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67
3월19일[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요셉 대축일/사순 제2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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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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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K-Wel37R_CM
[서울대교구 김동선 요한 마리아 비안네(청소년국 초등부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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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여행객들에게는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에게는 감사가 전부입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요셉 성인의 이름 뒤에는 몇 가지 중요한 닉네임이 붙습니다. 마리아의 아내, 예수님의 양부, 나자렛 성가정의 수호자, 임종자들의 수호자, 성교회의 보호자...
구세사 안에서 요셉 성인의 공로와 역할이 얼마나 지대했던지 미사 경문 내 가장 중요한 부분인 성찬 예식 내에 그분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그 배필이신 성 요셉과...”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면 마리아 못지 않게 요셉 성인의 삶도 참으로 기구하고 혹독했습니다. 그가 꿈꾸고 있었던 평범하고도 단란한 결혼 생활은 하느님의 초대로 인해 일찌감치 물건너 갔습니다.
어찌보면 그는 닭쫓던 개처럼, 낙동강 오리알 같은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결혼한 것도 아니고 결혼 안한 것도 아니고. 그는 하느님으로 인해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기본적인 욕구나 희망이 모두 차단되었습니다. 대신 그에게 성가정을 위한 봉사와 헌신, 침묵만이 요구되었습니다.
제가 만일 요셉 처지였다면, 입만 열면 불평불만에 하소연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과묵했습니다. 충실했습니다. 하느님의 요청에 흔쾌히 순응하며, 그렇게 순탄치 않은 신앙 여정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요셉 성인에게서 강하게 풍기는 덕행은 순례자로서의 충실함입니다. 그의 모습에서 성조 아브라함의 신앙을 느낍니다. 일어나라니 즉시 일어났습니다. 떠나라니 군말 없이 떠났습니다.
요셉 성인은 부단히 자신의 의지와 계획을 접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추구했습니다. 언제나 한치앞을 내다볼수 없는 안갯속같은 여정이었지만, 기쁜 마음, 감사한 마음으로 하루 하루 그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여행객은 요구가 많지만, 순례자는 항상 감사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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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VPGq1QpYn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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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의 성 요셉: 고민을 오래 하지 말고 회의도 길게 하지 말라>
지금까지 성 요셉의 의로움과 정결함에는 많은 강론을 하였으나, 성 요셉의 기도라는 부분에서는 크게 묵상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는 기도가 필수적이고, 성 요셉에게서도 그 특징은 여지없이 나타납니다.
우선 기도하지 않는, 혹은 잘못된 기도를 하는 이들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고민을 오래 한다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단호합니다. 일생일대의 결정 앞에서 성모님은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 하셨고, 예수님은 “제 뜻이 아니라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며 목숨을 내어주셨습니다.
그러나 자아가 강한 사람은 언제나 우유부단하고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하나를 결정하는 데도 엄청난 시간이 소비됩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를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각자가 기도하고 결정이 된 상태에서 와야 하고 책임자는 기도를 통해 빠르게 나아갈 길을 확정지어야 합니다.
전쟁이나 기업과 같은 경쟁 상황에서 빠른 판단력은 필수적입니다. 빠른 판단력이 사라지는 이유는 신앙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나폴레옹은 대관식 이후부터 자신감을 잃기 시작하였습니다.
나폴레옹은 1804년,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성대하게 거행된 대관식에서 스스로의 손으로 황제의 왕관을 머리에 얹었습니다. 그 자리에 교황 비오 7세가 있었지만, 나폴레옹은 하느님의 축복을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로부터 11년 후인 1815년 6월 18일,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그러한 교만함과 홀로 결정해야 하는 지도자의 외로움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뼈아프게 경험하게 됩니다.
워털루 전투는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와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른바 ‘백일천하’의 마지막 전투였습니다. 당시 나폴레옹의 군대는 약 7만 3천 명이었고, 상대편 연합군은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과 네덜란드, 벨기에군 연합 6만 8천 명, 그리고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5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전략은 이 양쪽 군대가 합류하기 전에 신속히 공격하여 각개격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전투 당일인 6월 18일, 새벽부터 내린 비로 전장이 심하게 질척거렸고, 포병과 기병의 이동에 불리하다고 판단한 나폴레옹은 오전 6시부터 공격을 망설이기 시작했습니다. 측근의 많은 장군들은 즉각 공격할 것을 조언했지만, 모든 결정을 홀로 내려야 하는 황제였던 그는 쉽게 결단하지 못한 채 고민을 이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은 조금 더 좋은 환경이 오기를 기다리며 공격 명령을 계속 미루었고, 그렇게 결정적인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습니다.
나폴레옹은 무려 6시간이라는 귀중한 시간을 낭비한 끝에, 오전 11시가 넘어서야 첫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결정의 지연은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공격이 늦어지는 동안, 18km 떨어진 곳에 있던 프로이센군 5만 명은 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확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공격을 지연한 사이, 프로이센군은 오후 4시경부터 전장에 도착하기 시작했고, 이후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했습니다. 결국 저녁 7시가 될 무렵에는 영국군과 프로이센군의 병력이 완벽히 합류하여 총 1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습니다. 반면, 전투를 너무 늦게 시작한 나폴레옹의 군대는 이미 피로와 혼란으로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나폴레옹은 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했고, 단 하루의 우유부단함으로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프랑스 제국 전체를 몰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는 다시 세인트헬레나 섬으로 추방되었고, 쓸쓸히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만약 그가 홀로 모든 결정을 내려야 하는 외로운 왕좌가 아니라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신중하지만 빠르게 결단했다면,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눈치채고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이것은 ‘묵상’기도입니다. 마리아의 잘못을 자기가 다 끌어안겠다는 엄청난 결단입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여기까지는 도달할 수 있지만, 관상의 단계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보지 못합니다. 바로 그 잉태가 곧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보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요셉의 꿈에 나타나 마리아와 결혼하라고 하십니다. 요셉은 그렇게 합니다. 이 외에도 헤로데가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고 할 때 꿈을 꾸고는 바로 짐을 싸서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다시 돌아올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기도할 줄 모르는 교만한 사람이었다면, 성모님과 결혼하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결혼했다면 시간을 끌다가 메시아를 잃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기도하는 이는 모두 결단력이 좋고 빠릅니다.
