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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 믿음
요 6:28-35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30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 기록된 바 하늘에서 그들에게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34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28-35 /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30-31) 그들이 다시 말하였다. `만일 당신이 메시야이신 것을 우리가 믿기를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더 많은 표적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조상들이 광야에 있던 때처럼 날마다 필요한 음식문제를 해결해 주십시오. ㄱ) `우리의 조상들이 배가 고프면 주께서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다'고 한 성경 말씀처럼 말입니다.' 32)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그들에게 떡을 내려 준 것은 모세가 아니라 내 아버지이시다. 이제 아버지께서는 하늘로부터 참된 떡을 너희에게 내려 주신다. 33) 하나님께서 주시는 떡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선생님, 그 떡을 날마다 우리에게 주십시오' 하고 그들이 말하였다. 35)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내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 되라는 가르침에 무리는 어떻게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 지를 묻습니다. 말씀에 반응을 보이는 것은 일단 첫 관문을 통과한 셈입니다.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28-29) 가장 중요하고 근원적인 질문은 이유를 묻는 것입니다. 무리가 이유를 물었다면 보다 직접적인 복음의 내용이 전달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무리의 질문은 이유가 아니라 ‘어떻게’라는 방법이었습니다. ‘어떻게’는 ‘왜’가 해결된 사람이 묻는 질문이어야 했습니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사람들은 어려워했고(6:60), 결국 예수님의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6:66).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어떻게’를 묻는 질문으로 인해 예수님의 다음 메시지에 대한 길을 텄다는 것으로도 다행입니다. 이어지는 예수님의 답변은 하나님의 일이란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습니다.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가르침은 왜를 묻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이 주시는 지혜로운 답변, 우문현답이라 할 수 있습니다.
표적이 무엇이니이까(30-31) 무리들은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며 믿음의 표적을 요구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질문이 한 단계 깊어진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이 먹었던 기적의 떡과 물고기가 무엇이었냐는 것입니다. 그들이 생각해 낸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광야에 내린 만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영도할 메시야의 증거가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결 깊어진 질문이지만 여전히 자신들이 입으로 씹어 먹은 육의 떡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질문에는, 정치적이라는 육적 떡과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메시야이길 바라는 마음이 반영된 것입니다.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32-35) 지혜나 표적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한 것을 근거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면 굳이 믿음이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혜나 표적은 믿음 이후에 믿음을 견고하게 하는 유산들입니다. 무리들이 모세의 표적을 구하는 무리들에게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는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만나도 일시적이고 썩어질 양식이라는 한계를 그어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복음의 시대에 주시는 참 떡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라는 영적인 비밀을 풀어주십니다. 하지만 무리들은 이것조차도 육적인 떡으로 받아들여 그 떡을 계속해서 달라고 요구합니다. 영적인 지식은 일단 믿음의 자리에 서 있지 않다면 올바른 이해가 어렵습니다.
적용: 떡을 구하며 계속 주님을 쫓던 이들과 모세는 아침마다 만나를 주셨음을 상기하며 예수님의 도우심을 촉구합니다. 예수님은 모세가 준 만나를 하나님께서 주신 것임을 설명하고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을 생명의 떡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셨습니다. 매일매일 생명이신 예수님으로 살고 있는지요?
떠돌이 땜장이의 아들로 태어나 빈민 농촌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습니다. 아이는 열심히 책을 읽으며 꿈을 키워 존 밀턴과 함께 영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는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천로역정〉의 작가 존 버니언(1628-1688)입니다. 그는 인생이 꽃필 33세 때 종교재판에 의해 투옥돼 12년간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가장 고통스러운 기간에 가장 빛나는 문학의 업적을 이루었습니다. <천로역정은 이때 쓰여진 것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렇게 찾아다녔던 보물을 고통의 감옥 안에서 찾을 수 있었다."
< 설 교 >
하나님의 일
이종윤 목사
요한복음 6장 28-29, 빌레몬서 1장 1-3, 8-18절
세계의 역사 속에는 당대의 명인들이 남긴 유명한 명언들이 있습니다. 로마의 씨저는 고울(Gaul)에서 적들을 만났을 때 “Veni, Vedi,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는 명언을, 영국의 처칠은 2차 세계대전 때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후 국민들에게 “나는 안일한 날이나 승리를 제공할 수 없다. 오히려 지금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피와 고통과 땀과 눈물이다”라는 ‘고통분담’이라는 명언을, 미국의 맥아더 장군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낸 후 함선위에서의 연설에서 “결국 오늘의 문제는 군사의 문제가 아닌 경제의 문제이고 경제의 문제가 아닌 신학의 문제이다.”라는 유명한 명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더욱 유명한 말씀들이 많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의 기적을 목격한 이들이 가버나움에 계신 예수님을 찾아와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까”(28절)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29절)라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Ⅰ. 믿음이냐 행함이냐(faith or works)
예수님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27절)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잘 이해를 못하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미 무엇인가를 하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믿으라고 하십니다. 빌립보 감옥의 간수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라고 물었을 때, 사도바울은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고 간수에게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그를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한다는 생각은 포기하시고 우리자신을 주님의 손에 의탁해야 합니다.
