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梁山 靈鷲山 通度寺 靈山殿 八相圖
통도사 팔상도 : 보물 제1041호 / 1775년(영조51)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는 여덟 폭 모두 견본채색으로, 세로 234㎝ 가로 151㎝ 크기의 액자형이다.
세로가 긴 장방형의 화면으로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와 구성은 상단(上段)과 하단(下段)으로 나뉘어 있다.
화면 제일 하단 주색란에 화기가 적혀 있으며, 각 화폭의 왼쪽 상단의 주색 바탕 화제란에 금색으로
‘제일도솔래의상(第一兜率來儀相)’처럼 각 화폭의 순서와 상(相)의 제목을 적고 있다
양산 영축총림 통도사 전경 (1920년 대)
梁山 通度寺 靈山殿 : 보물 제1826호
영산전은 통도사 하로전(下爐殿)의 중심 건물로 남향하여 자리잡고 있으며 그 전면의 좌우에는 극락전과 약사전이 놓여 있다. 영산전의 창건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통도사성보박물관에 남아있는 “靈山殿天王門兩重創丹雘記文”(1716년)의 기문에는 1713년(숙종 39) 봄 어느 날 밤 화재로 영산전과 천왕문이 소실되었고, 1714년 任間淸印, 松谷正眼, 楓岩朗日, 禪岩致源등 4인의 대선사가 모연(募捐)하고 33명의 목수와 天悟, 最熏, 寂照, 智淳등 15명의 화승이 참여하여 중건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암막새 명문에 강희 53년 甲年(1714년)이라는 기록은 기문의 내용을 뒷받침하고 있다.
영산전은 벽화가 매우 주목되는데 내부벽화로는 다보탑을 회화작품으로 표현한 <견보탑벽화>가 유명하다. 이 벽화는『법화경』「견보탑품」을 도해한 변상도(變相圖)로는 국내에서 유일한 것으로 예술적 가치도 뛰어난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더불어 대들보에 화려하게 자리한 황룡과 청룡그림, 양류관음과 나한, 산수를 표현한 벽화들, 그리고 이러한 화려한 장엄 속에 석가모니불, 영산회상도가 봉안되어 있으며, 그 옆으로 부처님의 일생을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그린 팔상탱이 자리잡고 있다.
영산전에는 석가여래를 모시고 '영산회상도'와 '팔상도'를 봉안하였다
부처님의 일생을 그린 여덟 폭은 시간의 순서에 따라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비람강생상(毘籃降生相),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등으로 전개된다. 각 화면에는 각종 장면과 모티브로 여백 없이 표현되었으며, 소나무·구름·전각 등을 활용하여 장면 간을 구분 짓고 있다. 여덟 폭의 장면마다 석가의 일대기인 팔상의 내용을 설명하는 문구가 묵서로 자세히 적혀 있다.
1775년(영조 51)에 영남 지역에서 화승으로 유명하였던 유성(有誠)과 포관(抱冠) 등을 비롯하여 40여 명의 화승에 의해 그려진 것으로 화면을 여백 없이 메우려는 공간 구성, 장면 간의 분할 방식, 주색·녹청색·군청색의 주조색 등에서 18세기 후반 불화의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전각의 치미와 풍경, 수레 장식 등의 일부 모티브에 금분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의 도상은 이후 1869년(고종 6)에 제작된 남양주 흥국사의 「석가팔상도」에서 계승하고 있어 주목할 만하다
통도사성보박물관에 전시된 팔상도원본
팔상의 구성은 기본적으로 「송광사 석가팔상도」, 「쌍계사 석가팔상도」와 마찬가지로 『석씨원류응화사적(釋氏源流應化事蹟)』(1673)의 도상을 주로 수용하였지만, 화면을 세로로 길게 재구성하였고, 각 장면을 여백 없이 화면 가득 표현하였으며, 소나무·구름·전각 등이 장면 분할에 좀 더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다른 팔상도에 비해 도상들을 새롭게 해석하여 차용한 방식이 두드러지고 있다. 즉, 도솔래의상의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의 표현, 수하항마상에서 보이는 뇌신(雷神)의 역할, 각 화폭의 제일 바깥에 궁궐을 지키는 호법신(護法神)과 같은 수문장 도상 등을 들 수 있다.
