經社會願文」에
따르면, 聖上(정강왕)과‘ 北宮長公主’가 兄인 헌강대왕을 위한 結社를 일
으켰다. 경문왕의 자녀 헌강왕, 정강왕, 진성여왕이 차례로 즉위했으니 여
기의 북궁장공주는 잠저시의 진성여왕이다.65) 경덕왕 때에 .姉妹 3인이
갈항사 탑을 세웠는데 .은 영묘사 언적법사였고, 姉는 照文皇太后(원성
왕의 모친)였고, 妹는 敬信‘太王’(太主로 판단됨)이었다. 開仙寺의 석등은
경문대왕, 文懿皇后(경문왕의 배필), 大.(잠저시의 진성여왕)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다. 심원사 수철화상탑비에는 진성여왕이 端儀長翁主에게 敎
276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64)『 삼국유사』권1, 紀異 2, 南海王; 권3, 興法 3, 阿道基羅; 권2, 紀異 2, 무왕 ;
권4, 義解 5, 元曉不羈
65)『 삼국유사』紀異 경문대왕 항목에는 헌안대왕의 2女에서 맏딸은 上公主 내지
長公主로, 둘째딸은 第二公主 내지 弟主로 표현되었다.
勅해 수철화상을 심원사에 머물기를 요청하게 했다. 최치원이 진성여왕 때
찬술하고 경명왕 때 건립된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에는 경문왕 때 未亡人 端
儀長翁主가 단월로서 불교행사를 후원했다. 왕의 딸과 자매가 公主, 太主,
大., 翁主 등으로 불려졌는데, 太主와 大.은 長公主를, 옹주는 후궁 소
생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처럼 신라말에는 王女·王妹가 공주 혹은 옹주
의 지위를 띤 사례가 발견된다. 신라 중대에는 당의 눈치를 보느라 공주라
칭하지 못하다가 하대에는 당의 약화를 틈타 공주를 칭한 것이 아닌가 싶
다.66)
유리 이사금 치세에, 왕(유리)이 6부를 中分해 王女 2인으로 하여금 각
기 部內 여자를 거느리고 가을 7월 旣望부터 매일 일찍 大部의 뜰에 모여
績麻 즉 길쌈을 하여, 8월 15일에 그 공로의 다소를 고찰해서 진 쪽이 술과
음식을 갖추어 이긴 쪽을 대접했고, 歌舞百.가 공연되었는데, 이를 嘉俳
라 했다.67) 이는 왕녀들이 왕경의 여자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었음을 시
사한다.
신라 임금의 배필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
면 혁거세 거서간이 閼英을 納하여 妃로 삼았고, 거서간이 6부를 巡撫할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77
66) 신라의 王女와 王.·王妹에 대해서 밝혀내야 할 사항들이 많다. 태종 무열왕
은 셋째 딸인 왕녀 智照를 김유신에게 下嫁시켰다.『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2년;『 삼국사기』권43, 김유신전. 문무왕은 王妹를 보덕왕 安勝과
결혼시켰다.『 삼국사기』권7, 신라본기, 문무왕 20년. 헌안왕은 장녀를 왕족 膺
廉(僖康王子 啓明 아찬의 아들)과 결혼시켰고, 응렴(경문왕)은 사위로서 왕위
에 오르자 헌안왕의 둘째딸을 次妃로 삼았다.『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헌안
왕 4년·5년 및 경문왕 3년. 그녀들이 공주였는지, 공주였다면 결혼 후에 그 신
분을 유지했는지 불확실하다. 한편, 왕흥사 사리석에 백제 창왕의 누이가‘ 공
주’로 표현된 점으로 보아 신라 임금의 누이 혹은 딸도 독자연호 시절에 ‘공
주’라 불렸을 가능성이 있다.
67)『 삼국사기』권1, 신라본기 유리이사금 9년.
때 妃 閼英이 따라갔다.68) 또한 남해 차차웅의 母는 閼英夫人이고, 妃는 雲
帝夫人(一云 阿婁夫人)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후 임금의 편에서도 무
열왕대까지 이러한 형식으로 기술되어 있다.69) 임금의 배필이 무열왕대까
지 무슨‘ 夫人’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지증마립간의 妃 박씨는『 삼국사기』에는 延帝夫人(登欣 이찬의 딸)으
로,『 삼국유사』왕력에는 迎帝夫人으로 나온다.『 삼국유사』紀異 지철로
왕 항목에는 지철로왕(지증왕)이 牟梁部 相公의 딸을 궁중에 맞아들여 책
봉해 皇后로 삼았다고 되어 있지만, 그녀가 지증왕 때에 황후에 책봉되었
는지는 의문이다. 진흥왕의 妃는 박씨 思道夫人인데, 승려가 된 진흥왕을
王妃가 본받아 영흥사의 비구니가 되었고 진평왕 36년에 사망했다는 기사
에 보이듯이 王妃로도 나타난다.70) 이‘ 왕비’가 단순히 왕의 妃 즉 왕의 배
필을 의미했는지, 왕의 배필 중에 왕비라는 특정 지위를 의미했는지 명확
하지 않은데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울주 전천리 書石에,‘ 王妃 只
沒尸兮妃’,‘ .卽知太王妃 夫乞支妃’가 여러‘ 夫人’들과 구별되었음이 주
목된다. 학계에서 이 太王을 법흥왕으로 보고 있으므로 이 무렵에 왕(갈문
278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68)『 삼국유사』紀異 신라시조 항목에서는 진한 6촌 사람들이 그들이 키운 男(혁거
세)을 王으로, 女(알영)를 后로 삼았다고 되어 있다.
69)‘ 妃’는 임금의 여성 배필을 일반적으로 일컫는 경우와 임금의 여성 배필의 특
정한 지위를 일컫는 경우가 있다.『 삼국사기』에“ 妃는 누구이다” 라고 하면 전
자의 경우이다. 누구를 妃를 삼았다고 하든지, 納妃했다고 하면 전자인지 후자
인지 애매하다.『 삼국사기』에‘ 어느 왕의 妃(혹은 母)는 무슨 夫人이다’ 라는
부분의 夫人이 왕의 妃 혹은 왕모가 되기 이전의 칭호를 의미했을 수도 있다.
70)『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진평왕. 주보돈은 전천리 서석을 분석해 입
종 갈문왕 시절에 갈문왕의 처도 왕비라 불렸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2002『 금
석문과 신라사』, 지식산업사, 제3장. 한편, 미륵사 사리기문에 백제 무왕의 배
필이‘ 왕후’라 표현된 점으로 보아 신라 임금의 여성 배필이 독자연호 시절에
‘왕후’로 불렸을 가능성도 있다.
왕 포함)의 正妃가 다른 夫人과 구별해 妃로 표현된 것이다.『 삼국사기』신
라본기에는 법흥왕의 妃가 박씨 保刀夫人으로, 진흥왕의 妃가 박씨 思道
夫人으로, 眞智王의 妃가 知道夫人으로, 진평왕의 妃가 갈문왕 福勝의 딸
인 김씨 摩耶夫人으로 나오지만 법흥왕의 妃는 夫乞支妃였고 진흥왕의 妃
도 왕비였으니 진지왕 이후 임금의 배필도 王妃 내지 妃로 칭해졌으리라
생각된다. 물론 법흥왕 이후에도 임금의 배필이 처음에는 夫人이라 칭해
지다가 나중에 왕비 내지 妃로 승진했을 수도 있고, 次妃 혹은 후궁이 夫
人을 띠었을 수도 있다.
『삼국유사』왕력편에 따르면, 선덕여왕의 배필은 飮葛文王이었고, 무
열왕이 眞智王子 龍春(一作 龍樹) 卓文興葛文王의 아들이었다. 황룡사 구
층목탑 사리함기에 의하면 선덕여왕이 監君인 伊干 龍樹에게 명령해 황룡
사탑을 조성하게 했다.71) 용춘 내지 용수와 飮갈문왕 내지 卓文興葛文王은
동일인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여왕의 배필은 갈문왕 내지 監君으로 불렸
던 것 같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면, 태종 무열왕의 비는 文明夫人(김서현
角.의 딸)이었고, 문무왕의 母는 文明王后였으니 그녀가 왕후가 된 시기
는 남편의 치세이거나 아들의 치세였는데, 법흥왕 이래의 추세로 보아 남
편 치세에 적어도 왕비 내지 妃였을 것이다.『 삼국유사』太宗春秋公 항목
에 따르면 태종대왕의 妃는 文明皇后 文姬(庾信公의 季妹)였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따르면, 문무왕의 비는 慈儀王后(파진찬 善品의 딸)였다. 무열
왕 혹은 문무왕 때부터 皇后 칭호가 사용되었는지 의문이지만 王后 칭호
는 사용되었다.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79
71) 伊.龍樹는 진평왕 44년 2월에 內省私臣으로 大宮, 梁宮, 沙梁宮을 兼掌하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고, 51년 8월에 대장군 龍春·舒玄과 副將軍 庾信이 고
구려 娘臂城을 침략했다『(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신문왕의 비 김씨는 蘇判 金欽突의 딸로 태자 때에 納해졌는데 오랫동
안 子가 없다가 남편 치세 원년에 김흠돌의 모반 사건에 연좌되어 出宮당
했다. 신문왕은 3년 2월에 一吉.金欽運의 少女를 納하여 夫人으로 삼았
다. 이찬 文潁과 파진찬 三光을 보내 결혼 날짜를 정하고, 대아찬 智常을
보내 納采하게 했다. 5월에 이찬 文潁·愷元을 그 宅에 보내 그 딸을 夫人
에 책봉했다. 수레에 탄 좌우 侍從官人 및 ..가 심히 성했다. 그녀가 왕
궁 북문에 이르러 수레를 내려 入內했다.72) 그녀는『 삼국유사』왕력에 신
문왕의 妃가 金運公의 딸 神穆王后라고 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왕후로 승
진했을 가능성이 있다.
