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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7회 : 역사교사시리즈 제3편
만주독립운동의 요람,신흥무관학교
방송일: 20020831 조회수 : 18533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pre>
1000명의 역사교사가 뽑은 역사이야기
[제3편] 만주독립운동의 거점, 신흥무관학교
방송일자 : 2002년 8월 31일 토요일
담당 P D : 이광록 / 작가 : 한윤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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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청산리 전투10
(자막 나오면 멘트 시작)
독립전쟁사상 최고의 승첩 청산리 전투.
쌍성보 영릉가 전투5
1930년대 한중연합군의 대승리 쌍성보 전투와 영 릉가전투.
의열단 결성6 항일비밀결사 의열단.
광복군5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 광복군까지,
독립전쟁의 선봉에는 언제나 신흥무관학교가 낳은 정예군인들이 있었다.
(서브타이틀 그림까지 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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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브타이틀 만주독립운동의 거점 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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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대한민국 전도 배경
엠씨 국사책 들고
역사교사 천명이 뽑은 역사이야기, 세 번째 주제는 55명의 선생님들께서 적어주셨는데요,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일제시대 독립운동사는 워낙 복잡해서 가르치기도 배우기도 쉽지 않은게 사실인데요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우리 독립운동사를 바라보는 새로운 방법을 하나 제시하려고 합니다.
확대.... 독립군부대 지도(국사 교과서 157쪽)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실린 독립군부대를 보면, 연해주의 대한 독립군단, 블라디보스톡의 대한광복군정부, 만주의 대한독립군, 북로군정서, 서로군정서, 한국 독립군, 조선혁명군 등이 나옵니다. 이들 각 군부대들은 사상과 노선에 조금씩 차이가 있었지만 조국독립이라는 목표만은 하나였는데요, 이 많은 독립군부대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요.
지도 사라지고 고풍스런 분위기의 앨범 뒷배경으로 등장
표지 넘어가고 7명의 사진과 이름, 한 장에 하나씩 나온다.
마지막 사진은 돌아온 신흥학우단 단체사진.
자, 여기를 잠깐 보실까요...
한 장씩 넘어가고
의열단장 김원봉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광복군 제2지대장 이범석
광복군 제3지대장 김학규
임시정부 부통령 이동녕
군정부 독판 이상룡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이시영....
그리고 무명의 독립투사들까지...
단체사진 위에 신흥무관학교 이름 새겨지고
이런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모여있던 곳이 있습니다.
바로 신흥무관학교입니다. 앨범 속에서 보신 분들은 모두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했던 학생이거나 그곳의 교관들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만주에 세워진 독립군양성기관으로 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다른 독립운동단체들이 몇 년 몇 달을 버티지 못하고 문을 닫았던 것과 달리, 신흥무관학교는 10년 간이나 지속되며 3500명이 넘는 장교와 군사들을 배출해냈습니다. 앞서 본 독립군 부대의 많은 군인들이, 바로 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거나 이곳 출신 장교들의 지휘를 받았습니다. 우리 독립운동의 뿌리랄 수 있는 신흥무관학교는 과연 어떤 곳이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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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달리는 창밖8
(4초 후 시작)
압록강 건너 조선인들이 최초로 정착한 삼원포.
삼원포 거리6
현재 길림성 유하현에 속해있는 삼원포는 총인구 1만 6천여명 가운데
수레끄는 여자4
3천여명이 조선족이다.
두 노인5
이곳에 한국 이주민이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910년경부터.
삼륜차 가고11
그다지 풍요로운 땅은 아니었지만, 일제시대 삼원포는 만주지역 독립운동의 중심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오르막 산길11
(5초 후 멘트 시작)
삼원포를 벗어나 신흥무관학교의 주요무대인 합니하로 가는길.
기사 팬3
(흘리고)
이덕일 조문기8
독립운동사를 연구하는 이덕일 박사와 중국인 학자의 도움을 받아 합니하 현장을 찾았다.
지도 가리키는 손7
합니하는 삼원포에서 동쪽으로 40킬로미터 정도 거리에 있었다.
다리 건너는 소와 사람들7
현재지명은 광화. 합니하는 경운기와 마차가 주요운송수단인 산간오지였다.
걸어가 묻는 취재팀4
할아버지 대답 자막부분22
여기 학교가 있었다는데 알고 계십니까.
들어는 봤는데 몰러...
학교가 어디있었느지 들어보셨나요.
산과 강 근처..저기 강이 있잖아요.
물건너는 사람 줌아웃 풍경15
100년전의 흔적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마을에서 가장 연로한 노인조차도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독립운동사 자료집 표지10
학교의 위치를 추측해볼 수 있는 다른 자료는 신흥무관학교 생도대장 이었던 원병상의 수기다.
책 내용 줌인13-
수기에는 합니하강 북쪽 언덕위에 학교터를 신축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노인이 말해준 강쪽과 일치하는 부분이었다.
팬 합니하 강과 터17
강을 따라 탐색한 결과, 언덕위의 넓은 분지를 찾아냈다. 언덕을 감싸고 합니하강이 돌며 흐르고 있었다. ( 좀 쉬고 )뒤로는 험한산을 연달아 두고 앞으로는 강줄기를 해자로 삼은곳.
학교터 팬13
신흥무관학교의 지형은 그 자체가 뛰어난 천연요새였다. 군사학교를 세우는데는 더없이 알맞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옥수수 밭 들어가는 피디3
큰돌 들어내는 아저씨10
그러나 학교터는 옥수수밭으로 뒤덮여있었다.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곤 우물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둘이서 돌 꺼내려 고...7
주민들이 밭을 일구면서 큰돌들을 모두 치워버려 남아있는 주춧돌도 별로 없었다.
