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지 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돈이없어 동냥을 하는 눈먼 아버지와 그 딸(여기에서 보면 효성이 지극한 심청이 와도 같은 소설속의 인물로 등장하네요)
*** 주인 영감이 소리질렀으나 태연하였다.
거지로 알고 주인장이 쫒아 낼려 하는데 장사하는 사람들은 원래 장사가 잘되는 사람을 고르는 것이지요
일본인이 지배하는 총독부의 밑에서도 굴하지안고 일본 놈들을 당황하게 하는 어귀......... 나라는 없으나 일본놈들 한테는 빌어먹지 않는다는 어귀.........
***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십전짜리 두개를 보였다.
그러니 여기에서 옷은 비록 허울지고 남루할 망정 동냥하는 사람은 아니고 그 어린 소녀는 아름다운 마음씨와 갸륵한 효심이 듬뿍 들어있는 좋은 시를 형님이 골라오셨네요
저도 이 시어에서 깊은 뜻을 재삼 생각해 봅니다.
전번에 오래된 시는 아니지만 국화님이 올리신 황지우 시인의 :발작"을 보면서 그 시절 전라도에서 태어나 시인의 한사람으로 군부 독재의 슬하에서 껵어 오는 심적의 시를 자기가 금새 그 정부로 부터 터져 오르는 분노가 금새 발작할 것 같은 미쳐 버릴 것 같은 그런 내용을 볼때 아 그 시대를 그렇게 표현하였구나를 느꼈습니다.
좋은 시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인천에서 형렬 배상
** 본문내용 **
조선총독부가 있을때
청계천변 10전균일상 밥집 문턱엔
거지소녀가 거지장님 어버이를
이끌고 와 서 있었다
주인 영감이 소리를 질렀으나
태연하였다.
어린 소녀는 어버이의 생일이라고
10전짜리 두 개를 보였다.
- 김 종삼씨의 시 -
시간 나시면 한번 일어 보십시오.
김종삼(金宗三,1921∼1987)
시인.황해도 은율 출생
초현실주의 경향의 특이한 소재와 표현 기법의 단절및 비약으로 주목을 끌었다.
시집에「12음계」가 있고, 대표적인 작품으로「음악」,「배음」,「민간인」등
한 늙고 추레한 노인이 가난한 산동네의 구멍가게에 들어왔다. 무허가 집들이 밀집된 산동네 산 8번지의 한 구멍가게였다. 그 일대에는 개백정도 살고, 상처한 복덕방 영감도 살고, 막노동꾼, 술집 나가는 아가씨들도 산다. 과자 부스레기, 라면, 소주, 일용 잡화 따위로 겨우 구색을 갖춘 코딱지만한 구멍가게였다. 마침 주인은 자리를 비운 채 였다. 노인은 떨리는 손으로 얼른 소주 두병을 훔쳐 밖으로 나왔다. 노인은 구멍가게에서 훔친 소주 두병을 소중하게 옷안에 숨겨가지고 어디론가 허청허청 가고 있었다. 그이가 저 유명한 시집 [북치는 소년]의 시인 김종삼이라는 걸 아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소주 두병 값을 갔다 주긴 했지만 이 무렵 김종삼은 구제불능의 소주 중독이었다. 집에서 책을 들고 나가 헌책방에 넘겨주고 받은 돈으로 소주를 마셨고, 돈네 세탁소 주인에게 구걸하듯이 소주값을 빌리기도 했다. 세탁소 주인은 <깔끔하시던 분이 변해도 너무 변하셨어.......>라고 한탄을 하며 혀를 찼다.
