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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말씀하실 때 사랑에 대해 강조를 많이 하십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주님은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그런데 구약에서 가르치신 그 말씀을 본 의미와 그리고 더 깊이 사랑을 강조합니다. 마태복음 5:38절에 보면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하셨습니다. 눈으로 상해를 입으면 눈으로 보복하고 이로 공격을 받았으면 이로 보복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씀은 출애굽기 21:24절, 레위기 24:20절, 신명기 19:21절 등에 언급되어 있습니다. 출애굽기 21:23~24절에 보면 [(23)그러나 다른 해가 있으면 갚되 생명은 생명으로, (24)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동해보복법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 동해보복법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반드시 죄값을 치룬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죄를 지으면 그 지은 만큼만 벌을 받아야지 지나치게 대가를 치르게 하면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기를 보복을 해야 된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보복하지 말라고 가르치고 계십니다. 오히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를 싫어하고 괴롭히는 사람들까지도 사랑하고 그들에게 말씀을 전하라는 의미입니다.
첫째,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5:39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가르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감화를 시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라고 했습니다. 아주 유명한 성경구절이죠. 오른쪽 뺨을 때리는 자에게 왼쪽도 돌려대라는 말씀에 굉장히 깊은 뜻이 숨어 있습니다. 그만큼 보복하지 말고 사랑으로 감화시키라는 말씀이죠.
오른쪽이라는 말은 대표적인 단어입니다. 오른손잡이가 오른편 뺨을 때리면 손등으로 때리게 되니 가혹하고 혹은 모멸감을 참으라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오른손이라는 말은 항상 대표적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한쪽을 때리면 다른 한쪽을 돌려대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악한 자를 대적해서 싸우지 말고 오히려 희생함으로 감화시키라는 의미입니다.
또한 40절에 보면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했습니다. 당시 고대사회에서 겉옷은 옷의 기능 뿐 아니라 밤에 이불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이 낮에 겉옷을 전당잡고 돈을 빌려주었으면 밤이 되면 겉옷을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중동에는 낮에는 덮다가도 밤에는 또 춥습니다. 그래서 이불로 덮고 자도록 돌려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옷을 달라고 하면 중요한 겉옷까지도 주라는 것입니다.
이 병형구절을 누가복음에는 [겉옷을 달라고 하면 속옷도 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라기보다 이것을 요구하면 저것까지도 들어주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사랑, 아가페적인 사랑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가페적인 사랑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못하고 부당하고 늘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충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참으시고 지금까지 참으셨다가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허락하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시고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천국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오래 참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을 닮아서 사랑과 자비를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41절에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라고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군인들이 유다 백성들에게 그렇게 요구할 수 있습니다. 오 리를 동행하도록 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그 옆 군중 가운데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에게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십자가를 억지로 대신 지고 갔습니다. 이 풍습을 두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수도 있습니다. 누가 오 리를 갈 것을 요구하면 십 리를 가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누가 요구하면 더하여 주라는 것입니다. 더 큰 희생과 사랑으로 베풀라는 의미입니다.
42절에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라고 하셨습니다. 네게 요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고 주라는 것입니다. 할 수 있으면 더하여 주는 것도 좋은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사회에서 굉장히 획기적인 말씀입니다. 어느 누가 가족도 아니고 책임져야 할 사람도 아닌데 요구하고 구할 때 지원해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악한 자와 하나님의 자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을 닮아서 악인과 선인을 고루 사랑하듯이 성도는 사랑으로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예화) 교회 공공성
지난 주중에 제가 삼일교회 동남성경연구원 주최 ‘교회의 공공성’이라는 세미나에 다녀왔습니다. 연초에 그렇지 않아도 기도원 혹은 수양관에 가서 기도할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말씀 세미나가 있어서 참여하였습니다. 말씀으로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이번 세미나의 주제가 ‘교회의 공공성’입니다. 교호의 공공성이란 교회는 공적으로 그 지역사회에 공공적인 기관이며 사명을 감당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쉽게 보면, 교회가 우리 교회 안에서만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사회에 나가서 선한 사역을 해야 된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먼저는 교회 안에서 예수 믿는 성도들을 돌보고 양육하는 것이 우선이고 중요합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자기 교회 안에서만 활동을 하고 머물면 안 됩니다. 당연히 사회에 나가서 선한 빛을 나타내고 헌신하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과연 교회는 지역사회에서 세상 사람들의 유익이 된다는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공공성입니다.
즉 비록 세상의 사람들은 우리의 교인이 아니지만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때로는 교회가 빛으로 그들에게 선을 베풀어서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성경적 가치, 인류보편적 가치를 한 목소리로 사회에 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둘째, 원수를 사랑하라!