돌 잡고 현장음32
취재팀은 옥수수밭 한가운데서 건물자리로 추정되는 곳을 찾아냈다.
이런 돌이 많았습니까? 예 많았습니다. 원래는 여기서 1미터 높이였습니다. 지금은 농사짓기 때문에 거의 없어졌습니다...이거이 신흥학교 교실의 주춧돌입니다.
줌인 학교터13(웬 초가?)
건물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었다. 옥수수대에 뒤덮힌 채, 주춧돌 몇 개만 겨우 남은 신흥무관학교의 옛터. 그 위에 세워졌던 학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팬 영농사진15
유일하게 남아있는 사진을 통해 학교의 모습을 추측해 보자. 이 사진에는 흐릿하게나마 학교의 이모저모를 추측해 볼 수 있는 내용들이 들어있다. .
괭이 든 애 말탄애11
원병상의 수기에서 나온대로, 학생들은 염색한 천으로 교복과 모자를 만들어 입었다.
디졸브6
학생들 뒤로 희미하게 보이는 건물은 교실건물일 것이다. .
그래픽 교실? 막사?9
교실은 주변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나무를 이용해 통나무집 형태로 지었다.
아리랑...김산사진12
그 교실은 어디에 있었을까? 님웨일즈의 소설 아리랑에는 독립운동가 김산의 신흥무관학교의 생활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있다.
책장 넘어가면
책에 따르면 이 학교는 교실의 위치가 매우 특이했다고 한다.
책장넘어가고... 자막돌출23
마침내 목적지에 도착했다. 합니하에 있는 조선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렸다.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
그래픽 교실들... 줌아웃 풀샷까지28
자료들을 바탕으로 신흥무관학교의 모습을 복원해보았다.
(3초 정도 쉰 후, 교실 발생하기 좀 전부터 들어가주세요)
교실발생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숨듯 줄지어선 18개의 교실. 신흥무관학교의 교실은 학습장소이면서 동시에 비밀 아지트이기도 했다. 교실배치야말로 군사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주는 것이었다.
줌인 막사로5
넓은 연병장 안쪽에는 큰 병영사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픽 복도 지나고12
병영사에는 비품실 나팔반 취사장 사무실 식당 숙직실 등이 갖추어져 있었다.
내무반 문 열리고8
내무반 안에는 생도들의 성명이 부착된 총가가 설치되어 있었다.
총가의 총 하나8
학생들이 쓰던 총은 나무를 깎아만든 목총에 쇠방아쇠를 부착한 것이었다.
팬 학교터12
학제는 3년제인 중등과와 1년제인 군사과로 나뉘어있었다. 그러나 과와 상관없이 군사훈련은 기본이었다.
맞은편 가리키는 셋14
앞의 수전하고 옥수수밭... 골짜기 양쪽하고.... 여기가 연병장입니다
팬.. 연병장 자리10
넓은 연병장에선 수시로 각개훈련과 기초훈련을 하고 실전을 방불케 하는 공격전과 방어전을 펴기도 했다.
그래픽 연병장-군사과목 자막10
군사과목으로는 총검술 유격 축성학 육군형법 구급의료 측도학 격검등이 있었다.
교관들 사진
이세영 이관직 김창환15
교관은 대한제국 무관학교 출신의 이세영 이관직 김창환등의 장교들이었다. 훈련은 철저하고 엄격했다.
서중석 인터뷰50
이분들은 산악훈련같은걸 철저히 시켰고 그런 것은 북한지역에 대한 침투도 있었습니다만 게릴라 작전을 많이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실전에 대비해서 대단히 강한 체력훈련이나 산악훈련을 많이 시켰습니다.
합니하강 수기자막20
(자막 부분 읽기)
-넓은 연병장에서는 각개훈련과기초훈련을 했었다.
-야외에서는 실전에 방불케 훈련을 되풀이 했다.
-70리 강행군을 비롯해 강인불굴의 체력단련에 힘썼다.
석양을 달리누나7
강인불굴의 독립군을 길러내는 군사양성소. 그곳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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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복원한 학교 연병장 그래픽 배경
엠씨, 허름한 책 하나 준비해서 들고 읽기
<새벽 6시에 도또따 기상나팔 소리가 잠든 학생들의귓전을 때리면 각 기숙사의 학생들은 일제히 일어나 내무반을 정리하고 복장을 단정히 한 다음, 각반차고 검사장에 뛰어나가 인원검사를 받은다음 보건체조를 한다>
지금 읽어드린 것은 신흥무관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의 수기입니다. 수기를 바탕으로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일과표를 만들어봤습니다.
일과표 뜨고 학생들은 새벽 6시부터 일어나 점호를 받고 하루종일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습니다. 수기에는 식사내용도 자세히 나와있는데요, 중국인들이 사료로도 쓰지 않는 썩은 조밥 한덩이와 기름에 쩐 콩장 두어쪽이 전부라고 했습니다. 오후엔 수업 외에 영농활동이란 것을 했는데요, 학교 재정에 보태려고 산비탈을 갈아 밭을 만들고 한겨울에도 허리까지 차는 눈을 헤치고 땔감을 구했다고 했습니다. 학생들은 이런 자신들의 학교생활을 학.병.농 투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생활 자체가 투쟁이었죠.