Ⅱ. 인간의 공로(Human works)
자신을 주님의 손에 맡긴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사람들은 구주 예수님보다 자신의 공력을 더 의뢰하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늘 ‘내가 이런 일을 했기 때문에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한행위 없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을까? 없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선해야 합니까? 조금도 흠이 없이 완전해야 합니다. 완전에서 조금만 모자래도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시켜 드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에서는 아무도 완전하지는 못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완전하신 성품만을 우리에게 제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죄를 예수님께 맡기셨으며, 예수님은 그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믿으라고 하시고,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것을 받아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이는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부금, 헌금을 많이 바치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주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공로로는 할 수 없습니다. 이 진리를 성령에 의해 깨닫게 되면 우리는 주님을 붙잡고 믿게 됩니다.
Ⅲ. 그것을 내 앞에서 계산하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빌레몬서에서 나오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였습니다. 오네시모는 주인인 빌레몬의 물건을 가지고 로마로 도망한 자입니다. 이러한 오네시모를 사도바울은 로마의 감옥에서 만나게 되며, 오네시모를 전도하여 예수님을 믿게 하고 주인인 빌레몬에게 되돌려 보내며 빌레몬에게 쓴 편지에서 “갇힌 자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10절)고 했으며, “오네시모가 네게 빚진 것이 있다면 그것을 내 앞으로 계산하라”(18절)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빌레몬은 하나님의 형상이요, 바울은 예수님의 형상이요, 우리는 오네시모와 같은 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맺는 말
우리가 이 세상에서 행한 것을 다 그릇된 행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예, 영광, 순종하는 일, 예배를 훔치고 오네시모처럼 도망쳤을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빚 갚을 방법도 빌 수 있는 기회도 전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께 나아가는 길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아버지하나님께 이들이 빚진 것이 있다면 내게로 계산하십시요”라고 우리를 위해 간청합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아버지 앞에 설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약속의 말씀이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요 6:28-40 / 이재철 목사
♬ 심령이 가난한 자는 ♬
심령이 가난한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요
애통 하는 자는 복 있네 위로를 받을 것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기업으로 받겠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저희 배 부를 것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 받겠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컫네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자 천국이 저희 것이라
내게도 주소서 내가 복을 받기 원하네
오 내 주여 주소서 아멘
영국의 찰스 프라이스 목사님의 저서 중 “예수님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라는 책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내가 뭔가 하겠다’라는 생각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요 15:4-5절 말씀에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리라 하는 것은 가지인 우리가 힘을 써서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뿌리에서 영양분과 수분이 공급되어 가지에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가지인 우리는 스스로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원줄기에 바짝 붙어있으려고 노력하고 힘써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실패합니다. 그 전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어떤 일을 행했는지를 발견하십시오.
유대인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 일을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그래서 쉽게 지치고 무너지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 하나님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28-29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쉽게 지치고 결실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내 인생의 주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일입니다.
왜 예수님을 믿으면서 기쁨이 없을까요? 왜 하나님 일을 하면서 쉽게 지칠까요?
자기 힘과 열심으로 열매를 맺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붙어 있는 시간이 있을 때 하나님이 일하시고 열매를 맺습니다.
★ 주님을 의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 염려가 줄어들고 주님의 평강이 임합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사도바울은 죽을 고비가 많았으나 평강을 잃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빌 4:6-7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우리는 내일을 염려하고, 내가 할 수 없는 것 가지고 염려합니다.
내일 일을 주님께 맡기십시오. 내일을 염려하면 오늘을 잃어버립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선을 다하지만 내가 할 수 없는 것은 주님께 맡기십시오.
㉡ 하나님이 내 생명을 끝까지 지켜준다는 확신이 생깁니다.(37절)
요 10:28-29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 나를 왜 이 땅에 보내셨는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40절)
생명을 살려내기 위해 우리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생명의 떡 예수 그리스도
요 6:39-40 / 이준행 목사
요 6:29-40절
우리나라 사람들의 장점이면서 단점인 공통점 중의 하나는 ‘빨리빨리 정신’입니다. 외국을 여행하다보면 한국말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도 ‘빨리빨리’라는 단어 정도는 압니다. 세계인들은 요즈음 ‘빨리빨리 정신’을 배우러 한국을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을 나타내는 공통점들이 있습니다.
1. 계단을 두 단씩 오릅니다. 지하철을 탈 때 에스컬레이터에 가만히 서 있지 못합니다.
2. 자판기에서 커피가 다 나오기도 전에 컵을 잡고, 고개 숙이고 쳐다봅니다.
3. 길가다 깡통 따위가 보이면 발로 찹니다.
4. 전철에서 내리면 뛰어갑니다. 먼저 출구를 빠져나와야 마음이 편합니다.
5. 택시를 타고 갈 때 창밖의 아름다움은 보지 않고 미터기만 보고 있습니다.
6. 자판기에서 거스름 돈 뺄 때 레버를 2번 이상 돌리거나 누릅니다.