한 번은 집을 나간 김종삼이 며칠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를 봤다는 사람도 없었고, 그의 종적은 묘연했다. 경찰서에 실종신고를 내고도 며칠이 더 지난 뒤에야 식구들은 시립병원에 입원해 있는 그를 찾아내었다. 술에 만취되어 길가에 시체처럼 방치되어 있는 그를 누군가 시립병원에 입원시켰던 것이다. 그는 무연고 행려병자로 십여일간 사경을 헤매다가 가까스로 살아나 가족들에게 연락이 닿았던 것이다. 김종삼은 일어나 걸어다닐만 하자 시립병원의 여기저기로 마실을 다녔다. 시체실 주위를 배회하기도 하고, 중환자실의 침상에서 죽어가는 이들의 얼굴도 들여다보기도 하고, 특별치료 병동 중환자 보호대기실에서 환자 보호자와 말벗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치료를 받은 뒤 시립병원에서 퇴원하고 그 이후로 식구들은 그에게 일체 용돈을 주지 않았다. 한푼이라도 생기면 구멍가게로 달려가서 소주를 사 마셨기 때문이다. 김종삼은 절도라는 극한의 방법도 마다 하지 않고 소주 두병을 확보했다.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알콜 중독이 아니라면 그는 멀쩡했다. 상처한 복덕방 영감이 석달만에 서둘러 후처를 들였다가 심장마비로 죽자 매장에 필요한 사망진단서를 떼다 준 것도 그였다. 아니면 하릴없이 인파 속을 어정어정 걸어가다가 충무로의 한 평 남짓한 자그만 카셋트 점포에서 흘러나오는 핏셔 디스카우가 부른 슈베르트의 보리수에 취해 있곤 했다. 그는 <팝송 나부랭이와 인기 대중가요가 판치는> 세상을 못마땅해 했다. 그런 곳에서 커피 한잔이라도 마시면 <속이 메식거려 기분 나쁘게 먹었다>라고 할 정도였다.
김종삼은 유서깊은 고전음악 매니아였다. 김종삼은 전봉래 전봉건 형제들과 함께 사변 전의 유명한 고전음악감상실들이었던 명동의 돌체 오아시스 라아뿌륌의 단골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돌체가 피난지 부산 역전으로 옮겨진 뒤에도 김종삼은 그곳을 드나들었다. 돌체는 피난지로 몰려든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다. 때로는 잠 잘 곳이 마땅치 않아 돌체의 홀에서 잤고, 아침이면 바하를 틀어놓고 세수를 하기도 했다. 그때 김종삼은 여기저기서 훔친 마태 수난곡의 독창 판과 브람스 교향곡 4번의 SP판도 소지하고 있었다. 그 무렵 그의 품에는 [園丁] [G. 마이나]와 같은 처녀작 원고를 갖고 다녔다. 시인 김윤성이 그의 처녀작 원고를 본 뒤 [문예]지에 추천을 받게 해주겠다고 갖고 갔으나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의 작품들은 꽃과 이슬을 노래하지 않았고, 지나치게 난해하다는 이유로 [문예]지의 추천위원들로부터 거절당한 것이다. 시인이며 불문학도였던 전봉래가 전후의 상실감을 이기지 못해 부산 남포동의 스타다방에서 바하를 들으면서 자살을 했던 것도 그 무렵이었다.
김종삼은 1963년 2월에 동아방송 총무국에 촉탁으로 입사했다가 1967년 일반사원이 되어 제작국으로 옮겼다. 그 이후 그는 10여년간을 동아방송에서 음악효과를 맡으면서 1976년 정년으로 동아방송을 나올 때까지 그는 원없이 고전음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남들이 다 퇴근한 뒤 자정 너머부터 혼자 음악을 들었다. 남들이 퇴근하는 시간에 그는 방송국 근처에서 어슬렁거리다가 간단하게 저녁을 해결하고 방송국으로 다시 들어갔다. 의아해 하는 방송국 수위에게 손을 번쩍 들어 <시그널 몇 개 만들려고.......> 하면 그만이었다. 그는 텅 빈 레코드실에서 옷속에 감춰 들여갔던 소주를 따고 혼자 모짜르트를 들었다. 어떤 곡은 며칠 몇 달씩을 반복해서 듣기도 했다. 오랫동안 방송국에 근무하면서도 그 흔한 직책하나 맡은 적이 없지만 그 시절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순수하게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김종삼의 부친은 신문기자를 지낸 지식인이었다. 나중에 [평양공론]이이라는 잡지를 내기도 했다. 김종삼은 평양고보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귀족들만 다니는 동경문화학원에서 문학부에 입학하지만, 작곡을 하고 싶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러나, 그가 음악공부를 한다는 사실을 안 그의 부친은 일체의 송금을 끊어버렸다. 김종삼은 부두에서 막노동을 하며 7년간 고학을 했다. 그 시절 도스토예프스키를 비롯하여 광범위하게 독서를 했고, 바이런, 하이네, 발레리 등의 시들을 열심히 탐독했다. 고전음악만을 틀어주던 동경의 르네상스 다방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드나들기도 했다.