유성(有誠)의 대표작인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는 안정된 구도와 유려한 필선, 섬세한 인물 묘사, 선명하고 화려한 색채가 돋보이는 대작의 불화로 조선 후기 팔상도 가운데 수작이라 할 수 있다. 또한, 화면에 산수화적 기법을 대담하게 수용하고 있으며, 그림의 중요한 부분마다 그림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기문을 남기고 있어 자료적 가치도 높다.
유성(有誠)의 밑그림인 초(草)는 이후의 불모들이 그림을 그리는 일에 기초로서 출초(出草)에 널리 활용되었을뿐만 아니라 그림을 배우는 초보자들도 대부분 유성 불모의 초본을 모범으로 하였는데 이는 조선 후기 200여 년간 영향을 미쳤다 한다.
- 자료 : 향토문화대전 -
1. 도솔래의상 (兜率來儀相) - 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
석가모니부처님이 호명보살로서 도솔천에 머물다가 마침내 사바세계로 출현하게 되자, 카필라국의 정반왕과 마야왕비의 태자로 탄생하여 도솔에서 내려오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여기에는 흰코끼리를 탄 호명보살(護明菩薩)이 오른쪽 옆구리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있는 마야(摩耶)부인의 모습 / 상(相)을 잘 보는 바라문에게서 꿈의 해몽을 듣는 왕과 왕비의 모습 등이 주 내용으로 묘사된다. 이 때 바라문이 이르기를 “반드시 태자를 잉태할 것이며 훗날 출가를 하면 정각을 이루어 삼계중생을 제도할 것”이라 하였다.
2. 비람강생상 (毘藍降生相) - 룸비니 동산에서 탄생하는 장면
부처님의 탄생과 관련된 자연들이 묘사되고 있다. 따뜻한 봄날에 마야부인이 궁중을 떠나 궁녀들과 룸비니 동산에 올라 무우수(無憂樹) 꽃가지를 붙들고 서서 오른쪽 옆구리로 태자를 낳는 장면 / 하늘에서 제석천왕이 비단을 가지고 내려와 태자를 받으며 모든 천왕들이 온갖 보물을 공양하는 장면 / 태자가 땅에서 솟아오른 연꽃을 밟고 일곱 걸음을 움직이며 한손은 하늘을 또 한손은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 외치는 장면 / 아홉 마리의 용이 깨끗한 물을 토하여 태자를 목욕시키는 장면 / 태자를 태워 궁궐로 돌아오는 장면 / 아지타 선인을 불러 관상을 보이는 장면 등 묘사.
3. 사문유관상 (四門遊觀相) - 사문 밖에 나가 관찰하는 장면
태자가 사방의 문으로 나가서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이 네 가지로 묘사된다. / 동문(東門)으로 나가서는 노인을 보고 사색하는 장면 / 남문(南門) 밖에서는 병자를 보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 / 서문(西門)으로 나가서는 장례행상을 보고 죽음을 절감하는 장면 / 북문(北門) 밖에서는 사문(沙門:출가한 중)을 보고 깨달아 출가를 결심하는 장면 등 묘사.
4. 유성출가상 (踰城出家相) -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
태자가 정반왕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을 넘어 출가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태자를 감시하던 야수부인과 시녀 그리고 오백 장사들이 잠에 취해 있는 장면 / 태자가 마부 차익(車匿)에게 궁성을 뛰어 넘을 것을 지시하는 장면 / 말을 탄 태자가 성을 뛰어 넘으니 제석천이 호위를하며 하늘에 오색 광명이 환하게 비치는 장면 / 머리카락을 자른 태자가 사냥꾼의 옷과 자신의 비단도포를 바꾸어 입는 장면 / 마부 차익이 태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눈물을 흘리며 태자의 금관과 용포를 가지고 궁궐로 돌아가는 장면 / 정반왕과 마야부인 그리고 태자비가 태자의 의관을 받고 슬피우는 장면 등이 주로 묘사된다.
