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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문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과山
미역, 소금, 어물지고 춘양장 언제가노/ 대마, 담배, 콩을 지고 울진장을 언제가노/
경북 울진 흥부(지금의 부구)지방에 내려오는 구전 민요 십이령가(十二嶺歌)의 일부분이다. 선말한초 당시 고단한 세월에 부침 많았던 보부상의 곤로한 삶과 애환들이 물컹물컹 묻어나는 대목들이다. 그럼 그들은 왜 허리가 반으로 꺾이는 고단함을 무릅쓰고 수 많은 봇짐과 등짐을 이고 지며 150여 리나 되는 그토록 먼 노정을 꾸역꾸역 내왕했을까?
울진 십이령길이란 울진과 봉화 사이, 고달픈 발 품이나마 어쩔 수 없이 강요된 거친 삶을 이어가기 위해 보부상들이 넘나들던 열두 고개의 총칭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 보붓길은 울진 흥부(부구)에서 출발하여 쇠치재->세고개재->바릿재->샛재->느삼밭재->저진치재->새넓재->큰넓재->꼬치비재->멧재->배나들재->노룻재->소천(내성)에 이르는 약 150여 리의 멀고도 먼 길을 말한다. 여기서 꼬치비재부터는 36번 국도가 지나가는 봉화 땅이다. 그러나 현재 울진 십이령고개를 넘어 봉화 내성장과 춘양장, 그리고 멀리 안동장까지 봇짐과 등짐을 이고 지며 보부상들이 내왕했던 그 옛길을 고스란히 복기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부질없는 세월에 밀려난 탓도 있지만 현대문명이라는 편리와 이기에 수 없이 망가지고 무력하게 뭉텅뭉텅 잘려 나간 산천이 한두 곳이 아닌 이유다. 아니 어쩌면 아날로그 그 옛길을 찾아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예전 그 보부상들의 고단한 삶과 거친 숨소리 그리고 그 지린 땀냄새를 약간이나마 추억할 수 있는 곳이 기적적으로 살아 남은 곳이 있다. 거기에 사위를 아우르는 천혜의 자연풍광까지 더하면 이 시대에 이런 비경이 아직 남아 있나 싶을 정도다. 사시사철 푸른 청정수를 받아내는 소광천이 그러하고 그 차가움으로 유명한 찬물내기 계곡이 또한 그러하다. 거기에 하늘을 찌르듯 너무도 당당한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를 대하자면 한없이 작아지는 나의 존재에 짐짓 부끄러워진다. 여기가 바로 말래(두천리) -> 바릿재->샛재->대광천에 이르는 약 9km 거리이다. 놀며 쉬며 흥에 겨워 느릿느릿 기껏 약 네댓 시간이면 족하다. 보통 십이령길은 보부상들의 걸음 따라 울진 두천리에서 출발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우리는 반대편 소광리 후곡동 후곡교에서 하차, 소광천 계곡을 끼며 옛길을 올랐다. 계곡 깊숙한 곳까지 비교적 잘 닦여진 시멘트 포장 길은 바싹 마른 계곡임에도 그래도 겨울이라고 군데군데 얼음에 반사되는 형용한 빛과 어울려 하나의 실루엣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하늘만은 무슨 심산인지 금방이라도 무슨 사단을 낼 것처럼 잔뜩 볼 나 있다. 결국 산행 시작 30여분이 안되어 부슬부슬 보슬비를 흩뿌리고 만다. 아무리 사소한 비라도 이 겨울에 쓸데없는 용기로 맞선다는 것은 무모한 일임을 모르진 않는다. 여기저기서 제각각 배낭을 풀어 나름의 대책을 강구한다. 문득 형형색색의 행색과 복장이 장엄하다. 아주 옛날, 이 겨울에 그때 그 보부상들의 삶의 행렬은 또 어떠하였을까?
어느 지점에 이르러 편안한 임도를 버리고 계곡을 가로질러 산길로 접어들었다. 산길 초입에 산림청장의 지엄한 말씀이 눈에 익다. < 이 지역은 보호수 금강소나무 군락지로 문화재용 보호수림지역임> 금강송에 대한 산림청장의 귀중한 예우다. 그러고 보니 산의 주인이 비로소 눈에 찬다. 당당히 하늘을 견주며 우뚝 선 우람한 체구들. 전혀 비굴하거나 비겁한 행색이 없다. 세상을 똑바로 노려보며 눈을 부라리는 듯 그 어느 하나 꿀림이 없다. 문득 내가 왜 눈 둘 곳이 이렇게 민망할까? 유난히 붉어 적송으로 불리며 또 춘양목이라는 생뚱 맞은 별명을 얻고도 당대의 대궐재목이 아니면 감히 섞이지 않는 당당한 기개가 그렇게 부담스러워서일까? 나만 그런가?
