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앞에서 외 20편
무엇인지 쏟아낼 게 많은 것 같은 생각에
벌떡 일어나 눈을 부비고 보니 새벽 03시
컴퓨터를 부팅하고 키보드 앞에 앉아본다
05시까지 생각들 다 어디 갔나? 종적묘연
20200529
비몽사몽
누군가에게서 약을 받았다 꿈이다
아하 그렇다 오늘 약 타는 날인데
날짜를 잊을까봐 미리 알려주려는
어떤 예언가인가 꿈, 잠재의식인가
20200325
물각유주
아내가 두릅순 손질하기 귀찮다 내다버려라 해
한 시간도 넘게 어렵게 딴 두릅순 차마 아까워
그럼 내가 하지, 남자가 쪼잔하게 뭐하는 짓거리
이를 어쩌나, 오 다행히 지향이 다듬어 먹겠다네
20200414
화성읍내가 주는 반응
방금 선생님 메일을 보고 방방 뛰었어요
좋은 아침 기분이 상승되는 소식이네요
읍내라는 화성인이라는 단어에 반했어요
어쩜 무슨 시험에 합격한 느낌을 주네요
*강희산 시인이 보내온 메일내용을 운문화함
20200425
빛이 부서지는 밤
유리창 방충망에 들이친 빗방울 매달려
새카만 바람결에 반짝반짝 흔들리는 빛
이슬방울 같은 맑은 보안등 불빛 부서져
자글자글 잔 변방 별빛처럼 불안한 한밤
20200803
시집
전화를 받았다 자기시집을 보낼 테니
만원을 송금하라고 좋은데 쓸 거라고
시집이 하 안 팔리니 그럴 수 있겠다
좋은데 쓸 돈이라는데 그래 좋다했다
20200424
농가의 봄날
봄이 왔다고 산에 들에 봄이 왔다고
흥, 좋을시고 우리 동네에 봄이 왔다고
그늘을 접고 집집마다 양지로 일터로
밭 갈고 감자 심고 묵은 고춧대 태우고
2020032
투표
“그놈이 그놈이라고 투표를 포기한다면
제일 나쁜놈이 다 해먹는다” 함옹의 말
아내에겐 안 통해 시끄럽다 그만 어허,
끝내 투표를 거부하고 낮잠만 쿨쿨 쿨
*고 함석헌 옹의 어록
20200415
어떤 프러포즈
하와이 태평양 어느 깊은 무인 섬 광막한 용암 벌
복판에 두 다리 쭉 뻗고 혼자 포즈를 취한 저 여자
누군가를 기다리려 비워놓은 저 쓸쓸한 그 옆 자리
간절한 눈빛 화성인이라도 내려가 짝을 지어야겠지
20200316
봄바람
봄바람은 찬데 옷소매 속으로 쏙쏙 기겁해 기어드는데
비닐조각들 나뭇가지들 세차게 요란하게 흔들어대는데
산기슭 묵정밭과 밭두둑 논두렁 양달에 다투어 솟아난
냉이 달래 참쑥 꽃다지 제비꽃 모여 서로 의지해 피네
20200321
여름
사람은 가벼운 옷으로 살 드러내 뽐내기 좋고
나무들은 푸른 치마저고리로 한껏 치장해 좋다
불가마 속 같은 삼복혈에도 그늘이 있어 좋고
푸른 들판을 건너오는 녹색바람이 시원해 좋다
20200629
오후에 부는 바람둥이
바람은 어디서 노래와 춤을 배운 것일까
조용한 아침나절 풀잎 하나 간당 않다가
오후에 일어나 짓궂게 치맛자락 찰랑찰랑
처녀 궁둥이 노래하는 바람손길 아슬아슬
20200412
입동 무렵
뒷밭 까만 들깨 베어 말렸다 털고
앞들 벼농사 차곡차곡 갈무리하고
텃밭에 무 배추 김장하기 이르고
나는 호주머니에 왼손을 넣습니다
20201108
첫눈
첫눈 날리는 날 만난 사랑은 오래가지 못 한다
첫눈처럼 쉬이 사라져 해마다 그리움만 쌓이고
본 듯 만 듯 홀리기 딱 좋은 꿈도 허 헛꿈인 듯
도깨비인가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눈만 비비고
20201128
캄캄한 한밤에 홀로 깨어 앉아 듣는 소리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속에 들리는 소리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 위이이잉 위이이잉
나무들이 물 길어 올리는 소리 쭈욱쭈욱쭉
젊은 엄마뱃속에서 아기 노는 소리 쿵쾅쿵
20201122
한내서왕寒來暑往하는 기러기에 대한 궁금증
기러기 고향은 남쪽인가 북쪽인가
찬 겨울에 왔다가 봄 되면 돌아가
철새들의 이동 피한인가 피서인가
집은 있나 없나 잠은 어디서 자나
20201116
기러기
어서 오너라 기다렸다 기러기야
차고 흰 구름 지워진 빈 하늘에
너희들이 날아들어 심심치 않게
기럭기럭 노래 시끄럽지 않구나
20201115
벌거벗은 겨울 산
상수리나무 열매 떨어지고
빨강 노랑 단풍잎 다 지고
파란 하늘 파랗게 보이고
그대 몸매도 환히 보이네
20201215
첫눈 3
희끗희끗 첫 눈발이 날리는 늦은 저녁때
약속된 그녀는 안 오고 그리움만이 더해
창가에 앉아 노란 제주 한라봉 까먹는다
한쪽씩 떼 내어 말없이 그대를 내다보며
20201204
첫눈은 안 오고
십여 년 전 춘천 아가씨와 헤어지던 날 첫눈이 내렸다
마음으로만 털장갑 하나 사서 끼워준단 것이 한이 되어
언제고 첫눈 오는 날 다시 만나자고 한 그녀와의 약속
털장갑 사놓고 기다렸는데 항공엽서가 왔다 하와이에서
20201128
5월 5일
눈이 싱그롭고 환하다
코가 싱그롭고 환하다
맘이 싱그롭고 환하다
싱그롭다 연두색 새싹
202004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