하여튼 ‘빨리빨리 정신’은 단점이면서 또한 장점입니다. 세계선교도 다른 나라 선교사가 한 교회 개척할 때 한국 선교사는 다섯 교회 정도 개척합니다. 선교사들이 힘들어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다른 나라 문화권에 있는 사람과 동역하는 문제입니다. 선교사들은 빨리빨리 하는데, 동역하는 문화권의 사람들이 천천히 하기 때문에 속이 터지려 합니다. 글씨를 읽어도 속독법까지 개발해서 빨리 읽습니다. 자격증 따는 데도 속성반이 있습니다. 선교사 훈련도 속성 과정이 있습니다. 빨리 훈련 끝내고 선교하러 가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빨리 한다고 해서 하나님 일을 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고 분명하게 아는 일이 중요합니다.
29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하나님의 일은 간단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메시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깨닫게 된 다섯 마디를 가르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을 하는 것보다 낫다는 말을 언급했습니다. 교회가 깨닫고 가르쳐야할 다섯 마디 단어는 “예수스(예수) 크리스토스(그리스도) 데오스(하나님) 휘오스(아들) 소테리아스(구세주, 구원하신 주님)” 이 다섯 단어입니다. 이 다섯 단어의 첫 알파벳으로 ιχθυς(익투스)라는 글자를 만들었습니다. ‘물고기’라는 단어입니다. 익투스(물고기)는 ‘예수는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입니다.’를 뜻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신앙고백이 되었습니다. 핍박이 다가올 때도 물고기를 그리며 그리스도에게 속한 신앙인임을 확인했으며 이 복음으로 사도행전을 열어갔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속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 공동체이다” 이러한 자부심으로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 이 사실을 알면 우리의 삶이 달라집니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인생의 목적이 보입니다. 교회가 이 말씀을 붙들면 복음적인 교회가 됩니다. 교회가 이 말씀을 붙들면 서로 사랑하게 됩니다. 교회가 이 말씀을 붙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이요, 십자가 정신이요, 하나님의 일입니다.
30절, 그들이 묻되 그러면 우리가 보고 당신을 믿도록 행하시는 표적이 무엇이니이까? 하시는 일이 무엇이니이까?
31절, 기록된 바 하늘에서 떡을 주어 먹게 하였다 함과 같이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나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셨다. 이 사실을 믿어라.”고 말씀하셨더니 그들이 동의하지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제도를 지키는 일은 할 수 있지만 예수를 그리스도라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인 것은 믿지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질문합니다.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표적이 무엇입니까? 무슨 일을 하십니까?”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들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는 표적을 두 눈으로 생생히 보았고, 너무 흥분해서 밤새도록 노래하고 떠들었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줄 표적은 좋아하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우리 주님으로 믿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또 질문합니다. “표적을 보여 주세요” 동기가 잘못된 사람들은 표적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또 표적을 보려고 배 타고, 고속버스 타고 표적이 있다는 곳으로 찾아갑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표적을 따르는 것입니다.
만나 이야기 아시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먹을 것이 없었습니다. 배가 고파서 힘들어 할 때에 하늘로부터 먹을 것이 내려왔습니다. “이것이 무엇이냐?(만후)” 이런 감동이 담긴 히브리말을 따라서 만나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무리가 예수님께 요구합니다.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어제 하루 표적으로는 안 됩니다. 만나는 40년 동안 계속 내렸습니다. 앞으로도 날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서 먹을 것을 주시고 또 주시면 당신을 믿어 드리겠습니다.” 요따위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알기는 똑 소리 나게 잘 압니다. 성경말씀 들이대며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만나를 계속 내려주었을 때 뭐라고 했습니까? 처음에는 표적을 보고 감격했습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은혜냐?”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표적이 시시해졌습니다. “이런 시시한 표적 말고 좀 더 센 표적은 없습니까? 마늘과 양념, 고기는 내려주지 않고 왜 이 하찮은 만나만 내려주십니까?”
이스라엘 민족을 버리지도 아니하시고, 떠나지도 아니하시며, 걸음마다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고 계속 표적만 요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불 뱀을 보내셔서 물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후손들이 불 뱀에게 물려죽은 사실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렸습니다. 광야에서 표적을 구한 세대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온 무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은혜는 경험했으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께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3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어주십니다. “광야에서 너희에게 주신 만나가 참 떡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것이 참 떡이다.” 세상에서 겪고 있는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진짜 떡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 진짜 떡입니다. 세상은 영원한 생명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34절, 그들이 이르되 주여 이 떡을 항상 우리에게 주소서
예수님을 눈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관심과 시선이 이 땅에 머물러 있어서 영적인 세계가 전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살 생각만 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나님 나라의 생명이 보이겠습니까? 그들이 요구하는 이 떡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와는 상관이 없는 떡입니다.
