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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 윤씨와, 중종때 여인천하로 유명한 난정이하고 구분 하시길..
3백 여 년 전 빼어난 미모와 권모술수를 이용 궁녀 출신으로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아 왕비자리까지 오르고 숙종의 비(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 1701)를 죽음에 이르도록 저주한 악녀이자 요부의 상징, 그녀를 가리켜 우리는 "장희빈"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과연 이것이 장희빈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장희빈(장옥정)은 인동 장씨 22대손으로 역관(譯官) 장경의 2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16세기 후반부터 역관이 나오기 시작한 인동 장씨 집안은 조선 중기와 후기 사이에 주목할 만한 중인 가문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활약이 컸던 사람이 바로 장희빈의 할아버지 장응인이었다.
조선시대 외교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 통문관지(通文館志-중국 및 일본과의 외교관계 사항을 기록한 책)에는 역관으로서 크게 활약한 사람들이 소개돼 있는데 장응인의 이름도 여기에 있다.
장응인 이후로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여명의 역관이 나왔는데, 그중 역과에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이 7명일 정도로 실력이 뛰어났다. 장현, 장응인 등 청나라 사신들이나 고위관리들을 잘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아 청나라와의 관계를 잘 처리해서 좋은 평판을 얻고 있었다.
역관이었던 장옥정의 아버지 장경은 장옥정이 어렸을 때 죽었다. 그 후 장옥정 일가를 거둬준 사람은 5촌 당숙인 장현이었다. 장현 역시 역관이었는데, 1617년(광해군 9) 역과에 수석 합격한 그는 효종(孝宗)때부터 숙종(肅宗)때까지 40여 년 간 역관으로 활동하면서 꽤 이름을 날렸다.
당시 중국과 조선은 일년에 3-4회 사신단을 교환하고 있었다. 조선의 조정대신들은 대부분 외국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통역을 담당할 역관이 반드시 필요했다. 이런 사정으로 역관들은 사신 행렬에 빠짐없이 선발됐고 외교상 이뤄지는 거의 모든 부분에 관여하면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조정은 사신단에게 쌀, 포, 종이 등을 지급하여 이것으로 무역을 해서 사행경비를 충당하게 했는데, 그 무역의 권한이 역관에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역관들에게는 출장비 대신, 개인무역을 할 수 있는 권리도 주어졌다.
한 사람에게 허용된 무역량은 인삼 팔포, 즉 80여근이었으며 이것은 은으로 치면 약 2천 냥, 요즘 돈으로 3억4천만 원에 이르는 매우 큰 돈이다. 역관들은 조선에서 인삼이나 종이, 면포 등의 특산물을 가져가 팔고 중국에서 비단류와 문방구류, 약재류, 가죽제품들을 구입해왔다.
이렇게 들여온 물건들은 일부 국내 상인에게도 넘어갔지만 대부분은 일본과의 무역 창구인 왜관으로 넘겨지게 된다. 당시 청나라는 일본과 모든 교류를 단절하고 있었기 때문에 청나라와 직교역을 하지 못하고 조선의 왜관을 통해 중국 문물을 구할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당시의 외교 상황 속에서 역관들은 18세기 이후부터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했던 것이다. 장현 역시 중계무역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당대에 손꼽히는 부자였던 역관 장현은 외교적인 공로를 인정받아 벼슬도 종1품 숭록대부(崇祿大夫)까지 올랐다.
장옥정은 아버지 장경이 죽으면서 장현의 집으로 들어와 비록 중인 신분이었지만 풍족하게 자랄 수 있었다. 이처럼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장옥정이 왜, 궁녀가 된 걸까? 조선시대 궁녀라고 하면, 가난한 집안의 딸들이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숙종 6년(1680) 경신환국(庚申換局)이 일어난다. 환국의 시작이 된 것은, 이른바 삼복의 변으로 당시 영의정이던 허적(許積 1610~1680)과 서자 허견(許堅)이 왕실의 종친이던 복선군(福善君 ?~1680 인조의 손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의 2남) 3형제와 함께 역모를 꾀했다는 사건이다.
이 일로 당시 정권을 잡고 있었던 남인 세력들이 대거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고 서인들이 조정을 장악하게 되는 일당 전제정치로 바뀌는데, 하루아침에 일당 전제가 되는 이런 정치를 환국정치(換局政治)라고 부른다.
