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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아지매
이 홍사
청양 할망구
블록담벼락에 그렇게 씌어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웃음이 쿡, 터져 나왔고 인심이 후덕한 청양아지매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스치고 지나갔다. 뒤에 무슨 욕설인가를 쓰려다가 그만둔 티가 역력했다.
어느 아이의 짓인지는 모르지만 참 천진난만하다는 생각이 들며 청양아지매가 집을 나설 때마다 그 글귀를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이들에게 무슨 소리를 해서 밉상을 보였기에 그런 글귀가 바로 골목 담벼락에 방처럼 씌어 있을까? 골목을 나설 때마다 표정이 달라지는 청양아지매! 그 변하는 표정을 순간적으로 상상하니 너무 우스워 웃음이 쿡, 터져 나온 것이다.
홍랑의 형제들은 그녀를 두고 청양아지매라고 불렀다.
물론 청양아지매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돌아가신 지 칠팔 년이 넘었을 것이다. 그런데 살아남은 자들로부터 청양아지매를 떠올릴 수 있는 충족요건을 두루 갖춘 것이 바로 이 담벼락의 글귀다. 옛날에는 청양아지매가 기분이 상했을 터이지만, 이제는 저승에서라도 고마워해야 할 글귀가 분명하다. 그 글귀로 인해 불특정 다수가 수시로 청양아지매를 기억하니 여간 고마운 일이 아닌가?
청양 할망구
땡감으로 쓴 글씨가 분명하다.
집성촌인 고향 동네에서 종갓집 둘째로 태어난 홍랑은 항렬이 낮다. 본디 종갓집 항렬은 낮은 편이라, 어릴 적에는 골목을 나가면 기저귀를 찬 아지매가 아니라 할매가 수두룩할 지경이었다.
끝 아재비 장조카 장짐을 진다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실감할 집성촌의 촌수였다.
백이십여 호가 사는 집성촌에는 홍랑의 성인 이 씨 외에 다른 성씨는 고작해야 예닐곱 집이었다. 원 씨, 박 씨가 두 집, 산지기인 김 씨가 살고 있는데, 아니 그러고 보니 처가살이로 들어온 신 서방 집이 있으니 더 되겠지만, 집성촌 사람들은 그들을 두고 타성받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이 씨 일색의 집성촌이었다. 타성받이에게는 반장도 맡기지 않을 정도로 배타적인, 지독한 집성촌이었다,
청양아지매도 역시 타성받이와는 품앗이도 잘 하지 않는 아지매였다. 집성촌이고 시골이라 그랬는지 다른 성씨에 대해서 배타적인 성격이 유독 강한 자연부락이었다. 타성받이들은 마을에서 어떤 일이고 잘 희석되지 못했다. 물 위에 기름이 떠돌아다니듯이 노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아지매?
정식으로는 아주머니라는 호칭이 맞지만, 홍랑의 고향 마을에서는 고모든, 이웃 아주머니든 통으로 싸잡아 아지매라고 불렀는데, 청양아지매는, 홍랑이 아지매라고 불렀으니 그래도 항렬이 낮은 축에 속한다. 택호가 붙은 아주머니는 거의 홍랑의 할매나 노할매 항렬이 되는데 아지매라고 불렀으니 이 동네에서는 항렬이 낮은 게 분명하다.
학교를 같이 다녔던 동급생 중에서도 아재가 엄청 많았고 항렬로 할아버지뻘이 되는 놈까지 있었다. 집성촌에서는 결코 드문 일이 아니다.
둘러보니 마을은 피폐해져서 드문드문 빈집이다.
21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홍랑의 고향 마을도 여느 농촌 마을과 다를 바가 없다. 예전에 백이십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았던 마을에 이제는 사람 사는 소리, 생활 소란이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생활 소란을 일으키던 아이들이 사라진 전형적인 이 시대의 농촌 마을로 변했다. 예전에 살던 몇몇 가구가 남아서 살고 있다지만 전부 노인들만 앙상하게 남았다. 그것도 대부분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들만 남아 있는 집이 태반이었다. 홍랑의 집도 마찬가지다. 아버지는 계시지 않고 새어머니만 홀로 계신다.