물론 공부도 빠질 수 없는 투쟁이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의 기본목적은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었지만 독립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인재양성에도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군사훈련 못지 않게 일반중등교육과정도 철저히 진행했는데요 이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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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국회 도서관 전경5
국회도서관엔 일제시대의 정찰보고서가 남아있다.
국경지방 시찰복명서4
일본이 국경지방 조선인들의 활동을 감시해놓은 기록이다.
지도 펴고6
조선인 이주민들이 많이 모여있는 길림성 봉천성 등은 일제의 요주의 시찰지역으로
봉천성 가리키고6
이주민 수까지 정확하게 기록되어있다.
책장 넘기고10
그중에서도 삼원포 합니하 일대는 이들이 늘 관심을 집중하던 곳이었다.
한부분 줌인7
바로 이곳에 독립군 양성소인 신흥무관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합니하 신흥학교 글씨 돌출12
일제가 조사한 '정보'들 가운데는 교사의 이름과 생도들의 수, 입학자격 뿐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는 각종 과목까지 자세하게 들어있다.
틸다운 교과목 훑는 펜20
(교과목으로는 지리 역사 산술 이화 수신 독서...까지 듣고)
교과목은 모두 12개 정도였는데, 군사학교이니만큼, 무기와 관련있는 이과계통이 중시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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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오는 고대도서관 5
복도 걸어오는 두사람5
신흥무관학교에서 쓰이던 교재는 어떤 것들이 있었을까.
팬... 교과서들13
당시 많이 사용되던 교과서로는 국가론이나 대동역사, 독사신론등이 있었다. 이들 대부분의 교과서에는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이 담겨있어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대한신지지6
말의 소리4
국민독본.. 넘기고12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들 역시 대부분 일제의 금서목록에 올라 있었다. 특히 역사학자 현채가 지은 국민독본은 일제가 압수한 출판물 중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유명한 책이었다.
팬... 그림6
온조왕5
이 책은 민족의 시조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역사를 알기 쉽게 기록하고 있다.
을지문덕7
수나라의 10만 대군을 맞아 살수대첩을 이끌어냈던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 장군,
안시성5
당태종을 물리쳤던 안시성 전투의 양만춘 장군.
그림 줌인... 도망가는 당태종10
이런 역사를 통해 학생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우리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확인하도록 했던 것이다.
거북선 부분 읽고 줌인19
(현장음- )
철로써 쐈으니 ... 곧 세계 각국 철갑선의 시조라 하나이다. -
특히 이 책에는 임진왜란의 영웅 이순신장군을 한국 제일의 명장으로 기술하고 있다. 거북선의우수성을 과학적으로 분석해놓기도 했다.
정기룡군기대적도8
유난히 일본과의 전쟁을 많이 다뤄서 잘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의 전투들을 소개하기도 했다. .
각 지도들24
지리교과서로 쓰인 배달족강역형세도는 신흥무관학교 교재편수위원인 이원태가 지은 책이다. 이책 역시 일제의 금서목록에 올라있었는데 모두 44장의 지도로 구성되어있었다.
지도들에는 만주지역의 역대국가들이 우리와 같은 민족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도에 색깔 나타나고10
거기엔 고구려와 부여 그리고 발해에 이르기까지, 만주일대가 우리민족의 영토였다는 고토의식이 자리잡고 있었다.
서중석 인터뷰50
이게 1910년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있는 힘이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만주가 예전에 우리 민족이 주인이었다... 이제 중국과 우리는 같은 민족이다 이걸 강조할 필요가 있었어요.
아파트 전경 4
신흥무관학교의 교재를 직접 편찬한 사람의 후손을 서울에서 만났다.
이범증 사진소개5
(현장음-)
우리 증조부시고 이상룡 선생 ... 1925년에 찍은 사진입니다.
이상룡 사진 타이트10
석재 이상룡은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중의 한사람이기도하다.
허은사진 꺼내고17
그의 며느리인 허은은 만주에서의 생활을 엮어 책으로 내기도 했다.
(이하 오디오 생.)
(독립군가 수백곡 기억하셨습니다 까지 듣고)
육필원고+ 둘이 대담12
허은은 당시에 불렸던 많은 독립군가들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그중에는 시아버지가 직접 지은 신흥무관학교의 교가도 들어있었다.
둘이 대담6
교가 가사 볼펜으로 가리키고
1절은 우리 민족이 아시아에서 중국과 일본을 지켜준 광범위한 역사를 나타내고, 그런데 그렇게 했던게 누구냐 하면 우리 조상들이었다... 설명.
노래하는 이범증
서북으로 흑룡태원. 남해발해의.. 노래
컴 화면으로 ... 12
중국을 업어기르고 일본을 안아 길렀다. 가사에는 우리민족을 동아시아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인식이 나타나있다.
노교수 얼굴7
일제시대 독립군가를 전공한 목원대 노동은 교수의 도움으로 신흥무관학교의 교가를 복원해봤다.
(오선지로 이어집니다)
오선지에 악보 그리기13
(5초 정도 보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친숙한 멜로디였다.
노교수 인터뷰30
그 리듬으로 보니까 당차고 독립의식 고취시키는 당시 독립운동가로서 전형적인 노래라고 볼 수 있느데요 단단.. 조지아 행진곡일겁니다. 그런데 이 노래를 신흥무관학교의 독립의식 고취시키는 인재 육성하는, 항일로 나가는 기개가 당찬 독립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아노 치는 손10-
(듣고)
노래하는 노교수
서북으로 흑룡태워 남의 발해에....