환국의 파장은 장옥정의 일가에까지 미치게 되어 장현이 함경도로 유배된다. 숙종실록에는 역관 장현이 환국과 연루된 사정이 기록돼 있다. 그가 역모의 주동으로 죽음을 당한 복선군 형제의 심복으로 남인 세력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치변동의 소용돌이 속에서 남인 세력과의 결탁으로 장옥정은 궁녀가 되어 궐에 들어가게 된다.
실제 남인들이 배후에 있었다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타나는데, 숙종이 문안하러 왔을 때 남인측 자의대비(慈懿大妃-인조의 비 장렬왕후)가 의도적으로 숙종과 장옥정을 주선하여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된다. 이런 점으로 볼 때 남인들이 정권을 탈환하기 위한 일환으로 장옥정을 궁녀로 들여보낸 것으로 판단된다.
장옥정의 입궁 시기나 절차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지는 않다. 다만 숙종실록에는 장옥정을 가리켜 "얼굴이 자못 아름다웠다"고 묘사한 기록이 있는데 조선 왕조 실록에서 이처럼 여인의 미색을 언급한 경우는 장옥정이 유일하다.
그러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도 발 빠르게 움직인다. 이 무렵 숙종의 첫번째 비 인경왕후(仁敬王后 1661~1680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가 죽자 서인들은 자신들의 가문에서 새 왕비를 내기위해 국상이 채 끝나기도 전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 서인파의 핵심세력들이 모여 병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의 딸을 왕비로 결정한다.
왕비 간택의 권한은 왕실에 있었지만 문제될 것은 없었다. 당시 대비였던 명성왕후(明聖王后 1642~1683 현종 비. 영돈령부사 김우명(金佑明)의 딸)가 서인가의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서인 세력들과 명성왕후의 뒷받침으로 민유중의 딸은 1681년 손쉽게 왕비 자리에 오른다.
서인의 상징으로 왕비에 간택된 인현왕후와 남인들을 뒤에 두고 있던 장희빈, 서로 다른 당파의 대리자로서 왕비자리와 숙종의 사랑을 놓고 끝없이 대립해야했던 두 여인이 모진 인연의 서막이 오른 것이다.
장옥정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뒤 승승장구 왕비자리까지 올라간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다음에도 꽤 오랫동안 여러 차례 고난을 겪어야 했다.
숙종 12년 7월 부교리 이징명이 올린 상소를 보면, "요즘 총애를 받고 있는 궁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 역관 장현의 친척이라고 합니다. 주상께서는 부디 장녀를 쫓아내시어 깨끗하고 밝은 정치를 펴십시오."
또 장옥정이 숙원(淑媛)으로 봉해진 이듬해,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이 숙종에게 간언한 내용은 당시 남인쪽 사람이었던 조사석(趙師錫)이 우의정이 되자, 장옥정의 어머니가 평소 조사석의 집안과 가까웠기 때문이라며 비난하고 있다.
이외에도 조정 대신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숙종에게 장옥정을 비방한다. 일개 궁녀가 국왕의 총애를 받는데 논란이 되는 경우는 장옥정 외에는 없었다.
서인들이 계속 이런 주장을 한다는 것은 장옥정이 남인의 간자(間者-첩자)로, 미인계로 궐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이렇게 장옥정이 남인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는 해도 당시에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집권당은 어디까지나 서인 세력이었다.
서인 세력을 배경으로 둔 인현왕후에 비한다면 장옥정의 입장이 극히 불리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1688년 10월 27일 숙종의 후궁 장옥정이 숙종이 왕위에 오른지 14년 만에 왕자를 출산하게 된다. 이것은 서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았다. 장옥정의 왕자 출산은 그 배경이 되는 남인의 입지로 연결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던 것이다.
왕자 균이 태어난지 두 달 만에 숙종은 원자 정호, 즉 왕위 계승자를 정하는 문제를 거론하게 된다. "국본을 정하지 못해 민심이 안정되지 않으니 이제 새로 태어난 왕자를 원자로 정하려 한다. 만약 선뜻 결단하지 않고 머뭇거리며 감히 이의를 제기하는 자가 있다면 벼슬을 내놓고 물러가라."