3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36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이다. 너희들 눈앞에 서 있는 내가 생명의 떡이다. 그런데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않는다.” 떡은 양식(주식)이라는 의미입니다. 팥빙수는 먹어도 되고 먹지 않아도 되는 간식입니다. 그러나 주식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어야 됩니다. 필수입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먹어야 된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날마다 날마다 나를 먹으면 결코 주리지 않을 것이요, 날마다 날마다 나를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 비뚤어진 시각으로 보는 사람들은 문자적으로 접근합니다. 예수님께서 “거듭나야 되겠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어떻게 접근했습니까? “어떻게 어머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이런 식으로 접근했듯이 예수님께서 “내가 생명의 떡이다”라고 했더니 “어떻게 예수님을 먹습니까? 우리가 식인종입니까?” 이렇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 날 밤에 제자들에게 떡을 떼어주시면서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잔을 나누어 주면서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언약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후로 이들은 유월절만 되면 떡과 잔을 나누며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했습니다. 그때마다 비뚤어진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제자들을 비난했습니다. “식인종의 후예들이다.”
날마다 예수님을 먹으라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채우고 채우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날마다 채우고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매일 아침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그 말씀을 먹는 것입니다. 밥을 먹어야 육신이 살듯이 말씀을 먹어야 영이 삽니다. 우리 교회는 아침마다 말씀을 나누는 ‘진리를 찾는 사람들의 모임’이 있습니다. 같이 좀 나누자고 말하고 또 말해도 이를 악물고 듣지 않아요.
인류 최초로 물 위를 걸어본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폭풍과 파도가 사라져서 물 위를 걸은 것이 아닙니다. 폭풍과 파도가 여전히 있었지만 그가 주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걸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았을 때 두려워서 빠져 들어갔습니다. “살려주세요. 죽을 것 같습니다.”
믿음이란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전히 많이 있습니다. 파도도 여전히 세차게 밀려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시선이 폭풍 가운데로 걸어오시는 주님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과 점점 더 가까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날마다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이 생명의 떡을 먹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생명입니다. 예수님 없으면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체입니다.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의 길을 열어놓으셨는데, 그 길이 곧 십자가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계십니다. 문제를 바라보며 고통하는 일을 멈추고, 여전히 임마누엘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여, 우리의 눈을 열어 주옵소서.” “주여, 주님만 바라보는 인생이 되게 하소서” 이렇게 살아가는 인생이 되길 기도합니다.
기도: 여러분은 무엇을 바라보고 계십니까? 산적한 문제입니까? 풀기 너무 어려워 풀 수 없어서 좌절하며 낙심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여전히 밀려오는 폭풍이 있을지라도, 그 폭풍 사이로 걸어오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나를 구원하신 주님,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 고정시키는 순간 놀랍고 위대한 변화가 시작될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 자
영원을 향한 네비게이션
요 6:32-36,55-56 / 이동원 목사
우리는 테레사하면 인도에서 사역한 노벨상 수여자인 마더 테레사를 먼저 연상할 것입니다. 그러나 주후1500년대를 살았던 분 가운데 아빌라의 테레사(1515-1582)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르틴 루터의 종교 개혁직후 스페인에서 수도원 개혁에 헌신했던 여성 지도자이었습니다. 그녀는 카톨릭 교회안에 머물며 특히 수도원의 개혁만이 세상의 희망이라고 믿어 개혁 사역에 헌신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본래 스페인 귀족 집안의 출신이었으나 모든 것을 버리고 아빌라는 곳에 있는 카르멜 수도원에 들어가 평생을 수도에 정진했습니다. 많은 핍박과 어려움을 경험하고 교회 지도자들에게서 조차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그녀는 결코 미소를 잃지 않았고 어떤 경우에도 세 가지 일, 기도하는 일, 시를 쓰는 일, 그리고 찬미하는 일을 쉬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녀가 남긴 전 재산은 짧은 세 문단으로 된 시 한편이었다고 합니다. 그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어느 것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말라/무엇에도 걱정마지 말라/모든 것은 지나가는 것 (2)하나님은 변치 않으시나니/인내함으로/ 모든 것을 행할 것이라 (3)하나님을 지닌 자/부족함이 없나니/하나님만으로 만족하도다(Solo Dios basta)" 그 이후 그리스도인 수도자들에게 이 고백은 최고의 갈망이 되어왔습니다. “하나님만으로 만족합니다.” 그러나 정말 오늘 우리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이 그런 선언을 하시지 않습니까? 35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정말 이 선언이 우리의 경험이고 현실이 되기 위해서 할일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내 인생의 만족이심을 고백하시기 위해 우리가 할일은 무엇이겠습니까?
