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하역사소설 태종 이방원 204
대마도 정벌군 개선하다
70년 묵은 때를 한 방에 보내다
대마도 정벌군이 개선했다. 태종은 병조참의 장윤화로 하여금 조강 어귀에 나가 동정군(東征軍)을 영접하라
이르고 세종을 대동하여 친히 낙천정에 거둥했다.
낙천정(樂天亭)은 태종이 세종에게 선위하고 만년을 보내기 위하여 한강변에 지은 하계 별장 겸 이궁이었으나
중요 국사를 구상하는 산실이었다.
한강에는 한양 10경 중 하나로 꼽히던 제천정을 비롯하여 망원정, 천일정, 희우정, 효사정, 압구정 등 수많은
정자가 세워졌으나 낙천정은 그 격이 달랐다.
여타의 정자들이 먹고 마시고 시를 읊으며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다면 낙천정은 국정을 치열하게 고민하던
곳이었다.
태종이 대마도 정벌을 구체화시켰던 곳이 낙천정이고 정벌전에서 위력을 발휘했던 삼판선의 시험운행과
수군들의 진법 훈련을 진두지휘했던 곳이 낙천정(樂天亭)이다.
태종18년 9월, 낙천정이 준공되었을 때 참찬(參贊) 변계량이 낙천정기(樂天亭記)를 지어 바쳤다.
변계량은 당대의 명 문장가였다.
태종은 명필 권홍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 판에 새겨 낙천정(樂天亭)에 걸으라 이르고 변계량을 불렀다.
“낙천이라는 이름은 누가 지었는가?”
“좌상 박은대감이 지었습니다.”
“무슨 뜻이라 하던가?”
“주역의 계사(繫辭)에서 낙천(樂天)이란 두 자를 따와서 지었다고 하였습니다.”
“경은 어떻게 해석하나?”
“주상전하께 왕위를 물려주신 상왕전하께서 때때로 보시고 노시며 만년을 편하게 보내시라는 뜻이라
사료됩니다.”
“아직도 할 일이 많은 사람에게 편하게 놀아라?”
마뜩지 않은 표정을 짓던 태종이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때 태종 나이 52세였다.
“낙천이란 두 글자를 풀어보도록 하라.”
“범인(凡人)들은 세상과 인생을 즐겁고 좋은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 하나, 하늘(天)이라는 것은 이치일 뿐이요,
낙(樂)이란 것은 억지로 애쓰지 아니하고 자연히 이치에 합하는 것을 이름입니다.
대개 무극(無極)의 진(眞)과 이오(二五)의 정(精)이 묘하게 엉기어서 사람이 생기는 것인즉, 천리가 사람에게
품부(稟賦)된 것은 이와 같지 않음이 없을 것입니다.”
“경과 같이 박식한 신하가 있다는 것이 내 심히 마음 든든하도다. 허나 낙천(樂天)을 요천(樂天)으로 생각하는
미욱한 신하가 있을까 염려된다.”
한자는 상형문자다. 그러나 상형문자로 표현할 수 없는 개념과 존재가 있다.
이를 모양(形)과 소리(音)와 뜻(義)의 세 요소로 표현하도록 한 것이 육서(六書)다.
육서에 전주문자(轉注文字)가 있다. 락(樂)이 음악(音樂), 오락(娛樂), 요(樂)는 요산요수(樂山樂水)로
표현되듯이 낙천을 요천으로 해석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한 마디로 더 일해야겠다는 태종 자신을 신하들이 알아주지 못한다는 질타다.
*낙천정(樂天亭) : 현재 광진구 자양동 해발 42미터 대산(臺山) 언덕에 지었으나 없어지고 지금은 자양현대3차
아파트 근처에 안내판이 있다. 자양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 볼품없이 자리한 또다른 낙천정은 서울시 기념물
12호로 지정되었다가 위치도 다르고 건물도 볼품없어 지정이 취소되었다. 우리의 문화재에 대한 의식이
어떤가를 보여준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
삼각산을 뒤로 하고 태종이 좌정했다. 옆자리에 세종도 자리를 잡았다.
태백준령 깊은 골에서 발원한 한강물이 넘실댄다.
도도하지만 낙천정 아래다. 강 건너 송파진까지 넓은 강폭에 짙푸른 한강물이 바다와도 같다.
남한산과 관악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확 트이고 시원하다.
끝이 아스라한 잠실벌에 천군만마의 함성이 들리는 것 같다. 그릇이 큰 사람들이 선호하는 지형이다.
대마도에 출정했던 야전군 총사령관 이종무 장군을 필두로 우박· 박성양· 서성재· 임상양· 이징석이 상왕
태종과 임금 세종에게 승전을 보고했다.
