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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효녀지은조와 삼국유사 빈녀양모조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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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녀지은 설화는 진성여왕대(887.7∼897.6)에 신라의 왕경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전하고 있다.
이 설화는 진성여왕대의 사회와 정치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하는데, 특히 경순왕 김부金傅의 아버지인 효종이 진성여왕 당시에 화랑이었다는 점과 헌강왕의 딸과 혼인하게 된 배경이 지은의 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어서 신라말의 정치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효녀지은 설화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양 史書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두 사서는 같은 설화를 취급하고 있으나 그 구체적인 내용에는 부분적으로 차이가 보인다.
1. 『三國史記』 권卷48, 열전列傳8, 효녀지은조孝女知恩條의 내용
효녀 지은知恩은 한기부韓岐部의 백성인 연권連權의 딸이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모셨는데, 나이 32세가 되어도 시집을 가지 않고 조석으로 어머니를 보살펴 그 곁을 떠나지 않았다. 먹을거리가 없으면 혹은 품팔이를 하고 혹은 구걸도 하면서 밥을 얻어다가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그러한지 오래되니 피곤함을 견디지 못하고 부잣집에 가서 몸을 팔아 종이 되기를 청하여 10여석石을 얻었다. 종일 그 집에서 일을 하고 날이 저물면 밥을 지어 가지고 돌아와서 어머니를 봉양하였는데 이렇게 사나흘이 지나자 어머니가 딸에게 말하기를
"전에는 음식이 나빠도 맛이 있었는데 지금은 음식이 비록 좋기는 하지만 맛이 그 전과 다르고, 마치 속을 칼로 에이는 것 같으니 이는 무슨 까닭이냐?"
라고 하였다. 딸이 사실대로 이르니 어머니가
"나 때문에 네가 종이 되었으니 내가 차라리 빨리 죽느니만 못하구나"
고 하면서 큰소리로 통곡하므로 딸도 따라 우니 그 애처러움에 길가는 사람들까지 마음 아파하였다.
이때 효종랑孝宗郞이 출유出遊하던 중에 그것을 보고는 돌아와 부모에게 청하여 자기 집의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보내주고 또 지은이 몸을 판 주인에게 몸값을 갚아주어 양민이 되게 하였으며, 낭도郞徒 수천 명도 각각 곡식 1석씩을 내어 그녀에게 주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또한 벼 500석과 집 한 채를 하사하고, 정역征役을 면제하여 주었으며, 곡식이 많아서 도둑에게 빼앗길까 염려하여 군사를 보내 교대로 지켜주도록 관청에 명하였다. 그리고 그 마을을 표방하여 효양방孝養坊이라 하였으며 당나라 왕실에 표문을 올려 그 아름다운 행실을 드러내도록 하였다.
효종은 당시 第三宰相인 舒發翰 仁慶의 아들로서 어렸을 때의 이름은 化達이었다. 왕이 이르기를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어른스러움이 있다"고 하고는 그 형인 헌강왕의 딸로 아내를 삼게 하였다. (『三國史記』 卷48, 列傳8, 孝女知恩條)
2. 『三國遺事』권5, 효선孝善9, 빈녀양모貧女養母條의 내용
효종랑孝宗郞이 남산의 포석정鮑石亭(혹은 삼화술三花述이라고도 한다)에서 유遊할 때에 문객門客들이 모두 급히 달려왔으나 오직 두 사람만이 뒤늦게 왔다. 랑郞이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분황사芬皇寺 동쪽 마을에 나이가 스무 살 안팎의 여자가 눈먼 어머니를 껴안은 채 서로 소리내어 울고 있었으므로 그 마을 사람에게 까닭을 물으니, 말하기를
'이 여자는 집이 가난하여 걸식으로 어머니를 봉양한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마침 흉년이 들어 걸식으로도 살아가기가 어렵게 되어 남의 집에 가서 품을 팔아 몸값으로 곡식 30석石을 얻어서 주인집에 맡겨 놓고 일을 하다가 날이 저물면 쌀을 가지고 집에 와서 밥을 지어먹고 함께 잠을 자고, 새벽이 되면 주인집에 가서 일을 하기를 며칠이 되었는데 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지난날의 거친 음식은 마음이 편했는데 요즘의 좋은 쌀밥은 창자를 찌르는 것 같아 마음이 편안치 못하니 어찌된 일이냐?'
고 했습니다. 그 여인이 사실대로 말하자 어머니가 통곡하므로 여인은 자기가 다만 어머니의 구복口腹의 봉양만 하고 마음을 살피지 못하였음을 탄식하여 서로 껴안고 울고 있는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이것을 보느라고 늦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郞은 이 말을 듣고 측은하여 곡식 100斛을 보내주니 랑郎의 부모도 또한 옷 한 벌을 보냈으며, 랑郎의 모든 무리도 곡식 1,000석石을 거두어 보내주었다.
이 일이 왕에게 알려지자 그때 진성왕眞聖王은 곡식 500석과 집 한 채를 내려주고 군사를 보내서 그 집을 호위하여 도둑을 막도록 하였다. 또 그 방坊에 정문旌門을 세우고 효양孝養의 마을이라고 하였다. 그 후에 그 집을 희사해서 절을 삼고 양존사兩尊寺라고 하였다. (『三國遺事』卷5, 孝善9, 貧女養母條)
3. 두 기록에서 나타나는 차이점
사기의 효녀지은조와 유사의 빈녀양모조는 서술방식과 구체적인 부분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먼저 양 사서의 특성에 따른 차이가 있음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삼국사기는 기전체紀傳體로 기술된 정사正史이며, 따라서 효녀지은조도 기전체 열전列傳의 서술형식에 충실히 따르고 있다. 사기史記에서는 지은知恩이라는 이름과 그 출신을 명백히 밝히고 있으며 이야기의 전개가 체계적이고 정돈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사기의 편찬자가 이 사건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하여 열전 형식에 맞추어 기술한 것이다.
