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두 가는 철학자 / 솔향
별다를 게 없는 하루가 또 시작됐다. 빠르게 씻고 준비해서 출발한다. 주차하고 곧장 교무실로 직진. 어제도 그 자리에서 봤던 직원 네 명이 이야기 나누고 있다. ‘안녕하세요?’ 판에 박힌 아침 인사를 한다. 좀 더 창의적인 인사말 없나?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컴퓨터 전원 버튼부터 누른다. 로그인하는 동안 늘 그 벽에서 내려다보는 시계와 눈 맞춘다. 여덟 시 15분. 혹시 전날 채 확인하지 못한 문서가 있나 쭉 훑어보고 처리한다. 됐다. 이제 커피 마실 시간이다.
얼마 전부터 커피의 크레마가 콜레스테롤을 높이는 주범이라고 각종 매체에서 떠들어 댔다. 김 선생님은 깜짝 놀라서는 이제부터 종이 필터에 걸러 마시기로 했다. 혈압이 높단다. 그렇다면 고지혈증약을 먹고 있는 나도 동참해야 인지상정이지. 김 선생님이 볶은 커피콩을 넣은 조그만 분쇄기의 손잡이를 잡고 빙글빙글 돌린다. 가르륵, 가르륵. 원두가 잘게 부숴진다. 그 손은 아마도 맷돌에 콩을 넣고 정성을 들였던 우리네 옛 시골 아낙의 맷손을 쥔 그것과도 닮았다. 아니, 조금 다른가? 그의 손동작이 조금 더 방정맞다. 어, 미안. 조금 더 활기차다. 원두 향이 아침 공기에 섞여 실내에 가득 퍼진다. 으음, 그윽하다. 덕수궁에서 고종 황제께 올렸던 가베에 스민 냄새에 비견할 만하지 않을까? 여봐라! 어서 따끈하게 한 잔 마시고 싶다. 도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느냐?
눈동자 여러 개가 회전하는 손잡이를 힐끗거린다. 지금 사무실에 있는 사람은 다섯, 그중에 커피를 마시지 않는 이가 한 명이니 노리는 사람은 넷이다. 내 몫은 확보된 듯하나 누군가 금방 또 들어올 수도 있어서 방심은 금물이다. 어릴 때 친구가 학교에 라면 스프를 가져와 친구들에게 나눠 주던 게 떠오른다. 잘못 보이면 내 손은 빼놓고 갈 수도 있으니 최대한 불쌍하게 보여야 한다. “나도, 나도!” 꼬질꼬질한 손바닥에 뿌려 준 고 감칠맛 나는 가루를 매운 입을 호호 불어 가며, 얼마나 맛나게 날름날름 핥아먹었던지. 그때랑 비슷하다. 황제가 되기 전까진 일단 커피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중독자 같은 표정을 장착해야 내 컵에도 저 향긋한 가베가 쪼로록 부어질 것이다.
아, 진짜. 성격 버리겠네. 내가 도착하자마자 바로 시작하더구먼, 끝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냥 커피 머신에서 뽑아 마실까? 아냐, 참자. 잠시만이라도 황제의 기분을 맛보려면 인내의 미덕이 필요하나니.
으, 답답해! 인내는 무슨. 기다리지 못하고 기어이 한마디 했다. “커피 머신에서 내린 걸 종이 필터에 걸러 마시면 안 돼요?” 오, 내가 생각해도 기발한데? 반짝이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웃기만 하고 조용히 싹 무시한다. 쳇. 그래도 다행히 황제의 가베는 한 잔 얻어 마셨다. 캬, 좋다!
점심 먹고 들어와서, 김 선생님이 또 새 원두를 넣고 부지런히 가륵가륵 소리를 만들어 낸다. “자동 분쇄기 수석실에 있는데 드릴까요?” 킥킥. 수석님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군. 성질 급한 사람 같으니라고. “와! 그래요? 그걸로 하면 빠르겠다. 힘도 안 들고. 빨랑 갖고 와요.” 박수까지 치며 거들었다. 김 선생님이 시큰둥하게 대꾸한다. “저도 있어요. 일부러 손으로 하는 거예요.” 뭣이라고라? 뭣땜시? “아무 생각 없이 이렇게 천천히 갈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잖아요. 원두 냄새도 좋고. 이 시간을 즐기는 거예요.”