1805년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아시시에서 태어난 프란치스코는 원래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부족함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기사로서의 명예와 세상의 부귀영화를 꿈꾸며 살았지만, 전쟁터에서의 패배와 포로 생활을 통해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1205년 어느 날, 아시시 외곽에 버려진 산 다미아노 성당에서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깊은 기도에 잠겨 있던 프란치스코는, “프란치스코야, 가서 무너져가는 나의 집을 고쳐라.”라는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순간 프란치스코는 망설이거나 우물쭈물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 즉시 자신의 화려한 옷을 벗고 거친 옷을 입었으며, 아버지의 재물을 포기하고 온전히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는 돌 하나하나를 손수 쌓아 올리며 산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하기 시작했고, 그의 단호한 결단에 감동한 동료들이 그를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 무너져가는 당신 집은 결국 탐욕으로 기울어져 가는 교회를 재건하라는 것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저 작은 하느님의 집은 다미나노 경당을 재건하기 시작한 그의 결단력은 바로 요셉 성인과 같은 기도에서 온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더 데레사도 있습니다. 그녀는 1929년 열아홉 살의 나이에 인도의 콜카타로 파견되어 로레토 수녀회 소속으로 가르치는 일을 하며 평범한 수도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1946년 9월 10일, 데레사 수녀는 다르질링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깊은 묵상 중에 강력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녀에게 수도원의 울타리를 넘어 길거리의 가장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라는 소명을 명확하게 전하셨습니다.
데레사는 이 부르심을 듣고 즉시 결단을 내렸으며, 자신이 20년 가까이 지냈던 수도원과 안정된 생활을 떠나 콜카타의 빈민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곳에서 맨손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살피며, 극도의 가난 속에서도 사랑과 기쁨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결단력 있는 행동은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설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마더 데레사는 가난한 이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기고, 전 세계에 가난과 사랑의 가치를 전하며 노벨 평화상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성 프란치스코와 마더 데레사의 삶은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분명히 깨달았다면 절대로 주저하지 말고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요셉 성인과 이 성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도 삶의 중요한 순간마다 하느님께 묻고, 그분의 음성을 듣는 즉시 겸손과 용기로 결단하여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놀라운 축복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고민을 많이 하지 말고, 회의를 길게 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기도하는 분이시기에 항상 주저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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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고인이 되신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현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을 모티브로 한 두 교황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전통을 지키려는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변화를 꿈꾸는 프란치스코 교황(당시 베르골료 추기경)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단순히 두 교황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고자 하는 두 사람의 깊은 고민과 신앙의 여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교회를 지키려 했지만,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반면, 베르골료 추기경은 교회가 좀 더 가난한 이들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젊은 시절 독재 정권 아래에서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후회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가졌지만, 하느님 앞에서 같은 고민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는 전통을, 베르골료 추기경은 개혁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았습니다. 교회는 변해야 하지만, 그 변화 속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지켜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구약과 신약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드러나는 예표라면, 신약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현장입니다. 오늘 저는 구약과 신약에서 볼 수 있는 두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환경에서 살았지만,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먼저 구약의 요셉을 떠올려 봅시다. 그는 열한 번째 아들로 태어나 형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집트로 팔려 갔습니다. 어린 시절, 그는 하느님께서 보여주신 꿈을 믿었지만, 현실은 혹독했습니다. 종으로 팔려 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는 꿈을 해석하는 능력을 인정받아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고, 흉년으로 고통받는 가족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치려 하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고난과 시련을 통해 더 큰 계획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인생은 단순한 성공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고통과 배신 속에서도 하느님의 섭리가 함께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다소 조용한 인물입니다. 성경에 그의 말이 한마디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행동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님을 잉태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꿈속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합니다. 헤로데 왕이 아기 예수님을 해치려 하자, 또다시 꿈에서 하느님의 지시를 받고 가족을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합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라는 명을 받고 나자렛으로 가서 예수님을 양육합니다. 신약의 요셉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느님께 순종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많은 질문을 던집니다.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왜 저는 이런 시련을 겪어야 합니까?" 그러나 요셉은 묻지 않았습니다. 그는 조용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고, 그 순종을 통해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졌습니다. 구약의 요셉이 "꿈을 해석하는 자"였다면, 신약의 요셉은 "꿈을 실천하는 자"입니다. 신약의 요셉은 행동하는 신앙과 침묵 속의 순종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실천적 지혜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신약의 요셉을 통해 "가장 큰 사랑은 말보다 행동에서 나온다"라는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두 요셉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둘 다 꿈을 통해 하느님의 뜻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둘째, 둘 다 고난을 겪었지만,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셋째, 둘 다 중요한 순간에 용서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차이점도 있습니다. 구약의 요셉은 하느님의 계획을 해석하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신약의 요셉은 그 계획을 믿고 침묵 속에서 실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에도 두 요셉과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때로는 구약의 요셉처럼 고난을 겪으며 하느님의 섭리를 깨닫는 시간이 있습니다. 또 때로는 신약의 요셉처럼 조용히 순종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이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선으로 바꾸실 계획을 세우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을 하느님께 온전히 맡기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두 요셉의 이야기를 마음에 새기며, 우리도 하느님의 사랑과 구원 의지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며 고뇌하지만, 천사를 통하여 하느님의 뜻을 깨닫게 되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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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성 바오로수도회 한창현 모세 신부님]
