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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보디아 사랑방
 
 
 
카페 게시글
―‥‥남은 이야기 스크랩 시애틀에 첫 눈이 온다구요!
권종상 추천 0 조회 72 08.12.15 00:18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원래 눈이 별로 없는 곳이지만, 한번 내렸다 하면 교통이 마비되는 대설을 겪는지라, 마음이 조금 심란키도 했지만, 그래도 하얗게 세상을 덮어주는 이 눈에 한 글자만 더 달면, 그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 버리는 듯 합니다. '첫 눈'.

제가 일 끝나고 집에 올 때는 눈이 오지 않았는데, 아이들과 열심히 놀면서 아내를 기다리고 있자니 차고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아내의 차는 완전히 눈에 하얗게 덮여 있었습니다.

"아니, 눈 오는 것도 몰랐어요?" 조금은 힐난 비슷한 아내의 말 속엔, 다른 남편들은 열심히 아내들에게 전화해서 조심해 운전하라는 이야기들을 남겼는데, 저는 안 했다는 뜻이 들어 있는 듯 했습니다. 음... 이런.

 

어쨌든, 아내가 오기 전부터 전 생선을 굽고 새우를 볶고 있었습니다. 점수만회의 기회. 이게 아마 우럭인가 싶습니다. 커다란 도미류 생선인데, 아내는 두 마리를 사 왔고, 한 마리는 매운탕을 끓이고 다른 한 마리는 제가 구워먹어보고 싶다 하여 오늘 오븐에 넣었습니다. 새우는 타이거 새우를 브로컬리를 넣어 볶은 것인데, 새우 향이 코스트코에서 파는 봉지 생새우 같은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도록 좋습니다.

 

과거같았다면, 첫눈이 내리는 날은 어떻게든 기를 써서 둘이 함께 손을 잡고 눈길을 거닐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그렇게 우리가 서로의 옆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을 뿐 아니라, 아이들의 존재는 일단 우리의 존재를 한 수 접도록 만듭니다. 이 추운 날 밤에 눈밭에서 뒹굴겠다는 아이들을 말리고 붙잡아 함께 퍼즐을 맞추고, 묵찌빠 토너먼트를 벌이고... 아빠와 엄마의 첫눈맞이 낭만 와인파티는 절대로 낭만스러울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즐거워합니다. 저에게 고맙다고 이야기합니다. 휴우... 이제는 제 존재가 아이들에게 밀려 부차로 갔다는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인가 싶어서 조금 섭섭하기도 합니다. 아니, 내가 왜 이런 아이같은 생각을... 하긴, 남자들은 커도 다 애들이라는 소리는 우리 선대로부터 들었으니, 우리집은 아들만 셋인건가...

 

자, 아내와 첫눈 내리는 날에 재미있는 화이트를 마셨으니, 그 이름하여 라이언 패트릭 Ryan Patrick 에서 출시된 '네이크드 샤도네' 입니다. '뻘거벗은 샤도네'니까 그 의미가 금방 유출되지요? 샤블리 스타일입니다. 오크통 숙성을 전혀 시키지 않고, 스텐레스통에서만 숙성시킨 샤도네지요. 깔끔합니다. 코스트코에서 $9.99 에 구입했던건데, 아내도 궁금해했던 와인입니다. 무엇보다 귀여운 레이블이 마음에 든다면서.

 

흠, 전 오크통 숙성을 거치지 않은 샤도네를 별로 마셔본적이 없습니다만, ?핏 레몬향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금방 레몬그래스를 앞세운 산도가 치고들어옵니다. 그럼 맛은? 아, 상큼. 아내도 "이거 피노 그리지오 아냐?"라고 말할 정도로 치고들어오는 상큼함. 새우와 생선과 맞추기보다는, 차라리 생굴과 맞춘다면 훨씬 더 튈듯한 이 상큼함은 어디서 맛본듯한... 아, 윌리엄 페브르 마실 때였습니다. 역시 샤블리의 느낌인가 싶습니다.

이 새로운 트렌드는 아마 오크통 값을 아끼려는 의도도 조금 들어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만큼 프랑스산 오크통 수입을 줄여야하는 와이너리의 입장에서는 이런 새로운 시도로 소비자들의 입맛을 공략해야 하겠지요. 문제는 이래서 아예 프랑스 와인쪽을 궁금해하는 사람들도 꽤 생기겠다는 것. 하지만, 콜럼비아밸리산 샤도네가 이런 맛을 낼 수 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성공적인 와인 헌팅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라이언 패트릭 빈야즈는 가족들이 운영하는 작은 와이너리인데, 이 집 둘째 아들이 몇년 전 교통사고로 죽고 나서 가족들이 모두 상심했지만, 그런 어려움들을 딛고 일어나 새로 비즈니스 확장을 꿈꾸는 작고 알찬 와이너리입니다. 올해 여름에 워싱턴주 독일 마을인 레벤워스에 가서 이 와이너리에서 운영하는 시음장에도 가본적이 있었지요. 아무튼, 이들의 이 재밌고 신선한 와인이 경기 타지 말고 저같은 와이노들에게 꾸준히 팔렸으면 좋겠군요.

 

눈은 내리고, 아이들은 잠들고, 그리고... 아내도 잠들어 버렸습니다. 아, 술 올라. 나도 자야지.

첫눈이 가진 낭만은 사라졌을까요? 아니지요. 그래도 이렇게 잠들어 있는 식구들을 보는 것도 큰 낭만의 한 부분이겠지요. 내가 살아있기에, 그리고 식구들과 함께 호흡하기에 느낄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낭만. 모두가 편안하게 잠든 때, 혼자 타오르는 벽난로의 불빛도 함께 편안합니다.

 

 

시애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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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8.12.19 22:48

    첫댓글 첫눈.. 맛있는음식 그리고 와인...하하 정말 낭만 그자쳅니다. 저두 음식 만들기 좋아하고 와인도 즐기는 편입니다만... 권종상님하고 저하고 다른 점은.. 저는 마눌님없이는 혼자서는 음식을 못 만든다는거.. 옆에서 썰어주고 볶아주고..도와줘야만 음식이 되지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울 마눌님은 알콜을 한방울도 못마셔요. 암만 촛불키고 그럴싸한 와인잔이 있으면 모합니까? 같이 칭하고 마셔줄 사람이없는데...

  • 09.02.13 08:49

    살아 있어서 감사하다고 느끼는 사람 만이 쓸 수 있는 글이네요... 저도 늘 감사하게 느끼거든요... 권 형, 감사해요, 늘 가슴에 담기는 맛깔스럽고 진솔한 글을 주셔서...

  • 09.02.14 14:53

    감사합니다 같은 시에틀에 살면서 느끼는 감정은 이리도 다를가요 제가 싱글이어서 그렁가요 항상 따뜻한 마음을 받아갑니다 입가에 웃음이 지네요 ...

  • 작성자 09.02.15 20:03

    아, 전에도 세계엔에 시애틀 사신다는 말씀 하셨었지요?... 저는 사는 건 Fway 입니다. 직장은 브로드웨이구요... 반갑단 말씀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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