5. 설산수도상 (雪山修道相) - 설산에서 수도하는 장면
설산에 들어간 태자가 대신들을 보내어 환궁을 종용하는 정반왕의 권청을 물리치고 신선들과 함께 수도에 정진하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정반왕이 교진여 등 5인의 신하를 보내어 태자를 환궁하게 하는 장면 / 이들이 태자에게 돌아가기를 간청하는 장면 / 환궁을 거절한 태자에게 궁중에서 양식을 실어 보내는 장면 / 6년 고행의 무상함을 깨우친 태자에게 목녀가 유미죽을 바치는 장면 / 제석천왕이 못을 만들어 목욕을 하게 하고 천인이 가사를 공양하는 장면 / 태자가 수도하면서 모든 스승을 찾는 장면 / 풀베는 천인에게서 길상초를 보시받는 장면 등 많은 내용이 그려지고 있다.
6. 수하항마상 (樹下降魔相) -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를 항복시키는 장면
태자가 마군들의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고 그들로부터 항복을 받아내는 장면들이 묘사되어 진다. 마왕 파순이 마녀로 하여금 부처님을 유혹하게 하는 장면 / 마왕의 무리들이 코끼리를 타고 부처님을 위협하는 장면 / 마왕이 80억 마군을 몰고와 부처님을 몰아내려고 하나 창칼이 모두 연꽃으로 변하는 장면 / 지신이 태자의 전생공덕과 계행을 마왕에게 증명하는 장면 / 마군들이 작은 물병을 사력을 다해 끌어내려고 하나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히려 돌비와 바람이 쏟아져 80억 마군들을 물리치는 장면 / 드디어 마왕의 무리들이 항복하고 부처님과 모든 천신, 천녀, 군중들의 수희 찬탄하는 장면들이 묘사.
7. 녹원전법상 (鹿苑轉法相) - 녹야원에서 처음으로 포교하는 장면
무상전각을 이루신 부처님이 녹야원에서 최초로 불법을 설하시는 장면들이 상,하단(上下段)으로 묘사되고 있다. 상단(上段)에는 노사나불의 모습을 보이신 석가삼존이 처음으로 화엄경을 설하는 장면 / 하단(下段)에는 세존께서 녹야원에 이르러 교진여 등 5인의 비구에게 고집멸도의 사제법문을 설교하는 장면 / 수달다 장자가 아사세 태자의 동산을 사서 기원정사를 건립하고자 하는 장면 / 흙장난을 하고 놀던 어린이들이 부처님께 흙을 쌀로 생각하고 보시하자 부처님이 이것을 탑으로 바꾸는 장면 등이 그려진다.
8. 쌍림열반상 (雙林涅槃相) -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시는 장면
80세가 되신 부처님이 이월 보름 쿠시나가라의 사라쌍수 아래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시고 열반에 드시는 장면들이 묘사되고 있다. 사라쌍수 아래서 길게 누워 열반에 드신 부처님과 그 주위로 비탄에 잠겨 있는 사부대중과 천룡 팔부중의 모습들 / 노老가섭이 크게 슬퍼하자 부처님이 관 밖으로 두발을 내보이시는 장면 / 아나율존자가 하늘에 올라가 부처님의 열반소식을 전하자 마야부인이 천녀들과 허공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꽃을 뿌려 공양하는 장면 / 관이 성밖으로 저절로 들려 나가는 장면 / 다비를 하니 사리가 비오듯 쏟아지고 이 사리를 바라문이 여덟 나라의 왕들에게 골고루 나누어주는 장면들이 상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영산전 벽화 「견보탑품도(見寶塔品圖)」
<견보탑품>벽화는『법화경』제11품 「견보탑품」의 내용을 표현한 것으로,
석가여래가 영취산에서 설법할 때 다보여래의 탑이 땅에서 솟아나 설법을 찬탄하니
그 탑안으로 석가여래가 들어가 다보여래와 같이 앉았다는 내용을 담고있다. 즉 거대한 보탑 안에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나란히 자리를 나누어 앉아 있는, 이른바 이불병좌(二佛竝坐)의 모습을 표현한 벽화이다.