이에 비하여 유사의 빈녀양모조는 포석정에 뒤늦게 도착한 두 낭도가 늦은 이유를 설명하는 가운데 마을사람에게서 들었던 것을 전하는 말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遺事에서의 지은이라는 인물과 효행에 대한 묘사는 간접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서술과 이야기의 전개도 사기에 비해 허술하다. 그럼에도 오히려 현실감이 있고 정황의 묘사도 상세하여 편찬자에 의해 정돈된 사기의 내용보다 설화의 본래 모습을 더 잘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첫째, 사기에서는 지은이라는 이름과 한기부韓岐部의 백성인 연권連權의 딸이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홀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고 하여 지은의 처지와 신상에 관한 소개가 상세하게 나와 있는데 비해 유사에서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단지 분황사 동쪽 마을의 스무살 안팍의 여인이라는 것만 제시되고 있을 뿐이다. 지은의 부모에 대해서는 사기는 아버지가 일찍 죽었다고 하였으나 유사에서는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사기에 설명이 없는 대신 유사에서는 눈이 멀었다는 사정이 부가되어 있다.
둘쩨, 사기와 유사의 기록은 구체적인 몇몇 수치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다. 지은의 나이에 대해서는 각기 32세와 20세 내외로, 지은의 몸값은 10여석과 30석으로 각기 다르며, 효종의 낭도들이 지은에게 보낸 은전의 수량을 사기는 낭도 수천 명이 각기 1석씩, 즉 수천石에 이르는 것이 되지만 유사는 단지 1000석이라 하였다. 효종이 보낸 물품에 대해서도 사기에서는 효종이 그 부모에게 요청하여 보낸 것으로, 유사에서는 100석은 효종이, 효종의 부모는 옷 한 벌만을 보낸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밖에도 지은이 몸을 판 이유나 형태 등에서 약간씩의 차이가 보인다.
셋째, 두 기록에는 서로 없는 부분에 대한 기술이 포함되고 있어서 상호보완이 가능하다.
사기에만 있고 유사에는 없는 내용은, 지은이라는 이름과 아버지 연권의 출신부와 신분 이름, 효종이 지은을 양민으로 만들어 준 사실, 국왕이 지은의 征役을 면제해준 것과 당나라 왕실에 표문을 올렸던 것, 그리고 특히 효종에 대한 소개와 혼인에 관련된 이야기 등이며, 사기에는 없는 내용으로 유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지은이 살던 곳이 분황사 동쪽마을이고, 지은의 홀어머니가 장님이라는 것, 효종이 出遊한 곳이 포석정이며 낭도를 門客이라고 한 점, 당시의 국왕을 眞聖王이라고 명시한 것, 지은이 탄식하며 말한 내용, 후에 그 집을 희사하여 兩尊寺가 되었다는 것 등이다.
넷째, 효종의 비중에 대한 차이이다. 유사에서는 효종의 역할이 그다지 두드러지게 강조되고 있지 않다. 지은 모녀가 울고 있는 광경을 목격한 사람은 효종이 아니라 포석정에 뒤늦게 도착한 두 낭도이며, 그들이 효종에게 지은의 사정을 전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때 두 낭도가 전한 사연도 마을사람의 설명을 옮긴 것이라서 知恩의 실체는 이야기 전개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효종과 지은은 바로 연결되지 않는다.
유사에서는 많은 부분이 지은이 몸을 팔게 된 애처럽고 안타까운 처지와 지은과 어머니 사이에 교감하는 끈끈한 애정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비록 지은은 몸을 팔아 노비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두 모녀가 굶주려 죽을 만큼 다급한 처지도 아니었고 아주 이별을 하여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어머니는 좋은 쌀밥을 먹고 있었고, 지은은 요즘 식으로 표현한다면 출퇴근하는 정도의 종살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든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의 곤란함 때문이라기보다는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면서도 서로를 아끼는 모녀의 애틋한 사랑이라고 하겠다.
이에 비해 사기에서는 효종의 역할과 비중이 매우 크다. 효종은 出遊 중에 지은과 어머니가 함께 울고 있는 광경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곡식 100석과 옷가지를 보내주고 지은을 다시 양민으로 만들어 준 것도 효종이 직접 한 것으로 되어 있다. 유사에서와는 달리 효종은 설화의 전면에 중심인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설화의 말미에 별도로 효종의 신상 소개와 헌강왕녀와의 혼인에 관한 내용이 추가되어 있는 것은 사기의 서술이 효종을 부각시키고 있으며, 지은의 孝行 못지 않게 효종과 국왕의 빈민구휼 행위를 강조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지금까지 사기와 유사의 기록을 비교 분석하였다. 두 사서는 구체적인 면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줄기가 되는 이야기의 큰 틀은 같다. 즉 하나의 사건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하고 있을 뿐이다. 효녀지은조와 빈녀양모조는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할 수 있는 자료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20050425
(전기웅교수의 논문 '진성여왕대의 화랑 효종과 효녀지은 설화' 중에서 일부 발췌하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