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탐험사 100장면 95 - 대국의 체면을 가까스로 지키다 '히든 피크'를 찾아낸 피터 셰닝, 울릭 카우프만(19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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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03. 21:12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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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탐험사 100장면
대국의 체면을 가까스로 지키다
'히든 피크'를 찾아낸 피터 셰닝, 울릭 카우프만(1958년)
요약 가셔브룸Ⅰ은 오늘날 히든 피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때까지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들은 거의 정복되어 남은 곳이 별로 없어 미국에게는 정복이 시급했다. 1958년, 히든 피크를 찾은 세 번째 도전자 미국대의 피터 셰닝과 울릭 카우프만이 정상에 섰다.
"우리도 8,000m 등정국"
미국은 비장한 각오로 히든 피크에 도전해 성공했다. 니콜라스 클린치 대장과 피터 셰닝 대원은 1966년에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도 처음 정복했다.
가셔브룸 Ⅰ(8,068m)은 오늘날 히든 피크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글자 그대로 '숨어 있는 봉우리'라는 뜻으로, 브로드 피크처럼 콘웨이 박사가 붙인 이름이다. 앞에 첩첩이 놓인 산들에 가려, 발토로 빙하를 한참 거슬러올라야만 모습을 드러내는 까닭에 이런 별명을 붙였다고 전한다.
이 산에 처음 뜻을 둔 이는 노먼 다이렌퍼스의 아버지인 군터 다이렌퍼스이다. 그는 1930년에 칸첸중가를 노리고 네팔 히말라야 원정대를 만들었고, 1934년에는 카라코람 히말라야 원정대를 만들었을 정도로 히말라야 등산에서 선구자였다.
다이렌퍼스가 이끄는 카라코람 원정대는 7,000m가 넘는 봉우리들을 여럿 올랐는데, 특히 그의 부인은 시아 캉리 서봉(7,355m)을 올라 그때까지의 여성 등반 사상 가장 높이 오른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 때 다이렌퍼스 등반대에서 두 사람이 처음으로 히든 피크에 도전했는데, 그들은 6,200m까지 올랐다가 돌아섰다.
1936년 프랑스가 두 번째로 히든 피크에 도전했다. 프랑스로서는 알프스라는 좁은 무대를 벗어나 히말라야를 향한 첫 번째 도전이었다. 3년에 걸친 연구와 준비 끝에 드 세고뉴를 대장으로 하여 대원 10명, 셰르파 35명, 짐꾼 600명으로 이루어진 대규모 원정대가 5월 17일 발토로 빙하 어귀에 도착했다.
5월 26일 4,950m에 베이스 캠프를 세운 프랑스대는, 6,100m에 제3 캠프를 세우고 나서 갑자기 날씨가 나빠지자 베이스 캠프로 물러났다. 며칠지나 6,600m 높이에 제4 캠프를 쳤으나 또다시 폭설이 내려 나흘 동안 텐트 안에 갇혔다. 6,800m에 제5 캠프가 세워진 날은 6월 19일. 프랑스를 떠나온 지 두 달하고도 이틀이 더 지나도록 4,000~6,000m 사이를 오르락내리락하기만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 해 몬순이 일찍 닥쳐왔다. 6월 21일 베이스 캠프에 있다가 라디오로 이 뉴스를 들은 세고뉴 대장은 곧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공격대원들이 이미 7,069m 지점에 제6 캠프를 세운 뒤였다.
대장으로부터 후퇴 명령을 받은 공격대원들은 고민에 빠졌다. 그들이 제6 캠프를 세운 곳은 어려운 고비들을 다 넘어선 지점이었다. 비록 정상까지 1,000m나 남아 있지만 오르기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들은 며칠 기다려 보기로 했다.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니 조금만 참아 보자는 속셈이었다. 텐트가 눈에 묻히고 기온이 영하 20도로 떨어졌지만 그들은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다. 7월 1일이 되어서야 그들은 마지못해 산을 내려왔다. 내려오다가 셰르파 두 사람이 700m나 굴러 떨어지며 눈사태를 일으켰으나 기적처럼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1958년 5월 히든 피크를 찾은 세 번째 도전자는 미국팀이었다. 그때까지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들은 이미 열한 군데가 정복되어 남은 곳은 히든 피크와 다울라기리 그리고 공산주의 정권이 지배하는 중국 땅에 있어 들어갈 수 없는 시샤팡마뿐이었다. 우물거리다가는 세계 제1의 대국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이 8,000m 봉우리를 하나도 오르지 못하는 창피를 당할 판이었다.