무슨 일인지 그림의 아래쪽을 휘장으로 가려 놓아서 아쉽다
「견보탑품」벽화는 3면으로 분할되어 있으나, 하나의 내용을 표현한 것이다
보탑 안에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나란히 앉아있다
통도사 영산전 서쪽 내부의 전면벽을 차지하고 있는 이 벽화는 『법화경』「견보탑품」을 도해한 변상도로서
국내에서는 유일한 벽화로 남아 있다. 그러한 까닭에 그 희귀성과 중요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으며,
연구와 보전을 위해 각별한 보호를 받고 있다. 이 벽화는 말 그대로 「견보탑품」에 나오는 다보탑을 형상화한 것으로서,
1716년에서 1800년 사이에 당시 활동하던 화승 지연(指演) 문하에 의해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며,
조선 후기 불화 화풍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거대한 보탑 안에 석가여래와 다보여래가 나란히 분반좌(分半座)하여 앉아 있는 이불병좌(二佛竝座)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탑 전체에는 온갖 영락과 보배로 된 풍경이 장엄되어 있고, 그 주변과 탑 위에는 상서로운 오색구름을
장식하여 그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또한 탑 좌우로 보살과 제자들이 대칭구조를 이루며
천상에서 하강하듯 내영(來迎)하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지극한 신심을 일으키게 한다.
영산전 후불탱 「영산회상도(靈山會上圖)」
영산회상도는 인도의 영축산(靈鷲山)에서 부처님이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설법하는 장면을 도해한 것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린 많은 그림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주제도라 할 수 있다. 영산회상(靈山會上)이란 부처님의
영축산 설법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 또는 불교 그 자체를 의미한다.
영산전(靈山殿), 응진전(應眞殿)의 후불도로 활발히 조성된다.
통도사 영산전 '영산회상도' : 보물 1353호
통도사 영산전 영산회상도는 세로 339cm, 가로 233cm의 비단 화폭을 마련한 뒤 채색을 베푼 대규모 작품이다.
그림의 아래쪽 양 옆에는 장방형의 화기란(畵記欄)이 구획되어 있다. 그 안에 기록된 묵서(墨書)를 통해
옹정(雍正) 12년(1734, 영조 9년)에 제작된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림의 제작에는 수화승 임한(任閑)을 비롯하여
희심(喜心), 민휘(敏輝), 순백(舜白), 포근(抱根) 등 5명의 화원이 함께하였다.
18세기는 불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화승의 유파가 형성되어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된다.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신라불교의 계율이 정립된 것은 자장(慈藏)율사가 통도사(通度寺)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설치하고 난 뒤였다.
금강(金剛)이란 금강보계(金剛寶戒)에서 유래된 말이므로 금강과 같이 보배로운 계(戒)란 의미가 있다.
불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에는 부처가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불교에서는 일체의 것을 깨뜨릴 수 있는 가장 단단한 것을 금강이라 하고, 금강과 같은 반야(般若)의 지혜로
모든 번뇌를 물리칠 것을 강조한다. 그러한 지혜는 계(戒), 정(定), 혜(慧)의 삼학(三學)으로 성취될 수 있으며
삼학(三學) 가운데 계율이 으뜸이고, 계(戒)를 금강(金剛)과 같이 견고하게 보존하는 데는
불사리를 봉안한 곳이 으뜸이라는 뜻에서 금강계단(金剛戒壇)이라 하였다.
금강계단 전면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는 편액을 건 전각을 건립하는데, 그곳에는 불상을 봉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그것은 급강계단에 불(佛)을 상징하는 불사리가 봉안되어 있어 예배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의 하나인 통도사 금강계단
- (알이두기) :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 -
적멸보궁(寂滅寶宮)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보배로운 곳'이란 뜻이다.
(1) 경남 양산 통도사(通道寺) (2)강원도 평창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3) 강원도 인제 설악산 봉정암(鳳頂庵) (4) 강원도 영월 사자산 법흥사(法興寺)
(5) 강원도 정선 태백산 정암사(淨巖寺)
진신사리를 모신 석종형(石鐘形) 부도
신라 진덕왕 때 자장(慈藏)율사가 중국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부처님 가사와 사리를 모셔와
(1)양산 통도사(通度寺)에 부처님 가사(袈娑)와 사리(舍利)를,
(2)설악산 봉정암(鳳頂庵), (3)오대산 상원사(上院寺), (4)사자산 법흥사(法興寺),
(5)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에 부처님 사리를 봉안하고 적멸보궁을 세웠다. 이곳을 5대 적멸보궁이라 한다.