성덕왕은 3년 5월에 乘府令 蘇判 金元泰의 딸을 妃로 삼았지만 15년에
成貞(一云嚴貞) 王后를 出하여 彩 500필, 田 200결, 租 1만석, 宅 1區를 하
사했는데, 宅은 康申公의 舊居를 매입해 하사한 것이었다. 19년 3월에 이
찬 順元의 딸을 納하여 王妃를 삼았고, 6월에 王妃를 王后에 책봉했고, 23
년 12월에 炤德王妃가 卒했다고 한다.73) 그녀는 강등된 것이 아니라면 炤
德王后로 사망했다고 보아야 한다. 성덕왕의 첫 배필은 성정왕후(엄정왕
후)였고, 두 번째 배필은 소덕왕비를 거쳐 소덕왕후에 올랐다.
효성왕이 즉위하자 당 현종이 嗣王(효성왕)을 신라왕에 책봉하면서 王
妃 박씨를 책봉했다. 또한 효성왕이 3년에 이찬 順元의 딸 惠明을 納하여
妃로 삼자, 4년에 당이 사신을 파견해 夫人 김씨를 王妃에 책봉했다.74) 당
이 신라왕을 책봉하면서 그 배필을 王妃에 책봉한 점이 주목된다. 당은 신
280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72)『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 신문왕. 김흠돌 난에 대해서는 김수태, 1996『신라
중대정치사연구』, 일조각, 제1장이 참고된다.
73)『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 성덕왕.『 삼국유사』왕력에는 先妃가 陪昭王后(元大
의 딸)로 시호가 嚴貞이고, 後妃가 占勿王后(順元 각간의 딸)로 시호가 炤德이
라 되어 있다.
74)『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효성왕.
라왕의 배필이 王后라도 王妃에 책봉했다.『 삼국유사』왕력에는 효성왕의
妃가 惠明王后(眞宗 각간의 딸)로 되어 있다. 혜명은 당에 의해 왕비에 책
봉되었으니 신라에서 왕비였을 수도 있지만 왕후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경덕왕은 妃가 이찬 順貞의 딸이었지만, 2년 4월에 舒弗邯 金義忠의 딸
을 納하여 王妃를 삼았다.75)『삼국유사』왕력에 따르면 경덕왕의 先妃 三
毛夫人은 出宮 無後했고, 後妃는 滿月夫人(依忠 각간의 딸)으로 시호가 景
垂(景穆) 王后였다.『 삼국유사』권2찬기파랑가 항목에 따르면, 왕(경덕왕)
이 子가 없자 (先妃를) 폐하여 沙梁夫人을 책봉했고, 後妃는 滿月夫人인데
시호는 景垂太后로 依忠 각간의 딸이었으며, 滿月王后가 태자를 낳았지만
8세에 왕이 崩하자 태자가 즉위했는데 이가 혜공대왕이었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혜공왕의 元妃는 新寶王后(이찬 維誠의 딸), 次妃는 이찬 金璋
의 딸이었다.76)
정변으로 즉위한 宣德王의 妃는 具足夫人(각간 良品의 딸 혹은 아찬 義
恭의 딸)인데, 왕이 즉위하자 妻를 王妃로 삼았다. 그런데 원성왕이 원년
3월에 前妃(선덕왕의 妃) 具足王后를 外宮에 내보냈다.77) 이로 보아 선덕왕
의 배필은 구족부인에서 구족왕비로 승진하더니 구족왕후로 승진했다. 정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81
75)『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경덕왕.
76)『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혜공왕.『 삼국유사』왕력에는 先妃는 神巴夫人(魏正
각간의 딸), 妃 즉 後妃는 昌昌夫人(金將 각간의 딸)으로 되어 있다. 경덕왕이
先妃를 쫓아낸 것은 無子 때문이라기보다 정치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영
호는 신라 중대에 왕비의 출궁과 국왕의 재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며 그 원
인을 귀족세력 상호간의 力關係와 외척세력의 대두에서 찾았고, 중대의 국왕
은 한 명의 왕비와 혼인하는 것이 원칙이었다고 언급했다(2003「신라의 왕권과
귀족사회」『신라문화』22). 신라 국왕은 한 명의 元妃를 두는 것이 원칙이었다
고 보는 편이 나을 듯 싶다. 외척세력의 대두는 국왕 배필이 높은 위상을 지니
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반증한다.
77)『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선덕왕 ;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변에 참여해 즉위한 원성왕의 비 김씨는 神述 각간의 딸이었는데, 당 덕종
이 신라왕과 妃 등에게 선물을 보냈다.78)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찬술한 숭
복사비에는 파진찬 김원량이 肅貞王后(원성왕의 배필)의 外祖로 나오니,
원성왕의 비는 왕후에 올랐다. 소성왕의 妃 김씨는 桂花夫人(대아찬 叔明
의 딸)인데 왕의 치세 2년에 妃 김씨를 王后에 책봉했으며, 당이 소성왕의
처 叔氏(김씨의 오류)를 왕비에 책봉했다.79)『삼국유사』권3 .藏寺 항목에
따르면 소성대왕의 妃는 桂花王后였다. 애장왕이 6년에 妃 박씨를 王后에
책봉했고, 당의 순종이 애장왕의 妻 박씨를 妃에 책봉했다.80)
소성왕의 同母弟로 정변을 일으켜 즉위한 헌덕왕(彦昇)의 妃는 貴勝夫
人(禮英 각간의 딸)인데, 당의 헌종이 헌덕왕의 妻 貞氏(?)를 妃에 책봉했
다. 흥덕왕은 원년 12월에 妃 章和夫人이 卒하자 定穆王后를 追封하고 잊
지 못한 나머지 더 이상 納妃하지 않았는데, 2년 정월에 당의 문종이 흥덕
왕의 妻 박씨를 妃에 책봉(追封?)했다. 흥덕왕이 11년에 薨하니 유언에 따
라 章和王妃의 릉에 합장되었다.81) 그러하니 장화부인은 장화왕비로 칭해
졌음을 알 수 있다. 희강왕의 妃는『 삼국사기』희강왕 본기에 따르면 文穆
夫人(갈문왕 忠恭의 딸),『 삼국유사』왕력에 따르면 文穆王后(忠孝 혹은 重
恭 각간의 딸)였다. 민애왕은『 삼국사기』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정변을 일
으켜 즉위하자 妻 김씨를 允容王后라 했는데,『 삼국유사』왕력에는 妃가
无容皇后(永公 각간의 딸)로 되어 있다.82)
문성왕 3년에 당이 문성왕의 妻 박씨를 王妃에 책봉했고, 문성왕이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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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원성왕.
79)『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소성왕.
80)『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애장왕.
81)『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헌덕왕·흥덕왕. 헌덕왕의 妃는『 삼국유사』에 따
르면 貴勝.(忠恭 각간의 딸)으로 시호가 皇娥王后였다.
82) 神虎王(神武王)의 妃는『 삼국유사』왕력에 따르면 貞從大后 혹은 繼大后였다.
에 倂.魏昕의 딸을 納해 妃로 삼았으며, 7년 3월에 청해진 大使 弓福의
딸을 次妃로 삼으려 했지만 朝臣이 海島人의 딸을 왕실의 배필로 삼을 수
없다며 반대하자 그만두었다.83)『삼국유사』왕력에는 문성왕의 妃가 炤明
王后로 되어 있다. 헌안왕이 4년 9월에 王后와 함께 임해전 모임에 참석했
다.84)
경문왕의 妃 金氏 寧花夫人(헌안왕의 장녀)은 왕의 즉위 전에 결혼했
고, 왕은 치세 3년에 寧花夫人의 동생을 納해 次妃로 삼았다. 5년에 당이
왕과 王妃와 王太子 등에게 선물을 하사했다. 왕이 6년에 夫人 김씨를 文
懿王妃에 책봉했지만, 10년에 王妃가 卒했다.85)『삼국유사』왕력에는 경문
왕의 妃가 文資皇后(헌안왕의 딸)로 되어 있다. 開仙寺의 석등은 경문대왕
과 文懿皇后의 발원에 의해 세워졌다. 경문대왕의 배필은 夫人에서 王妃
로, 다시 황후로 승진했던 것인데 왕후로도 불렸으리라 여겨진다.
헌강왕의 妃는『 삼국사기』그의 일대기에 따르면 懿明夫人이었는데,『 삼
국유사』왕력에는 一云 義明王后라 되어 있다.86)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의
고사에 따라 즉위한 진성여왕의 연인은 숙부로 入內 用事한 각간 魏弘이
었는데, 그는 卒하자 惠成大王이라 追諡되었다.87)『삼국유사』왕력에는 위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83
83)『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문성왕.
84)『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헌안왕.
85)『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경문왕. 그녀는 뒤의 사례로 보아 왕비가 아니라 황
후(혹은 왕후)로 사망했으리라 여겨진다.
86) 최치원이 지은 「대화엄종 불국사 비로자나·문수·보현像 讚」(최영성, 『역주
최치원문집』)에는 불국사 光學藏 講室 左壁의 畵像이 헌강대왕의 脩媛權氏 法
號秀圓이 尊靈 玄福을 追奉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되어 있다. 여기에‘ 脩媛 권
씨’가 언급되어 있지만 이 부분은 권씨가 고려시대에 등장하는 성씨라는 점에
서 볼 때 후대에 삽입되지 않았나 싶다.
