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쾌하다. 나쁜 남자는 정말이지 통쾌한 영화다. 10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 토요일 오후에 영화를 보고 그 상쾌한 기분을 지금까지 유지하며 이 글을 쓴다.
이런 통쾌함은 '뻐꾸기 둥지위로 날아간 새' 이후 두번째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맛을 음미할 줄 아는 사람은 많지않겠지 싶다. 이상의 날개나 오감도를 읽었을 때의 느낌이다. "이게 무슨 소설이냐?"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온다.
그대는 그다지 통쾌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또한 나의 사설을 들어보기 바란다.
이 영화를 관통하는 정신은 허무주의다. 주인공 한기는 세상의 쓴맛단맛을 다 본 허무의 밑바닥까지 체험한 사람이다. 생긴걸로 보나 노는 모양으로 보나 이 영화에 등장하기 전에 이미 어디서 대여섯사람은 너끈히 죽였지 싶다.
이를테면 월남전에서 베트콩 열두엇 때려잡고 실수로 아군도 서너명 쏴죽이고 돌아온 퇴물군인이다. 상처입은 늙은 사자에게도 위엄은 있다. 포효소리는 아직 남아있다.
쓴맛 단맛을 다보고 죽음과 죽음 그 이후 까지 체험한 한기에게 세상은 조금도 살아볼 가치가 없다. 허무하다는 말이다. 그때 세상이 살맛나서 죽겠다는 선화를 만난다.
선화는 허무주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는 것이 신나서 죽겠다는 듯이 생글생글한 눈빛이다. 보통 현실의 공간에서 한기와 선화가 만나는 일은 잘없지만 드물게는 있다. 한기는 운명의 어떤 지점에서 선화와 한 개의 벤치를 공유한다. 둘은 마주친다. 한기는 선화를 못마땅해 한다. 둘은 충돌한다.
1라운드는 선화의 일방적인 리드로 끝난다. 그러나 게임은 공정하지 않다. 해병대 3인 및 행인 수십인이 선화를 편드는 까닭이다. 해병대 3인은 정부권력이다. 권력 및 관객의 개입에 힘입어 한기와 선화의 게임은 선화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난다. 당연히 한기는 이 게임의 부당한 판정에 불복하고 항고한다.
2라운드는 한기의 일방적 승리다. 한기는 선화에게 운명의 가혹함을 보여준다. 삶 안에서의 지옥을 보여준다. 그중 통쾌한 장면은 선화의 처녀값이 얼마에 흥정되는지 보여주는 신이다.
처음 선화는 한기의 거듭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통용되는 가치기준을 고수하려 한다. 말하자면 처녀는 상당한 값나가는 보물이라는 식이다. 한기는 선화의 남자친구가 조금의 도움도 주지 못하는 현실을 입증하므로서 선화가 아껴온 처녀값이 사실은 단돈 50원의 가치도 없음을 증명해 보이는데 성공한다.
선화는 계속 패배한다. 이 즈음 한기와 선화의 분신들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한기의 분신은 한기의 똘마니로 설정되어 있다. 선화의 분신은 늙은 포주여자로 설정되어 있다. 선화의 거듭된 패배는 점점 늙은 포주를 닮아가는 것으로 표상하고 있다.
늙은 포주의 입장 : "오는 손님 안말리고 가는 손님 안잡는다"
한기 똘마니의 입장 : "나는 진짜로 선화를 사랑한단 말이야"
여기서 위대한 반전의 조짐이 복선으로 깔린다. 이 게임의 규칙은 선화가 늙은 포주처럼 되어 인생의 허무를 긍정하면 선화가 패배하는 것이고 반대로 한기가 선화를 사랑해서 세속적인 가치들 즉 사랑이나 행복 따위를 긍정하면 한기의 패배다.
선화는 결국 패배에 패배를 거듭하여 허무를 긍정한다. 치명적인 것은 한기 역시 자기도 모르는 새 자신이 부정하였던 세속의 가치들.. 즉 사랑이나 행복이나 쾌락이나 출세나 고상함이나 부, 명예 따위들을 긍정하게 된다는 점이다.
극중에서 한기의 대사는 한기 똘마니를 통해 대신 말해진다. 선화의 거듭된 패배는 늙은 포주의 연기를 통해 대신 말해진다.
