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가을이 내려앉은 펀더기에 안개가 걷힌다. 멀찌감치 솔버덩에도 어김없이 가을이 내렸으련만 소나무의 굳은 절개가 가을이라고 변할 리 없어 여름 빛깔 그대로다. 인근 야산의 올밤 나무에는 가시 돋친 숭어리가 버성기고 그 사이로 밤톨 삼형제가 오달진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가을이 왔음을 알린다. 행여 누가 따먹을세라 속살을 떨떠름한 보늬로 덮고 단단한 겉껍질로 매끈둥하게 감싸고도 모자라 가시숭어리 안으로 숨어들어간 밤톨이 그곳에서 나올 때가 되었나 보다.
그 옆에는 감나무에 주렁주렁한 감들이 풍만한 몸뚱이를 자랑한다. 껍질이 단단하지 않은 감들은 까치가 쪼아댈까 걱정하며 이웃한 밤들을 부러워하고 있으리라. 고갯길 옆에 외롭게 자리한 산달밭 한 뙈기, 예수남은 아낙이 붉은 고추가 한가득한 자루를 들고 ‘들피진 엇부루기 쟁기 끌듯’이 힘겨운 발걸음을 옮긴다. 그러고 보니 추석이 코앞이다.
추석은 한가위, 가위, 가배 따위로 불린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시대 여자들이 패를 나누고 길쌈을 해서 지는 쪽이 음식을 마련하여 이긴 편에게 대접하며 베푸는 잔치를 ‘가배’라 하였는데 ‘가위’라는 말은 거기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나 ‘가배’가 8월의 ‘가운데’라는 뜻인지, 지는 쪽에서 ‘갚는다’라는 뜻을 지닌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한다. 한편 옛날에는 온 가족이 모두 모여 보름달을 보면서 소원을 빌기도 했는데 추석(秋夕)이란 ‘가을의 달빛이 가장 좋은 밤’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그 해 풍성한 곡식과 과일을 얻을 수 있게 해준 조상들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예를 다하여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였으며 행사와 놀이를 즐겼는데 추석의 유래를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대 삼한의 추수감사제,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동예의 무천 등은 농업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자연에 대한 공경과 감사하는 마음에서 지역공동체가 하늘에 지내는 제사였다. 추석은 가족이 조상께 차례를 지낸다는 점이 다르지만 모두 농경의례라는 공통점이 있다. 미국의 추수감사절도 400여 년 전 그곳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낯설고 물선 개척지에서 갖은 풍토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하늘의 도움으로 한 해 농사를 수확한 후 결실을 감사하여 드린 감사기념 예배에서 유래하였다.
오늘날에도 기후 등 자연조건이 농사의 풍흉을 좌우한다. 예전과는 달리 시설농업이 발달하여 비닐하우스나 유리온실 등에서 농사를 짓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연조건과 무관할 수는 없다. 시설농업은 추운 겨울에도 난방을 하여 농작물의 생육온도를 맞추어주고 인위적으로 물을 주며 때로는 해가 짧은 겨울에 전등을 켜서 일조시간을 늘려주면서 농작물을 가꾸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식물생육조건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므로 자연조건을 의존하지 않고서는 농작물을 절대 가꿀 수 없다. 갈수록 이상기후가 잦아지고 그에 따른 농작물피해도 늘고 있어 농사에 알맞은 기후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지고 있다. 추석은 그 해 농사에서 거두어들인 햇곡식으로 조상들께 감사하며 차례를 지내는 농경의례로서 궁극적으로는 풍년이 계속되기를 바랐다. 농사에 알맞은 기후가 인간생활에도 적당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자연현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오늘날에는 농업과 관계없이 의미가 있지 않으랴.
민족의 대이동으로까지 일컬어지는 추석의 귀성풍습은 아직도 여전하지만 그 의례와 행사 등은 많이 축소되었다. 아마도 그것은 대가족제도의 붕괴와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농업인구의 감소에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며 조상들께 차례를 지내는 특성상 일부 종교의 영향과도 무관치 않으리라. 우선 예전의 대가족제도와는 달리 오늘날의 소가족제도에서는 여러 가족이 한 곳으로 모여야 하는 번거로움으로 명절이나 전통 제례가 간소화되기 마련이다. 또한 농업인구의 감소로 농경의례와 관련이 깊은 추석의 의미가 갈수록 희미해지고 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농업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의 먹을거리만큼은 오직 대자연에서 살아 숨쉬는 동식물에서만 얻을 수 있다는 영원불변의 진리 때문이다.
내일이 추석인데 TV뉴스에서는 해외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공항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그 해 결실의 의미를 되새겨 조상들께 차례를 지내고 성묘도 하면서 뜻 깊게 보내야 하는 추석은 그들의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씁쓸한 마음을 달래며 달보드레한 송편을 한 입 베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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