히브리인들의 문화에서 약혼은 혼인에 포함된 중요한 과정입니다. 일단 약혼하면 남편과 아내로 불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식으로 혼인할 때까지, 적어도 일 년은 남녀가 각자 자신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자기와 함께 살지 않았던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것은, 요셉의 처지에서는 마리아가 율법에서 금하는 행동을 하였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은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라고 전합니다. 히브리인에게 ‘의롭다’는 말은 곧 율법을 곧이곧대로 지키는 것을 뜻합니다. 율법에 따르면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에 실제로 마리아에게 죄가 있는지 따져 보았어야 합니다.(신명 22,23-27 참조) 그러나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음에도 율법에 따라 마리아의 죄를 따져 묻는 대신,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기로 합니다. 어쩌면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 과정에 율법에서 금하는 죄가 있으면 어쩌나 걱정하였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천사는 이러한 요셉이 하느님 구원의 신비를 꿈에서 마주하고, 이미 자신이 하느님 구원의 역사 안에 있다고 깨달을 기회를 주셨습니다.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도 자신의 상황을 마주하지 못하고 요셉처럼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차마 용기가 없어 외면하고 있는 우리의 외적인 상황과 내적인 상태를 바라볼 기회가 온다면, 요셉 성인처럼 그 안에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자비에 겸손하게 머물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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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16.18-21.24a: 요셉은 천사가 일러준 대로 하였다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18절). 이 잉태는 신비이다. 이 잉태로 인해 요셉은 조금도 마리아의 마음을 괴롭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해결하려 한다. 약혼은 했지만, 마리아와 혼인을 하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일을 드러내어 마리아를 재판에 넘긴다면 마리아가 죽을 수도 있어서 조용히 파혼하려 했다. 이때 천사가 꿈에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20절) 하였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순결을 의심하지 않도록 그 신비를 알려준 것이다. 요셉은 의심이라는 악을 떨쳐버리고 신비라고 하는 선을 받아들였다. 요셉은 이제 마리아가 아무 죄가 없다는 것과 동정 잉태를 인정할 수 있었다. 요셉이라는 뜻은 흠잡을 데 없는 이라는 뜻이다.
천사는 또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21절) 하였다. 그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 했는데 그 뜻은 하느님께서 구원하신다, 구원자라는 뜻이다. 이는 하느님께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 이름은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분의 육에 붙여진 이름이다. 요셉은 천사에게서 계시를 받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에 따른다. 그는 마리아를 맞아들이고 기쁘게 하느님의 뜻을 이룬다. 요셉이 의롭다고 하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뜻을 채우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요셉이 하느님의 뜻을 따라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는데 협력하셨던 삶을 본받아,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에 주님의 뜻을 이루려고 노력하며 그분을 본받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바로 하느님의 뜻에 대한 올바른 응답이 되어야 한다. 요셉이 자기 뜻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였듯이, 마리아가 주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였듯이 주님의 뜻을 따르며 주님의 뜻을 따르려 노력하여야 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살면서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삶의 순간순간이, 조그마한 행위 하나하나가 하느님 구원사업에 협력하는 순간이 된다. 요셉 성인과 같이 언제나 하느님의 뜻을 충실히 이루는 우리 자신이 될 수 있도록 깨어있는 삶을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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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버리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마태 1,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마태 1,18-23)
1) 유대교에서는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관점에서 ‘자비로운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는 요셉이 ‘율법의 준수’보다 ‘자비의 실천’을 먼저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법’보다 ‘자비’가 위에 있습니다. 마태오복음 12장에 있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너희가 알았더라면, 죄 없는 이들을 단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마태 12,7)라는 말씀을 요셉과 마리아의 경우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2)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한 것은, 마리아를 ‘버리려고 한 일’이 아니라, ‘지키려고 한 일’입니다. 여기서 ‘남모르게’ 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남모르게, 즉 세상 사람들 모르게 파혼을 했다면, 사람들은 요셉과 마리아가 파혼한 사실을 모르니까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러면 마리아가 잉태한 아기를 요셉의 아기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마리아도 아기도 무사히 보호할 수 있습니다. 파혼은 왜 하려고 했을까? 요셉은 ‘성령 잉태’를 이해하지는 못했어도 믿었기 때문에, 아기의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생각했을 것이고, 그렇다면 자기는 뒤로 물러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의 지위를 포기하려고 파혼을 생각한 것인데, 마리아와 아기를 모두 지키려면 그 모든 일을 사람들 모르게 해야만 했습니다.
3)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저절로 드러났다.’는 뜻이 아닙니다. <‘성령 잉태’는 ‘저절로’ 드러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마리아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요셉에게 가서 그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따라서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라는 말은, “마리아는 요셉에게 가서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을 알렸다.”로 이해하는 것이 옳습니다.
요셉은 그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믿었습니다. 마리아를 믿었으니까 마리아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것만큼이나 사람을 믿는 것도 중요합니다.