그러나 서인 일색이었던 조정 대신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선다. 적자가 아닐뿐더러 정비인 중전이 아직 젊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숙종의 의지는 단호했다. 처음 얘기를 꺼낸지 닷새 만에 숙종은 왕자 균을 원자로 봉하고 종묘사직에 고해버린다. 그리고 장옥정은 내명부 정 1품 빈(嬪)으로 책봉된다.
그런데 원자 정호 문제가 이렇게 마무리되어가던 무렵,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상소를 올린다. 열 살이 지나서야 비로소 태자로 책봉된 송나라 철종의 예를 들어 원자 정호의 성급함을 지적한 상소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숙종의 분노를 불러왔고 10년 동안 유지돼온 서인 정권이 몰락하는 계기가 되고 만다. 상소를 올렸던 송시열은 삭탈관직을 당한 뒤 제주도로 유배된다.
이어서 서인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벌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다. 송시열을 비롯해 김수항과 홍치상 등 18명이 죽고 59명이 유배를 당했으며 이외에도 26명이 파직과 삭탈관직을 당하는 등 100명 이상의 서인이 처벌을 받았다.
경신환국 이후 9년 만에 일어난 기사환국으로 권대운(權大運) ·김덕원(金德遠) ·목래선(睦來善) ·여성제(呂聖齊) 등의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된 것이다. 환국의 마지막 절차는 인현왕후의 폐출이었다. 서인파의 상징으로서 왕비 자리에 올랐던 인현왕후는 정권의 몰락과 함께 궐 밖으로 쫓겨난다.
숙종 또한 원자와 관련해서 서인과 연관된 인현왕후 민씨를 왕비로 둘 경우 원자의 미래가 불확실해질 수 있고, 인현왕후를 폐출시킴으로써 왕비 선택권이 국왕인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할 의도도 갖고 있었다고 보여 진다.
인현왕후가 폐출된지 열흘 만에 숙종은 장옥정을 왕비로 책봉한다. 중인 신분으로 태어난 궁녀 장옥정 그녀가 마침내 숙종의 세번째 왕비가 된 것이다. 장옥정의 왕비 책봉, 그것은 엄격한 신분제도가 존재했던 조선에서 그야말로 파격적인 사건이었던 셈인데 이것이 과연 숙종의 총애와 남인이라는 정치 세력의 뒷받침만으로 가능했을까?
중인출신 장옥정이 왕비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실 더 큰 세력이 있었다. 조선 후기 사회의 또 다른 축으로 등장한 중인 계층이 바로 그들이다. 상인과 역관 등의 중인계층은 상업과 무역활동을 통해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한다.
그리고 이 같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중인들은 사회적인 영향력을 키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가장 두드러진 세력은 바로 역관이었는데, 특히 중국어 역관의 경우 청나라를 자주 오가며 외교는 물론 국정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때문에 당시에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런 역관들의 지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장옥정의 왕비 책봉도 이 같은 사회 변화와 연관돼 있다고 보여 지는데 당시에 청나라와 사대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이 정권을 유지하기위해서는 청나라의 지지가 반드시 필요했고, 역관은 이 같은 지지를 확보해줄 수 있었던 존재였다.
때문에 숙종은 이 같은 역관들을 세력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장옥정을 왕비로 삼았던 것이다. 숙종 대 여러 차례 환국이 일어난 것은 이처럼 중인계층과 정치권이 서로의 이권과 목적에 따라 결탁해있었던 상황과도 깊은 연관이 있었다.
1694년(숙종 20) 다시 한번 정권이 바뀌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서인인 김춘택(金春澤)과 한중혁(韓重爀) 등이 폐비 민씨의 복위운동을 전개했는데,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으로 갑술환국(甲戌換局)이 바로 그것이다.
정권의 교체와 함께 폐출됐던 인현왕후는 다시 복위되고, 장옥정은 빈으로 강등되어 취선당(就善堂)으로 밀려나게 된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장희빈은 잊혀진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1701년 인현왕후 민씨가 죽으면서 장희빈은 또 다른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무수리 최씨(영조의 모)가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희빈의 저주 때문이라고 숙종에게 밀고했던 것이다.
당시 장희빈이 취선당 뒤편의 사당에서 인현왕후를 저주했다. 인현왕후를 상징하는 인형을 만들어 바늘을 꽂거나 화살을 쏘고 또 귀신에게 새 옷을 지어주면서 인현왕후를 죽여 달라고 빌었다. 이 같은 죄로 인해 장희빈은 인현왕후가 죽은지 두 달 만에 사약을 받게 된다.