87)『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진성왕. 위홍의 사망 후 진성여왕은 소년 美丈夫 2,
3인을 潛引해 淫亂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國政을 맡겼다고 한다. 전기웅
홍이 왕의 배필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권2진성여왕 항목에는 진성여왕
이 臨朝함에 乳母 鳧好夫人과 여왕의 夫 魏弘 .干 등 3, 4 寵臣이 권력을
마음대로 하여 정치를 어지럽혔다고 되어 있다.88)
효공왕은 3년에 이찬 乂謙의 딸을 納해 妃로 삼았다. 박씨로 왕이 된 신
덕왕의 妃 김씨는 헌강대왕의 딸이었는데 신덕왕이 원년에 妃를 義成王后
라 했다. 경애왕이 4년에 妃嬪과 더불어 포석정에서 연회하고 있었는데 견
훤이 들이닥쳤다. 왕과 妃가 後宮으로 도망해 들어갔다. 왕과 妃妾 數人이
後宮에서 잡혀 끌려나오자 견훤이 王妃를 强淫하고 휘하에게 마음대로 妃
妾을 亂하도록 했다.89)
신라 임금의 배필은 혁거세 거서간부터 지증왕 무렵까지는 대개 ‘夫
人’으로 불렸다.『 삼국유사』에 혁거세 거서간의 배필 알영부인이‘ 后’로,
지증왕의 배필이‘ 皇后’로 나오지만 고려시대의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여
겨진다. 단, 지증왕이 신라국왕을 칭하면서 배필을 妃 내지 왕비라고 칭했
을 가능성은 있다. 법흥왕 무렵에 왕의 배필이 妃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변화가 무열왕~문무왕 무렵에 발전적으로 정착했으니, 무열왕의
妃 文明夫人(김유신의 누이)이 文明王后라는 칭호를 받은 것, 문무왕의 妃
가 慈儀王后라 칭해진 것이 그것이다. 이후 남성 임금의 元妃는 대개 王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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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경문왕가의 왕위계승이 헌강왕 이후 왕실의 고착화로 왕제, 여제, 조카로
이어지며 취약성을 내포해 정치적 혼란을 일으켜 박씨왕실의 등장을 초래했다
고 보았다. 1989「신라 하대말의 정치사회와 경문왕가」『부산사학』16.
88) 최치원이 진성여왕의 명령으로 찬술한 성주사 낭혜화상탑비에는 낭혜화상이
.下 즉 왕경에 오자 先大王이 절하여 師로 삼고 君夫人, 世子 및 太弟相國(세
주: 追封尊諡惠成大王), 郡公子公孫이 우러렀다고 되어 있다. 황룡사 구층목탑
사리함기에는 今上(경문왕)이 11년에 親弟인 上宰相 伊干 魏弘에게 명령해 새
롭게 수리하게 했다.
89)『 삼국사기』권12, 신라본기, 효공왕·신덕왕·경애왕.『 삼국유사』권2, 김부대
왕 항목에도 견훤이 王妃를 强淫하고 휘하에게 嬪妾을 亂했다고 한다.
혹은 王妃를 생존시에 띠거나 사후에 왕후를 추증받았다. 처음부터 왕후
를 받는 경우가 있었고, 夫人 혹은 王妃·妃를 띠다가 왕후로 승진하는 경
우가 있었다.
임금이 元妃 외에 혜공왕과 경문왕처럼 次妃를 두는 경우가 있었다. 원
비와 차비는 경문왕의 원비와 차비가 자매로서 헌안왕의 딸이라는 사실이
보여주듯이 고귀한 신분으로 妻妾 내지 嫡庶로 보기는 어렵지만 서열의 차
이는 있었으니 제1 妃와 제2 妃 정도로 파악된다. 문성왕이 궁복(장보고)
의 딸을 次妃로 들이려다가 그녀의 신분 때문에 포기한 점도 차비가 고귀
한 존재였음을 시사한다. 小妃가, 진흥왕이 百濟王女를 娶하여 小妃로 삼
은 사례에 보이는데90) 차비와 비슷한 존재로 여겨진다. 신라의 임금도, 기
록에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다른 왕조와 마찬가지로 대개 후궁을 여러 명
두었다. 永宗의 딸이 효성왕의 後宮에 들어왔다. 효성왕이 그녀를 絶愛하
여 恩渥이 날마다 깊어가자 王妃가 질투하여 族人과 더불어 모의해 살해
했다. 효성왕 4년 8월에 파진찬 永宗이 王妃 宗黨을 원망해 반역을 꾀하다
가 伏誅되었다.91) 후궁은 천민도 포함되는 경우가 있듯이 신분이 다양했는
데 원비와 차비에 비해 꽤 차별 대우를 받았다고 여겨진다.92)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85
90)『 삼국사기』권4, 신라본기 진흥왕 14년. 진흥왕의 소비는 백제 성왕의 딸로 판
단된다.『 삼국사기』백제본기.
91)『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효성왕 4년조. 後宮은 왕 배필 중의 낮은 지위 여성
을 의미하거나 궁궐의 內殿 혹은 그 중의 후미진 곳을 의미했다.
92) 다른 후궁의 사례를 보면, 照知 마립간이 捺巳郡 사람인 波路의 딸 碧花가 國
色이어서 몰래 맞이해 別室에 두고 1子를 낳았다.『 삼국사기』권3, 신라본기 소
지마립간 22년. 사륜왕(진지왕)은 沙梁部의 庶女로 姿容이 艶美한 桃花.을 궁
중으로 불러들여 관계하려 했다.『 삼국유사』권1, 紀異 2 桃花女 鼻荊郞. 애장
왕은 3년 4월에 아찬 金宙碧의 딸을 後宮에 들였다. 헌강왕이 사냥 구경을 갔
다가 佳麗한 여자를 만나 .宮에서 野合했는데 그녀가 嶢(효공왕)를 낳았다. 효
공왕이 賤妾을 사랑하여 政事를 돌보지 않자 15년에 大臣 殷影이 간했지만 따
대체로 신라 임금의 여성 배필은 지증왕 무렵까지는 夫人으로 불렸으
며, 법흥왕 무렵부터 통일 이전 무렵까지는 夫人·妃·王妃로, 통일 이후
에는 夫人·妃·王妃·王后 등으로 불렸으며, 하대에는 皇后로 불리기도
했다. 이는 중국의 제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수나라까지는 后-夫人
체계를 사용했고, 당나라 이후에는 后-妃 체계를 사용했다.93) 그러니까 신
라는 왕실 여성의 호칭에서 통일 이전에는 주로 수나라까지의 제도를 활
용했는데 后를 제외한 夫人만 사용하다가 법흥왕 무렵부터 夫人보다 위 단
계로 妃를 설정해 사용했다. 통일 이후에는 수나라까지의 제도를 기본으
로 하면서 당나라의 제도를 수용해 혼용했다. 통일기에 당이 신라 임금의
여성 배필을 妃 혹은 王妃에 책봉한 것도 당 제도의 수용을 촉진시켰는데,
신라는 妃·王妃에 만족하지 않고 천자의 배필에 해당하는‘ 后’를 써서 王
后를 즐겨 사용하고 나아가 皇后까지 사용해 신라 중심의 천하관을 표현
했다. 여성 임금의 경우, 선덕여왕의 배필은 飮葛文王이었고, 진성여왕의
배필은 위홍 각간으로 사후에 大王을 추증받았다.
신라 임금의 모친은 무엇이라 불렸을까?『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르
면, 남해 차차웅의 모친 閼英夫人에서 진덕여왕의 모친 박씨 月明夫人(진
평왕 母弟 國飯갈문왕의 배필)까지 모두‘ 夫人’ 칭호를 띠었다. 단, 진흥
왕의 母는『 삼국사기』진흥왕 본기에 따르면 夫人 金氏(법흥왕의 딸)인데
왕이 어렸기 때문에 王太后로 섭정했다.『 삼국유사』권1 진흥왕 항목에서
는 진흥왕이 즉위하자 태후가 섭정했는데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자 입종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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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지 않자 은영이 그 賤妾을 죽였다.『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애장왕 3년 ;
권11, 신라본기 진성왕 9년조; 권12, 신라본기 효공왕 15년조.
93)『 당육전』권12, 內官. 后는 궁중 여인들을 통솔하는 존재로 품계를 초월했다.
신라가 임금의 배필 칭호에 중국의 제도를 대략적으로 수용했지만 중국의 內
官이나 조선의 내명부처럼 질서정연한 체계가 마련되어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문왕의 妃였으며 임종시에 삭발하여 法衣를 입고 서거했다고 한다.94) 임금
의 모친은 지증왕 무렵까지는‘ 夫人’ 칭호를 띠었지만 법흥왕의 배필이 妃
로 불리고 진흥왕의 모친이 태후라 불린 점으로 보아 법흥왕 무렵부터 태
후로 불리지 않았나 싶은데, 지증왕이 왕을 칭하면서 모친을 태후라 칭했
을 가능성도 열려 있다.
태종 무열왕의 母는 天明夫人(진평왕의 딸)인데, 무열왕이 즉위하자 母
를 文貞太后라 했다. 문무왕의 모 김씨는 文明王后(소판 김서현의 季女:
무열왕의 비), 신문왕의 모는 慈儀王后(문무왕의 비)였다. 효소왕의 모는
김씨 神穆王后(일길찬 김흠운의 딸: 신문왕의 비)였다.95) 성덕왕 때 조성된
皇福寺 금동사리함 명문에는 신문대왕이 천수 3년(692) 7월에 乘天하니 神
睦太后(신문왕의 배필. 효소왕의 모친), 孝照大王(孝昭王)이 聖靈을 위해
禪院伽藍에 3층석탑을 건립했다. 성력 3년(효소왕 9년: 700) 6월에 신목태
후가 長辭하여 淨國에 高昇했고, 대족 2년(702)에 孝照大王이 登霞하니, 신
룡 2년(성덕왕 5년)에 今主大王(성덕왕)이 불사리 4개와 6寸 金미타상 1軀
와 무구정광대다라니경 1권을 석탑 제2층에 안치해 신문대왕, 신목태후,
孝照大王의 명복을 빌었다. 또한 隆基大王(성덕왕)과 王后와 內外親屬의
행복을 빌었다고 한다. 효성왕과 경덕왕의 모는『 삼국사기』신라본기에 따
르면 炤德王后(성덕왕의 비)였는데,『 삼국유사』왕력에는 炤德大后로 나
온다. 경덕왕이 돌아가신 태후와 성덕대왕을 위해 종을 만들기 시작했고
혜공왕이 완성시켰는데 이것이 성덕대왕신종이다.96)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87
94) 그녀는 『삼국유사』왕력에 따르면 只召夫人(법흥왕의 동생 立宗 갈문왕의 배
필)이었다.