3라운드는 선화의 승리다. 한기가 선화를 사랑함은 즉 한기가 허무주의를 버리고 세속적 가치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즉 한기의 패배다. 그러나 한기는 그 패배를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이미 전과가 상당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에 출연하기 전에 이미 한기는 수십번의 살인을 저지른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세속적 가치를 받아들이는 순간 한기의 현실적 존재는 순수한 무로 변해버리는 것이다.
한기의 딜레마 : 한기는 수십인을 살해하였으므로 벌써 죽었어야 할 놈인데 아직 살아있다. 한기의 변명은 인생은 허무하기 때문에 진작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있어도 상관없다는 논리다. 한기가 만약 세상의 규범을 존중하여 사랑과 행복을 긍정하고 세속적 가치를 인정하게 되면 자신은 죽었어야 한다. 유일한 방법은 자살이다
한기는 패배한다. 한기는 세속적 가치를 인정한다. 세속의 룰을 빌리는 방법으로 자살한다. 한기는 사형선고를 받고 죽는다. 한기는 죽었다. 어차피 죽었어야 될 놈이 죽었으므로 잘못된 것은 없다.
문제는 한기의 패배는 선화의 패배까지를 수반한다는 점이다. 악은 심판되었지만 여전히 선은 구원되지 않았다. 선화가 한기를 구원할 수 있어야 한다.
선화의 딜레마 : 선화는 원래 선한 영역에 속한 사람이었지만 우발적인 불행을 당하여 악의 영역에 들어와 있다. 억울하다. 관객이 선화의 억울함을 인정하기로 한다면 한기 역시 우발적인 실수로 악에 물들었을 수 있다는 점이 걸린다.
사형의 방법으로 한기를 사회와 격리하는 세속의 방법은 공정하지 않다. 즉 한기의 사형은 도피이며, 도피는 게임의 규칙 위반이다. 한기가 사형의 방법으로 자살해 버리면 선화의 최종적인 승리를 검증할 방법이 없어진다.
선화는 한기의 계략에 넘어가 범죄자로 몰렸다. 억울하다. 이 사실을 관객을 알고있지만 세상은 모르고 있다. 아무도 선화의 억울함을 알아주지 않는다. 이건 현실이다. 선화가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호소하려면 한기 역시 억울함을 세상에 호소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관객은 선화가 계략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있지만 진정으로 말한다면 그 사실을 몰라야 한다. 그대가 조금만 세상을 안다면 원래 세상의 룰에 그러한 정상참작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만약 선화의 범죄를 정상참작한다면 탈주범 신창원도 어릴 때 친구 꾐에 빠져서 어쩌구 하며 변명할 것이다. 우리가 신창원의 변명을 받아들이지 않듯이 선화의 변명 또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세속의 룰이다)
지독한 딜레마다. 선화는 승리한다. 그러나 결승골을 넣기 일초전에 한기는 "그래 내가 졌다치고 게임 그만하자"하고 도망가버린다. 선화는 최종적인 승리를 확인하기 위해 한기를 더 게임 안에 붙잡아놓아야 한다.
김기덕의 영화는 대개 막다른 골목을 향해 질주하는 것으로 결말짓는다. 막다른 절벽 너머 갈데 까지 가보자는 식이다. 델마와 루이스가 그랜드캐년에서 급가속페달을 밟으면서 끝나는 격이다.
그러나 '나쁜 남자'는 출발점에서 이미 그랜드 캐년 바닥으로 추락해놓고 있다. 죽음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이다. 한기는 영화에 등장하는 시점에서 이미 사망해놓고 있다. 갈데까지 간 다음 한걸음을 더 내딛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바닷가에서 한기는 선화의 죽음을 보여준다. 운명의 거역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극중에서 선화는 자살하고 있지만 그 죽음은 실은 자살이 아니다. 타살일수도 있고, 사고사일수도 있고, 병사일수도 있고, 자연사일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찢어진 사진은 이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에 선화와 한기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
선화는 그 죽음을 다시 복원한다. 거울 너머에 있던 한기가 라이터를 켜 얼굴을 보이므로서, 선화가 거울을 깨뜨리므로서 한기는 선화임이 확인된다. 즉 한기가 선화이고 선화가 한기인 것이다.
