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8/16목(木)시 23:1-6
아르헨티나의 금광을 찾아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 중 열 명이 금맥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로 하고 각자 집으로 돌아가 금맥을 케어 낼 준비를 하고 모이기로 했습니다. 식량을 구해 금광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백 여 명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비밀을 말했는지 물었더니 그들의 얼굴이 너무도 밝아 알아보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주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런 사람의 얼굴은 누가 보아도 다릅니다. 주님이 나의 목자라면 더더욱 부족함이 없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는 ‘여호와 로이’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길, 나의 문, 나의 지팡이, 나의 해답이라는 것입니다. 양과 목자는 생명관계입니다. 삶과 죽음의 관계입니다. 생명 관계일 때만 ‘그럼에도 불구하고’입니다. 이 때 문제 해결이 됩니다. 부모와 자식은 생명관계입니다. 그 관계에서 이탈되면 죽게 됩니다. 우리 문제는 결핍을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되어야 합니다.
여호와가 목자가 되면 어떤 축복이 오는지 생각해 보겠습니다.
내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십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1-2절) 목자와 양의 관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양의 특징은 눈이 나쁩니다. 그래서 맹수를 잘 알지 못합니다. 풀(독초)을 잘 구별하지 못합니다. 큰 구렁이 있어도 보지 못합니다. 목자가 독초를 가려주십니다.
주님은 두려움에서 평강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4-5절) 세상 사람들이 술, 폭력, 바람을 피우는 것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함입니다. 실존적 두려움 때문에 오버하는 것입니다. 은혜로 사는 것이 축복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릅니다. 양의 약점은 힘이 없고 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잘 넘어지고 잘 놀랍니다. 무기가 없습니다.
음침한 골짜기(죽음의 그림자)는 우리가 사는 곳입니다. 이세상은 안전한 곳이 없지만 주님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안전합니다. 세상은 주님이 지켜주셔서 아름답습니다.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과 싸워서 이겼습니다. 주님이 지켜주셔야 지킬 수 있습니다. 칼은 나를 망하게 합니다. 하나님이 칼이 되실 때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방향이 문제를 알려 주십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3절)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삶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가을이 쓸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방향에 대해 자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길에게 길을 묻습니다. 빨리 가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날마다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해야 합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6절)
“The Lord My Shepherd”
And...
전남 순천에 참 존경받는 목사님이 한 분 계셨습니다. 그 목사님이 여순 반란 사건 때 순천에 있다가는 잡혀 죽을 수밖에 없어서 순천에서 조금 떨어진 별량이라고 하는 곳에 가서 숨어 지내다가 그 동네 공산당원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순천 사람인지라 순천으로 보내졌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데 불안했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으니 독 안에 든 쥐 꼴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반란군 장교 하나가 들어오더니 여기 예수 믿는 놈 있으면 나오라고 소리칩니다. 처음엔 아무도 손을 못 들었습니다. 그 목사님이 가만히 보았더니 자기 교인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시치미를 떼고 손을 들지 않았습니다. 신앙 양심의 가책은 말할 것도 없고 마음속으로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다고 하면 당장에 죽을 형편이었기에 꾹 참고 있었습니다. 장교가 나가더니 한참 있다가 다시 들어 왔습니다. “여기 목사 놈 있으면 나와” 라고 거듭 소리칩니다. 그 당시 순천에는 목사님은 그 목사님 한분 밖에는 없었습니다. 분명히 자기를 두고 하는 소리였습니다. 그렇지만 손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마음속으로 “이놈아, 너 목사가 아니냐. 바로 너를 부르는 소리 아니냐. 왜 그렇게 목사가 아니라고 시치미를 뚝 떼고 있느냐. 손들어”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 목사님은 견디다 못해 “내가 목사요” 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랬더니 장교가 목사님의 목덜미를 잡고는 “이 반동은 괴수니까 내가 직접 처리할 테니 너희들은 가라”며 다른 사람들을 못 따라오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을 산기슭으로 끌고 간 장교는 공포탄만 쏘고는 목사님에게 “목사님! 빨리 도망가십시오. 내가 어떻게 하다가 지금은 이렇게 됐는데 사실은 내 아버지, 어머니도 다 예수 믿습니다. 나도 주일학교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듣자하니 순천 지방에서 유명한 목사님이 잡혀 왔다고 하기에 살려 주려고 ‘믿는 사람 나와라’ 해도 안 나오고 ‘목사 나와라’ 해도 안 나오니 참 답답했습니다. 마지막에라도 손을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내가 내 손에 권세가 있을 때 돕는 길은 이것밖에 없지 않습니까? 빨리 도망가십시오.” 라고 하더랍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살아났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목자이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도 못들은 체 했다면 그 목사님은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고 말았을 것입니다.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는 길이 사는 길입니다. 만약에 양이 목자의 음성을 불순종하고 다른 길로 가면 들짐승들의 밥이 되든지 아니면 목자에게 혼이 날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하나님의 음성, 목자의 음성을 들었다고 하면 신기하게 생각합니다. 목자의 음성이 목자와 양을 연결시켜주는 고리 이듯이 주님의 말씀이 우리와 주님을 연결시켜주는 고리입니다. 양에게 요구되는 것은 음성을 듣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대답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따라가야 합니다. '알아요!'가 아니라 '들었어요!'가 아니라 움직이는 것입니다. 믿음은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라가야 합니다. 곁길로 가서는 안 됩니다. 목자가 가는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가 양이라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하고 목자의 음성에 귀를 기울려야합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가장 적극적인 신앙생활입니다. 승리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리고 목자 되신 예수님을 따라 가야 합니다. 아무리 지금 이곳에 놀 것이 많고 내가 좋아하는 것이 많아도 목자가 가자하면 따라가야 합니다. 내 생각과 판단을 버리고 목자 되신 주님을 따라가는 주님의 양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안에 주님 계십니다.
주님은 나의 주인이십니다.
오늘도 나는 그분의 도구로 살아갑니다.
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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