4) 주님의 천사가 나타난 일은, 요셉의 기도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신 일로 해석됩니다. 요셉은 자신의 판단과 계획이 과연 하느님 뜻에 합당한 것인지를 알 수 없어서 많이 고민했을 것이고, 그래서 간절하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천사가 요셉에게 한 말 가운데에서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는 말은, “일을 그렇게 복잡하게 진행할 것이 아니라, 원래 하려던 대로 결혼하여라.”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라는 말은, ‘성령 잉태’에 관해서 마리아가 한 말이 진실이라는 것을 보증해 준 말이기도 합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말은, ‘메시아 강생’을 예고하는 말이면서, 동시에 요셉과 마리아가 메시아의 부모로 선택되었음을, 즉 하느님의 ‘부르심’을 전해 주는 말입니다.
5) 겉으로 보이는 표현들만 보고서, 요셉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인물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잘 생각해 보면, 요셉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인물이었습니다. 또 그는 용기가 없어서 가만히 있기만 한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습니다. 만일에 용기 없고 비겁한 사람이었다면, 율법을 방패로 삼아서, 율법 뒤로 숨으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마리아와 아기를 지켰고, 온갖 어려움들을 자기가 떠맡았습니다. <복음서에는 ‘요셉의 말’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요셉이 ‘말보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신앙인이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실 진정한 믿음은, 원래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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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 당신의 사람이니>
마태오 1,16.18-21.24ㄱ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나 당신의 사람이니>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0ㄱ.24)
굳어진
내게
당신
스미니
당신을
품어
나를
허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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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민우 알베르토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삶에 나침반이 되어주십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복음에는 요셉의 이야기가 많이 실려 있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복음의 요셉 이야기는 요셉이 주인공인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합니다. 요셉이 어떤 인물일지 상상해볼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요셉의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행동합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나요? 저는 만약 제 꿈에 주님의 천사가 등장한다면 못 알아봤을 것 같습니다. 그동안 꿈에서 천사를 만나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천사를 알아봤다고 해도 천사의 명령을 들은 다음날 ‘개꿈 아니었을까?’ 하며 의심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요셉은 꿈에서 주님의 천사를 만나는 일에 익숙한 것 같고, 심지어 천사의 명령도 그대로 따릅니다. 마치 평소에도 종종 꿈에 주님의 천사를 만난다는 듯이, 또 종종 천사가 일러준 대로 삶의 크고 작은 결정들을 내린다는 듯이 말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매일 밤 자기 전 하느님께 이런 기도를 한 건 아니었을까 생각해봅니다. ‘주님 저의 삶에 나침반이 되어주십시오. 제가 해야 할 바를 알려주시고, 제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깨닫게 해주소서.’
모든 것이 저의 상상이긴 하지만, 매일 잠들기 전 요셉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지요? 좋은 기도처럼 느껴지시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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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김종기 세례자요한 신부님]
<요셉의 꿈>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꿈에 관해 생각할 때면 동시에 구약 성경의 야곱의 아들 요셉의 꿈이 생각납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은 이집트에서 파라오 왕의 꿈을 해몽함으로써 왕의 신뢰를 얻어 최고 통치자로서 영예를 누렸습니다. 또한 야곱 가족은 요셉 덕분에 흉년에도 잘 지낼 수 있었고 마침내 이집트에서 평안히 부를 누리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약혼한 마리아가 예수님을 잉태한 사실을 알고 의심과 갈등으로 괴로워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꿈에 천사의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구약 성경의 요셉이 형들로 인해 미움과 시련을 겪고 그 후 하느님께서 꿈을 통해 이끌어주셨다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신앙의 시험을 거친 후 구세주이신 예수님의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우리도 언제든지 다양한 아픔과 갈등으로 인해 신앙의 위기를 겪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신앙의 위기를 맞을 때 쉽게 포기하지 말고 인내하면서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기도할 수 있는 은총을 청해야 함을 보여줍니다.
많은 일 때문에 염려하고 힘겨워하며 생활하고 있는 우리는 이제 인류 구원을 위해 성모님과 함께 충실히 살았던 요셉 성인의 믿음과 신앙을 본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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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이경기 토마스 데 아퀴노 신부님]
<요셉 성인의 삶을 본받자>
오늘은 복되신 동정마리아의 배필 성요셉 대축일입니다. 축일 이름이 무척 깁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으신 모든 분들께 축하드립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호주제를 폐지한다고 논란이 많습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바뀌고 생각이 바뀌니까 법이나 제도도 변해 가는가 봅니다. 가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지니까 뭔가 허전할 수도 있겠지요. 권위적으로서의 가장이 아니라, 가정의 대소사에 책임을 지고 헌신하는 그런 가장이 있어서 나쁠 것은 없는 것 아닙니까?
오늘 축일을 지내는 요셉 성인도 예수님 가정의 가장이셨습니다. 아마 그 당시 이스라엘은 지금의 우리 못지 않게 남성중심적, 가부장적인 사회였으니까, 요셉 성인도 가장으로서 많은 역할을 감당하였을 것입니다. 특히 만만찮은 아내와 아들을 두었으니 몸 고생, 마음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겠지하고 상상해 봅니다.
복음서를 통틀어 요셉 성인에 대한 내용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아마 과묵한 성격에 묵묵히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어서 그런게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요셉 성인은 천사가 시키는 말에 아무런 반론이나 저항도 없이 마리아와의 혼인을 수락합니다.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어떠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순순히 내어맡긴 의롭고 믿음직스런 인물이었던 것만은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이번 주 내내 말씀드리듯이 적어도 이기적인 분은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성모님 또한 주님의 종으로서 주님의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지기를 바라신 분, 절대 이기적인 분이 아니었지요.