내가 김종삼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 초봄이었다. 그해에 나는 신춘문예를 통과하여 문단에 나온 신출내기 시인이었고, 한 단행본 출판사의 편집사원으로 일할 때였다. 같은 출판사의 편집장이었던 시인 이세룡과 함께 인쇄소를 다녀오다가 무교동에서 점퍼 차림에 벙거지 모자를 눌러쓰고 걸어오는 그와 마주쳤다. 낡은 등산모, 커다랗게 솟아 있는 귀, 그리고 어정어정 걷는 걸음........나는 <나는 누구나 가는 길을 / 어슬렁어슬렁 가고 있었다>라는 그의 시 한 구절을 떠올리며 그가 김종삼 시인이라는 걸 한눈에 알았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시인 이세룡에게 다짜고짜로 세금 2천원을 내놓으라고 했다. 이세룡은 웃으며 호주머니를 뒤져 그에게 2천원을 건네줬다. 그의 소주값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조선일보 옆에 있는 아리스 다방에서도 몇번인가 그를 만났다.
어느날 그가 출판사의 편집실에 예의 점퍼 차림에 벙거지를 쓰고 불쑥 모습을 나타냈다. 생전의 그의 별명은 도깨비였다. 그는 그렇게 도깨비처럼 출판사 편집실에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모습을 나타내곤 했다. 그는 품에서 원고 하나를 꺼내더니 내게 베껴쓰라고 했다. 김종삼의 육필 원고는 글자 하나가 주먹만 했다. 글자들은 날카롭게 직선으로 뻗어 있었고, 원고지의 네모칸을 훨씬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원고를 새로운 원고지에 정성스럽게 옮겨적었다. 내가 정서한 원고를 받아 든 김종삼은 자신의 육필원고와 대조를 마치고는 원본을 이세룡에게 내밀었다. 말은 안했지만 며칠 전 2천원의 갈취에 대한 우아한 답례였다.
김종삼은 보헤미안이었고, 無産者였고, 생활인으로서 철저하게 무능력자였다. 그의 인생에는 생활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시와 음악과 술이었다. 그는 다만 시인이었다. 때로 그는 자조적으로 <나같이 인간도 덜 된 놈이 무슨 시인이냐. 나는 건달이다, 후라이나 까고.>라고 내뱉었다. [製作]이라는 시에서 <그렇다 / 非詩 일지라도 나의 職場은 詩 이다>라고 선언했둣이 그는 다른 그 무엇도 아닌 시인일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글/장석주(시인/문학평론가)
장석주 1979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첫시집 『햇빛사냥』을 출가한 이후 지금까지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 등 7권의 시집과 『세기말의 글쓰기』 등 4권의 평론집, 그리고 『이산의 사랑』 등 3권의 장편 소설을 냈다. 그동안 활발한 작품 활동, 방송, 출판 편집인으로 일해왔다. 최근에 산문집 『절망에 관해 우아하게 말하는 방법』, 평론집 『문학, 인공정원』, 그리고『세도나 가는 길』이란 장편 소설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