다행히 이젠 시로 편입되고 공단이 가까운 까닭에 전원주택을 선호하는 몇몇 타지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전원주택을 짓고 살고 있지만, 홍랑은 어느 집에 누가 사는지 알지 못한다.
한낮이 지난 마을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할 정도였다.
그 정적이 홍랑을 처량함의 나락으로 밀고 있었다.
참 적막한 마을이 되었구나!
홍랑은 마을 위쪽에 자리 잡은 고모님 댁에 갔다가 둘러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본디 바로 이웃이었으나 집을 동네 어귀, 논에 새로 짓고 나서는 윗마을에 올라갈 일이 없었다. 명절이나, 볼일이 있어서 오면 동네 입구에 있는 집에만 들렀다가 바로 가기에 윗동네는 어떻게 변했는지 관심도 없었다. 한데 오랜만에 올라가 보니 동네는 정말 많이 변했다.
고모님이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고종사촌이 어떻게 살고 있나, 혹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나 둘러보러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인데 올라가면서도 그랬지만 내려오면서도 골목에서 사람 하나 마주치지 않았다. 미석산, 산자락을 사이로 개울을 끼고 형성된 자연부락이라 길은 외통수인데도 그랬다.
마치 시간을 거슬러 유령의 마을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는데 생동감을 느낀 것이 바로 청양 할망구라는 글귀였다. 오래전에 땡감을 주워다가 블록 벽에 쓴 글씨가 분명한데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글씨를 써놓은 담벼락은 청양아지매가 살았던 집, 골목을 나서면 맞은 편에, 바로 보이는 종기아재의 축사 담벼락이었다. 종기아재는 예전에 그 축사를 지어서 밍크를 키우다가 무슨 전염병인지, 밍크가 몰살하고는 축사를 그대로 비워두고 아이들 공부를 빙자해서 대구로 나가버렸다. 종기아재의 모친이 세월할매가 돌아가시고 집은 빈집이다.
청양 할망구!
그 글씨는 동네에 아이들이 있을 적에 쓴 것이 확실한데, 동네에 아이들이 사라진 지 오래되었다. 그렇다면 그 글귀도 엄청난 세월 동안 그 자리에 적혀 있었다는 말이다.
땡감으로 시멘트 블록에 글씨를 쓰면 페인트보다 오래 간다. 메리야스나 천에 감물을 들인다는 바로 그 땡감이다. 요즘은 먹고살 만하니 취미로 천연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땡감을 구하러 다니는 일이 있지만, 당시에는 골목에 늘린 게 땡감이었다. 당시의 아이들은 하나같이 배꼽 부분에 땡감 물로 얼룩진 메리야스를 입고 다녔다. 감나무에서 떨어져서 터진 땡감을 주워 메리야스 자락에 싸서 날랐기에 생긴 얼룩이다. 땡감이 아주 작을 적에는 그것을 노리개로 가지고 놀았고 감이 좀 크면 그런 것을 주워다가 소금물에 삭여서 떫은맛을 없애고 주전부리 삼아 먹던 시절이었다.
땡감으로 장난을 많이 했다.
어느 녀석이 땡감으로 담벼락에 어느 녀석의 욕설을 써놓으면 그 욕을 먹는 대상이 다른 땡감으로 알아보지 못하도록 덧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을에는 집마다 고목이 된 감나무가 많이 있어서 땡감은 골목에 늘 늘려 발에 차이던 자연부락이었다.
청양아지매는 머슴 둘을 데리고 남편이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사별한 게 아니다. 그렇다고 후처에게 빼앗긴 것도 아니다.
청양아지매가 후처로 들어온 것인데 범골아재는 전처인 범골아지매와 장터에서 백화점이라는 간판을 걸어놓고 만물상을 열어놓고, 엿장수를 여섯이나 거느린 고물상을 하고 있었다.