영농사진
(사진 나오면 멘트)
독립의 염원이 스며있는 교가와 창가들을 부르며, 학생들은 독립군으로 거듭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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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교실 배경. 칠판과 게시판등 보이고
칠판 위 벽에는 안중근 사진, 손바닥 그려진 태극기 보이고.
교탁도 있고.... 의자 책상 몇 개 준비.
*엠씨, 분필 들고 교사처럼 칠판 가리키며....
신흥무관학교에 있었던 18개 교실 중의 하나에 들어왔습니다. 교실 내부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없지만. 아마도 이 비슷한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위의 안중근 사진 가리키며
아, 여기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 보이군요.
당시에 안중근은 한국인뿐만아니라
중국인들에게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었습니다
*엠씨, 시간표 있는 자리로 이동하며
이번에는 여러 자료를 토대로 학생들의 시간표를 한번 꾸며봤습니다..
*시간표에서 중국어 화학 창가등 손으로 가리키며
중국어와 화학과목이 눈에 띄는 군요.
중국어는 제1외국어로 필수과목이라 할만큼 강조되었고,
화학은 폭탄제조와 무기를 다루기 위한 필요성에서 개설되었던
것 같습니다. 창가시간엔 신흥교가나 용진가같은 군가를 부르며 결의를 다졌겠지요. 축성학 측도학 육군형법 구급의료.... 앞서봤듯이 오늘날 사관학교에서 가르치는 것과 별 차이없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정교한 교육내용들입니다.
*엠씨, 앞쪽으로 걸어나오며 분위기 일신하고.
지금도 그렇지만 거사를 일으키는데 가장 중요한게 돈, 바로 자금이죠. 신흥무관학교는 학생들에게서 학비를 전혀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학교에서 책임졌습니다. 토지며 건축비도 엄청나고 운영비도 만만치 않았을텐데 이 모든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을까요?
여기에는, 당시 돈 40만원, 지금 돈으로 6백억원이라는 막대한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한 독립운동가 가문의 헌신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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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상동교회외경8
(3초 후 멘트)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자리잡은 상동교회.
실내팬9
세워진지 110년이 넘는 이곳은 우리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장소다.
사진 줌인 상동교회16
1907년 조국의 운명을 걱정하던 젊은이들이 이곳에 모여 항일애국계몽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을사보호 조약 전까지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생각했던 것은 세계 열강에 일본의 강제합병을 폭로하는것이었다.
.
지하실 돌?6
애국지사들은 신민회 결성 직전, 상동교회 지하 실에서 거사를 논의한다.
7 이준 이상설 이위종
이른바 헤이그 밀사 파견에 대한 것이었다.
문서 고종직인12
그러나 열강은 약소국의 독립에 관심이 없었다. 독립운동 진영 내부에서는 점차,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 무력항쟁을 해야한다는 논의가 퍼져가고 있었다.
사진들 팬-이동녕 이동휘 안창호 양기탁17
1909년 봄, 이동녕 이동휘 안창호 양기탁 등 신민회 주요인사들의 상동교회에서 비밀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해외독립군 기지론의 중요한 내용이 논의된다.
이회영5
이 모임을 주도한 이가 우당 이회영이었다.
신주백 인터뷰23
신민회는 국내항일 운동이 어려움을 깨닫고 해외독립운동기지를 갖춰야한다는 그런 국가적인 미래를 염두에 두고 해외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위해 노력합니다. 구체적인 준비과정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사람이 우당 이회영 선생님이 되겠습니다.
우당 기념관 외경4
서울 종로구에 있는 우당기념관.
이규창 부부20
아흔을 넘긴 우당의 셋째아들 이규창옹이 기념관을 찾았다. 이회영일가는 정승판서만 아홉이 나온 당대의 명문가였다. 그러나 우당의 6형제들은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로 집단 망명을 떠났다.
6형제 사진6
6형제의 집단망명을 설득한 것은 넷째인 이회영이었다.
이회영 이석영 돌출13
이회영은 둘째 형 석영에게 독립운동에 투신할 것을 건의한다. 이석영은 당대 재력가인 이유원의 양자로 가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었다.
돈 이미지12
이석영은 흔쾌히 동의하며 상속받은 전재산을 내놓았다. 이렇게 해서 모인 재산은 모두 40만원, 지금돈으로 6백억원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이었다.
이규창 옹 인터뷰
왜 우리집이 서울서 참 잘살았거든. 누가 어쩌지도 못하고. 세력도 있고 돈도 있고. 그때야 세력과 돈 있으면 그만이거든. 그런데 그걸 그만두고 올적에는 어떻게 왔느냐. 돈 갖고 왔다구.
서중석 인터뷰
이회영 6형제가 만주 독립운동을 하러 전재산을 ... 큰 규모의 이석영의 재산을 가지고 만주로 가게됐다.. 이런점에서 세인들은 깜작 놀랐습니다만 권문세도가등은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친일파가 됐다.. 이런 비난을 많이 받았는데 그런면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는 역할을 했다... 그 당시 칭송을 많이 받았습니다.
다리 건너는 기차20
이렇게 해서 이회영가의 6형제와 식구들, 그리고 부리던 하인들까지, 모두 60여명의 대가족이 만주를 향해 압록강을 건너게 된다. 뜻을 같이하는 독립운동가들도 그해 겨울 모두 만주로 떠났다. 1910년 겨울의 일이었다.
빗길 가는 시선3
팬 추가가 14
압록강을 건너 두달만에 도착한곳은, 조선국경에서 한참 (0킬로미터) 떨어진 유하현의 오지마을 추가가. 추가가는 추씨성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사는 집성촌이었다.