95)『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권6, 신라본기 문무왕; 권8, 신문왕·
효소왕.
96) 명문은 한림랑 級.金弼奧가 奉敎·奉詔하여 찬술했고, 글씨는 待詔 大奈麻
姚湍이 썼다.
혜공왕의 모 김씨는『 삼국사기』본기에 따르면 滿月夫人(舒弗邯 金義
忠의 딸: 경덕왕의 王妃)인데, 왕의 즉위시 나이가 8세여서 太后로 섭정했
다. 그녀는 『삼국유사』왕력에는 滿月王后로 되어 있고, 『삼국유사』권2
찬기파랑가 항목에는 滿月王后가 낳은 少帝(혜공대왕)가 幼.했기 때문에
그녀가 태후로 臨朝했는데, 政條가 다스려지지 않아 도적이 봉기했다고 한
다. 혜공왕 4년에 당의 代宗이 왕을 신라왕에 책봉하고, 王母 김씨를 大妃
에 책봉했다. 16년 2월에 정변이 일어나 왕과 后妃가 해를 입었다. 宣德王
의 모 김씨는 四炤夫人(성덕왕의 딸)인데 왕이 즉위하자 모 김씨를 貞懿太
后로 올렸다. 원성왕의 모 박씨는 繼烏夫人인데, 왕이 즉위하자 모 박씨를
昭文太后라 했다.97)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찬술한 숭복사비에는 옛적에 파
진찬 金元良이 炤文王后(원성왕의 모친)의 元舅로 나온다. 경덕왕 때에 갈
항사 탑을 照文皇太后(원성왕의 모친)가 후원해 세웠다.
소성왕의 모는 김씨였는데 소성왕 원년에 모 김씨를 聖穆太后에 追封
했다. 당이 소성왕의 모 申氏(김씨의 오류)를 大妃에 책봉했다. 애장왕의
모 김씨는 桂花夫人(소성왕의 비. 소성왕 때 왕후에 책봉되었음)인데, 왕
의 나이가 13세여서 숙부 彦昇이 섭정했다. 애장왕이 6년에 모 김씨를 大
王后에 책봉했고, 당의 순종이 애장왕의 모친 叔氏(김씨의 오류)를 大妃에
책봉했다.98)애장왕의 모친이『 삼국유사』왕력에는 桂花王后로 되어 있다.
흥덕왕 2년 정월에 당의 문종이 흥덕왕의 모친 박씨를 大妃에 책봉했다.
희강왕의 모는 包道夫人인데, 2년 정월에 모 박씨를 順成太后로 올렸다.99)
『삼국유사』왕력에는 희강왕의 모가 美道夫人 혹은 深內夫人 혹은 巴利夫
人이고 시호는 順成大后로 忠衍 大阿干의 딸이라 되어 있다. 민애왕은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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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혜공왕·선덕왕 ; 권10, 신라본기 원성왕.
98)『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소성왕·애장왕.
99)『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흥덕왕·희강왕.
변을 일으켜 즉위하자 모 박씨 貴寶夫人을 宣懿太后라 올렸다. 신무왕은 정
변으로 즉위하자 모 박씨 眞矯夫人을 憲穆太后라 올렸다.100) 문성왕의 모는
『삼국사기』문성왕 본기에 따르면 貞繼夫人(一云 定宗太后)이었는데,『 삼
국유사』왕력에는 貞從大后로 나온다. 헌안왕의 모는『 삼국사기』헌안왕
본기에 따르면 照明夫人(선강왕의 딸)인데,『 삼국유사』에는 昕明夫人으로
되어 있다.
경문왕의 모친은 光和(一云光義) 夫人인데, 왕이 치세 6년에 모친 박씨
光和夫人을 光懿王太后라 올렸다. 헌강왕의 모친은 文懿王后(경문왕 때 文
懿王妃였음)였다. 효공왕이 모친 김씨를 義明王太后(헌강왕이 사냥갔다가
.宮에서 野合한 미인)로 올렸다. 아달라왕의 遠孫인 朴乂謙의 아들로 즉
위한 신덕왕의 모친은 貞和夫人이었는데, 신덕왕은 원년에 모친을 貞和太
后라 했다. 경명왕의 모친은 義成王后였다. 경순왕 金傅의 모는 桂娥太后
인데, 왕이 원년 11월에 모친을 王太后로 올린 것이었다.101)『고려사』세가
에 따르면 고려 태조 14년 2월에 왕(왕건)이 신라의 왕경을 방문하고 5월에
羅王 太后 竹房夫人과 相國 裕廉 등에게 선물을 주고 돌아왔다. 이 태후는
경순왕의 모친 계아태후였다.
신라의 王母는 夫人이라 칭해지다가 법흥왕 무렵에 태후라 칭해졌을
여지가 있었고 진흥왕 때에 太后가 확인되었다. 무열왕이 모친 천명부인
을 文貞太后로 올렸고, 그 이후 왕모는 王后 혹은 太后(大后)로 칭해졌는
데 하대로 가면서 대개 太后(大后)로 칭해졌고 황태후로 칭해지기도 했다.
하대에 大王后로 칭해지는 경우도 보이는데 太后(大后)와 유사한 개념이
다. 태후는 국왕이 어렸을 때 섭정을 하는 등 왕실의 어른으로서 권위가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89
100)『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민애왕·신무왕.
101)『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경문왕·헌강왕 ; 권12, 신라본기 효공왕·신덕
왕·경명왕·경순왕. 헌강왕의 모친은『 삼국유사』왕력에는 文資皇后로 나온
다.
컸다.
신라는 법흥왕 이래 국력이 신장되자 신라 중심의 천하관을 형성했다.
법흥왕~진흥왕 무렵에 王母를 태후라 부르더니 통일기에 일반되었다. 또
한 통일기에 임금의 元妃가 대개 王后 혹은 왕비로 칭해졌다. 하대에는 정
변이 자주 발생해 왕위의 교체가 심했으므로 새로 즉위한 왕은 자신의 정
통성과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생시에 왕을 지내지 않은 부친에게 大王 칭
호를 올렸을 뿐만 아니라 모친에게 태후 내지 왕태후 혹은 황태후를, 배필
에게 왕후 혹은 황후를 부여했다. 王母와 왕 배필의 칭호가 대체로 지증왕
무렵까지는‘ 夫人’이었고, 법흥왕~진흥왕 무렵부터는 太后-妃-夫人, 통
일 이후에는 太后-王后-妃-夫人의 서열로 구성되었다.
后는 황실·왕실 여성의 최고위 칭호로 천자에 해당하는 황제·국왕의
배필·모친에게만 주어졌다. 이는 신라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妃나 夫
人은 황제나 국왕의 배필이 아니더라도 주어졌다. 妃는 헌덕왕이 14년 3월
에 각간 忠恭의 딸 貞嬌를 太子妃로 삼은 데102) 드러나듯이 태자의 배필에
게도 사용되었다.『 삼국유사』에는 문호왕(문무왕)의 庶弟 車得公이 무진
주에 갔다가 州吏 安吉의 妻 3명 중의 1妻와 자고 그녀를 데리고 왔는데 차
득공의 妃로 표현되었다.103) 妃는 국왕, 태자, 갈문왕, 王弟 등 극히 소수의
왕족남성의 배필을 의미했다고 여겨진다.
반면 夫人은 妃보다 넓게 주어져 상당수 귀족 여성이 夫人을 띠었다.
그렇다고 귀족 여성이면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삼국유사』권
1 나물왕 항목에 따르면 .羅郡太守 堤上이 일본에 인질로 간 美海(눌지왕
의 동생)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니 堤上의 夫人이 세 娘子를 데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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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헌덕왕 14년.
103)『 삼국유사』권2, 문호왕 法敏. 車得公이 문호왕을 陛下라 부른 것으로 되어 있
다.
.述嶺에 올라 통곡하다가 죽었다. 美海가 탈출해 오자 눌지왕이 親弟 寶
海와 더불어 맞이하고 미해의 妻를 國大夫人에 책봉하고 미해의 딸을 美
海公夫人에 책봉했다.『 삼국유사』권2원성대왕 항목에 따르면 왕의 孫(자
손)은 5인이었는데 惠忠太子, 憲平太子, 禮英.干, 大龍夫人, 小龍夫人이
었다. 夫人에도 등급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김유신 집안의 혼인은 夫人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준다.『 삼국사기』김
유신전에는 舒玄의 처 萬明夫人(갈문왕 立宗의 아들 숙흘종의 딸)과 김유
신의 처 智炤夫人이 나오고,『 삼국유사』紀異 김유신 항목에는 舒玄公 夫
人과 財買夫人(김유신 前妻로 추정됨)이 나온다. 무열왕은 2년에 왕녀 智
照(智炤)를 김유신(智照의 외삼촌)과 결혼시켰고, 성덕왕이 11년에 김유신
의 妻(智照)를 夫人에 책봉하고 해마다 곡식 1000석을 하사했다.104) 지소가
왕녀이자 김유신의 처임에도 夫人 책봉이 늦어진 이유는 그녀가 後妻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쨌거나 夫人은 귀족 여성 중에도 일정한 자격을 갖춘 여성에게만 책
봉의 형식을 갖추어 주어졌던 것인데, 미혼 여성은 해당되지 않았을 것이
다. 황남대총에서‘ 夫人帶’라는 명문이 쓰여진 銀製 帶端金具가 발견된 것
은‘ 부인’의 높은 지위를 시사한다.