딸을 진정으로 귀하다면 후처로 주라는 말이 있는데 청양아지매의 경우를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듯하다. 마을 사람 누구를 잡고 청양아지매의 남편이 누군지 물으면 사람들은 범골아재라고 대답한다. 누구라도 그렇게 대답하게 되어 있다. 부부간에 택호가 다르다.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홍랑의 어머니 택호가 기를댁이었다. 기를이라는 곳은 행정지도에도 나오지 않는 김천의 변두리 시골 마을이었다. 홍랑의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기를양반인 홍랑의 아버지와 사는 새어머니는 택호를 그대로 물려받아 기를댁이라고 불리고 있다. 굳이 동네 사람들이 어머니와 새어머니를 구별하여 불러야 할, 경우에는 죽은 기를댁과 새로 들어온 기를댁이라 구분해서 불렀지만 그런 경우는 흔하지 않았다. 기를양반도 돌아가시고 없는 지금은 기를댁이라고 하면 새어머니를 지칭하는 게 틀림없다.
오늘 홍랑은 그 길르댁을 찾아서 마을에 왔고, 그 기를댁을 찾아서 윗마을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땡감으로 쓴 굴귀를 본 것이다.
아무튼, 부부간에 택호가 다를 수는 없는 게 이치인데 청양아지매는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청양댁이라고 불렀다. 집성촌이지만 촌수가 가까운 집안에서는 촌수를 불렀고 나머지는 택호를 부르던 마을이었다. 청양아지매는 충청도 어디에 있다는 청양군에서 시집을 온 것이 아니라 강 건너 청양골이라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기에 택호가 된 것이라고 했다.
언제부턴지 모르지만 청양아지매는 남편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청양아지매가 거느린 식솔이라면 운철이 남매였다.
운철이는 홍랑과 초등학교와 중학을 같이 다녔던 동기이며 지금도 같이 계를 하고 있어서 자주 만난다. 베이비붐 세대라 운철이 말고도 동기는 스물세 명이었으니 백이십여 호가 되는 마을에 배가 부른 임산부가 한 해에 스물넷이나 되었다니 지금은 그 광경을 이 시대 사람들은 유추하기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청양아지매가 운철이 엄마는 아니었다. 운철이는 늘 ‘큰오메!’라고 불렀다. 부모를 일찍 여윈 운철이 남매가 슬하에 자식이 없는 큰어머니와 사는 집이었다. 운철이에겐 누나가 하나 있다. 이름이 금오였는데 홍랑은 거목기라고 불렀다.
지금은 얼굴 모습조차 기억에서 희미하지만, 상당히 복스러운 얼굴이었다.
운철이가 누나라고 부르니 홍랑에게도 항렬로 따지면 분명히 누나다. 금오누나는 홍랑이 군에 입대하면서 고향 마을을 떠나고는 여태 보지 못했다. 운철이를 통해서 간간이 안부는 듣고 대구에 살고 있다고 들었지만 본 지가 하도 오래되어서 얼굴 기억에 자신이 없다. 사실이지 지금은 길거리에서 스쳐 지나간다고 해도 서로가 알아볼 수가 없을 것이다.
돌아보니 그 정도의 세월이 흘렀다.
한번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청양아지매의 복인지 만나지 못했다. 그건 바로 청양아지매의 장례식이었다. 청양아지매의 장례식날이 금오누나의 딸 결혼식 날과 겹치는 것이라 삼일장을 하지 않고 이틀 만에 장례를 마쳐야 했는데 혼사를 앞둔 시점이라 금오누나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요즘도 그렇다. 혼인날을 잡으면 남의 궂은일에는 가지 않는다. 친부모가 아니니 청양아지매의 죽음은 당연히 ‘남의’ 궂은일이 되고 말았다.
운철이에게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있었다. 운기형이었는데 그 형은 운철이의 친형이지만 족보상으로는 사촌이다. 그 형이 운철이 큰아버지인 범골아재에게 양자를 갔기 때문이다. 양자를 가고부터는 운기형은 청양아지매의 집에 있지 않고 장터의 백화점에서 기거하고 학교에 다녔다. 그 운기형은 대학을 나왔지만, 운철이는 양자에서 제외되었기에 중졸이 최종학력이었다. 운철이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다. 한 핏줄이고 한 형제지만 양자를 가고, 못 가고의 차이였다.