성 요셉과 성모님 못지않게 우리나라 부모님들도 자식을 키우는데 가히 눈물겨울 정도로 헌신적입니다. 자식들 학교에 학원에 보내고 맛있고 건강에 좋은 음식 다 해주고 컴퓨터에, 휴대폰에 남들 부끄럽지 않도록 옷 입혀 줘야지. 등골이 쑥 빠집니다. 좀 여유가 있으면 조기유학에 해외 연수에, 그리고 나중에 결혼할 때 살림차려줘야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습니다.
정말 어느나라 어느 부모님이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헌신적입니다. 정말 헌신적으로 자녀를 사랑하기에 이기적이 아닌 것 같지만 그 또한 대단히 이기적인 것입니다. 가족이기주의입니다. 제 자식 잘 되고 나도 어깨 힘 좀 주고 다니고 나중에 자식덕 좀 보려나 하는 이기주의입니다. 입시철이 되면 수험생의 부모들은 속이 탑니다. 그리고 대학 떨어지면 성당에도 안 나옵니다.
그런 이기주의가 과도한 경쟁이 되고 너나 나나할 것 없이 모두 남들이 하는 것, 남의 자식이 가진 것, 다 해주고 갖추어 주다 보니까 부모 등골이 쑥 빠질 지경이 된 것입니다. 결국 자녀들의 삶의 태도 또한 이기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독일의 스포츠 갑부인 미카엘 슈마허라는 사람은 자가용 비행기로 전 세계를 다닐 정도이면서도 자기 아들에게 한 주간 용돈이 겨우 2유로 삼천원 정도라고 합니다. 아마 우리 나라에서 그랬다간 아들이 기가막혀 졸도해 버렸을 것입니다. 아니면 가출하든가... 예수님도 가출을 하신 셈이지만 나이 서른이 되어서 하신 가출이지요.
의로우신 성 요셉, 그분으로 인하여 예수님을 잉태하신 성모님은 가정을 꾸릴 수 있었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구세주를 이 땅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 구원과 기쁨과 빛을 참생명을 가져다주는 방법은 바로 요셉 성인의 모범을 본받는 것입니다.
이기적인 생각으로 자기가 손해 볼 수도 있는 일, 귀찮은 일이라고 피해 버렸다면 성모님은 부정한 여인으로 취급을 받았겠지요.
요셉 성인께서 예수님을 어떻게 교육시키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부부가 자신의 의지, 자신의 욕구와 기대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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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책을 읽고 있으면 크게 와 닿는 부분을 발견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내용을 통해 쓰고 싶은 것도 떠올려집니다. 예전에는 책에 밑줄을 그어서 기억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책에 표시하면 단점이 있습니다. 나중에 보는 사람(다시 읽는 본인도 마찬가지)에게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그 표시에 매여서 자기 것을 발견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표시에만 집중하게 되어서, 새로운 것을 찾기가 힘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저는 다 읽은 책을 본당 도서관에 기증하고 있어서 더 깨끗하게 읽어야 합니다. 그래서 밑줄보다 클립을 꽂아두었습니다. 이 클립으로 표시한 곳을 나중에 쓰면서 정리할 목적이었습니다. 문제는 나중에 다시 읽으면 왜 클립을 꽂아두었는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분명 크게 와 닿는 구절이었는데, 다시 보면 별 내용이 아닙니다. 이제는 곧바로 적습니다. 지금 순간의 감정과 생각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미루면 잊어버립니다. 소중할 수 있는 감정과 생각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쉽게 뒤로 미루곤 합니다. 그 순간에 해야 할 것인데도 나중에 해도 충분할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우리 생명을 유한하게 만드신 것이 아닐까요? 너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뒤로 미루지 말고 지금 당장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특히 사랑의 실천은 결코 뒤로 미뤄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가장 강조하셨고,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 실천하는 결정적인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을 지냅니다. 요셉 성인께서 간직하셨던 것은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랑 때문에 ‘강림’이라는 하느님의 일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성인은 약혼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지 그저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의로운 사람, 법대로 사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던 성인이기에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하기까지 무척 힘들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처녀가 아기를 가지면 간음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세우거나 율법 학자들에게 고발해서 돌로 치게 하는 것이 원칙이니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파혼으로 인해서 그 사랑이 끊어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천사를 보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합니다. 이 계시에 곧바로 요셉은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합니다. 이렇게 사랑을 버리지 않고, 또 사랑을 즉시 실천하는 그 모습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을 뒤로 미뤄서도 또 포기해서도 안 됩니다. 계속해야 하는 사랑이고, 즉시 실천하는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그 안에서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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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의 말씀(2025.3.19. 수. 한국교회의 공동수호자동정마리아의 배필성요셉대축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마태오. 1,20-24)
요셉의 생각은 아기를 잉태한 약혼녀 마리아와 사람들 몰래 헤어지는 것이었으나, 자신의 깊은 마음에서 울려 퍼지는 천사가 전해준 주님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보이는 현실보다 보이지 않는 깊은 마음의 울림을 통해 들은 주님의 음성을 따랐습니다.
성 요셉은 현실에서 직면하여야 하는 사람들의 비난이 두렵기도 했으나 주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믿음으로 이겨내었습니다. 현실적이고 합리적이며 이성적인 자신의 판단이나 사건에 대한 효율성보다, 주님의 말씀을 더욱 깊게 믿고 따랐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였기에 성 요셉의 가정은 인류를 위한 성가정이 되었습니다. 성 요셉의 가정은 새로운 세상을 위하여 자신의 몸을 바쳐 이웃을 위해 희생적인 사랑을 하신 예수님을 양육한 보금자리입니다.