당시에 조정 대신들은 장희빈이 한때 국모 자리에 있었고 세자의 어머니라는 이유로 사사를 반대했다. 그러나 장희빈의 용서를 청하는 대신들에게 숙종은 단호한 의지를 밝힌다. "내가 살아있는데도 이럴진대, 이 사람을 살려둔다면 후일 안팎으로 그 당파를 심어 국가의 근심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내가 절박하게 여기고 통탄해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3살의 어린 나이로 신하들의 힘이 극히 강했던 시기에 즉위했던 숙종은 왕권 강화에 대해 남다른 의지를 갖고 있었다.
장희빈을 내쫓으라는 상소에 대해 "주약신강(主弱臣强)"을 거론하며 한탄하는 모습이나, 원자 정호와 관련해 송시열이 반대상소를 올렸을 때 왕을 능멸하는 처사라며 격분했던 것 모두가 그 같은 상황에서 비롯된 일이었던 것이다.
신권이 왕권을 넘보는 것을 묵과하지 않겠다는 숙종의 이 같은 의지는 장희빈의 사사를 명하면서 내린 비망기에서도 드러난다.
장희빈을 죽이는 것이 국가와 세자를 위한 조치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왕권 강화에 대한 숙종의 강력한 의지는 세 번의 환국으로도 나타나게 되는데 한 세력에서 다른 세력으로 정권이 완전히 교체되고 대대적인 숙청이 잇따르는 환국과 적절한 왕비교체를 통해 왕권을 강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역관 집안의 딸로 태어나 궁녀가 됐고, 왕비라는 최고의 자리까지 올랐던 여인 장희빈은 강력한 왕권을 원했던 숙종의 의지와 정쟁의 소용돌이 속에 결국 죽음을 맞았다. 그리고 숙종은 이 같은 희생을 대가로 얻어진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정치적 안정을 이룰 수 있었다.
숙종이 강력한 왕권을 구축해나가던 시기 시대의 흐름 속에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던 희빈 장씨 그녀의 신위는 후궁 출신으로 왕의 어머니가 된 여인들이 모셔져 있는 일종의 사당인 칠궁(七窮)에 모셔져 있다.
사실 그동안 장희빈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모습들만이 부각돼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장희빈은 중인이라는 신분을 극복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나간 적극적인 여성이었고 또 조선 후기라는 격변의 시대 속에서 정쟁의 희생물이 된 비운의 여인이기도 했다
첫댓글 안타깝네요... 당파의 희생양이군요......덕식씨.사학과나요? 지리학과나요?
약간의 수정은 했지만, 위에글 제가 정리한것은 아닙니다. 물론 관심은 있습니다. 요즘 선생님들(특히 부부교사)께서 하도 중국에 많이 가길대(저는 외국이라곤 딱 한번 퀴즈대회???) 중국 역사에 관해서 한시간 강의를 하고 박수를 받았습니다. 영국이나 미국사람들의 영어보다 제3국인의 영어가 더 이해가 잘 되는거와 같이. 지리와 역사는 4촌?
유대교가 어머니라면 기독교는 큰아들, 이슬람교는 작은아들이라고나 할까요? 그런데 그 아들들끼리 사이가 안좋아서 테러가 일어나고, 어쩔수 없이 꼽사리에 낀 우리나라가 희생을 당하고. 요즘 제가 읽는 책이 박노자의 "나를 배반한 역사"와 "중국의 붉은별"의 저자인 에드가 스노의 자서전인데 기독교를 억수로 많이 욕을 하더군요.== 몇일전 6만원 받고 노가다 하루 했는데, 죽겠더만요. 편안히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를 준 신(?)께 감사 드립니다== .
몸매로 봐서는 천부적인 노가다 스타일인데... 어쩌다가 선비의 길로 들어서서리... 하여간 두째 일욜 별일 없으면 캠핑 장에 놀로 가볼께욤. 한 수 배우러. 지리에서도 밀리고 사학에서도 밀리니...기분 좋네요...ㅎㅎ
"나를 배반한 역사" 다 읽으면 나 빌려 주오.
이미 반납 했습니다. 기백이 한테 빌려 놓으라고 하이소. 아무 도서관이나 있을 겁니다. 내용이 하도 비판적이라 중고생한테는 안 맞을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