신라 지배층 여성의 모습을 금석문에서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울주
전천리 書石에 따르면, 을사년(법흥왕 12년)에 沙喙部 斯夫知갈문왕(입종
갈문왕)과 妹 於史·鄒安郞, 셋이 유람했다. 作食人은 榮知智 一吉干支(7
등)의 妻 居知尸奚夫人, 眞穴智 沙干支(8등)의 妻 阿兮牟弘夫人이었다. □
巳年에 왕이 과거의 王妃 只沒尸兮妃를 사랑하여 생각했다. 기미년(법흥
왕 26년)에 妹와 함께 계곡으로 왔는데, .卽知太王妃 夫乞支妃와 斯夫知
王子郞이 동행했다. 作食人은 眞穴知 波珍干支(4등)의 婦 阿兮牟呼夫人,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91
104)『 삼국사기』권5,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2년; 권8, 신라본기 성덕왕 11년.
.夫知 居伐干支(9등)의 婦 一利等次夫人, 居.次 □干支의 婦 沙爻功夫人
이었다. 을축년에는 沙喙部 于西□夫智 波珍干支(4등)의 妻인 夫人 阿刀郞
女가 계곡을 보러 왔다. 계해년에 沙喙部 □凌智 小舍(12등)의 婦 非德刀
가 놀러왔다. 또한 이 서석에 豆世夫知 夫人이 새겨져 있다.
妃와 여러 夫人인 등장하는데 9등 관등 남성의 아내라도 夫人이었다.
‘王妃 只沒尸兮妃’,‘ .卽知太王妃 夫乞支妃’가 여러‘ 夫人’들과 구별되
었다. 왕(갈문왕 포함)의 正妃가 .卽知太王 즉 법흥왕 무렵에 다른 夫人
과 구별해 妃로 표현된 것인데, 그 뒤 당 제도의 영향도 받고 해서 통일기
에는 대개 后·妃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성덕왕 때 重阿.金志誠이 亡考인 仁章 一吉.과 亡.인 觀肖里夫人
을 위해 감산사의 아미타상과 미륵상을 조성했는데, 동생인 金良誠 小舍
와 玄度師, 姉 古巴里, 前妻 古老里, 後妻 阿好里, 庶兄 及漢 一吉.·一憧
薩.(8위)·聰敬 大舍, 妹 首.買里 및 법계의 일체중생을 축원했고, 國主
大王의 장수와 愷元 伊.公의 행복을 빌었다. 성덕왕 때 단월인 有休大舍
宅夫人 休道里 등의 후원에 의해 범종(현재 상원사 종)이 완성되었다.『 삼
국유사』권3 황룡사종에 따르면 경덕대왕 때 황룡사종이 주조되었는데 시
주가 孝貞伊王 三毛夫人이었다. 三毛夫人은 경덕왕의 왕비였다가 出宮된
여성이었다.『 삼국유사』권2 水路夫人 항목에 따르면, 성덕왕대에 純貞公
이 강릉태수로 부임했는데 公의 夫人 水路가 따라갔다. 9세기에 金立之가
찬술한 성주사비에는 允興 이찬의 아내로 보이는 宣和夫人이 나온다. 夫
人 칭호는 대개 干(.) 층의 아내 중에서 일정 자격을 갖춘 자에게 부여된
듯하다.
信廣夫人君, 令妙寺 日照和上 등이 후원한 종(강원도 양양 禪林院 터
에서 출토)이 애장왕 때 완성되었다. 헌강왕 10년에 건립된 보림사 보조선
사탑비에는 禪師 體澄은 宗姓 金으로 熊津 사람이라 소개하면서 모친을 尊
夫人으로 표현했다.『 삼국유사』권2후백제 견훤에 따르면, 신라말에 상주
292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의 자칭 장군 阿慈介의 제1 妻는 上院夫人, 제2 妻는 南院夫人이었다. 신
라말, 후삼국으로 감에 따라 夫人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지방 호족의 아내
도 夫人을 칭하는 경우가 생겨났다고 여겨진다.
신라 왕실의 여성은 궁을 소유했을까? 원효를 파계시킨 공주는 요석궁
에 거처했으니105) 요석궁은 그녀의 소유였을 것이다. 경덕왕 7년 8월에 太
后가 永明新宮으로 移居했는데106), 이 궁은 태후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크
다. 원성왕 원년 3월에 前妃(선덕왕의 妃) 具足王后를 外宮에 내보내고 租
3만 4천 석을 하사했는데107), 이 외궁은 구족왕후의 소유였을 가능성이 있
다. 진성여왕은 즉위 전에 北宮長公主였고, 양위 후에 북궁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떴는데108), 이 북궁은 그녀의 부친인 경문왕의 잠저시 거처이거나
모친인 문의왕후(헌안왕의 장녀)의 거처였다가 진성여왕이 물려받은 것이
아닐까.
『삼국유사』권1 射琴匣 항목에 따르면, 비처왕이 天泉亭에 행차했다가
入宮해 琴匣을 보고 화살을 쏘니 內殿 焚修僧과 宮主가 몰래 간통하고 있
었으며, 그 두 사람은 伏誅되었다.『 삼국유사』권3 백율사 항목에 따르면,
효소왕 때 大玄 薩.의 아들 夫禮郞 國仙이 유람하던 중에 오랑캐에게 잡
혔다가 돌아오자 왕이 부례랑을 대각간으로 삼고, 부친 大玄 아찬을 태대
각간으로 삼고, 모친 龍寶夫人을 沙梁部 鏡井宮主로 삼았다. 이들 궁주는
자신의 궁을 소유했기 때문에 궁주로 불렸을 것이다. 大岾城(關門城) 석각
에 金京 元千毛主가 作한 北堺(界)라는 부분이 있는데 毛主는 宅主가 아닐
까 싶다. 그렇다면 宅主도 존재했던 것이 된다.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93
105)『 삼국유사』권5, 義解 元曉不羈. 瑤石宮에 대해 일연은 지금 學院이 그것이라
고 細註했다.
106)『 삼국사기』권9, 신라본기 경덕왕 7년.
107)『 삼국사기』권10, 신라본기 원성왕 원년.
108)『 삼국사기』권11, 신라본기 진성왕 11년 12월.
2. 고려 왕실
고려 왕실의 여성 칭호는 어떠했을까? 먼저 임금의 배필을 살펴보자.
태조 왕건의 배필은『 고려사』권88 후비전에 29명이 실려 있다.109) 신혜왕
후 柳氏·장화왕후 吳氏·신명순성왕태후 劉氏·신정왕태후 황보씨·신
성왕태후 김씨(이씨?)·정덕왕후 柳氏, 이상 6명이 왕후와 태후로 실려 있
고, 나머지 배필은‘ 夫人(大夫人 포함)’으로 실려 있으니, 后-夫人의 체제
로 이루어졌다. 신명순성왕태후는 아들 정종과 광종이 즉위한 후, 신정왕
태후는 손자 성종이 즉위한 후, 신성왕태후는 손자 현종이 즉위한 뒤 주어
진 死後 諡號였다. 신정왕태후는 태조 때 황주원부인이었다가 경종 때 명
복궁대부인으로 승격했으니,110) 신명순성태후와 신성왕태후도 태조 때 夫
人이었을 것이다. 신혜왕후 柳氏, 장화왕후 吳氏, 정덕왕후 柳氏 중의 누
군가가 죽기 전에 태조 때 王后 혹은 王妃였으리라 짐작된다.111)
혜종의 배필은 의화왕후 林氏, 後廣州院夫人 왕씨, 淸州院夫人 김씨,
궁인 哀伊主(太子 濟의 모친)였다. 定宗의 배필은 문공왕후 박씨, 淸州南
294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109) 왕건의 배필 출신지에 대한 분석은 정용숙, 앞의 1988 책의 제2장과 1992『고
려시대의 후비』, 민음사, 제2장에 자세히 되어 있다. 신성왕태후는 김씨설과
이씨설이 학계에서 대립해 왔다. 신혜왕후 柳氏는 태조 16년에 後唐으로부터
河東郡夫人에 책봉되었는데『( 고려사』후비전), 그 이후 몽골간섭 이전에는 고
려국왕의 배필이 강대국으로부터 책봉받지 않는다.
110)『 고려사』권2, 경종 원년 6월.
111) 왕건의 배필에서 신혜왕후 柳氏가 後唐으로부터 책봉받고 사후에 태조 顯陵
에 .葬되는 점으로 보아 생존시에 王后였으리라 생각된다. 장화왕후 吳氏는
정윤을 배출했으므로 王妃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혜종의 즉위 후에 왕후 혹
은 태후로 올려졌을 것이다. 왕건의 나머지 배필은 대개 夫人이었으리라 생
각된다. 이태진은 태조의 6명의 왕후와 태후를 왕후족으로 묶어 고려초의 정
치를 왕후족 중심의 정치체제로 설명했는데(1977「김치양 난의 성격」『한국사
연구』17), 사후에 추증된 것을 고려하지 않았기에 설득력이 부족하다.