43절에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 레위기 19:18절 말씀을 언급한 것입니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자신을 사랑함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귀한 말씀이죠.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동족을 한 형제 혹은 이웃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주로 원수로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대사회에서 워낙 전쟁을 많이 하다보니 이방의 나라들을 적들로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방의 나라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이스라엘과는 적대관계가 많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방나라에 대해 대개의 경우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44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그의 제자들 혹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성도 무리를 두고 한 말씀입니다. 오늘날 예수 믿는 우리 성도들에게 우리 주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원수는 이방 나라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원수는 개인적으로 나를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지역적 집안의 원수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나와 우호적인 관계의 사람이 아니지만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아가페입니다.
이 말씀을 전할 그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유다를 지배하고 있는 로마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무력으로 이스라엘을 점령하여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군인들은 백성들 착취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라고 했을 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중요한 것은 복음적 의미가 강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성도들이 전도를 할 때 그들이 유대인들에게만 전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의 이방인들 즉 헬라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시아와 마게도냐에서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뿐만아니라 그들 제자들은 로마에까지 가서 선교하여 로마에 교회가 세워지고 많은 로마의 시민들과 군인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그리고 300면이 지난 313년 로마 콘스탄틴 황제 때에는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었겠습니까! 만일 예수님의 제자들이 다른 유대인들처럼 로마인들을 적대시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지도 않고 심지어 적개심으로 늘 대하였다면 복음이 로마에 전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이 이방인들을 미워하고 멸시하고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은 세계 선교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복음의 현장에는 늘 핍박이 따릅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박해하고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럴지라도 복음의 사역자들은 늘 핍박을 감래하며 선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나라에도 이렇게 복음의 꽃을 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와 여러분들이 구원받을 길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원수를 갚으려 하지 말고 오히려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현실로 비유한다면 일본을 예를 들 수가 있습니다. 일제는 우리나라에 침탈할 때 얼마나 고통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물론 그 일본제국주의와 우상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 일본 국민을 우리가 지금도 싫어하고 대적하면 어떻게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일본에 세우겠습니까! 뿐만아니라 언제까지 적대시하는 감정을 자손들에게 물려주어 이웃나라가 원수가 되어 살아가도록 하겠습니까!
북한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공산주의 사상을 인정할 수는 없습니다. 공산주의는 유물론 사상으로서 종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와 조화될 수가 없습니다. 또한 지난 전쟁으로 인해 너무나 서로 고통과 상처를 안겨주어서 아직도 좌우의 대립이 극대화 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북한 사람들을 다 싫어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고 우리가 또 복음을 전해서 구원해야 할 선교대상자들입니다. 언젠가 북한이 개방되어 교회가 재건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 날을 기다리며 그들 백성들이 고통받을 때 그들에게 사랑을 전하고 쌀을 전하고 그들에게 옷을 전하여 입혀야 합니다.
45절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되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선인의 밭이나 악인의 밭에 햇빛을 똑같이 비추어 주십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의 논이나 불신자의 논이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6절에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이라고 했습니다. ‘나를 좋아해주는 사람만 좋아한다면’ 무슨 상이 있겠는가? 하늘에 상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세리’도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인데 그들은 유대인들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세금을 세게 거두어 로마 사람들에게 바쳤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을 매국노라 죄인이라 취급했습니다. 창녀와 같이 아주 강한 죄인으로 취급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죄인들도 자기를 좋아해주는 사람은 좋아합니다.
47절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라고 했습니다. ‘너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러면 이방인들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방인이란 타민족을 사람들을 의미하지만 오늘날 영적으로 보면 불신자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만일 우리 형제들에게만 문안하면 불신자들과 믿는 신자들이 무엇이 다르겠느냐는 것입니다.
예화) 명절 장애복지관 돌보기
우리는 명절이 되면 항상 인근 장애복지원에 과일 등을 가져갑니다. 또 맥추절이나 추수감사절이 되면 과일, 채소들을 갖다드립니다. 그 이유는 우리만 먹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약한 이웃을 돌보자는 취지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원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세상 사람들은 그런 의식이 그렇게 강하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마땅히 그런 일들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멘
왜 그렇습니까!
48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 같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라는 의미입니다. ’온전함‘은 히브리어 ’탐밈‘이라는 말인데 원이 온전함과 같이 흠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성도로서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자녀는 아버지를 당연히 닮아야 합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닮지 않으면 그것은 돌연변이입니다. 당연히 아버지를 닮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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