소와 건물6
조용한 산골마을에 낯선 이주민들이 수백명씩 들 닥쳤으니
어느 집 외경6
추씨들이 경계심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 다.
줌인 싸리문7
이주민들은 정착초기에 한족의 심한 텃세를 받아야만 했다.
아자씨 인터뷰44
이회영 선생이 올 때 재산이 곡마차로 열차. 한족은 망명하여 온사람들이 이렇게 부잔가. 이렇기 때문에 유하현 경찰서에다 고소했습니다. 경찰서에서 조사한 결과, 이회영 이동영 이.. 말씀이 온 목적은 조선 망하고 교육을 향상시키고 농업을 해가지고 독립운동하러 왔다. 유하현 많은 사람들이 존경했습니다.
질척한 거리5
추가가는 새로운 삶의 터전이자 독립운동 기지였다.
길가는 취재팀8
추가가 마을 곳곳에는 초기 이주민들의 정착노력을 보여주는 흔적이 남아있었다.
마을 뒷산 줌인15
1911년 4월, 마을 뒤의 대고산에서 3백여명의 이주한인들이 천인대회를 열었다. 새땅에 정착했음을 하늘에 알리고 조국의 독립을 기원하는 일종의 군중집회였다.
두루마리 펴지고 돌고8
이 자리에서 이주민 자치단체인 경학사가 설립되었다. 해외독립군기지건설의 첫 걸음이었다.
경학사 취지서 돌출6
그 자리에선 경학사취지문도 발표된다.
내용 돌출40
-내용읽기-
-부여의 옛땅은 눈강에 달하였으니이곳은이국의 땅이 아니요, 고구려 유족들이 발해에 모였으니 여기있는 사람들은 모두 옛 동료들이 아닌가...
-아, 기러기 떼지어날고 서풍은 날을 재촉하는 듯 하지만, 그러나 금계가 한번 울어대면 곧 동천이 밝아올 것이다.
이덕일 인터뷰52
경학사를 통해 전 주민은 하나로 묶고 중국과의 교섭을 담당하는 공식창구 역할을 했습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경학사를 통해 일체감을 조성하고 경학사가 모체가 되어서 이곳에 온 목적인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려는 기초적인 역할을 한 단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시내풍경12
(자막 나온 후 멘트)
그러나 정착은 쉽지 않았다. 한인들은 조선사람들로 인해 일본의 군대가 들어올 것을 염려해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
당안관 외경4
당시 사정을 알아보기 위해 기록이 남아있는 곳을 찾았다.
간판 틸다운10
신빈만주자치현당안관. 신빈현 지역의 정부공식문서를 모아둔 곳인데,
열쇠로 열고7
(문 열리면 )
문서들4
이주민들이 땅을 매입하기 위해 제출했던 청원기록이 발견됐다.
뒤지는 피디와 조씨
자료는 한두개가 아니었다. .
문서 줌인.. 토지매매 불가18
수십건에 달하는 청원기록은 당시 이곳에서 땅을 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보여준다. 거듭되는 청원에도 불구하고, 이주민들에게 돌아오는 중국당국의 대답은 토지매매불가라는 통보였다.
서중석 인터뷰48
중국정부가 한국인의 입적문제에 대해 대단히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10년이 되지 않으면 정식으로 귀화입적을 시켜주지 않는 그런 정책을 썼던 것이죠. 그래서 이회영이 북경에 있는 원세개를 만나러 직접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옥수수밭 트래킹10
당시 중국총리대신인 원세개는 청나라의 사신으로 조선에 와있을때 이회영일가와 친분을 쌓은 일이 있었다.
옥수수밭8
이회영과 원세개의 담판으로 토지문제는 일단락 되었다.
학교터10
조선의 망명자들은 허름한 옥수수 창고 하나를 장만했다. 마침내 학교를 세울 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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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추가가 현장사진 배경으로 돌담과 교문 그래픽.
교문에 신흥강습소 간판이 걸리고
자, 이렇게 해서 1911년 봄 신흥무관학교가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세워진 간판을 잘 보십시오.... 신흥강습소라고 되어있습니다. 새로울 신자에 부흥할 흥. 우리민족을 새롭게 일으킨다는 뜻인데요... 이상한건 그다음입니다. 왜 무관학교가 아니라 강습소라고 했을까요? 그것은... 당시 살벌한 분위기에서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중국당국과 마찰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학교는 신흥강습소 신흥중학교 신흥무관학교라는 명칭을 두루 사용합니다. 하지만 이름이 어떻게 되었든, 신흥무관학교는 엄연히
군인을 양성하는 무관학교였습니다.
시작부터 내내 학교의 운영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14년 제 1회졸업생을 시작으로 10년동안 학교는 3500명이라는 많은 학생을 배출합니다. 독립전쟁이 본격화되는 1920대 이전에도 이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쳐나갔는데요, 신흥학교의 졸업생들은 어떤 활동을 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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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독립기념관 외경4
상자들고와 열기8
독립기념관 지하 수장고에는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가 있다.
보자기 펼치니 책 보이고10
발간된지 85년이 된 신흥학우보. 이것은 신흥학교 졸업생모임인 신흥학우단의 회보다.
겉장 넘기고 속 보고8
학우보는 주민을 대상으로 배포되기도 했는데, 많은 졸업생들이 학우보를 통해 주민 계몽 활동을 벌였다. .