院夫人 김씨였다. 광종의 배필은 대목왕후 황보씨(이복형제), 慶和宮夫人
林氏(혜종의 딸)였다.112) 경종의 배필은 헌숙왕후 김씨(경순왕의 딸), 獻懿
王后 劉氏(문원대왕의 딸), 應天啓聖靜德王太后(천추태후) 황보씨, 獻貞王
后(孝肅王太后) 황보씨, 大明宮夫人 柳氏(원장태자의 딸)였는데,113) 이중에
응천태후(목종 때 칭호) 즉 천추태후와 대명궁부인만 생존시 칭호였고, 나
머지는 사후의 시호였다. 경종의 배필은 1명의 왕후(헌숙왕후), 다수의 夫
人으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성종의 배필은 문덕왕후 劉氏(광종의 딸), 연
흥궁주(현덕궁주: 시호 문화왕후: 金元崇의 딸) 김씨, 延昌宮夫人 최씨(崔
行言의 딸)였다. 목종의 배필은 선정왕후 劉氏(홍덕원군의 딸), 궁인 김씨
邀石宅宮人이었다.114) 혜종~성종대에도 后-夫人의 체제로 이루어졌는데,
妃 내지 王妃로 불려진 경우가 있었을 수도 있다.115)
왕실 여성의 제도는 현종대에 들어와서 대폭 개편되었다. 현종의 배필
은 성종의 딸인 현덕왕후(시호는 원정왕후) 김씨, 항춘전왕비(시호는 원화
왕후) 최씨, 왕비 연경궁주(←연경원주←궁인) 김씨(김은부의 딸), 안복궁
주 김씨(김은부의 딸), 妃 柳氏(시호는 원용왕후), 淑妃 흥성궁주, 김은부
의 딸(시호는 원평왕후), 德妃 김씨(元順淑妃: 김인위의 딸), 元質貴妃 왕
씨(왕가도의 딸), 貴妃 庾氏(←궁인), 궁인 한씨(한인경의 딸), 궁인 이씨
(이언술의 딸), 궁인 박씨(박온기의 딸)였다.116) 왕후 1명, 왕비 2명 정도, 궁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95
112)『 고려사』권88, 후비전. 대목왕후는『 균여전』에는 대목황후로 되어 있다.
113)『 고려사』권88, 후비전.
114)『 고려사』권88, 후비전.
115)『 고려사』권77, 백관지 2, 內職 항목에는 國初에 定制가 없어 后妃 이하가 某
院·某宮 夫人으로 칭호를 삼았다고 되어 있다. 또한 이에 따르면 문종이 정
한 관제에서 貴妃·淑妃·德妃·賢妃는 정1품이었다.
116)『 고려사』현종세가;『 고려사』권88, 후비전 현종의 배필.『 고려사』지채문전
에 따르면 현종의 피란 때 현덕왕후와 대명왕후가 따라갔다. 항춘전왕비가 대
주·諸妃, 궁인으로 구성되었다. 왕실에서 夫人 칭호가 사라지면서 后妃
체제가 성립했다.117)
고려 이른 초기의 后-夫人 체제는, 원래 后-夫人 체제가 중국에서 온
것이지만 수나라까지의 제도이기 때문에, 중국보다 신라의 제도를 계승한
측면이 강한데, 신라 왕실제도와 당나라의 后-妃 체제를 응용해‘ 妃’를 가
미하여 운영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고려왕조는 성종 때 당의 3성 6부를 받
아들여 관제를 개편한 데 이어 현종 때 당의 后-妃 체제를 응용하여 왕실
제도를 개편했다. 后妃 체제는 통일신라기에 본격적으로 스며들었는데 후
삼국과 고려초를 거쳐 현종 때 정착했다.
고려 국왕의 모친은 고려초부터 생존시 혹은 사후에 태후로 올려졌다.
천추태후는 장성한 목종을 제쳐서 섭정하고 사숙태후는 稱制해 어린 헌종
대신에 軍國大小事를 모두 取決했다. 고려의 태후는 府를 지녔고 국왕과
마찬가지로 받는 글을‘ 表’, 생신을‘ 節’이라 했다. 그러하니 고려 태후의
위상이 대단히 높았다. 성종의 배필이자 현종의 장모인 현덕궁주(현덕왕
후의 모친)는 현종 때 大妃에 책봉되었고, 사후에 시호 문화왕후를 받았
다.118) 大妃는 태후를 받지 못하는 왕실의 여성 어른에게 주어졌던 것인데
왕후보다 지위가 낮았다. 예종이 3년 정월에 모친을 왕태후로 존숭하는 冊
文에서 자신을‘ 嗣子 國王臣’이라 표현하고 머리를 조아려 두 번 절한다
면서‘ 臣聞’으로 시작하고 있으니119) 의례적이지만 태후가 국왕보다 위상
296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명왕후로 승진했을 가능성도 있다.
117) 이상은 김창현, 2007「고려시대 후비의 칭호와 궁」『고려의 여성과 문화』, 신
서원의 내용을 참고했다.
118)『 고려사』권88, 후비전. 성종이 조모 明福宮大夫人 황보씨에게 神靜大王太后
라는 시호를 올린 예처럼 국왕의 祖母도 태후 내지 대왕태후에 책봉되는 경우
가 있었다.
119)『 동문선』권28, 王太后玉冊文(李.찬술);『 고려사』권88, 후비전 숙종 명의태후.
이 높았으니 태후를 지칭할 때 폐하를 붙였을 것이다. 그런데 무인정권기
에 사람들이 태후에게 올린 表文120)에는‘ 王太后 殿下’로 표현되었으니 陛
下가 붙는 국왕보다 밑에 위치한다. 아마도 의종이 모후를 싫어해서121) 태
후의 지위를 이전보다 격하시켰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현종 이후 后妃는 왕태후(황태후), 왕후(황후), 왕비(황비), 궁주, 諸妃,
원주, 택주, 궁인 등으로 구성되었다. 왕후는 1명이거나 없을 수도 있었다.
왕비는 1~3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다수였다. 태후와 왕후와 왕비는 대체
로 궁주였고, 諸妃는 대체로 궁주 내지 원주였다. 선택받은 궁인은 宅主가
되었다. 왕녀 출신은 대개 왕후나 왕비에서 시작했다. 일반인 출신은 왕비
이하에서 시작해 출산 등으로 왕을 기쁘게 해야 승진했다. 대개 승진 단계
는 궁인-諸妃-왕비-왕후-태후이거나, 궁인-원주-궁주-왕비-왕후-태
후였는데 각 단계를 반드시 거처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122) 后는 광종의 배
필이『 균여전』에 대목황후 라 표현되고 숙종의 배필이 최계방 묘지명에 皇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97
120)『 동국이상국집』권30, 表· ·狀 및 권32, 狀. 이에 따르면 태자, 王后, 왕실
公侯伯의 令公은‘ 殿下’가 붙었다. 하지만 아랫사람이 태후에게 올린 글은 국
왕에게 올린 글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表文인 반면 태자와 왕후에게 올린 글은
‘ ’이었고 令公에게 올린 글은 狀이었으니 태후는 거의 국왕 수준의 위상을
지녔다. 한편 진강후 최충헌과 진양공 최우는 대개‘ 令公邸下’로 불렸다.『 동
국이상국집』권19 및 후집 권8·권9
121)『 고려사』권88, 후비전 인종 공예태후; 권98, 정습명전. 공예태후는 次子를 사
랑해 태자를 삼으려 했기 때문에 장자인 의종이 원망했다.
122) 김창현, 2007 앞의 글.『 고려사』권88, 후비전 서문에는 고려의 제도에서 王母
를 王太后라 칭하고, 嫡을 王后라 칭하고, 妾을 夫人이라 칭했는데 貴妃·淑
妃·德妃·賢妃 이것들이 夫人으로 정1품이라고 되어 있다. 고려의 태후와 왕
후는 국왕처럼 품계를 초월한 존재였고, 왕비도 때로 그러했다. 고려 后妃制
는 황후, 妃(정1품: 3~4명), 六儀(정2품), 美人(정3품: 4명), 才人(정4품: 7명)
으로 이루어진 당의 后妃制『( 당육전』권12, 內官)와 다른 측면이 많다.
后로 표현되고 이자겸이 딸(예종의 배필)을 황후라 지칭하고 고종이 皇太
后를 尊崇해 太皇太后라 했듯이123) 황후, 황태후, 태황태후로도 불려졌다.
현종 때 왕실에서 夫人 칭호가 사라졌다. 현종은 8년에 항춘전왕비 최
씨의 외조 최행언을 상서좌복야에 추증하면서 외조모 김씨에게 豊山郡大
夫人을, 모친 최씨에게 樂浪郡大夫人을 주었다.124) 11년에 거란에 억류된
將作少監 王佐暹의 妻를 開城郡君에 책봉했다.125) 13년에 연경궁주 김씨의
부친 김은부에게 安山郡 開國侯를, 모친에게 安山郡大夫人을 추증했고, 15
년에 조모에게 안산군대부인을 추증했다.126) 17년에 숙비 흥성궁주의 모친
최씨에게 利川郡大夫人을, 繼母 鄭氏에게 利川郡大君을 추증했다. 20년에
성종의 배필 현덕궁주 김씨의 부친 김원숭을 和義郡開國侯에 추증하면서
모친 왕씨와 조모 김씨에게 각각 和義郡大夫人을 주었다.127) 이제 夫人은
왕실 여성이 아니라 관료 집안의 여성에게 주어지는 여성작위로 변모했다.
‘君’도 夫人보다 낮은 단계로 관료 집안의 여성에게 주어졌는데 왕자와 王
弟에게 주어지는 경우와 동거하는 기묘한 형태였다. 하지만 문종 때 왕제
와 왕자가 公侯를 받으면서 해결되었다.128)
298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123)『 고려사』권127, 이자겸전; 권22, 고종 10년 10월. 조선초『 고려사』편찬과정
에서 고려시대 왕실(황실) 용어인 皇帝, 天子, 皇太后, 皇后, 皇太子 등이 격
하된 표현으로 고쳐졌는데 극히 일부가 부주의로 살아남았다. 김기덕은 앞의
1997년 논문에서 고려가 황제국의 용어를 대부분 사용하면서도 황제와 황후
라 하지 않고 왕과 王后만을 사용했다고 했는데 금석문과 문집을 간과한 결과
로 보인다.
124)『 고려사』권88, 후비전 현종의 배필.
125)『 고려사』권4, 현종 11년 2월.
126)『 고려사』권88, 후비전 현종의 배필;『 고려사』권94, 김은부전.
127)『 고려사』권88, 후비전 현종의 배필과 성종의 배필.
128) 外命婦에서, 公主와 大長公主는 정1품, 國大夫人은 정3품, 郡大夫人과 郡君은
정4품, 縣君은 정6품이었다.『 고려사』권77, 백관지 2, 內職.