그 양자가 언제 이루어졌는지 홍랑은 알지 못한다. 철이 들어 기억을 간직하기 전의 일이었다. 그리고 운철이의 부모님이 돌아가신 것도 홍랑은 알지 못한다. 운철이 세 살 적의 일이었다니 기억을 할 수가 없었다. 운철이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청양아지매가 졸지에 고아가 된 운철이 남매를 거둔 모양이었다. 청양아지매는 들일을 정말 소같이 해야만 했다. 억척이었다. 범골아재가 장터에서 엿장수를 거느리고 번 돈으로 마을의 논밭을 사들였다. 논밭을 사는 것은 범골아재의 일이고 농사를 짓는 일은 청양아지매의 몫이었다.
그렇게 억척같이 일을 해서 누구에게 물려주려고?
마을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지만 청양아지매는 개의치 않았다. 머슴 둘을 거느리고 죽도록 일을 하는 것이었다. 가을걷이하면 범골아재가 돈으로 만들어 또 땅을 사기도 하고 장터의 백화점이라는 가게를 더 늘리곤 했던 모양이다. 경제권에 대해서라면 청양아지매의 쌈지는 빈털터리였다. 범골아재에게 타서 쓰는 형편이었다.
청양아지매의 가계를 짚고 가자.
홍랑이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었는지 모르지만 범골아재는 슬하에 자식이 없자 후처를 들인 것이다. 그 후처가 바로 청양아지매였다. 범골아재가 청양아지매와 한집에서 얼마나 살았는지 홍랑은 모른다. 홍랑의 기억으로는 같이 사는 걸 본 기억이 없었다. 기억의 저장력이 수립되기 이전이나 홍랑이 태어나지 않은 시점이었을 수도 있다. 청양아지매와 살아도 슬하에 자식이 생기지 않자 범골아재는 다시 범골아지매에게로 돌아가 장터에 따로 살림을 차린 모양이다.
홍랑이 지금 와서 짚어보니 태기가 없었던 건 여자의 문제가 아니라 남자 쪽의 문제고 간주 된다. 두 여자에게 아이가 없다는 건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그런 확률은 지극히 묽고, 범골아재에게 문제가 있을 확률이 높다. 여태 그 문제에 대해서는 골똘히 생각해본 적이 없지만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요즘 같으면 청양아지매의 처지가 되면 다들 보따리를 싸고, 위자료를 요구해서 당장에 팔자를 고치겠지만 당시는 아니었다. 위자료를 요구하기는커녕 그 집의 상머슴이 된 꼴이었다.
운기형을 양자로 간택하자, 운기형은 청양아지매 슬하에서 살지 않고 장터로 나갔고, 공부를 빙자해서 대처로 나갔으니 홍랑은 운기형의 얼굴만 알지 살갑게 대해보지 못했다. 가끔 명절에나 보는 정도였다. 명절차례는 장터에서 모시지 않고 집성촌이 마을에서 대소 간에 모여서 모셨으니 명절 아래가 되면 모든 음식을 청양아지매가 장만해야만 했다. 범골아재는 당시에 귀한 오토바이를 타고 명절날 새벽에 차례를 모시러 올라오는 것이었다. 그게 청양아지매가 남편을 보는 기회였다.
홍랑의 아버지 기를양반은 그런 청양아지매에게 농처럼 말하곤 했다.
“아지매가 이 집 종년이오? 팔자 고치셔!”
가만히 생각하니 청양아지매는 홍랑의 아버지도 아지매라고 불렀고 홍랑도 아지매라고 불렀다. 같은 항렬인가? 아버지와는 같은 항렬이 될 수가 없다. 이 고장에서는 형수도 아지매, 고모도 아지매라고 불렀다. 홍랑의 아버지는 형수로서 아지매라고 불렀고, 홍랑은 아주머니로서 아지매라고 불렀다. 같은 아지매지만 그 의미는 달랐다.
어머니가 돌아오셨는지 모르겠다.