1. 영원한 양식되신 그 분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먼저는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양식 자체이심을 깨닫고 발견하는 일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은사나 기적조차도 우리의 해답이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중에는 신앙의 만족을 예수님 자신에게서 찾기 보다도 예수님이 제공하시는 은사나 기적에서만 찾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끊임없이 더 자극적인 은사나 희한한 기적을 찾아 은사 집회나 기적 집회, 신유 집회에로의 방황을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저는 은사나 기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사나 기적도 인생을 만족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 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예수님께서 베풀어 주신 동기를 아십니까? 오늘 본문의 교훈은 소위 예수님의 5병2어의 기적 사건이후에 주신 교훈이었습니다. 6:26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기적은 그냥 기적(miracle)이 아니요 표적(sign)이었다는 것입니다. 싸인 간판은 간판 그 자체를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간판이 지시하는 내용을 선전하기 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당시의 사람들은 그것을 보지 못하고 기적만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의 떡을 먹고 배부르다는 사실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기적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그것이 바로 본문 35절의 선언입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는 것입니다.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떡이 필요하고 생수가 필요했던 것처럼 영적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런 참되고 영원한 양식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6:55의 선언을 들어 보십시오.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그러니까 5병2어의 기적의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의 배고픔,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 35절의 ‘나는’이란 선언의 의미는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선언이라고 일컬어집니다. “나 하나님이 곧 생명의 떡이라”는 말입니다. 그가 하나님이시기에 그는 인생의 참 만족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이 5병2어의 기적의 현장은 그 교훈을 전달하기 위한 싸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체험한 만나의 현장도 하늘에서 배고픈 인생들에게 만나가 주어지듯 배고프고 목마른 인생들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이 오심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표적의 현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만이 인생의 참된 만족이십니다. 이것이 바로 크리스마스의 메시지요 성탄의 의미인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탄생하신 장소가 어디였습니까? 베들레헴-맞습니다. 베들레헴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시나요? “떡 집”이라는 뜻입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님이 떡 집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트요 하나님의 유머가 아닌가요! 이제 중요한 것은 바로 이 베들레헴에 오신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바로 그분이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양식이심을 깨달으셔야 합니다. 발견하셔야 합니다.
2. 영원한 양식되신 그 분을 신뢰해야 합니다.
크리스마스의 사건을 모르는 사람들은 없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의 축복을 경험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적습니다. 왜 그럴까요? 크리스마스의 주인이신 예수님에게 사람들이 오지 않고 그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시 35절을 읽어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자, 어떤 사람에게 주리지 아니함과 목마르지 아니함이 약속되었습니까? ‘내게 오는 자’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 오는 자입니다. 36절을 또한 읽어 보십시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더러는 예수만이 해결이고 해답임을 인지하고 관심을 갖지만 끝내 그 분을 믿는 자리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길은 있는데 그 길을 걷지 못하고, 해답이 있는데 그 해답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니 말입니다.
1930년대의 세계 문학계의 별은 단연 영국인 작가 윌리암 서머세트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이었습니다. 1965년에 그가 91세가 되었을때 그는 인간으로서 갈망하는 모든 것을 가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부를 가지고 있었고 인기와 명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전 세계에서 로열티가 계속하여 들어오고 있었고, 그는 아직도 한 주에 평균 300여통의 펜 레터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인생의 실체는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가 죽기 전 지중해 연안에 자리잡은 환상적인 그의 집을 방문하고 돌아온 그의 조카 로빈 모옴(Robin Maugham)은 이런 글을 남깁니다. “나는 나의 아저씨 윌리가 거두어 들인 성공의 대가로 그가 누리고 있는 그의 아름다운 저택, 눈부신 정원, 그리고 값으로 환산하기 어려운 여러 가구들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은빛 접시에 그의 하인들의 시중을 받으며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그에게 이런 모든 것도 창백하고 지친 얼굴의 그에게는 그 어느 것도 의미를 주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다음날 오후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로 큰 글씨 성경을 읽고 있다가 그는 갑자기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자네가 준 성경을 읽고 있다네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란 말을. 그런데 말이야 난 늦었네. 난 실패야. 이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도대체 내가 이제 누구를 믿고 다시 인생을 시작 할 수가 있단 말인가! 난 아직 죽지 않았을 뿐이네” 죽어가면서도 해답을 앞에 두고서도 그 해답을 신뢰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의 비극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얼마나 진리입니까? “너희가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3. 영원한 양식되신 그 분과 연합해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인생의 참되고 진정한 만족은 영원한 양식되신 예수님을 발견하고 그 분을 신뢰함에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난 그분을 믿고 그 분 앞에 나아와 믿음의 삶을 살고 있음에도 왜 내 인생은 여전히 만족이 없느냐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테레사의 대답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그 분과 우리 사이에 혹시 수도관에 이상이 생기지 않았는가를 점검하셔야 합니다. 수도의 파이프 라인이 막혀 있으면 아무리 수원지에서 생명의 물이 공급되고 있어도 우리는 목을 축일수가 있습니다. 먹어야 만족하고 마셔야 만족하지 않겠습니까. 회개의 기도, 참회의 기도는 이 파이프 라인을 청소하는 것입니다. 다시 그 분과 우리 사이에 막힌 것이 없으면 생명수가 흘러 들어옵니다. 우리의 갈한 목은 축여지고 우리의 배고픔은 포만감으로 바뀔 것입니다.
회심의 결단은 순간적이지만 신앙의 결단은 결코 일회적인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을 때 주님 앞에 왔지만 우리는 오늘도 그 분 앞에 계속 나아올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내게 오는 자’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나아오는 자’(현재 분사)입니다. 계속해서 나아와 그분의 양식을 누리는 자는 한순간 그 양식이 바로 나 자신이 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떡을 먹고 그의 생수를 마시면서 우리가 바로 그 떡의 한 부분이 되고 우리가 바로 그 생수의 한 부분이 된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예부터 우리의 선배 영성가들은 그런 경험을 하나님과의 연합 혹은 일치( with God)라고 불러 왔습니다. 요6:56의 말씀이 그런 상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그래서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의 신앙 생활 혹은 기도 생활의 가장 중요한 목표를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에 두었던 것입니다.