왕녀의 경우를 살펴보자. 태조의 배필인 신명순성태후 劉氏의 딸은 安
貞淑儀公主(낙랑공주: 神鸞宮夫人→夫 신라왕 金傅)와 흥방공주(→원장태
자)였고, 황주원부인(신정왕태후) 황보씨의 딸은 대목왕후(→광종)였고,
정덕왕후 柳氏의 딸은 문혜왕후(→문원대왕)와 선의왕후(→대종 旭)와 어
떤 공주(→의성부원대군)였고, 정목부인 왕씨의 딸은 順安王大妃였고, 흥
복원부인 홍씨는 공주 하나(→태자 泰)를 낳았고, 성무부인 박씨는 공주 하
나(→金傅)를 낳았다. 혜종의 배필 의화왕후 林氏는 慶化宮夫人과 貞憲公
主를 낳았고, 궁인 哀伊主는 明惠夫人을 낳았다. 定宗의 문성왕후 박씨는
공주 하나(→孝成太子)를 낳았다. 광종의 대목왕후 황보씨는 千秋殿夫人
(→千秋殿君)과 寶華宮夫人과 공주 하나(문덕왕후)를 낳았다. 성종의 현덕
궁주(문화왕후) 김씨는 貞元王后(元貞王后)를 낳았고, 연창궁부인 최씨는
항춘전왕비(원화왕후)를 낳았다.129) 고려초에는 왕녀들이 공주 혹은 夫人
을 칭했는데, 夫人을 칭한 경우는 그녀들이 근친 왕족과 결혼했기 때문에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현종의 항춘전왕비(원화왕후) 최씨는 積慶公主(시호는 孝靖公主 혹은
孝惠公主)와 天壽殿主를 낳았고, 연경궁주 김씨(원성태후)는 인평왕후와
景肅公主를 낳았고, 안복궁주 김씨(원혜태후)는 효사왕후를 낳았고, 원평
왕후 김씨는 孝敬公主를 낳았고, 원순숙비 김씨는 敬成王后를 낳았고, 궁
인 박씨(전주 박온기의 딸)는 1女 阿志(→檢校少監 井民相)를 낳았다. 덕종
의 敬穆賢妃 왕씨는 .悔公主(일찍 사망)를, 劉氏(충주 劉寵居의 딸)는 공
주 하나(→檢校太師 王忠)를 낳았다. 靖宗의 용목왕후 이씨가 낳은 딸은 문
종 11년에 卒하여 悼哀公主를 시호로 받았다.130) 왕녀는 공주 혹은 殿主를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299
129)『 고려사』권88, 후비전 및 권90, 종실전·공주전. 宮夫人도 宮主처럼 宮을 소
유했을 것이다. 고려초에도 궁을 가진 왕녀는 결혼 여부를 떠나 궁주라고 불
렸을 가능성이 있다.
130)『 고려사』권88, 후비전 및 권90, 종실전·공주전.
칭했고 공주를 추증받기도 했으며, 夫人 칭호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았다.
문종의 연덕궁주 이씨(인예순덕태후)는 積慶宮主(→부여공)와 保寧宮
主(→낙랑공 瑛)를 낳았다. 그 나머지 인예태후 소생의 두 공주와 仁淑賢
妃 이씨 소생의 두 공주와 仁穆德妃 김씨 소생의 공주는 모두 일찍 卒했
다. 선종의 정신현비 이씨는 경화왕후를 낳았고, 사숙태후 이씨는 공주 하
나(일찍 사망)와 遂安宅主를 낳았다. 수안택주는 태어나면서 눈이 멀었고
나이 40이 되어도 결혼하지 않았고 인종 6년에 卒했다.131)
숙종의 연덕궁주 柳氏(명의태후)의 딸은 大寧宮主, 興壽宮主, 安壽宮
主, 福寧宮主였다. 대녕궁주와 흥수궁주는 숙종 8년에, 안수궁주는 숙종
10년에, 복녕궁주는 예종 9년에 公主에 책봉되었다.132) 이들 궁주는 형제인
예종에 의해 부여된 칭호였다. 예종은 부왕 숙종이 치세 10년 10월에 세상
을 뜨자 즉위한 며칠 후에 모친 柳氏를 왕태후로 존숭했고, 壽寧宮을 大寧
宮으로, 長慶宮을 崇德宮으로, 延平宮을 安壽宮으로 개칭해 長公主에게 대
녕궁을, 二公主에게 숭덕궁을, 三公主에게 안수궁을 하사했다.133) 그러니
까 숙종의 첫째딸과 둘째딸과 셋째딸은 숙종 때 공주가 되었고, 예종이 즉
위하자 궁을 하사받아 궁주가 되었는데 공주이기도 했다. 숙종의 넷째딸
은 예종 9년에 공주에 책봉되었는데, 그녀가 복녕궁주에 책봉된 시기는 이
때인지 그 이전인지 그 이후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녀는 天子의 女로 晋康
伯과 혼인했다. 성품이 婉順해 兩宮의 총애를 받았고, 부유하기가 종실의
제일이었고, 佛法을 崇信해 塔廟를 營飾하는 데 심히 힘썼다. 인종 11년
(1133)에 公主 福寧宮主의 신분으로 卒해서 시호‘ 莊簡’을 받았는데 38세
였다.134)
300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131)『 고려사』권88, 후비전 및 권90, 종실전·공주전.
132)『 고려사』권91, 공주전 숙종의 딸. 大寧宮主는 예종 9년에 卒해 시호 貞穆을
받았다. 興壽宮主는 인종 원년에 卒했다.
133)『 고려사』권12, 예종 즉위년 10월.
예종의 연덕궁주 이씨(문경태후 이씨)는 承德宮主와 興慶宮主를 낳았
다. 인종이 2년 8월에 王妹 승덕궁주를 長公主에 책봉하고 재추·侍臣과
밤새도록 曲宴했으며, 2년 10월에 王妹 흥경궁주를 公主에 책봉했다.135) 인
종의 연덕궁주 任氏(공예태후)는 承慶宮主, 德寧宮主, 昌樂宮主(의종 5년
에 궁주에 책봉됨), 永和宮主를 낳았다.136) 의종의 莊敬王后 김씨(강릉공의
딸)는 敬德宮主, 安貞宮主, 和順宮主를 낳았다. 의종은 11년 11월에 長女
를 敬德宮主에, 第二女를 安貞宮主에, 第三女를 順和宮主(和順宮主)에 책
봉하고, 이날 밤에 재추·近臣을 불러 天寧殿에서 曲宴했다. 경덕궁주는
의종 16년에 司空 評과, 안정궁주는 17년에 咸寧伯과, 화순궁주는 광릉후
와 결혼했다.137)
명종의 義靜王后 김씨(광정태후: 강릉공의 딸)는 延禧宮主, 壽安宮主
를 낳았다. 연희궁주는 명종 3년에 공주에 책봉되고 9년에 寧仁伯과 결혼
했으며, 수안궁주는 명종 3년에 공주에 책봉되고 9년에 昌化伯과 결혼했
다. 신종의 元妃 김씨(선정태후: 강릉공의 딸)는 孝懷公主와 敬寧宮主를
낳았다. 河源公과 결혼한 효회공주가 신종 2년에 17세로 卒하니 왕과 后가
심히 애도하고 興德宮主에 追封했다. 경녕궁주는 신종 2년에 공주에 책봉
되고 4년에 始興伯과 결혼했다.138) 희종의 왕비 함평궁주(성평왕후: 영인후
의 딸)는 安惠太后(承福宮主), 永昌宮主, 德昌宮主, 嘉順宮主, 貞禧宮主를
낳았는데, 안혜태후는 희종 7년에 承福宮主에 책봉되었다. 강종의 사평왕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301
134) 王演 妻 福寧宮主 묘지명;『 고려사』권91, 공주전 숙종의 딸.
135)『 고려사』권91, 공주전 예종의 딸;『 고려사』권15, 인종 2년 8월·10월. 승덕
공주는 漢南伯과, 흥경공주는 安平公과 결혼했다.
136)『 고려사』권91, 공주전 인종의 딸. 승경궁주는 恭化侯와, 덕녕궁주는 江陽公
과, 창락궁주는 信安侯와, 영화궁주는 邵城侯와 결혼했다.
137)『 고려사』권91, 공주전 의종의 딸;『 고려사』권18, 의종 11년 11월.
138)『 고려사』권91, 공주전 명종의 딸 및 신종의 딸.
후 이씨(이의방의 딸)가 낳은 壽寧宮主는 강종 원년에 궁주에 책봉되었고,
河源公과 결혼했다. 고종의 承福宮主 柳氏(안혜태후: 희종의 딸)가 낳은
壽興宮主는 新陽公과 결혼했다. 원종의 왕후(慶昌宮主) 柳氏는 慶安宮主
와 咸寧宮主를 낳았다.139)
고려의 왕녀는 주로 宮主나 公主를 칭했고 드물게 殿主나 宅主를 칭했
다. 왕녀가 궁주로 불리는 모습이 문종 때부터 확연히 드러난 반면 그 이
전에 궁주로 불렸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고려의 왕녀는 일정한 나이가 되
면 공주에 책봉되거나 궁을 받아 궁주에 책봉되었다. 공주는 궁주인 경우
가 많았다. 공주가 궁주에 책봉되어도 공주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었고, 궁
주가 공주에 책봉되어도 궁주 신분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공주와 궁주 중
에 어느 것을 먼저 책봉해야 한다는 원칙은 없는 듯하다. 궁주는 하사받을
궁이 필요하기 때문에 궁이 확보되어야 책봉될 수 있었다. 궁주를 책봉받
는 당사자가 상속 등으로 궁 내지 저택을 소유하고 있다면 궁주를 책봉받
기가 수월했을 것이다. 공주·궁주 칭호는 왕녀일 때 받기도 하고, 왕의
자매일 때 받기도 했다. 왕녀나 왕의 자매는 대개 결혼 전에 공주나 궁주
에 책봉되었고 결혼 후에도 그 신분이 유지되었다. 고려 왕실은 근친혼을
많이 했는데 신라 왕실을 본받은 것이었다. 이는 태조 왕건이 土習에 익숙
해 아들과 딸을 결혼시키고 外姓을 諱稱하니 그 자손이 家法으로 여겨 괴
이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서술에140) 잘 드러나 있다.