“제장들의 승전으로 백성들의 걱정을 덜어주었고 나라의 근심을 씻어주었소.”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오늘날의 계획으로는 병선을 더 만드는 것보다 나은 일이 없다. 함길도와 평안도에 명하여 각각 병선을
더 만들게 하였는데 강원도에는 소나무가 많을 것이니, 강원도로 하여금 배를 만들게 하여 경상도로 보내어
방비를 튼튼히 하는 것이 어떠하겠는가?”
수군의 중요성을 새삼 깨달은 것이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태종은 환관 최한으로 하여금 장수들에게 술을 치게 하고 주연을 베풀었다.
태종을 배행했던 종친과 대신들도 참례한 연회는 날이 저물어서야 파했다.
전투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위로한 태종은 선양정으로 삼도도통사 유정현을 초치하여 별도로 주연을 베풀었다.
이종무· 최윤덕· 이지실· 이순몽· 우박· 박성양· 박초· 이천 등 여러 장수들도 참례했다.
4품 이상의 종사관과 병마사가 모두 참석했다.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수성이다
연회는 흥겹게 베풀어졌다. 여러 장수들이 차례로 잔을 올리고 번갈아 춤을 추었다.
우의정 이원과 최윤덕이 각기 적군을 방어하는 계책을 토론했다.
영의정 유정현이 태종에게 술을 올리며 말했다.
“전하께서는 창업의 어려움과 수성(守成)의 쉽지 않음을 날마다 생각해야 하실 것입니다.”
“내가 할 말을 영상이 하는구려.”
흡족한 미소를 띠우던 태종이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세종을 지긋이 바라보며 말했다.
“수성이란 있는 것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넘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주상은 잘 들어 두어라.”
이러한 태종의 소신은 유시(諭示)가 되어 세종14년, 함길도 북변에 김종서를 보내어 4군과 육진을
설치함으로서 현실화 되었다.
왜구를 크게 무찔러 공을 세운 장수가 최영 장군과 이성계 장군이다.
아기바투(阿其拔都)가 지휘하던 왜구를 대파하여 황산대첩(荒山大捷)의 위업을 작성한 곳이 남원 운봉이다.
내륙 깊숙이 들어와 백성들을 괴롭히는 왜구를 당하고 몰아낸 것이 아니라 쫓아가서 항복을 받아낸 것이
대마도 정벌이다. 발상이 다르다. 공격이 최상의 방어라는 평범한 진리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태종은 연회가 파할 무렵, 유정현과 이종무에게 각각 말 한 필과 안장 한 벌씩을 하사했다.
최윤덕 등 일곱 사람에게는 각각 말 한 필씩을 하사하고, 병마사 이하 군관 중 정벌에 나가서 공이 있는
자에게는 차등대로 상을 내리게 하였다.
또한 동지총제 이춘생에게 술을 하사하여 동정군중(東征軍中)에 나아가 제장들을 위로하라 명했다.
승전보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잔치가 벌어졌다. 논공행상이다.
이종무를 의정부 찬성사, 이순몽을 좌군 총제, 박성양을 우군 동지총제로 승차 임명했다.
정벌에 참여한 여러 절제사는 모두 좌목(座目)을 올리고 전사한 병마부사 이상은 쌀과 콩 각각 8석, 군관은
각각 5석, 군정은 사람마다 3석을 위로품으로 내려주었다.
대마도 동정(東征)에 공을 세워 상직을 받은 자가 2백여 명이었다.
전쟁이 끝났다.
대마도 도주 도도웅와(都都熊瓦)가 조선의 정치 질서 속에 편입되고 부하 시응계도(時應界都)를 보내왔다.
“섬사람들을 가라산(加羅山)에 주둔하게 하여 밖에서 귀국(貴國)을 호위하도록 하겠으며 조선의 영토 안의
주·군(州郡)의 예에 의하여 주(州)의 명칭을 정하여 주고 인신(印信)을 주신다면 마땅히 신하의 도리를 지키어
시키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또한 대마도는 토지가 척박하고 생활이 곤란하오나 백성들이 섬에 들어가서 안심하고 농업에 종사하게 하고
그 땅에서 세금을 받아서 우리에게 나누어 쓰게 하옵소서.”
도도웅와의 청을 가납한 태종에게 경상도 관찰사가 장계를 보내왔다.
“일본국왕이 보낸 사신 화자· 양예와 구주총병관(九州摠兵官) 사인(使人) 등 다섯 행차가 도두음곶(都豆音串)
에서 사로잡혔던 전 사정(司正) 강인발과 대마도를 정벌하러 갔을 때 포로가 되었던 갑사 김정명 등 4인을
데리고 부산포에 도착하였습니다.”
조선 수군의 대마도 정벌은 섬나라를 흔들었다. 강진이었다.
조선은 승전을 만끽하고 있는 사이 규슈를 비롯한 일본열도는 여진이 계속되었고 일본 국왕이 바짝
움츠러들었다.
13일간의 점령이 아쉬웠지만 고려 말부터 70여 년간 우리나라를 괴롭혔던 왜구 문제에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다음 205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