홍랑이 어머니에게 드릴 약심부름을 오니 집은 빈집이었다. 얼마 전에 홍랑의 아내는 운전면허가 취소되었다. 아내는 마시지 않았고 했지만, 홍랑은 미루어 짐작하는데, 계 모임이었으니 막걸리를 한잔했던 모양새였다. 계 모임을 마친 아내가 집 앞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서 신호를 받고 있던, 남의 차 옆구리를 살짝 긁었는데 아내는 몰랐다고 했다. 그게 다음날 사고에 뺑소니로 간주 되어 면허 취소를 당하니 홍랑이 엄청 불편했다. 아내에게 늘 심부름을 시키던 입장에서, 도리어 심부름을 해야 하는 대상으로 바뀌었다.
오늘은 아내가 시내 정신과 병원에서 어머니의 약을 타와서 홍랑에게 짬이 나는 대로 가져다드리라고 해서 현장을 둘러보라 나가는 길에 마을에 들렀더니 어머니가 집에 계시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약이 떨어지면 하루도 견디지 못하신다. 간이 작은 사람이 큰일을 당하면 일어난다는 공황증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비빌 언덕이 사리진 어머니는 공황장애에 시달려야만 했다. 약을 가져오니 현관문이 활짝 열려 있는 것으로 미루어 멀리 가시지는 않은 것 같고 윗마을 고모님 댁에 가셨나 싶어 올라갔더니 그곳에도 계시지 않았다.
고모님은 작년에 돌아가셨다.
그 얘기를 하자면 또 길다.
고모님은 귀가 들리지 않아서 말을 익히지 못하고 평생을 살았다. 아주 어릴 적, 말을 배우려고 옹알이를 할 적에 한국전이 발발했고 피난을 가서 어느 마른 개울에서 생활했는데 적인지, 아군인지 모르지만, 포탄이 떨어졌는데 고모가 놀던 곳에서 떨어졌다고 했다. 다들 죽었다고 했는데, 너무 가까이 떨어져서 고모는 파편의 비상각도 사각 지역에 있었던 모양이었다. 흙먼지가 가라앉자 아이가 울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기어서 나왔다고 할머니는 전했다. 거기서는 몰랐지만, 고막이 나간 것이었다. 말이 자꾸 어눌해지고 종내에는 불러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의 열악한 의술로는 손을 쓰지 못했다.
말을 못 하는 벙어리처녀!
그런 장애를 지녔으니 시집을 간 곳이 홍랑의 바로 이웃이었다. 고모부가 처가살이로 들어온 것인데 할머니는 미덥지 않아 바로 이웃에 살림을 내준 것이다. 고모는 들리지는 않지만, 눈치로 초등학교를 마쳤고 글씨는 달필이었다. 가끔 홍랑과 말이 통하지 않을 적에는 필담을 나누었는데 굉장히 달필이셨다. 그런 고모가 작년에 돌아가셨다. 고모님 댁에는 늦게 베트남 처녀를 데려온 고종사촌 동생이 아들을 하나 낳아서 살고 있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들른 것이다. 본디 바로 담 하나를 사이에 둔 이웃이었으나 홍랑의 집이 동네 어귀에 새로 지어 이사를 내려왔다.
홍랑이 살았던 집은 집터가 아주 예전의 뽕밭이었는데 어느 김 씨 시조 묘소에 딸린 땅이었다.
마을 뒤 미석산에 묘소가 있고 재실과 비각이 있는 골짜기 마을이다.
홍랑이 태어난 집 말고도 그 산에 딸린 집은 대여섯 가구가 되었는데 묘지 성역화 작업을 하며 주차장으로 쓴다고 집터를 빼앗겼다. 집터 문제로 송사까지 갔었다. 그러나 판결은 쉽사리 나지 않았다.
결국, 조정에 의해서 합의가 되었는데 팔십 년을 살았으니 얼마를 보상하라는 조정이 나왔지만, 그 금액은 미미했다. 집터 사용료로 가을걷이가 끝나고 매년 나락 한 말을 산지기에게 주었으니 그동안 그 문중에서 관리했다는 판결이 나왔고 그 산비탈황무지에 길을 내고 동네를 일구었으니 그 점은 참작해야 했기에, 조정관의 조정에 의해서 비워주는 조건으로 얼마를 받은 것이다.
