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을 보면 딱 생각나는 영화 있으시죠? 네, 맞습니다. 이 작품이 발표되기 한 해전에 개봉한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랑 비슷합니다. 그래선지 저는 당선작 중에서 이 작품이 가장 마음에 들더군요. 어쩌면 심사자들도 그런 이유로 이 작품에 더 눈길을 줬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제목이 좋아야 하는 건 그래섭니다. 뭐, 그렇다고 제목에 모든 걸 다 걸어야 한다는 건 아닙니다. 다만, 제목에서부터 끌리면 내용이 더 좋아 보이는 후광효과랄까요. 뭐 그런 게 있을 것 같아섭니다.
우리가 현대시를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로 제목을 꼽기도 합니다. 일단 제목이 재미없습니다. 간혹 오늘처럼 서정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제목부터가 좀 어렵습니다. 심지어 제목의 뜻을 몰라서 사전을 찾아봐야 할 때도 있으니까요. 반면 전통 서정시는 제목만 봐도 이 시가 앞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금방 감이 오죠. 그러니 이해도 잘되고요.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이해가 잘되는 작품과 이해가 잘 안 가는 작품 중 어떤 작품이 기억에 더 오래 남던가요?
특히나 심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술술 잘 읽히는 시는 그냥 한번 읽고 끝이겠지만, 이해가 안 가는 작품은 적어도 한 번은 더 읽어보지 않을까요? 명색이 심사자인데 내가 이해 못 하는 시가 있다니... 이러면서 좀 더 꼼꼼하게 읽어볼 겁니다. 정확한 뜻은 몰라도 거듭 읽다 보면 왠지 끌리는 작품도 있을 거고요. 그때 심사자는 어떤 점이 끌리는가 더 깊이 들여다보겠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입장이 뒤바뀌어 응모자가 심사자의 안목을 테스트하는 걸로 바뀝니다.
이제 심사자는 자신의 시적인 역량을 모두 동원하여 그 작품을 뽑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을 겁니다. 설령 응모자가 그런 깊은 의도로 쓰지 않았더라도 말이죠. 일전에 '쉬어가기' 코너에서 소개한 당선 사유처럼요. 두 번째로 현대시가 어려운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제목이랑 매치가 잘 안 될 때가 많아섭니다. 내용은 A에 관한 건데, 제목이 왜 뚱딴지같이 C냐는 거죠. 그렇지 않던가요? 예를 들어 사랑에 관한 시를 썼으면 제목을 '사랑'으로 하던지, 아니면 적어도 그런 종류여야 하는데 난데없이 '냉장고를 열며'라면 얼마나 황당할까요?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게 바로 현대시의 매력이라면 믿어지나요?
사랑이 냉장고를 여는 행위와 전혀 상관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요? 궤변일지 모르지만, 당장 떠오르는 것만 해도 그렇습니다. 갈증이 나서 시원한 물을 찾을 때 우리는 냉장고를 열죠. 그러한 행위는 우리가 간절히 원해서고요. 사랑의 속성도 간절히 원하는 것이죠.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요. 냉장고에 넣어둔다고 음식이 다 보존되지는 않죠? 유통기한이 지나면 상하기도 할 겁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죠. 사랑도 언제까지나 설레지는 않죠. 사랑 역시 유통기한이 있음을 알고 수시로 갱신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할 겁니다. 마치 갱신형 보험처럼요.
어떤가요? 이제 제목을 '냉장고를 열며'라고 해도 전혀 엉뚱하지는 않죠? 즉, A에 관한 내용을 썼을지라도 B라는 사유를 거치면 제목이 C여도 된다는 말입니다. *A(사랑)-B(갈증,유통기한)-C(냉장고를 열며)
특히나 우리가 아무리 어이없는 제목을 짓더라도 그러한 제목의 정당성을 입증할 사유의 언어로 어디 '한글'만 한 게 있을까요? 정말 위대한 글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ㅎ 이야기가 좀 엉뚱한 데로 샌 것도 같은데요. 어쨌든 제목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럼 제목은 그렇다 치고 내용은 어떻게 하나요? 그 역시 일전에 말한 것처럼 평소 생각나는 문장을 적어뒀다가 연결하는 방법도 있고요.(좀 엉뚱한 문장의 연결일지라도 방금 설명한 것처럼 B라는 사유는 그걸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처럼 한 번만에 사유의 틀을 짜서 쓸 수도 있겠습니다. 다만, 시구에 힘을 주지 마시라는 거, 그냥 자연스러운 감정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도록 써나가는 게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건 어디서 배우느냐? 그건 평소에 현대시를 많이 읽어보는 겁니다. 그리고 소설을 포함하여 산문적인 표현을 많이 접하는 겁니다. 한강 소설가의 소설이 시적인 산문이라면 현대시는 반대로 산문적인 시라고 할 수 있거든요.