설교의 서두에 소개한 아빌라의 테레사는 어느 날 기도의 깊은 자리에서 이런 주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네 안에 나를 가두려고 수고하지 말아라. 대신 내안에 네가 갇히도록 하여라”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저를 주님 안에 가두어 주십시오”하고 응답하자마자 그녀는 즉각적으로 일종의 영적 자유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때부터 그녀는 정말 누에고치를 벗어버린 나비처럼 날개를 펴고 주님의 깊은 임재를 향해 날아가기를 시작했다고 고백합니다. 그녀가 쓴 걸작인 ‘영혼의 성’(내면의 성, Interior Castle)은 주님이 계신 궁방 깊은 곳으로 나아가 우리 영혼이 주님과 결합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도 아직 내 인생이 불만으로 채워져 있다면 밖에서 원인을 찾지 마십시오. 다른 누구 때문에 다른 무엇 때문에 내 영혼이 메마르고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의 연합이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불완전함을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의지적으로라도 기도의 무릎을 꿇어야 한다고 그녀는 충고합니다. 그리고 무릎 꿇은 그 자리에서 우리는 무엇보다 주의 은혜, 주의 자비를 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런 때에 ‘예수 기도’(Jesus Prayer)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여, 죄인 된 저를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기도해 보십시오.
아빌라의 테레사는 이 연합이 어느 정도 깊어지게 되면 우리는 주님의 은총의 도우심으로 영혼의 어둔 밤을 벗어나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런 어느 한 순간 우리는 갑작스런 성령의 소낙비내림, 혹은 은혜의 주권적인 부으심을 경험하게 된다고 고백합니다. 그녀는 한때 이런 기도의 깊은 자리에서 이렇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고 기록합니다. “주님, 이제 더 이상 안주셔도 됩니다. 아무 것도 안 주셔도 됩니다. 되었습니다. 이제, 전 주님만으로 만족합니다.” 이런 은혜가 사모되지 않으십니까? 이런 은혜의 부으심이 기다려지지 않으십니까? 온갖 불만으로 가득 찬 시대, 참된 만족함을 위해 이제 우리의 참되고 영원한 양식되신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십시오. 그 분을 깊이 새롭게 만나 보십시오. 성탄과 송년의 계절, 할일이 많으시겠지만, 그 무엇보다 주님과의 깊은 만남의 갈망으로 새해를 계획해 보십시오. 성탄의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양식이십니다. 성탄의 주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만족이십니다. Solo Dios basta! Merry Christmas!
내 영혼이 받는 복
요 6:32-35 / 이정익 목사
오늘은 전도주일입니다.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생전 처음 교회에 나오신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동안 쉬었다 다시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억지로 끌려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또 나오려고 했는데 이 기회에 인도를 받고 나오신 분도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를 환영합니다. 오늘이 여러분들 인생에 가장 행복하고 최고로 복된 발걸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처음 신앙생활 할 때 어떻게 시작했는지 동기가 궁금합니다. 아마 순순히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공통된 몇 가지 동기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교회에 구경 갔다가 신앙생활 시작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과론이지만 참 좋은 구경을 간 셈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연 같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성봉 목사님이 부흥회를 하실 때 얼마나 재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구경꾼이 많이 몰려왔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구경하려 와서 회개하고 목사가 된 분들이 여러분 있습니다. 어떤 분은 부흥회를 방해하려고 야릇한 옷을 입고 갔다가 회개하고 후에 목사가 되어 총회장 까지 된 분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구경도 그런 구경은 참 소중한 구경입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도 언제나 구경꾼들이 몰려 다녔습니다. 중풍병자가 들것에 실려 예수님을 찾아갔을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서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지붕을 뚫고 내려 고침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은 거의 다 구경꾼들입니다. 또 예수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실 때 그곳에 5천명이 모였다고 했습니다. 그곳에 모인 여자 아이 노인들을 포함하면 만 오천 명도 넘을 것입니다. 그들은 왜 모두 굶은 채 광야까지 따라 나갔습니까. 그것은 구경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구경꾼들이었습니다. 구경으로 나왔어도 좋습니다. 그래서 믿게 되었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이 동기가 참 중요합니다. 아이들이 크면 부모에게 어떻게 만나서 결혼했느냐고 물어옵니다. 그때 부모가 결혼하게 된 동기를 대답해 주어야 하는데 말하기 곤란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오다가다 만나서 결혼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동기가 참 중요한 것입니다.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한 달간 기도한 후에 하나님이 보내주셔서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당당한 대답입니까. 거기에 경건함이 있고 엄숙함이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크면 또 묻습니다. “나는 어떻게 해서 태어나게 되었습니까.” 그때 대답도 “어떻게 하다 보니까 네가 생기게 되었단다.”하고 대답한다면 동기가 참 애매모호 합니다. 그런데 “너를 낳기 위해서 한 달간 기도로 준비한 후에 네가 태어났단다.”하고 말해 줄 수 있다면 그 또한 얼마나 엄숙한 대답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떻게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구경 갔다가 믿게 되었다면 믿음의 동기가 신선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날인가 내 마음이 강하게 끌려 스스로 교회에 나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 동기야 말로 참 강렬한 인상을 주게 됩니다.