집터를 비워주고 홍랑의 형과 상의해서 동네 입구에 있는 논을 돋우어 농가 주택 허가를 받고 집을 새로 지었다.
새로 지은 집에는 새어머니 혼자서 기거하고 있다.
홍랑은 새로 지은 집에 정이 가지 않는다. 이상한 일이다. 꼭 남의 집 같고 예전에 살던 집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어머니,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니 자다가 꿈을 꾸면 항상 그 옛날 집을 무대로 꿈을 꾸는 것이다. 집이 헐릴 적에 여섯 가구가 같이 헐렸는데 오늘 올라가 보니 주차장은커녕 완전히 억새와 엉겅퀴로 잡초밭이 되어 있었다.
잡초밭으로 변해버린 옛날 집터를 둘러보니 홍랑의 마음이 짠했다. 홍랑의 유년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샘물이 참 좋았던 집인데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 묘소를 관리하던 산지기는 죽어버리고 다른 산지기가 들어오지 않은 모양이다. 21세기 하고도 20년이 지난 지금 세상에 산지기로 들어올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그건 남의 일이고.
고종사촌 동생이 베트남 처녀를 데려와 아기를 낳자, 동네 할매들은 십칠 년 만에 마을에서 아기 울음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할매들은 그런 것까지 조목조목 짚어보는 모양이었다.
디들 어디를 갔는지 고모님 댁도 빈집이었다.
아무튼, 홍랑의 아버지 기를양반이 청양아지매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그녀는 내가 가면 저 어린 조카들은 누가 키우느냐고 웃으며 반박을 하셨다.
“그럼, 일을 뭐가 빠지도록 하지 말고 머슴을 하나 더 들여!”
홍랑의 아버지 기를양반의 말씀이셨다.
홍랑은 모른다. 장터에 살았던 범골아재와 범골아지매가 언제 죽었는지. 홍랑도 군에 가면서부터 객지를 떠돌았으니 소식을 듣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렇다.
홍랑이 생각하기에 청양아지매는 죽으면 운철이가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재산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사소한 문제가 돌출했다. 운기형이 들고 나선 것이다. 버들밭 앞에 있던 서 마지기 논은 청양아지매가 운철이에게 주자고 했으나 운철이는 조카고 아들이 있는데 왜 운철이에게 주느냐고 토를 단 모양이다.
운기형이 청양아지매의 제사를 모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운기형이 청양아지매의 제사를 모신다는 조건으로 운철이에게 넘어가지 않은 모양인데 정작, 청양아지매가 죽자 상주 노릇은 운철이가 했다.
홍랑은 운철이와 같은 계를 하기에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문상도 갔었고, 청양아지매가 새벽에 돌아가셨으니 이틀 장이라도 옳은 이틀 장이 되었지, 저녁 늦게 돌아가셨다면 하루 장이 될 뻔했다. 삼일장으로 하면 거목기누나의 혼삿날과 겹친다.
홍랑은 계원이라 빈소에서 다른 불알친구들과 밤을 새웠다.
그게 계칙에 있는 조건이다. 밤을 새우면서 홍랑은 친구들과 운기형에 대한 욕을 많이 했다. 욕심보의 자루가 놀부의 그것보다 더 늘어졌다고. 심지어 그따위로 놀면 끝이 좋지 않을 거라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밤이 깊어지고 술이 얼큰해지자 친구들은 더 거친 욕을 하기도 했다.
그 빈소에서는 운철이가 상복을 입었고 운기형은 도리어 손님이 된 모양새였다.
운기형은 평상복차림으로 낮에 한번 빈소에 들렀다가 사라지고는 늦은 밤에 또, 한번 둘러보고 집에 자러 간 모양새였다. 장례집행은 운철이와 홍랑 등 계원이 의견을 맞추어 이틀 장으로 치러졌다. 손님이 많지 않은 조촐한 빈소였다. 다음날 화장을 하여 납골당에 모시지 않고 범골아재 산소가 있는 선산에 뿌렸는데 운기형이 나타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 형은 분명히 왔었다. 그러나 누가, 어디를 보아도 상주라는 분위기는 풍기지 않았다.