성 요셉께서 이루신 성가정은 이기적인 생각이나 혈연적인 가족 관계를 넘어 장차 인류의 행복을 추구하는 자녀들을 양육하는 성소 못자리입니다. 단순히 같은 믿음을 가진 것을 넘어, 자녀들을 공동선에 투신하는 사람으로 양육할 때 성가정은 비로소 완성됩니다.
성요셉 대축일에 천사는 말씀의 메시지를 요셉에게 남기고 떠났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처럼 우리도 자신의 생각보다 천사가 전한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라야 합니다. 거짓의 자신에서 깨어나 천사가 전해준 주님의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위해 성모 마리아와 ‘파혼’하기보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던 성 요셉의 모범을 우리가 따를 때, 성 요셉은 진정 모든 성가정의 양아버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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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함승수 세례자요한 신부님]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오늘은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요셉 성인하면 떠올리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지요. 하나는 ‘의로움’이고 다른 하나는 ‘침묵’입니다. 먼저 요셉 성인의 의로움에 대해 살펴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은 세상이 말하는 ‘정의로움’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들은 법과 규율을 어기지 않고 충실하게 잘 지키는 사람, 사회 구성원들이 보편적으로 ‘옳다’고 여기는 가치들을 존중하고 따르는 이들을 정의롭다고 하지요. 하지만 우리가 요셉 성인을 두고 ‘의롭다’고 하는 것은 그분이 율법이나 조상들의 전통을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그저 인간적인 기준을 적용했을 때 드러나는 상대적 의로움일 뿐, 하느님으로부터 나오는 절대적이고 참된 의로움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된 의로움은 ‘주님 앞에 나설 수 있는 힘’을 가리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친구로부터 돈을 빌린 후 약속한 때까지 갚지 않으면 그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습니다. 그를 볼 때마다 갚지 못한 돈이 생각나서 미안해지고 괜히 마음이 위축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그와 마주치지 않으려고 피해다니게 됩니다. 그런 점은 우리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지요. 우리는 하느님께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존재들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몇 번이나 우리를 용서하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 외아들의 목숨까지 내어주셨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 우리에게 해주신 것처럼 우리도 이웃 형제 자매에게 그렇게 하라고 본을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런데 ‘무자비한 종’이 그랬듯이 나에게 빚을 진 형제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꾸어준 것을 끝까지 받아내려 든다면, 그것으로도 모자라 도저히 빚을 갚을 능력이 없는 딱한 형제를 ‘법대로’ 처벌하려고 든다면, 하느님 앞에 나설 힘을 잃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율법대로 했다면 정식으로 같이 살기도 전에 다른 이의 아이를 임신한 약혼녀 마리아가 엄중한 죄값을 치르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건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뜻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걸 알면서도 순간적인 미움과 원망에 사로잡혀 하느님 뜻을 거슬렀다가는 자기 잘못에 대한 후회 때문에, 하느님께 죄송스러운 마음 때문에 그분 앞에 온전히 설 수 없을 것임을 알았던 겁니다. 그래서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그녀와 조용히 파혼하기로 결정합니다. 그로인해 본인이 약혼녀를 저버린 ‘나쁜 놈’이라고 욕을 먹게 되더라도, 마리아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한 것이지요.
다음으로는 요셉 성인의 침묵에 대해 살펴봅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철저히 순명하는 모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그분의 깊은 침묵으로부터 우러나왔지요. 성경 전반에 걸쳐 요셉 성인은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하십니다. 그저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는 소극적인 침묵이 아닙니다. 내 생각과 뜻을 말하고 내세우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 뜻을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하기 위한 적극적인 침묵, 믿음의 침묵이지요. 그 침묵의 힘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납득하기도 힘든 하느님의 뜻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따르실 수 있었습니다. 그 덕에 참으로 의로우신 분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셉 성인의 대축일을 맞아 우리가 본받고 따라야 할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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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이미 저희 본당에서 강론을 들어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의 아버지는 외국에서 일을 하셨으므로 자주 뵙기 힘든 분이었습니다. 한국에 들어오셔서 집에 머무시는 시간은 고작 서너개월 뿐이었을 뿐, 아버지는 항상 외국에서 활동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저에게 친구와도 같으신 분, 언제나 가깝게 느껴지는 분이었습니다. 시간이 될 때마다 가족들에게 전화를 주셨고 무엇보다 자주 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성실한 신앙은 어머니 못지않게 저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한 추억 중 유난히 기억나는 장면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휴가를 나오신 아버지와 함께 노래를 부르던 순간입니다. 아버지는 기타를 치며 흥에 겨워 춤을 추고 누나는 피아노를 치는 식이었는데, 그 노래들은 제가 아버지를 통해 배운 동요들 혹은 오래된 가요들이었습니다.
대표적인 노래로는 오빠 생각, 섬집 아기, 등대지기, 바위섬과 같은 곡들이었는데 서정적인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재미있게 불러주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우스꽝스러워 배꼽을 잡고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가사들을 하나 둘 곱씹어 보면 여기에는 공통된 주제가 있습니다. 아마도 유명한 곡들인 만큼 대부분 가사를 아실 텐데 1절만 뽑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 주는 자장 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이 노래들의 공통적인 주제는 외로움, 혹은 사랑하는 마음이고 비교적 쓸쓸한 정서가 담겨있습니다. 아버지가 이러한 노래를 우리에게 왜 들려주셨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무래도 타지에서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담아 고요히 읊조렸던 노래를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들려주신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것은 막연한 제 추정일 뿐, 명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습니다. 이제는 아버지가 하늘나라에 계시기에 직접 물어볼 수 없는 탓입니다. 특별히 이 노래들 중에서도 등대지기의 가사가 저에게는 마음에 와 닿습니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물결 위에- 차고 한 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어쩌면 아버지의 삶이란 이러한 등대지기의 삶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가끔은 가족들에게 말할 수 없는 얼어붙은 달그림자가 삶에 드리워질 때가 있었을 것이고, 때로는 한 겨울의 거센 파도 같은 시련도 있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동떨어진 삶이 얼마나 외롭고 쓸쓸한 것인지 저는 몇 년의 유학생활을 하면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묵묵히 우리 가족들과 마음으로 함께 해 주신 아버지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요셉 성인 대축일입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복음 말씀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온화한 아버지 요셉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요셉의 삶 또한 묵묵한 등대지기의 삶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사실 우리는 주로 순명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성모 마리아를 본받아야 할 분으로 이야기합니다. 한편 이에 비해 마리아와 함께 예수님을 키운 아버지 요셉에 대해서는 종종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곤 합니다.