또 “얻어먹는 재미로 교회가 나가게 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 교회는 주는 것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얻어먹는 재미로 교회에 가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선교사들이 구제품을 가져와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탄 때가 되면 먹을 것을 주었고 상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주어서 오게하는 전도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주는 것은 효과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지극히 일시적인 방법입니다. 그 생명이 길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교회는 구제사업이나 하는 자선단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영혼을 구원하는 목적에 충실해야 합니다. 영혼구원은 구제로 자선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선교사들이 얼마 후 이 방법이 큰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중단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 주변에 구경꾼들이 많았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 그곳에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모여 구경하고 떡을 얻어먹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그 같은 기적을 보고 떡을 얻어먹고 나서 잘 믿었느냐 하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 어느 누구도 나타나서 예수께 힘이 되어주질 못했습니다. 각종 병자들이 기적같이 예수께로부터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고침 받는 기적을 곁에서 구경한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그런 기적을 보았으니 얼마나 잘 믿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 누구도 예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 나서서 도움이 되어 준 사람들이 없습니다. 오히려 기적이나 먹을 것과는 거리가 먼 가난했던 여인들은 언제나 예수님 곁에서 말씀을 듣고 따랐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의 길과 십자가의 길에서 끝까지 예수께 힘이 되어주고 함께 했습니다. 얻어먹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또 “사람을 보고 믿는 믿음”도 있습니다.
제자들은 인간 예수를 보고 믿었습니다. 그에게 감추어 있는 신성은 보질 못했습니다. 그래서 기적을 행하고 호령하시는 예수님의 모습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은 인간 예수께 기대를 갖고 미련을 갖게되었습니다. 이 예수께서 출세하고 호령하는 자리에 앉게 되는 날에 대해서 기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께서 죽게 되므로 기대가 무너지게 되자 배신행위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인간 예수만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정치적인 예수로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를 볼 때 어딘지 권위가 있고 권세가 있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에게 혹시 하고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가 빌라도 앞에 서 있는 그 무력한 모습을 보고는 어제의 그 예수가 아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실망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입니다. 모두 사람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고 믿는 신앙은 신앙도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도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 하다가 실족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오늘도 목사를 보고 믿다가 실망하고 신앙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가 완전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그럴 줄 몰랐다고 실망하고 신앙에서 낙오되는 분들이 있습니다. 장로보고 천사인줄 알았다가 실망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신자들을 보고 실망해서 신앙에서 떨어져 나간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실망했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신앙의 기준, 푯대, 목적은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을 보고 믿는 신앙은 가장 취약한 믿음입니다. 사람을 보고 믿으면 반드시 상처받고 실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무엇보다도 목적이 분명” 해야 생명이 길고 영적인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나는 영적인 양식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내게 오는 자는 누구든지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이 예수를 믿는 이유이고 목적입니다. 얼마나 분명합니까. 이 목적이 분명하면 사람들 때문에 상처받고 낙오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신앙인들이 이 본질이 애매한 채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여전히 사람들 때문에 흔들립니다. 생활이 어렵다고 흔들립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보기 싫기만 해도 교회에 다니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신앙이 무슨 깊이가 있고 내용이 있고 무게가 있겠습니까.