논단8
유일하게 남아있는 2권 2호에는,
전쟁을 주제로 한 논문이 보이고
기럭이....5
시나 수필 등 문학작품도 눈에 띈다.
학원-보병전..12
연재물도 많았다. 학원난에는 보병전투 연구라는 제목으로 전술관련 내용이 연재되고 있었다.
안중근전 번역9
학우보에는 당시 가장 인기있었던 안중근전이 연 재물로 실려있었다.
학예관 인터뷰25
학교안의 문제만 거론되는 것이 아니라 만주지방
일반적 한인의 민족운동주민의 생활과 직결되는 부분까지도 전체적으로 망라해서 소개되었기 때문에 .... 거기에 바탕하는 신흥학교가 발전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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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타고 지나는 풍경5 .
걸어가는 3인5
요녕성 환인현 쾌모자촌 마을 깊숙한 곳에는
비석 저기 보이고6
공들여 만든 비석이 하나 서있다.
만주지역 여성 항일계몽운동가인
노학당 유지 비석5
노학당 윤희복 여사가 설립한 학교터다.
비석 틸다운 항일인재적요람14
(3초 후) 학교의 목적은 항일운동 인재를 배출하는 것이었다. 그 역할을 담당했던 학교의 교사들이 바로 신흥무관학교에서 파견된 졸업생들이었다.
.
설명하는 사람들6
많은 졸업생들이 만주 곳곳에서 학교를 짓거나 교사로 활동했다.
아자씨 인터뷰
당시 학교를 지어놓구요 운동장도 넓으니까 군사훈련도 시키고.. 선생들은 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와서 1,2년 봉사하고 군사훈련시키고....
뒷모습.. 아줌마 설명자막15
학교 운동장에서는 군사훈련을 실시했다. 학교 안쪽 깊숙이에는 교실과 식당이 자리잡았었다고 한다. 신흥무관학교와 비슷한 구조다.
풀샷.. 동창학교 자리20
등 뒤로 험한 산을 끼고 앞으로는 강을 해자삼아 천연요새로 들어선 형태. 신흥무관학교의 구조와 입지조건이 닮아있었다.
아줌마랑 걸어오며13 오디오 생
이거 강돌은 강에서 가져온거고 큰돌들은 할머니가 독립단 학생들을 데리고서 앞산에서 실어온거다.
큰 주춧돌들23
이학교의 학생들은 대부분 항일운동가가 되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교사들은 자신이 학교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그것은 제 2, 제 3의 신흥무관학교를 만드는 작업이었고, 제 2 제 3의 독립군을 양성하는 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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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뒤지는 피디4
릴테잎 돌고4
신흥학우단이나 교육활동에 만족할 수 없었던 일부의 졸업생들은
폭탄들 팬10
좀 더 직접적인 항일투쟁에 나서기도 했다.
(보고).
신문자료 올라가고
항일비밀결사단체인 의열단 활동이었다
김원봉 사진, 가공할 폭탄 글씨10
1920년 이후, 각 신문에는 놀랄만한 기사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고, 일제에 대한 폭력테러를 기치로 내건 의열단원들의 의거였다.
요인들 사진팬...7가살15
이들은 조선총독 이하 고관과 군 수뇌부, 대만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 반민족적 토호열신을 살해대상으로 정하고 의혈투쟁을 펼쳤다.
건물 사진...16
또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각 경찰서등을 파괴대상으로 정했다. 실제로 곳곳의 주요 경찰서와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등에서 폭탄투척사건이 벌어졌다.
(이어서)
김원봉곽재기김익상 박재혁 김상옥 사진15
단장 김원봉과 단원 곽재기,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 육군대장을 요격한 김익상, 부산경찰서와 종로 경찰서에 폭탄을 던진 박재혁 김상옥. 의열단의 활동은 일제에게 큰 두려움이었다.
의열단 연혁문서6
이 의열단은 맨처음 어떻게 결성되었을까.
내용10
모임의 출발은 신흥무관학교였다. 의열단 13명의 단원 중 8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신주백 인터뷰
의열단은 무혈투쟁을 통해서 항일투쟁을..... 정신적인 계승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나무상자에서꺼내기6
의열단은 단순한 테러단체가 아니라 정확한 이념과 목표를 가진 독립운동단체였다.
조선혁명 선언 줌인3
조선혁명선언 글씨5
단재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의열단의 이념과 목표를 강조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조국의 독립과 이상적 사회 건설이었다.
책 내용 팬.20...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우리생활에 불합리한 일체제도를 개조하여 인류로서 인류를 압박하지 못하며 사회로서 사회를 수탈하지 못하는 이상적 조선을 건설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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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기본세트에 조선 총독부 사진 배경, 엠씨 뒷짐지고 멘트
서슬퍼렇던 그 시기에 조선총독부며 경찰서를 폭파하겠다는 생각은 참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독립전쟁이 본격화되기 전에도,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은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결정적인 때를 기다리던 이들에게 기회를 가져다 준건 바로 3.1운동이었습니다.
1919년 3. 1 만세운동 이후, 젊은 청년들이 독립운동에 참가하기 위해 만주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이 찾은곳은 바로 신흥무관학교였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이미 국내외에 유명해져서 독립군이 되는 공식루트 처럼 인식되고 있었는데요, 그결과, 1919년에서 20년 사이 한해에만, 적게 잡아 6백명에서 많게는 2천명까지, 정예교육을 받은 독립군이 배출됩니다.
1919년 봄, 만주지역에는 정식 군부대가 성립됩니다.