하지만 조금만 더 오늘의 말씀에 집중해보면 바로 아버지 요셉 역시 성모 마리아 못지않게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신 분이었으며 과묵한 태도 안에서 예수님의 생애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전승에 의하면 요셉은 마리아에 비해 나이가 아주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평소에 성실함과 의로움으로 마을에서 평판이 좋던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는 인간적으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로인해 마주하게 될 사람들의 비난이 충분히 두려웠을 법합니다.
특별히 누군가 자신의 흉을 볼 때, 혹은 사랑하는 이에게 어떤 오해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은 굉장히 불편합니다. 누구나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길 원하고 사랑하는 이를 지켜주고 싶은 마음이 가장 기본적인 우리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마리아의 잉태와 아기 예수님의 탄생 사건은 요셉에게 있어 우리가 겪는 이러한 어려움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처녀가 임신할 경우 돌로 쳐 죽이기 까지 하는 문화를 갖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안에서 끊임없이 사람들에 의해 제기될 아기의 출생에 대한 험담, 자신이 사랑했던 약혼자 마리아에 대한 배신감. 더불어 설사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한들 갖가지 부정한 소문들을 견디어 내야 하는 심리적인 고통. 일생동안 이 모든 것을 감내했을 아버지 요셉을 생각하면 참으로 마음이 슬프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파혼을 남몰래 결정하자 천사가 나타나 요셉에게 이야기 합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이에 요셉은 천사의 명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이 행동은 결코 단순한 응답이 아닙니다. 이는 자신과 관련된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신앙으로 떨쳐버리는 큰 용기가 기반이 된 응답입니다.
그럼으로써 요셉과 마리아의 순명은 우리 인간 모두의 운명을 구원으로 이끌어줄 어마어마한 힘을 가지는 대답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셉은 자신의 피가 섞이지 않은 하느님의 외아들이 세상에 오셨음을 받아들이고 이를 소중히 여기며, 침묵 중에 가정을 지키고 아기 예수님을 사랑으로 돌보신 분이었습니다.
비록 나이가 많은 와중에 성가정을 이루어 예수님의 공생활 전에 돌아가셨으므로 성경에는 얼마 나오지 않지만 예수님이 세상에 열매를 맺는 데에 있어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하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을 묵상하며 우리는 오늘 이러한 요셉의 순명의 자세, 그리고 묵묵히 성가정을 이루고 지켜낸 그분의 따뜻한 마음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저마다 한 명의 등대지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끔은 우리의 삶에 얼어붙은 달그림자가 드리워질 때가 있을 것이고, 때로는 한 겨울의 거센 파도 같은 시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 안에서 제자리를 지키며 이를 버티어 낼 때, 우리는 더욱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묵묵히 구원의 씨앗을 세상에 뿌린 아버지 요셉의 마음처럼--. “요셉이 파혼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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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은 배경의 사람, 성 요셉>
-기도, 자비, 믿음-
“보라, 주님은 당신 가족을 맡길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을 세우셨다.”(루카 12,42)
입당송 말씀이 그대로 성 요셉을 지칭하는 듯 합니다. 요셉수도원의 참 좋은 배경인 불암산을 볼때마다 떠오르는 '산처럼' 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마치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인 성 요셉을 연상케하는 불암산입니다. 2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잊지 못하는 제 소망이 담긴 시입니다.
“언제나 늘 그 자리에 머물러
가슴 활짝 열고
모두를 반가이 맞이하는
아버지 산앞에 서면
저절로 경건 겸허해져
모자를 벗는다
있음자체만으로
넉넉하고 편안한 산의 품으로 살 수는 없을까
바라보고 지켜보는 사랑만으로
늘 행복할 수는 없을까
산처럼!”<2000.11.17.>
또 하나 생각나는 불암산 시입니다.
“아
크다
깊다
고요하다
저녁 불암산!”<2005.3. >
때로 큰 믿음, 깊은 겸손, 고요한 마음의 성 요셉을 연상케 하는 불암산입니다. 이런 산같은 어른이, 성가정의 참 좋은 배경이 바로 성 요셉이요, 이런 든든한 배경의 어른이 되어 노년인생을 살고 싶음은 누구나의 소망일 것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지혜도 좋은 경각심을 줍니다.
“신뢰는 십년에 걸쳐 쌓이고, 하루만에 무너진다. 명성을 드높이는 것은 많은 사람이지만 몰락시키는 것은 단 한 사람이다.”<다산>
“명문가가 되기는 하늘을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몰락하기는 털을 태우는 것처럼 쉽다.”<유씨가훈>
쌓기는 평생이지만 무너지기는 순간입니다. 잃어버린 신뢰의 회복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매사 신중하고 조심하고 겸손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아마도 성 요셉의 평생 삶이 그러했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동안 늘 경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제 형님이 준 “정의, 효도, 우애”라는 가훈대로 화목하게 살아가는 삼형제의 조카들도 생각납니다. 오늘 참 좋은 배경의 성 요셉의 덕을 세 측면에 걸쳐 나누고 싶습니다.