장의차량에 운철이와 홍랑은 비롯한 친구들이 타고 화장터로 가자 운기형 내외가 승용차를 타고 뒤늦게 화장터에 나타났으며 산으로 가자 승용차를 타고 운기형의 내외가 따라왔다. 아이들, 그러니까 범골아재의 손자들은 뒀다가 어디에 쓰려는지 한 녀석도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들은 장의차를 타고 산으로 가면서도 욕을 멈추지 않았다. 양자는 다 소용없는 짓이라고 했다. 살아서 듬직하게 믿음만 있을 뿐이지, 죽어서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범골아재의 큰 살림을 통째로 삼킨 저 작자가, 제사나 제대로 모시는지 모르겠다고 입을 모았다.
홍랑은 청양아지매가 돌아가셨는데 뭔가 빠진 기분이 들었다.
빈소가 너무 조용한 것이었다.
청양아지매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울어주는 사람이 없다?
그건 너무나도 이상한 일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청양아지매의 죽음에는 곡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렇다. 거듭 생각해도 그랬다. 고인이 바로 청양아지매가 아닌가? 청양아지매가 돌아가셨다면, 분명히 누군가 처량하고 구성진 레파토리를 엮어가며 곡을 해야 마땅하다고 홍랑은 생각했다.
“청양아지매가 남의 초상집 곡 부조를 그렇게 했는데 울어주는 사람이 없군!”
홍랑은 청양아지매의 생전을 기억하고 너무나 조용한 빈소에서 밤을 새우며 친구들과 술판을 벌이다가 이 소리를 했고, 다음날 화장터로 가는 차 안에서 친구들이 들으라는 소리로 이 말을 또 했다. 친구들은 이설을 달지 않았고 홍랑의 말에 ‘정말 그러네?’ 라는 말로 동조를 했다.
청양아지매는 잘 운다.
눈물샘이 얕고 자주 울어서 울보라는 말이 아니고, 곡을 멋지게 한다는 말이다. 누구네 집에 초상이 나면 청양아지매는 열 일을 제쳐두고 나타난다. 그리고 병풍 앞에 퍼질러 앉아 곡을 한다. 청양아지매가 어느 초상집에 가서 곡을 해도 이설을 달지 못한다. 집성촌이라 누구네 집이라도 촌수로 따지면 먼 일가가 되기에 곡을 아무리 해도 실례가 되는 일은 없다.
심지어 초상집에 곡소리가 없이 너무 조용하면 마을 아지매들은 청양아지매를 찾는다.
‘청양댁 어디 간 거여?’
누구라도 이 말을 한다. 초상집 곡소리가 시원찮다는 말이다.
마을에서는 청양아지매가 초상집 구성진 곡소리의 대명사로 통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청양아지매가 나타나면 그제야 초상집 분위를 실감 나게 연출한다. 병풍 앞에 퍼질러 앉아 신명 나게 곡을 하는 것이다. 곡소리에 신명이 난다고 형용하면 말이 되는 소리인지 모르지만, 구구절절 망자의 사연을 추임새로 넣으며 곡을 하는데 얼마나 구슬프고 처량하게 하는지 눈물이 말라버린 상주들은 물론이요, 뒤란에서 음식을 장만하던 아지매들도 찔끔거리게 된다. 어느 집이라도 마찬가지다. 청양아지매의 곡은 잠시 끝나는 게 아니라 출상을 할 때까지 이틀이고 사흘이고, 지속한다. 정말이지 마당에서 그 곡소리를 듣는 아이들까지도 숙연해지며 괜히 울컥해지고 눈물이 나는 지경이다. 홍랑은 어린 시절 청양아지매의 곡소리를 들으며 곡의 달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해도 마찬가지다.
그 옛날, 조선 시대 곡을 잘하면 효자나 효부라는 소리를 듣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대에는 돈을 주고 곡하는 사람을 사기도 했다는데 청양아지매가 그 시절에 태어났더라면 열 사람을 제치고, 모셔졌을 것인데 시대를 잘못 타고 났다는 말을 동네아지매들은 서슴지 않았다.