신앙생활에서 주어지는 시험의 요인이 몇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 때문에 시험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도 완전할 수도 없지만 신앙의 대상에서 중심이 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을 극복해야 신앙이 깊어질 수 있습니다. 또 너무 가난한 것입니다. 생활이 너무 가난하면 영적 생활에 무관심해집니다. 사람이 먹고 살기에 급급하면 영적생활에 관심가질 여유가 없어집니다. 또 너무 배부른 것도 문제입니다. 사람이 너무 배가 부르면 아쉬운 것이 없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 세계에 대해서 관심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리고 육신의 삶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적 타락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생활이 좀 나아지니까 늘어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적타락입니다. 성한 곳이 없습니다. 사람이 생활이 나아지면 이렇게 생각과 관심이 몸에 집중되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는 현실주의입니다. 현재의 삶에 너무 집착하게 됩니다. 사람이 너무 현실에 집착하게 되면 저 높은 곳에 관심이 없어집니다. 보이지도 않습니다. 오직 땅 아래에 집중하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오늘 현대인들의 결점이라면 영적 세계에 무관심하고 아래에 관심을 집중하고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것이 너무 지나칩니다. 건강이 우상입니다. 몸에 좋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살 빼는 일에 생명을 겁니다. 물질 모으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만하면 살만도 한데 더 가지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니까 영적세계에는 자연 둔감해지고 멀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바닷가를 거닐다가 요술 램프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몸에 문질러 보니까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거인이 나타났습니다. “주인님 무엇을 도와드릴 까요, 소원이 무엇입니까,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만 요구하십시오.” 구할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은 1년 후 신문을 구해달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1년 후 신문을 보면 주식상황이 나타날 것이니 그것을 보고 미리 투자해서 많은 돈을 벌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년 후 신문이 왔습니다. 신문에 나타난 주식시세표를 보면서 값이 오른 것을 열심히 적고 있다가 얼핏 보니까 부고란 이 눈에 띄었습니다. 그래서 보니까 그곳에 자신이 죽었다고 부고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사람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오늘 사람들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관심을 갖는데 영적문제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참 불행한 일입니다. 모두 허상을 좇고 사느라고 정신이 없이 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좀더 대우가 좋은 곳이 나타나면 미련 없이 일터를 버리고 사람을 배반하고 떠나버립니다. 모두 약게 세상을 살아가려 애를 씁니다. 이익이 되는 일은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쟁취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다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말에 약은 고양이 밤눈 어둡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그래서 실족하고 실패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을 여행했습니다. 지옥하면 언뜻 떠오르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처참한 곳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입니다. 그런데 지옥에 여행을 가 보니까 아주 좋았습니다. 잘 먹고 편안하게 지내고 세상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그래서 돌아가 곧 바로 지옥에 이민을 신청했습니다. 그리고 지옥에 다시 가서 보니까 또 딴판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엉망이었습니다. 그래서 항의했습니다. “지난번 왔을 때는 그렇게 좋았는데 지금은 왜 이러냐!” 그랬더니 대답하기를 “지난번 왔던 곳은 관광코스였다.”고 하더랍니다. 무엇이나 약게 살겠다는 사람들은 결국 이렇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내 영혼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때 거기서 힘이 주어지고 능력이 주어지고 용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우리는 믿음을 강하게 가져야 합니다. 예수가 내 중심에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믿음들은 대부분 형식적인 믿음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이 오랜 역사는 있는데도 깊이가 없고 문제가 발생했을 때 내게 힘이 되어주질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오늘 신앙인들을 보면 말로는 믿는 다고 합니다. 그런데 속으로는 사실 자신을 과신하고 믿고 살아갑니다. 젊음을 믿고 건강을 믿고 재물을 믿고 자신의 능력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그 믿음이 오죽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의 것에서 무엇을 믿을 것이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의 믿음이 좋은 줄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어느 날 자신의 그 믿음이 허상을 좇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는 날을 맞이하게 됩니다. 어느 날 큰 사고를 당합니다. 사업에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암에 걸렸습니다. 그때 그 믿음이 산산이 깨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가지고 있었던 자신의 믿음이 이 순간에 아무런 작용이 안 된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는 순간 그 허상에서 깨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되뇌는 말이 “나는 그동안 무엇을 믿었단 말인가”하는 자조의 물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이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주리지 않고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다“하고 말씀합니다. 그 말은 영적 복을 받으라는 말입니다. 거기서 힘이 나오고 용기가 주어지고 쉼이 주어지고 은혜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주어지는 가장 큰 복이 있습니다. 그것이 성령의 아주 강한 인도를 받는 축복입니다. 이것이 복중에서 최고의 복입니다. 그때부터 하나님의 영이 나를 도우시고 인도하시고 배경이 되시고 장래를 염려해 주시는 은혜를 입게 됩니다. 그때부터 성령은 나에게 든든한 힘과 빽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존 번연은 영국 이 낳은 청교도이고 신앙자이고 극작가입니다. 이 분이 왕으로부터 미움을 사서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느 날 옥사장이 번연에게 “밤에 조용히 집에 가서 쉬고 오라.“고 자상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번연은 조용히 집에 가기 위해서 나갔다가 조금 후에 다시 감옥으로 돌아왔습니다. 놀란 옥사장이 “왜 벌써왔느냐?”고 물으니 번연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집에 가서 쉬는 것이 성령의 뜻이 아닌 것 같아 다시 돌아왔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리고 잠시 후 왕이 번연히 옥에 잘 있는지 보려고 확인 차 옥에 찾아왔다가 옥에 있는 것을 확인한 왕은 곧 바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옥사장은 간이 콩알만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번연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동함으로 나도 살고 당신도 살아났습니다, 이제부터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동하시되 마음대로 집에 갔다 오고 싶으면 갔다 오십시요.“하고 말했습니다. 얼마나 확신 있는 삶입니까. 이것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면 나의 미래도 종말까지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고 걱정하는 문제가 미래의 문제입니다. 오늘 우리의 미래가 얼마나 불투명합니까. 내일의 문제, 내일 나의 운명의 문제, 얼마나 불투명한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늘 사람들이 두렵고 자신 없고 걱정되고 불안해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은 그런 불투명을 모두 일소해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미래와 장래와 운명까지도 담당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이 여러분의 종말의 날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오늘 천국에 갈 자신이 있습니까. 없는 사람은 두려움에 떨 것이고 자신이 있는 사람은 그날 당당할 것입니다. 종말의 날에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이 진정한 신앙인입니다. 그 사람이 승리자입니다. 우리는 그런 신앙인으로 살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