아....... 문득 부러워졌다. 나는 온전하게 순간을 즐기면서 집중한 적이 언제였던가? 효율성, 가성비를 따지며 ‘빨리빨리’만 외치지는 않았나? 그렇게 시간을 절약해서 얼마나 위대한 일을 하겠다고. 방금 전, 점심을 먹으면서도 맛을 느끼는지 마는지, 허겁지겁 식판을 비웠다. 그것도 1등으로,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말은 또 어찌나 빠른지 모른다. 가끔은 침 삼킬 틈도 없을 지경이다. 입에 발동기를 단 것처럼 다다다다 쏟아 낸다. 아마 짧은 시간에 많이 말하려고 그러는 걸 거다. 길게 지껄이는 건 싫어해서 얼른 치고 빠지려다 보니 그렇게 됐다. 뭘 감상해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왜 음악을 들어도 감동이 안 오지?’라며 푸념하곤 하지만, 시간을 들여 제대로 느끼지 않고 다른 일을 동시에 하면서 흘려듣는데, 마땅한 결과다.
이러다간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안 된다. 그래, 느리게도 살아보지 뭐. 천천히 먹고, 조금만 말하고, 옆도 뒤도 보면서 나릿나릿 걸어 보는 거야. 그러면 여유와 휴식이 생기고 그 순간이 좀 더 소중해질 거야. 그동안 보지 못했던 것도 눈에 들어오겠지? 당연한 것을 다시 생각해 보겠지? 욕심이 없어질 거야. 화도 줄어들겠고. 그만큼 더 행복하겠지.
아까보다 커피가 더 부드럽다. 인생 선배인 철학자 바리스타가 느릿느릿 만들어 준 의미가 더해져서인가 보다. 좋아. ‘지금’을 살겠어. 오늘은 어제랑 조금은 다른 하루다. 시야가 맑아진다.
첫댓글 '캬, 좋다!' 는 소주 먹을 때 내는 소리 아니까요잉? 하하하.
글이 재미있어 괜시리 시비 걸어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저도 있어요. 일부러 손으로 하는 거예요.” 뭣이라고라? 뭣땜시? 하하하! 재밌습니다.
커피를 좋아하는 솔향님, 저와 다른 점이군요. 저는 잠을 못자요. 커피를 잘 마셔야 이렇게 글도 재미나게 쓰는가 봅니다. 하하하.
가르륵 그라인더 분쇄기의 커피 콩 갈리는 소리 들리는 듯. 원두향 물씬, 한 모금 머금고 싶네요.
원두 갈아 커피 내리는 그 장면으로 이렇게 세밀하게 글을 쓸 수 있다니 역시 고수이세요. 부럽습니다.
어쩜, 빠른 것은 나랑 같네요. 점심 시간 밥 먹는 속도 학교에서 1등입니다. 이제는 시간 여유도 생겼으니 밥 철학자가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커피 한 잔 얻어 마시는 게 이렇게 쫄깃한 글로도 나오는 군요. 원두 커피 가는 선생님도 만나 보고 싶어요. 하하.
'나릿나릿'이란 단어가 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느릿느릿'에 생각과 멋이 더해진 느낌입니다.
교감 초임에 만난 교장 선생님이 위 글처럼 일일이 원두를 갈아 차를 만들어 주셨어요.
3박자가 잘 혼합된 커피만이 전부인 줄 알고 살던 제게 예가체프, 콜롬비아, 브라질, 만델링 커피 등을 가르쳐 주셨어요.
아참, 비 오는 날엔 인도 커피 몬슨 커피가 맛있다는 것도요.
그렇지만
저는 과테말라나 온두라스 커피를 좋아해요.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