그 시절, 다른 동네도 그런지 모르겠지만, 집성촌이라 동네 초상이 나면 마을 사람들은 열 일을 제쳐두고 나서서 돕는다. 동네아지매들은 뒤란에 솥뚜껑을 뒤집어 걸어 놓고 적을 붙이고, 동네 아재나 할배들은 샘가에서 잡은 돼지를 장만하는데 청양아지매는 그런 허드렛일로 부조를 하지 않는다. 동네아지매들도 마찬가지다. 청양아지매에게는 아예 그런 허드렛일을 시키려고 하지도 않는다.
오로지 곡 부조다.
청양댁은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서 저렇게 잘 운다고 쑥덕거리는 아지매도 있었지만, 저건 천성으로 타고났다는 말을 하는 아지매도 있었다.
청양댁 불러내! 뭐 좀 먹고 우라고 해! 허기지겠다!
식음을 전폐하고 오로지 곡을 하고 있으니 허드렛일을 하던 마을 아지매들이 걱정을 하는 정도였다.
초상집에 다른 사람은 안 오더라도 표시가 나지 않지만 청양아지매가 없으면 단박에 표시가 난다.
그런 청양아지매가 돌아가셨는데 아무도 곡을 하는 이가 없었다. 그건 객관적인 시각이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서운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청양아지매는 곡뿐만이 아니라 동네 아지매들 친정에서 상을 당하면 제문을 지어주기도 했다. 옛날에는 친정 부모가 상을 당하면 제문을 잘 지어가야 효녀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청양아지매는 제문을 기가 막히게 짓고, 그것을 구성지게 읊었다. 규방문학의 대가로 마을에서 통했다. 들일이면 들일, 집안일이면 집안일, 뭐든지 다 잘하는 아지매였는데 후실로 들어와 아이가 없으니 낙동강 오리알이 된 것이다. 요즘 페미니즘 사상을 근거로 하면 도저히 말이 안 되고 있을 수가 없는 일인데, 그런 사정이 다 무시되고 자신의 박복으로 간주하고 살았던 시절이다.
청양 할망구!
참 잘 쓴 글씨다.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시기에 생각하니 참으로 잘 쓴 글씨다. 글씨에 눈길을 주고 서성이는데 바로 위 철휘아재 집에서 안노인 서넛이 골목을 나왔다. 가만히 보니 홍랑의 어머니 기를댁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어데 갔다가 오시능교?”
“아니구 얘야! 니가 우얀 일이고?”
“약 가지고 왔심더! 철휘아재 집에는 와예?”
“지난밤에 봉기아재 제사라서 오늘 음복하고 오는 길인기라.”
봉기할매는 철휘아재의 부친인데 먼 친척이 아니다. 정말 오랜만에 듣는 택호였다.
노인 둘은 위로 올라가고 어머니가 가까이 오자 홍랑은 턱짓으로 청양아지매 집을 가리키며 물었다.
“청양아지매 집도 비었지예?”
“그것도 운기가 안 팔아처먹었나? 전원주택인가 뭣인가를 지을라고 객지사람이 샀다더라. 운철이한테 주자고 청양아지매가 그렇게 우겼는데. 그놈의 욕심머리하고는.....”
그 말에 홍랑은 애써 대꾸하지 않고 딴지를 걸었다.
“청양 할망구! 여기 이 글씨 누구 썼는지는 몰라도 참 잘 썼는데요?”
“이 마실에서 청양댁의 흔적은 그것밖에 없어!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네. 이 사람아! 오늘은 바쁘지 않은가?”
어머니의 말씀에 홍랑은 입맛이 썼다. 누구에게 악의로 던진 말이나 글이 엉뚱하게도 좋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법이라고, 당장, 손익에 연연하지 말라는 한 수를 배웠다는 기분으로 글귀를 다시 들여다보았다. 적어도 이 마을에서는 범골아재보다 청양아지매를 기억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오지게 한 수 배웠다.
청양 할망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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