마침내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과 졸업생들이 고대하던, 참전의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던것입니다. 전쟁전야의 신흥무관학교에서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을까요?
엠씨 돌아서서 총독부건물 향해 권총 빵 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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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건물외경8 .
방위연구소전사부 간판3
일본 방위청 방위연구소에는 일제시대 일본육군
책들고오는 여자7
에 관한 각종자료가 보관되어 있다
육군사관학교역사 책9
취재팀이 찾은 것은 일본육군사관학교 역사책.
일본 육군사관생도들의 학적기록부라고 할 수 있었다.
틸다운 23기 졸업인명12
일본육군사관학교에는 소수의 조선인 출신 유학생들도 끼어있었다. 취재팀은 수백명에 달하는 제 23기 졸업생 명단 속에서, 중요한 이름 하나를 찾고 있었다.
지석규 환해지고15
(환해지면 맨트)
지석규. 후에 지청천으로 이름을 고치고 독립군 의 장군이 된 인물이다.
지청천 사진5
그는 일본의 병서와 군용지도를 갖고 망명해 신흥무관학교의교관이 되었다.
육사단체사진14
지청천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일본군의 정식장교였다. 그러나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험난한 독립군의 길을 선택했다.
책장 넘기고 사진으로 줌인12
신팔균과 김경천 역시 같은 선택을 한 인물들이었다. 이들의 망명은 일본 뿐 아니라 국내외에 까지 화제가 됐다.
생도들 사진5
많은 젊은이들이 신흥무관학교로 찾아들었다.
대포사진5
독립군을 꿈꾸던 젊은이들에게 이들의 소식은 하나의 희망이 었다.
신용하 인터뷰40
지청천, 김경천 신팔균 이런분들이 조국독립에 몸을 바쳐야지 일본군대의 장교가 될 수 없다해서 독립군으로 투신했습니다. 이 청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서 이청천장군이 일본육사 정규교육받은 장교인데 신흥무관학교 교관한다고 하니까 신흥무관학교에 청소년들이 물밀 듯이 밀려들었어요.
길 달리고8
젊은이들이 몰려들자 신흥무관학교는 포화상태가 된다.
대두자 비석5
신흥무관학교는 밀려오는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위해 유하현 대두자에 새 학교를 세운다.
팬 논11
이로써 신흥무관학교는 추가가와 합니하에 이어 고산자까지, 세 개의 교사를 갖게 되었다. (계속 이어서)
밭- 학교터12
이 세곳을 통해 1919년부터 1920년 까지 1년 사이에만 천명이 넘는 졸업생이 배출된다. 신흥무관학교는 개교이래 양적으로 가장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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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자진 거리6
신흥무관학교에 신입생이 몰리는 동안,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을까.
버스 지나고5
고산자 종합시장,간판 5
1919년 봄, 길림성에서는 만주독립운동사상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어서)
좌판들13
자치조직인 한족회를 주축으로 해서 정규군대를 보유한 서로군정서가 만들어진다. 서로군정서는 군부대와 행정기관을 갖춘 군정부였다. .
시장 풀샷4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이 염원하던 독립군 부대가 드디어 만들어진 것이다. . .
신주백 인터뷰32
군정서라는 것은 2중적인 기능이 있습니다. 하나는 정부로서의 기능 즉 이주한인들의 생활안정대책을 세워주는 기능이 있고 총을 들고 일본과 싸운다는 무장투쟁의 기능이 있습니다. 군정서가 1919년에 등장할 수 있었던것은 신흥무관학교 중심으로 한 유하현 지역의 강한 지지가 있었다는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대단히 장기적이고 안정된 독립운동기반을 구축했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여기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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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연길15
서로군정서가 만드어진것과 비슷한 시기에 연길에서는 김좌진을 중심으로 한 북로군정서가 형성된다. 3.1운동의 영향으로 흩어져 있던 각 독립군부대들이 연합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통화14
서로군정서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서로군정서의 군사령관은 부총재(?)인 지청천이었다.
팬총14
북로군정서는 무기공급이 원활했던 대신 군인들을 훈련시킬만한 교육체계가 없었다. 서로군정서는 신흥무관학교라는 훌륭한 사관학교를 가졌지만
타이트 총부분부분12
무기가 충분치 않았다.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의 연합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한 안성맞춤의 결합이었다.
사진 수거한 무기들9
두 독립군 부대가 협력을 도모하는 가운데, 만주의 독립군은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서중석 인터뷰30
서로군정서에서는 많은 군사학 관계 책, 그리고 서로군정서에서는 훈련받은 사람들이 직접 북로군정서에 가서 군대의 역할을하거나 사관연성소 같은데서 훈련을 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철저히 잘 해낸것이죠.
산길- 청산리 가는길5
청산리 대첩은 그렇게 준비되었다.
백운평 계곡6
1920년 10월 21일. 백운평 계곡에서 일본군과 독립군의 첫 번째 교전이 시작된다.
나무들 빙 돌고5
백운평 계곡은 삼림이 우거진 80도의 급경사 지역.
계곡의 물17
북로군정서군은 100미터의 벼랑을 낀 채 요지를 선점하고 있었다. 숫적인 우세와 막강한 화력을 믿고있던 일본군은 두편으로 나뉘어 독립군을 공격하다가 상대방 부대를 서로 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낸다.
걷는시선12
백운평에서 벌어진 최초의 접전은 독립군의 완전한 승리였다. 그리고 그것은 청산리에서 벌어진 6일간의 대첩의 서막이었다.