이 중에서 태백산 정암사(淨巖寺)의 적멸보궁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라의 자장(慈藏) 율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가져온 불사리 및 정골(頂骨)을 직접 봉안한 것이며, 정암사에 봉안된 사리舍利는
임진왜란 때 왜적의 노략질을 피해 통도사의 것을 나누어 봉안한 것이다.
적멸보궁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심으로써, 진신사리는 곧 법신불(法身佛)로
부처님의 진신이 상주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에 예불의 대상으로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는다.
삼보사찰(三寶寺刹)에 대하여
우리나라의 삼보사찰은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 합천 가야산의 해인사(海印寺), 전라남도 순천의 송광사(松廣寺) 셋을 가리킨다. 삼보는 불교의 신행 귀의대상인 불(佛)·법(法)·승(僧)을 가리키는 말로서 통도사가 불(佛), 해인사가 법(法), 송광사가 승(僧)에 해당한다.
불보사찰(佛寶寺刹) - 통도사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
통도사(通度寺)는 자장(慈藏)율사가 중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창건한 절이다. 그는 불경과 불사리(佛舍利)를 가지고 귀국하였는데,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봉안할 목적으로 이곳 통도사에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조성하였다. 그는 승통(僧統)이 되어 이곳 통도사의 금강계단에서 승니(僧尼)의 기강을 바로잡았다고 하는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다고 하여 통도사를 불보사찰(佛寶寺刹)이라고 한다. 영원한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상징하는 사리를 모셨기 때문에 통도사의 주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불단(佛壇)만 마련하였다.
법보사찰(法寶寺刹) - 해인사
해인사 장경각(藏經閣)
해인사海印寺는 부처의 말씀을 기록한 대장경을 봉안한 곳이라고 해서 법보사찰(法寶寺刹)이라고 한다. 강화도에서 완성한 고려대장경은 보관의 어려움 때문에 조선 초기에 가야산 해인사로 옮겨졌다. 이곳은 풍수지리에 의하여 예로부터 승지(勝地)로 손꼽히는 곳이어서, 장경각(藏經閣)을 따로 지어 고려대장경을 안치하게 된 것이다.
승보사찰(僧寶寺刹) - 송광사
송광사 국사당(國師堂)
송광사(松廣寺)는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었다고 해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고 한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普照國師)지눌(知訥)은 이곳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도모하였다. 원래 팔공산의 거조사(居祖寺)에서 이 운동을 전개하였으나 뒤에 송광사로 장소를 옮겼다. 그 뒤 그의 제자였던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國師)가 연이어 이곳에서 배출되었다고 하여 승보사찰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언제부터 삼보사찰이라는 칭호가 붙여지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쓰이게 되었다고 보인다. 오늘날 이 삼보사찰은 전통적인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禪院)·강원(講院), 그리고 율원(律院)의 세 기능을 다 집합시켜 놓았다는 뜻에서 각각 총림(叢林)이라고도 한다.
* (알림) = 다음은 하동 쌍계사의 '팔상도'와 '꽃담장' 그리고 '마애불'을 소개합니다.
첫댓글 1920년대 영축총림 통도사 전경에서도 신성한 기운이 느껴지지만, 통도사 영산전 팔상도는 불화의 수작임이 느껴집니다.
무지한 저도 저절로 감탄이 나옵니다. 감사합니다.
1920년대의 사진, 누구의 작품인지 정말 대단한 구도입니다.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습니다.
통도사는 팔상도뿐 아니라 구석구석이 寶庫더군요. 영산전만하더라도 놀라운 미술관(?)이고.....
송광사 국사당 사진은 십 년도 넘게 보관한 사진인데 이번에 잘 활용하게 되어 부듯합니다.
애정을 가지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영산회상도'를 추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