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발
유치환(柳致環)
이것은 소리 없는 아우성
저 푸룬 해원(海原)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哀愁)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인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닮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조선문단』, 1936.1)
[어휘풀이]
-노스탤지어 : 고향을 몹시 그리워하는 마음. 또는 지난 시절에 대한 그리움.
-애닮은 : 애달픈
[작품해설]
이 시는 청마 초기 시의 주된 정조인 연민과 애수위 서정을 통하여 존재론적 차원의 허무의 문제를 제기한 작품이다. 전 9행의 단연 형식의 이 시는 비유적 비교와 반어적 대조를 통해 성공을 거두고 있다. 진술(陳述)에 의존하여 대부분 관념시가 되고 있는 일반적인 청마시에 비해, 이 시는 체험의 윤리적 의미를 중시한 수사적 차원의 방법을 택함으로써 진술 대신 다양한 이미지를 형상화하고 있다.
이 시는 중심 이미지인 ‘깃발’에 ‘아우성’, ‘손수건’, ‘순정’, ‘애수’, ‘마음’이라는 5개의 참신한 보조 관념이 연결된 확장 은유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곧 깃발은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으로 ‘푸른 해원’이라는 이상향을 동경하는 ‘순정’을 상징하며, ‘애수’와 ‘마음’은 이상향에 끝내 도달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좌절의 표상이다. 그러므로 ‘푸른 해원의 하얀 깃발’이라는 색채의 대조 속에는 이 두 상반된 태도가 적절히 대응되어 있다.
다시 말해, 깃발은 ‘맑고 곧은 이념의 끝’에서 이상향을 향한 ‘아우성’의 몸짓으로 의지와 집념의 자세를 보이기도 하지만, 결국은 깃대를 떠날 수 없는 숙명적 존재임을 깨닫고 절망하고 만다. 결국 이 작품은 이상향에 도달하지 못해 절망하는 감성적 허무와, 영원히 실현될 수 없는 이상인 줄 알면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모순과 고뇌를 깃발의 펄럭이는 모습을 통해 제시하고 있다.
[작가소개]
유치환(柳致環)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문예월간』에 시 「정적」을 발표하여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일기(蜻蛉日記)』(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시집』(1954), 『제9시집』(1957),
『유치환 시초』(1953), 『동방의 느티』(1959),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1965), 『청마시선』(1974),
『깃발』(1975), 『유치환-한국현대시문학대계 15』(19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