조령성환사(鳥嶺城隍祠)이라는 당호를 보고 이 고개가 지도상의 샛재(710)임을 안다. 고개 마루 양 옆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는 연륜과 무게를 지닌 금강송 수십 그루가 주위를 호위하며 경계를 취하고 있다. 우리 일행 중 하나가 고개를 넘을 때마다 제물을 바쳐야 한다며 술을 따르고 흥을 돋워 너스레를 떤다. 아, 그때 그 당시 이 길을 다니던 보부상들은 또 어떤 놀이와 대화로 그들의 쓸쓸한 삶을 달랬을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성황당 안에 살며시 들여다본다. 목판에 빽빽한 글씨가 많은데 읽어내기가 여간 수월치 않다.
찬물내기는 샛재 고개마루를 지나 약 20 여분 지나면 다시 임도와 만나는데 그 임도 아래를 흐르는 계곡이다. 이 계곡은 샛재와 발재 사이를 가로질러 울진 두천리로 흐르며 일년 내내 그 물이 차고 그윽해 그런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전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산허리를 뭉텅 잘라내 개설된 임도로 인해 그 계곡의 깊은 맛과 그윽한 맛은 많이 줄었다. 오히려 산중 포장도로를 걷는 길이 외롭다. 더군다나 부슬 거리는 비가 겨울의 언 땅과 만나 얇은 살얼음을 만들어내니 그 길을 참아낸다는 것은 참말로 고역이 아닐 수 없다. 예전 보부상들이 결코 경험해보지 않았을 새로운 경험일터다.
일명 십이령이라고도 하는 발재는 이름과 발리 나지막한 고갯마루다. 고갯마루 위쪽에 무사안일을 빌었을 산신당이 있고 그 아래 폐가인 듯 민가가 보인다. 지도상에는 발현동으로 표기되어 있다. 옛 길은 여기 이 민가를 우회해 왼쪽 산길로 접어들어야 했으나 우리는 그만 지도를 잘못 읽어내고 이 고개에서 왼쪽 능선으로 바로 접어들어 한 동안 애를 먹었다. 산쟁이는 길을 찾는데 본능적으로 능선의 냄새를 맡는다는 대장의 말에 모두 머리를 끄떡였지만 어쩐지 짐짐하다. 어쨌거나 작은 지능을 두 번 넘고 계곡을 한 번 건너 결국 옛 주막 터 부근에서 옛 길을 만났다. 주막집은 맥없이 고개 숙인 갈대와 억대 속에 그 형체는 온데간데 없고 쓸쓸한 기왓장과 주춧돌만이 그 자리가 한때 영화로웠음을 외로이 항변하고 있다. 무너진 돌담 사이로 헝클어진 칡 넝쿨만이 제세상을 만난 듯 어지럽다. 무구한 세월을 이길 자 그 누구일까? 한 세기 전, 이 자리에서 거나하게 한 잔 술에 의지해 육자배기 짙은 고단한 삶을 토해놓으며 야속한 세월을 원망했을 그들은 도대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들은 저들의 삶 방식에 동의를 하긴 했을까?
얼마 후 실개천을 따라 난 길을 약 20 여분 걸어나오니 뜻밖의 전각이 우리를 반긴다. 아래에 비문이 있어 자세히 뜯어보니 乃城行商班首權在萬不忘碑라 음각되어 있다. 아마 예전 보부상들이 이 길을 넘나들면서 어쩔 수 없이 부딪쳐야 했을 여러 가지 곤욕들을 해결해준 은인에 대한 감사의 비문이리라. 그런데 가만, 그 세세한 내용이 문득 흥미롭다. 乃城이라면 봉화 내성을 말할 것인데 이 비문이 봉화가 아닌 울진 동쪽에 세운 이유가 일순 궁금해진다. 생각을 찝으며 곰곰이 뜯어보는데 아뿔싸!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쪽 사람들에겐 이 보붓길이 그만큼 당시의 문경새재만큼이나 절실한 길이었으리라. 단순한 삶이 아닌 절체절명의 생존의 길로 말이다. 무릇 이 생존의 길이 있어 어찌 너 남의 경계가 존재하였으리! 비문을 뒤로한 채 앞을 유유히 흐르는 두천계곡의 징검다리를 퐁당퐁당 건너온다. 멀리 발재가 아슴하고 그 사이로 어딘가에 크고 작은 등짐과 봇짐을 이고 진 보부상들의 장엄한 행렬이 잡힌다. 하나같이 허리가 겪었는데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길을 불평하는 자가 없다. 길은 걷는 만큼 줄어들고 줄어드는 길만큼 삶도 그만큼 단단해질 것이다. 비록 단단하다는 것이 행복을 담보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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