인터뷰18
백운평전투는 천산리 전투에서 제일 큰 전투로서 독립군들이 일본군들과 용감히 맞서서 싸워서 승리할 수 있다는 신심과 용기를 북돋아줬고 청산리 전쟁의 서막을 연것으로서 역사에 장식되는 것입니다.
청산리 부근 그래픽 14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와 어랑촌 천수평과 야지골 등 청산리 일대의 계곡에서 6일에 동안 10여차레에 걸쳐 접전이 벌어진다.
홍범도 김좌진 사진6
청산리 대첩의 주력부대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독립군과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였다.
도표
그리고 북로군정서에는 서로군정서의 교관들이 상당수 참여하고 있었다.
물살8
서로 연합한 세부대는 청산리 일대에서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성과를 올리며 승전을 거듭한다.
지
물살투7
청.산.리. 대.첩. (하나 하나 방점을 찍어서읽어주셔요) 그것은 독립군의 연합으로 가능했다.
햇살8
그리고 그 뒤에는 오래도록 기다려온, 준비된 군인들이 있었다 !
신주백 인터뷰40
청산리 일대는 대단히 험준한 산악지대였습니다. 무기나 수적으로 우세했던 일본과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신흥무관학교에서 체계적으로 훈련을 받았던, 따라서 부대내에서 안정적인 지휘체계와 기동력있게 싸울 수 있었던 단결력, 이 바로 승리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었다고 봅니다.
길가는 흔들리는 시선10
(5초 뒤 멘트)
청산리 전투가 끝난 후, 만주일대의 이주민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된다. .
팬, 비석들10
길림성 통화현 부강향. 이곳 마을 입구에 일곱 개의 비석이 나란히 세워진 묘역이 있었다.
조용석 조동호 비석10
비석엔 반일지사의 묘라고만 새겨져있었다. 하지만 무덤주인들의 이력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읽어보는 조문기7
두사람을 제외한 다섯명은 모두, 같은 학교의 졸업생들이었다.
비석글씨읽는 손12
(이덕일 선생님 오디오 살리고)
조문기 인터뷰33
일곱분 중 승병균, 조용석 외에는 모두 신흥무관학교 출신입니다. 교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임시교사였는데 당시 학교규정에 따라 모든 졸업생은 관할지역 내에서 1,2년간 일을 해야했습니다. 그들은 신흥학우단이 파견해서 교사가 된 것으로 후에 일본군에게 살해되고 맙니다.
책 ... 개 끌고와...내용38
청산리 대첩 직후인 1920년 11월, 일제는 만주일대에서 대대적인 보복을 자행한다. 전투와 상관없는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무차별한 만행, 이른바 경신대학살이었다. 일제는, 한달도 안되는 사이에 수천명의 조선인을 죽였다. 무덤의 주인들도 그 와중에 죽임을 당했다.
(남는 시간 지막 그냥 보고)
승씨 묘 가리키기7
무덤의 주인 중에는 친형제간도 있었다.
(3초 쉬고)
승병균 묘 틸다운6
형 승대언은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이었고
승대언묘 줌인10
학교의 뜻에 따라 교편을 잡았었다.
풀샷... 최찬화 묘12
3500명 신흥무관학교의 모든 졸업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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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클로징)
경신대학살을 피해 근거지를 옮긴 독립군세력과 연해주지방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러시아 알렉세프스크에서 소련군에게 속아 무장해제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합니다. 이른바 자유시참변이죠.
만주지역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 발생.
그러나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독립군은 끊임없이 조직을 만들고 활동을 이어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임시정부 직속군단인 참의부, 북만주지역의 독립운동 단체인 신민부와 길림성 부근의 정의부등인데요,
충징에 광복군 발생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에서 화살표 충징으로 모이기
이렇게 각지에서 흩어져 활동하던 독립군들은 1940년 충징에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창립되자 대부분 여기에 흡수됩니다. 그리고 이들은 1945년 9월 국내진공을 준비하는 등 마지막 독립전쟁을 준비하게됩니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이 조금만 늦어졌다면, 우리 독립전쟁사는 분명 지금과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1910년대 독립운동기지건설에서부터 20-30년대의 무장투쟁, 그리고 40년대의 광복군까지...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습니다.
학생명단과 활동내용을 스크롤로 뒷배경에 계속 흘리면서...
음악이 좡좡 깔리면셔....
3500명이 넘는 신흥무관학교의 졸업생들 가운데 기록이 남아있는 사람은 306명입니다. 그 자랑스러운 이름이 지금 저 뒤에 흐르고 있습니다.
(멘트 없이 잠시 돌아보고....)
나머지, 기록되지 않은 3천2백 여 명의 졸업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요.
그들은 대부분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이국의 전장터에 묻혔을겁니다.
역사교사 천명이 뽑은 역사이야기, 오늘의 주제는 독립군에 대한 이야기였는데요, 우리가 추적한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는 그대로 우리 독립군의 역사였습니다.
1911년부터 1920년 까지, 신흥무관학교가 운영된 기간은 꼭 10년 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역사는 단절되지 않고 이어져 조국독립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 자랑스런 독립운동의 역사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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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독립군 사진 <선열의 시범>.
-신흥무관학교 학생들이 외쳤던 구호-
나는 국토를 찾고자 이 몸을 바쳤노라.
나는 겨레를 살리려 생명을 바쳤노라.
나는 조국을 광복하고자 세사를 잊었노라.
나는 뒤의 일을 겨레에게 맡기노라.
너는 나를 따라 국가와 겨레를지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