첫째, 성 요셉은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기도할 때 큰 산같은 사람이 됩니다. 아브라함을 연상케 하는 성요셉입니다. 기도와 함께 가는 희망입니다. 아브라함은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끝까지 주님을 믿었습니다. 희망이 없어도 희망하며 한결같이 살아간 기도의 사람, 성 요셉입니다. 기도의 사람은 침묵의 사람이자 경청의 사람입니다.
오늘 복음은 온통 성 요셉의 침묵과 경청의 분위기입니다. 깊은 기도중 꿈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입니다. 주님의 성 요셉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깊은지 주님은 당신 천사를 통해 속내의 비밀을 다 밝히십니다. 아마도 성 요셉은 평생 이 말씀을 명심하여 마리아를 보호하고 예수님을 키우는데 전심전력을 다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늘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둘째, 성 요셉은 “자비의 사람”이었습니다.
자비할 때 깊은 산같은 사람이 됩니다. 한결같이, 끊임없이 바치는 간절하고 항구한 기도와 더불어 자비한 사람이 됩니다. 자비와 함께 가는 삶의 깊이입니다. 자비하기가 생명의 땅을, 생명을 바다를 닮은 성 요셉입니다. 며칠전 산책중 써놓은 글입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뿌리 내린
생명의 땅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품에 안은
생명의 바다
같은
하느님이
하느님 자비가 되고 싶다”<2025.3.15.>
요셉의 하느님 같은 자비심은 약혼자 마리아가 혼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을 때 그의 지혜로운 처신에서 잘 드러납니다. 자신보다는 마리아의 안위를 배려한 자비의 사람, 존엄한 품위의 의로운 사람, 성 요셉이요 다음 대목이 생생한 증거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셋째, 성 요셉은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내적고요는 믿음의 반영입니다.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아, 참 크고 깊고 고요한, 참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 요셉입니다. 역시 아브라함이 보여준 믿음에 따라 살았던 성요셉입니다. 참으로 기도와 함께가는 자비의 삶, 믿음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
흡사 성 요셉의 참 좋은 선물인 태몽같습니다. 예전엔 좋은 태몽도 많았는데 요즘은 태몽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성 요셉의 지체없는 순종이 멋지고 아름답습니다. 사람은 물론 하느님을 감동시키는 믿음입니다. 요셉의 순종의 믿음에 하느님의 기쁨과 고마움도 참으로 컸을 것입니다. 다음 사무엘 하권의 말씀은 성 요셉과 예수님은 물론 믿음 좋은 우리를 통해 실현된 축복처럼 들립니다.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자녀가 될 것이다. 너의 집안과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네 왕좌가 영원히 튼튼하게 될 것이다.”
믿음은 순종의 삶을 통해 검증되고 입증됩니다. 크고 작은 순종이 일상화될 때 마지막 순종의 죽음도 반가이 기쁘게 맞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은 믿음의 여정, 순종의 여정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과 함께 공동체의 참 좋은 배경인 기도의 사람, 자비의 사람, 믿음의 사람이 되어, 또 주님의 착하고 성실한 종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와서 네 주님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 25,2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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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24ㄱ)
<의로운 요셉을 본받자!>
오늘 복음(마태1,16.18-21.24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관한 말씀입니다.
요셉과 약혼한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아,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전하는 말을 듣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1,20ㄴ-21)
오늘은 '성 요셉 대축일'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모든 형제자매들(요셉.요셉피나)에게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의로운 성 요셉에 대한 칭호들은 이렇습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 '예수님의 양부', '예수님과 성모님의 보호자', '성가정의 수호자',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 '거룩한 교회의 보호자', 하느님 구원 사업의 조력자(봉사자)'입니다.
복음은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의롭다는 것은 '정의롭고 공정하고 정직하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이 점점 더 하느님의 정의와 공정과 정직과는 멀어지는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요셉 성인이 간직하셨던 의로움이 더없이 중요하고 필요한 때입니다.
3월은 '성 요셉 성월'입니다. '요셉 성인의 삶을 묵상하는 달'입니다.
요셉 성인이 간직하셨던 의로움을 본받아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자녀가 되고, 요셉 성인처럼 세상과 교회에서 하느님 구원 사업에 충실한 봉사자가 됩시다!
"성 요셉, 저희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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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하였다."(마태 1, 24)
하느님
햇살의
은총으로
봄꽃이
피어납니다.
망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서로에게
구원이
되어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충실한
요셉과
마리아의
사랑입니다.
요셉 성인을
통해
자신을
비워내는
진정한
하느님 중심을
만납니다.
자신의 뜻을
비워내는 것이
곧 자신을
살리는 길임을
깨닫습니다.
삶의 진정한
안목은
참다운 삶을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명(共鳴)되는
사랑이
복음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진실로
아끼고 귀하게
여기는
성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가
됩니다.
성 요셉의
일상이
신앙의 귀감이
되는 것은
사람 귀한 줄
아는 소중한
마음이
신앙의 일상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머무는
일상입니다.
마리아와 같은
믿음의
마음으로
예수님과
함께 합니다.
서로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서로를 간절하게
바라보는 삶이
신앙의 일상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느님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성 요셉 대축일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시작이 아름다우면
끝도 아름답습니다.
우리의 본마음이
끝까지
하느님과 함께하는
은총의
사순되십시오.
하느님의
뜻을 새기며
노오란
산수유꽃이
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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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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