바닷가는 자궁을 의미한다. 한기와 선화는 죽었다. 다시 원형의 아기로 돌아간다. 영화는 길에서 시작되어 길에서 끝난다. 기승전결을 거쳐 1사이클의 순환이 완성된다. 죽은 선화와 죽은 한기가 다시 아기로 태어나므로서 1사이클을 완결짓는 것이다.
두가지 여운이 있다. 하나는 용서다. 트럭을 타고 시골을 순회한다는 것은 한기가 증오를 재우고 모든 사람을 용서한다는 의미다.(남자가 트럭에서 내리면 한기가 휴지를 청소한다. 원래대로 한다면 한기는 그 순간 그 남자를 패죽여야 한다. 그게 지금까지 한기가 살아온 삶의 방식이다. 그러나 한기는 주먹을 휘두르지 않는다. 용서하는 것이다)
둘은 생명의 씨앗을 뿌리기다. 두 사람은 현실에서 죽었으므로 세속의 룰이 적용되지 않는 변방으로 나아가 다시 아기로 태어난다.(아담과 이브로 돌아가 변방에서 둥지를 틀고 새로 룰을 정한다) 씨앗은 다시 뿌려진다.
극은 한기와 선화의 치열한 대결로 일관한다. 일진일퇴, 막상막하의 팽팽한 난타전이 숨쉴틈없이 이어진다.
1라운드는 선화의 손쉬운 승리이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의미하는 해병대 3인 및 행인들로 묘사된 관객들의 부당한 개입에 의한 가짜승리이다. 게임은 공정하지 않았으므로 2라운드가 진행된다.
2라운드는 한기의 연전연승이다. 그러나 그 승리는 의미 없다. 허무가 승리한다. 허무는 승리까지도 허무하다. 허무하다고 말하는 거 까지가 허무하다. 고로 한기는 승리하지만 그 승리는 무효다.
3라운드는 선화의 최종적인 승리다. 한기의 허무주의는 한기 자신의 허무주의에 의해 완벽하게 패배한다. 최종적으로 남는 것은 삶에 대한 긍정이다. 그러나 그 긍정은 세속의 룰이 완전히 파괴된 다음의 긍정이다.
선화는 계략에 빠지지만 세속의 룰에는 정상참작이 없다. 관객들은 선화가 사실은 소매치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야 한다.(선화가 계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고있는 사람은 반칙을 범한 것이다)
등장인물은 6인이다.
■ 제 1의 인물 : 한기 - 세상에서 통용되는 삶의 가치들을 인정하기로 룰을 정하면 이미 죽었어야 할 인물들이다. 현실에서 이들은 삶의 낙오자들이다. 실직자, 재수생, 말기암환자, 실연당한 사람, 이혼당한 사람, 회사 망해먹은 사람.. 이들은 이미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 더 이상 삶의 무대에 등장할 자격이 없다. 고로 죽어야 한다.
이들이 뻔뻔스럽게도 죽지 않고 세상이라는 무대 주변에 빌붙는 논리는 허무다. 세상은 허무하므로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으며, 행복도 없고 불행도 없으며, 성공도 없고 실패도 없다. 고로 사업이 망했다고 해서, 시험에 떨어졌다고 해서, 아내가 바람을 피웠다고 해서 자살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허무를 긍정하기로 하면 살아있을 이유 또한 없다.
■ 제 2의 인물 : 선화 - 세상의 쓴맛 단맛을 보지 못한 철부지들이다. 삶을 긍정하고 세속적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위태롭기 짝이 없다. 이들도 재수가 없으면 언제든지 시험에 낙방할 수 있고, 연인과 헤어질 수 있고, 실직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고로 이들은 위선자들이다. 그들은 보통 승리하지만 그건 반칙이며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속임수이다. 그 속임수는 한기에 의해 사정없이 폭로된다.
■ 제 3의 인물 : 한기똘마니 - 한기의 또다른 자아다. 허무를 긍정하면서도 은근슬쩍 삶의 희망을 내비치는 바보들이다.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당하고, 실직당하고, 망가지고도 아무 생각없이 살아보겠다고 발버둥치는 세상의 소시민들이다.
이들은 근본적으로 모순에 차 있다. 그들은 끝없이 세상을 불평한다. 정리해고를 단행한 정부를 비난하고, 배신하고 도망간 연인을 비난한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세상의 룰을 거역해 볼 생각은 못하며, 자신에게는 결코 허용되지 않은 삶의 희망을 탐색하는 바보들이다.