고려 때 국왕의 배필은 宮·院을 받은 경우 宮夫人, 院夫人, 宮主, 院
主 등을 칭했고, 왕의 딸과 자매도 대개 궁을 받아 궁주가 되었다. 宮院에
302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139)『 고려사』권91, 공주전 희종·강종·고종·원종의 딸;『 고려사』권88, 후비전
고종의 배필. 원종의 딸 慶安宮主는 齊安公과, 咸寧宮主는 廣平公과 결혼했다.
140)『 고려사』권88, 후비전 서문. 정용숙은 앞의 1988 책에서 고려왕실의 족내혼
이 신라 이래의 혼인습속의 계승이며 신라 골품의식의 잔영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는 宮院田과 노비 등이 소속되어 있었으므로 궁원을 소유하면 재력을 지
니는 것이었다.141) 또한 왕실 여성들은 녹봉을 받았다.142) 신종이 즉위 이전
부터의 배필을 즉위하자 세워 元妃를 삼고서도 3년에야 궁주에 책봉한 예
처럼,143) 자격이 되어도 궁이 부족해 제 때에 궁주에 책봉되지 못하고 늦어
지는 경우도 발생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후기로 가면서 점차 늘었던 것
같다. 妃主 즉 妃와 宮主·公主에 책봉되면 반드시 殿을 세우고 府를 설치
해 僚屬을 갖추었는데, 문종 관제에서는 府에 左右詹事, 小詹事, 注簿, 錄
事 각 1인, 令史 書令史 書藝 각1인, 記官 2인을 두었고, 殿에는 通事舍人
2인과 給事 20인을 두었다.144) 고려 왕실의 여성이 宮·院·宅을 소유해 궁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303
141) 宮院에 田民이 하사되었고, 景昌院의 경우 田柴·魚梁·舟楫·노비가 소속되
었다.『 고려사』권8, 문종 12년 7월조. 궁주, 원주나 后妃에 책봉될 때 토지,
노비, 재물이 하사되곤 했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에 대해, 왕의 별궁
과 그 子弟의 所居를 모두 宮이라 하고, 王母·妃·.妹 別居者에게 宮을 지
급해 그들이 田을 받아 湯沐을 받든다고 언급했다.
142) 妃와 主(宮主, 院主, 公主)를 대상으로 한 妃主祿을 받았다『( 고려사』권80, 식
화지 녹봉). 문종 30년에 정한 妃主祿에서는, 諸院主가 233석 5두를, 貴妃·淑
妃와 諸公主와 諸宮主는 200석을 받았다. 태후와 왕후와 왕비가 누락되어 있
는데 품계를 초월한 지위라서 倉庫나 供上이 주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원주가 귀비 등보다 더 많이 받는 기이한 모습인데 誤記일 가능성과 다른 재
산을 적게 받은 데 따른 보상일 가능성이 있다. 인종조 更定한 妃主祿에서는
王妃가 300석을, 貴妃·淑妃와 諸公主와 諸宮主가 200석을 받았는데, 왕비가
녹봉 체계에 들어왔고 원주가 녹봉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143)『 고려사』권88, 후비전 신종의 배 필. 강종의 왕비 류씨는 강종 원년 10월에 연덕
궁중에 책봉되었고 이 무렵에 강종의 딸(수녕공주)이 궁주에 책봉되었다.『 고려
사』강종세가,『 고려사』후비전·공주전. 희종의 폐위와 강종의 즉위로 인해 책
봉이 늦어졌다. 왕비 류씨는 곧 왕후로 승진한다.『 동국이상국집』권30.
144)『 고려사』권77, 백관지 2 諸妃主府. 고려의 后妃府에 대해서는 이정란, 2006
「고려시대 후비부에 대한 기초적 검토」『( 한국중세사연구』20)에 자세히 분석
되어 있다.
주, 원주, 택주 등으로 불린 것은 신라 왕실 여성이 궁을 소유해 궁주로 불
린 전통에서 영향을 받았지 않았나 싶다.
왕실의 연장자가 이사금이 되는 신라의 관습과 신라말의 형제상속 경
향, 그리고 신라 중대의 長子가 왕위를 계승하는 경향은 고려에 영향을 미
쳤다. 그래서 고려는 왕위 장자계승 원칙을 지니면서도 형제상속 경향을
강하게 띠었다.
신라는 법흥왕~진덕여왕 때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했고 국왕 내지 대
왕이 천자 내지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진덕여왕이 당과 연합하면서
제후국 체제로 전환해 중대에도 제후국 체제를 유지했지만 신라말로 가면
서 천자국 내지 황제국의 양상을 다소 띠어 갔다. 고려는 신라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해 응용했으니 천자국 체제를 기본적으로 유지하면서도 중국
이나 북방 강대국을 사대하기도 했다. 특히 신라의 독자적인 연호 사용은
고려인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때로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으
며 칭제건원 운동의 이론적 원천을 제공했다.
신라에서 국왕의 배필과 모친은 대개 지증왕 무렵까지는 夫人으로, 법
흥왕 무렵부터 통일 이전 무렵까지는 배필은 妃(혹은 妃·夫人)로, 모친은
태후로, 통일 이후에는 배필은 后(왕후)·妃·夫人으로, 모친은 后(왕후,
태후)로 이루어졌는데 하대에는 배필이 황후, 모친이 황태후로 불리기도
했다. 夫人은 통일기에 왕비 혹은 왕후로 승진하기도 했다. 고려가 이를
계승해 왕의 배필에 后妃와 夫人을 운용하다가 현종 무렵부터 夫人을 관
료의 처에게 물려주고 后·妃를 운용했고, 왕의 모친은 고려초부터 태후
를 사용했으며, 또한 고려는 왕의 배필을 황후, 왕의 모친을 황태후라 부
304 한국고대사연구 55 (2009. 9)
르기도 했다. 왕녀와 왕의 누이는 신라말에 공주 칭호가 확인되고 고려시
대에 공주 칭호가 확산되었다. 신라의 왕실 여성이 궁을 지녀 궁주라 불리
는 모습이 더러 보이는데 고려시대에 그러한 모습이 일반화하였다.
신라는 왕실 칭호에서 중국식을 점진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에 칭호가
서로 조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할 때에도 선덕
여왕을 제외하면 황제 칭호를 사용하지 않고 국왕 내지 대왕 칭호를 사용
하거나 불교식 天帝 개념을 사용했으며 임금의 배필에 왕후를 도입하지 않
았다. 통일을 이루면서 국력은 상승했지만 당의 압력으로 제후국 체제를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임금의 칭호를 높이기 어려웠지만 임금의 배필에 왕
후를 도입함으로써 임금의 위상을 간접적으로 높였다. 신라말로 가면서 임
금의 배필은 황후, 모친은 황태후로까지 격상되는 경향을 보였다. 임금이
이를 통해 위상을 높일 수 있었지만 국왕 내지 대왕에 머물렀다.
이러한 부조응이 고려시대에 와서 천자국 내지 황제국 체제가 정착하
면서 해결되었다. 임금이 천자 내지 황제로 불리면서 임금과 배필과 모친
등 왕실의 칭호가 서로 조응하게 되었다. 고려는 국왕과 천자·황제, 왕태
후와 황태후, 왕후와 황후, 왕태자와 황태자 칭호를 자유자재로 사용했다.
그러하니 고려는 황제국 체제를 운용하기도 했지만 천자국 체제를 운용했
다고 보는 편이 낫다. 황제국은 황제 칭호가 필요조건인 반면 천자국은 왕
의 칭호를 사용하더라도 天命 의식과 독자적인 천하관을 지니면 되기 때
문이다. 신라 왕실의 칭호도 천자국의 시각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305
투고일 : 2008. 8. 5 심사개시일 : 2009. 8. 17 심사완료일 : 2009.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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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The Royal Titles of the Shilla and the Koryo Dynasty
Kim, Chang Hyun
The succession custom of the early Shilla royal court that the eldest of the royal
family was to be enthroned, as well as the primogeniture tendency or the succession
between brothers of the later period, were inherited to the Koryo royal court. As the
result, the Koryo dynasty kept both tradition . the primogeniture tendency and the
succession between brothers. The Shilla dynasty enacted its own name of the era and
also the kings’ status were much like an emperor’s. Although the Shilla was
downgraded as a vassal state when Queen Jindeok (진덕여왕) allied with the Dang
dynasty, it gradually recovered the original empire system towards the end of the
dynasty. Koryo followed the example of Shilla and it maintained the basis of the
empire system.
During the Shilla dynasty, they call both the spouse and the mother of the king
“Bu-in(夫人, lady)”. After Shilla unified the southern part of Korean peninsula, they
call the spouse of the king “Wang-hu(王后, empress)”, the mother of the king “Taehu(
太后, Empress dowager)”. The Koryo followed this precedent. The Koryo people
addressed the spouse of the king using both “Wang-hu” and “Bu-in”, later “Wang-hu”
and “Wang-bi(王妃, queen)”; they used Tae-hu(太后, Empress dowager)” for the
mother of the king. The daughter and the sister of the king was rarely called “Gongju(
公主, princess)” in the Shilla dynasty; but in the Koryo dynasty, the “Gong-ju”
became the regular title. “Gung-ju(宮主, lady or princess)”, a title for the royal
women of the Shilla court, was not a popular title to be called; but in the Koryo court,
“Gung-ju” was a commonly used title. Although the royal titles of Shilla showed
irregularity as the titles were imported one by one from China, the irregularity was
resolved in the Koryo period.
신라왕실과 고려왕실의 칭호 307
Key words : Royal Titles, Shilla dynasty, Koryo dynasty, Empire, Vassal Stat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