니콜라스 클린치를 대장으로 한 미국대는 비장한 마음가짐으로 히든 피크에 도전했다. 그들은 이곳저곳을 살피고 나서 1934년에 다이렌퍼스대가 올랐던 길로 오르기로 했다.
캐러밴을 시작한 5월 21일부터 꼭 한 달이 지난 6월 21일 미국대는 6,550m 높이에 제3 캠프를 세웠다.
제3 캠프에서 바라보니 정상에 이르기까지 아주 어려운 고비는 없어보였다. 그러나 거리가 너무 멀었다. 단숨에 끝낼 수 없는 거리이므로 오르는 도중에 바람이나 눈보라에 휩쓸리면 살아서 돌아오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그들은 제3 캠프를 베이스 캠프처럼 튼튼하게 만들어 모든 사람과 물자를 대기시켜 쉬면서 기다리다가, 날씨가 가장 좋은 날을 골라 정상을 공격하기로 했다.
일단 작전이 서자 대원들은 날마다 베이스 캠프로부터 짐을 져 올렸다. 눈사태를 피해 새벽부터 서둘러 10시간이 넘게 산을 오르는 힘든 나날이 한 주일이나 계속되었다. 가끔 날씨가 아주 나쁜 날은 텐트에 머무르며 쉬기도 했다.
6월 28일 밤이 되자 클린치 대장은 대원 모두를 제3 캠프에 모아놓고 팀을 셋으로 나누었다. 다음날 세 팀이 차례로 등산을 시작했다. 제2조는 도중에 되돌아왔지만 제1조와 제3조는 제4 캠프를 세웠다.
그런데 그날 밤부터 다시 날씨가 나빠졌다. 그러자 대장은 계획을 바꾸었다. 제3 캠프의 기능을 제4 캠프로 옮겨, 짐꾼들이 제4 캠프로 물자를 나르고 공격대는 날씨가 좋아질 때까지 텐트에서 쉰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제2조 3명이 제1조 2명을 위해 제5 캠프를 세울 곳까지 눈을 밟아서 길을 다져놓기로 했다.
7월 4일, 계획한 대로 대원 5명이 제4 캠프를 떠났다. 하루 종일 걸려 제5 캠프를 세운 뒤 제2조는 돌아가고 제1조 두 사람이 거기에 남았다.
7월 5일 새벽 5시. 밤새도록 산소를 아껴 쓰며 날이 밝기를 기댜려온 피터 셰닝과 울릭 카우프만 두 사람은 한 걸음 한 걸음 정상을 바라고 걸어갔다. 그들은 3~4분마다 번갈아 가며 앞장을 섰다. 러셀(뒷사람이 걷기 쉽도록 앞선 사람이 눈을 밟아 다짐)을 하기 위해서였다.
칼날 같은 바람을 뚫고 얼음 덮인 바위를 조심조심 디디며 그들은 오르고 또 올랐다. 마침내 오후 3시. 그들은 히든 피크 꼭대기에 올라섰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둘레에는 넋을 잃을 정도로 장엄한 경치가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의 주변을 카라코람 히말라야의 주봉(主峯)인 K2를 비롯해 가셔브룸 Ⅱ와 브로드 피크가 7,000m짜리 봉우리들을 거느린 채 우뚝우뚝 둘러싸고 있었다.
1시간 동안 거기서 머무르던 두 사람은 밤 9시에 제5 캠프로 돌아왔다. 다음날 제2조 3명이 다시 도전했으나 행운은 더 이상 따르지 않았다. 엄청난 눈과 회오리바람을 만나 그대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 우리나라의 기록은 * 1990년 / 박현상 초등 [네이버 지식백과] 대국의 체면을 가까스로 지키다 - '히든 피크'를 찾아낸 피터 셰닝, 울릭 카우프만(1958년) (세계 탐험사 100장면, 2002.7.18., 이병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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