그러니 이제 현대시를 어려워말고 막 써봅시다. 우리가 막 써도 심사자가 알아서 사유 B로 설명해 줄지 누가 아나요? ㅎㅎ 그러다 보면 우리도 꽤 괜찮은 현대시를 쓸 수 있을 겁니다. 1917년 마르셀 뒤샹이 소변기를 거꾸로 뒤집어 놓고 <샘(Fountain)>이라고 했을 때 그게 훗날 현대미술의 전환점을 이뤘다고 평가받을 줄 누가 알았을까요? 더구나 창작품이 아닌, 이미 만들어진 '레디메이드'인 평범한 소변기를 어떻게 예술작품으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으로 난리도 아니었는데 말이죠. 이를 기존 형식의 파괴이자 새로운 형식으로 인식하는 행위가 바로 사유 B일 겁니다.
시의 내용을 해석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좀 망설였습니다. 저마다 해석은 다를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아래 해석은 필요한 분만 읽으시면 됩니다. 이렇게 해석할 수도 있구나, 그 정도로요.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을 때 우리는 낙담하듯 전생을 말하기도 합니다. 지금의 삶이 불편하고, 불안할수록 알 수 없는 전생을 들먹이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 모양인지 한탄하는 식이죠. 반면 너무 행복한 사람을 볼 때면 전생에 나라를 구했을 거라며 한마음으로 부러워도 하고요. 그렇다면 지금과 다를 거라고 믿는 당신의 전생(그때)을 상상하는 일이 지금을 살아내는 당신에게 어떤 해답을 줄 수 있을까요.
당신의 전생을 한번 상상해 봅시다. 당신은 어쩌면 거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거미인 당신은 거미 이전의 전생을 또 말하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당신의 삶이 무엇이든 당신은 언제나 자신을 믿을 수 없을 겁니다. 늘 전생을 말할 테니까요. 삼생의 윤회를 꿰뚫어 보는 누군가가 거미인 당신을 보고 지금이나 전생이나 그게 그거라고 본질은 어차피 같은 거라고 당신에게 말하겠지만, 그때 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거미인 지금이 어떻게 전생과 같을 수 있냐며 항변하지 않을까요?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누군가에게 당신을 이해시키려 애쓰겠지만 끝내 실패할 것입니다. 당신은 언제나 좋은 날이 오면 다를 거라고 말하지만, 그런 날은 영원히 오지 않거든요.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당신은 순간에 충실하지 못한 채 엉거주춤 서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러고 보면 산다는 건 참으로 고단한 일이죠. 모습이 바뀌어야만 무엇이 되는 게 아닌데, 당신은 지금도 여전히 당신 자신이지만 거미인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으니 언제까지나 낯선 당신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당신이 당신을 이해할 방법은 당신이 아닌 타인을 이해해 보는 겁니다. 당신이 부러워하는 누군가가 되는 상상을 해보는 거죠. 상상은 알코올처럼 쉽게 날아가고 말 테지만, 적어도 오늘과 내일이 같은 하루지만 사람에 따라서 언제나 다르다는 것을 비로소 이해하게 될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매번 같을 수도 없겠지만, 같을 필요가 없다는 걸 너무 늦게 아는 건 아닐까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현생이 전생과 관계하듯 후생으로 이어질 지금을 당신과 타인의 관계로 바꿔본다면 우리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가 관계하는 삶 속에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은 순환의 삶을 살 것이고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음을 알 테고요. 다만 현재를 살아갈 뿐이라는 거, 그것이 곧 믿음이니까요. 그런 믿음으로 당신의 주변을 둘러봅시다. 현실을 부정하고 전생을 말하는 사람은 또 없는지.
당신이 거미라는 걸 인정하기 싫었던 것처럼 나방인 자신을 여전히 믿지 못하는 누군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는 걸 모른다면 우리는 영원히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좋은 날만 바라지는 말자고요. 당신이 거미줄에 걸리지 않고 훨훨 날았던 화려한 전생만 꿈꾼다면 거미임을 깨달은 지금의 누군가에게 당신은 죽고 말 것입니다.
지금은 오로지 지금으로서만 의미를 가집니다. 그 수많은 지금이 당신에게 있고 선택은 여전히 당신의 몫이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이 마음을 응모자는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으로 표현한 겁니다.
글이 쓸데없이 길었습니다.ㅎ 마지막으로 에피소드 하나만 더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이 영화의 제목을 보면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습니다.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감독의 2012년작 <다른나라에서> 역시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영화평론가로서 각종 의미를 부여했더군요. 그런데 정작 홍상수 감독의 대답은 이랬답니다. "제목에 글자 수가 많아서 그냥 그렇게 해본 거예요."
그러니 우리는 현대시라고 주장하면서 그냥 쓰면 됩니다. 사유는 전문가와 독자의 몫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