■ 제 4의 인물 : 여자포주 - 선화의 또다른 자아다. 선화처럼 한때 잘 나가다가 우연히 운명의 위험에 빨려들어 자포자기한 채 그냥 사는 사람들이다. 서울역 노숙자처럼 죽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희망도 없이 허무도 없이, 그냥 숨만 쉬는 군상들이다.
■ 제 5의 인물 : 해병대 3인 - 정부, 공권력, 세속의 룰이다. 그들은 부당한 개입으로 선화를 편든다. 언제나 그렇듯이 세상의 룰은 불공평하다. 정작 선화가 계략에 걸렸을 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허상이다.
■ 제 6의 인물 : 행인들 - 이 영화의 관객들이다. 부당하게 개입하며 선화를 편든다. 선화가 계략에 걸렸다는 사실을 순진하게 믿으므로서 이들은 사실 감독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인물은 사실은 한기 1인이다. 선화가 거울을 깨뜨리는 순간 한기=선화로 돌아간다. 즉 한기도 한때는 선화처럼 잘나가던 시절이 있었고, 한기도 한 때는 삶을 긍정했다는 뜻이다.
선화가 계략에 걸려들었듯이 한기도 운명의 계략에 걸려들어 악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으며, 한기가 법이라는 세속의 룰을 빌려 자살하듯이, 선화도 운명의 거역할 수 없는 구렁텅이에 말려들면서 한기처럼 자살하게 된다.(선화가 계략에 걸려들었음은 인정하면서 한기 역시 계략에 걸려들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감독의 계략에 걸려든 관객의 자기기만일 뿐이다)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한기는 패배하였다.
옆구리에 창을 맞은 늙은 사자가 마지막 포효소리로 위엄을 과시하고 있다. 그러나 사자는 한번 물리면 그것으로 끝이다. 한번 약점을 노출하면 구역을 내놓고 드라마에서 퇴장해야 한다. 그것이 병든 사자의 운명이다.
사랑의 감정을 부인하는 것으로 저항해 보지만 결국 패퇴한다. 더 이상 자기를 기만할 수 없다. 컨테이너를 비우고 무대에서 퇴장당한다.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다만 쪽팔리지 않는 방법으로 퇴장하는 것이다. 교도소를 빌리는 아이디어다.
이 드라마는 이를테면 델마와 루이스 속편이다. 델마와 루이스는 벼량을 향해 돌진한다. 벼랑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가? 죽음이 있다. 죽음 그 이후에는? 한기의 검은 옷은 죽고 난 다음의 이야기를 의미한다.
이 영화의 미덕은 우선 사상이 되어먹었다는 점이다. 세상에서 먹어주는 걸로 되어있는 게임의 규칙이 실은 하나의 계략에 불과하다는 점을 여지없이 폭로하고 있다. 관객들의 자기기만은 사정없이 폭로된다. 또 정치적으로 공정하다는 점이다. 또 해피엔딩이라는 점이다. 또 드라마가 완결된다는 점이다.
특히 드라마의 완결은 유의미하다. 이를테면 파이란은 미완성이다. 파이란의 두 주인공은 작가의 지겨움에 의해 돌연사를 당하는데 그건 이야기를 중간에서 자른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결말이 없다.
말하자면 파이란이 강재를 만나 병을 치료하고 여전히 살아있다 해서 달라질 것이 없고, 또 강재가 파이란을 잊고 빵을 다녀와 아직도 잘 살고있다해서 달라질 것이 또한 없다. 주인공들의 죽음은 단지 극을 끝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억지다. 강재와 파이란은 가리봉동 5거리에서 구멍가게 하며 잘 살고 있다.(어제 같이 소주한잔 했다, 사실이다. 증인도 있다)
무엇이 다른가? 그림을 그리다가 잘못되면 덧칠을 한다. 그래도 표시가 나면 또 덧칠을 한다. 늙은 여인의 진한 화장같이 덧칠에 덧칠을 더한다. 나쁜 남자의 미덕은 그 경우 화선지를 확 찢어버리고 새 백지를 꺼낸다는 것이다.
첫댓글 파이란이 강재를 만나 지금까지 살아 있다면, 파이란도 없구 파사모도 없지.. 나두 나쁜남자 좋아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