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랑 같이 오세요. 할머니"
내가 살 물건이 아니라는 듯한 매장 점원의 말이 서러워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컴퓨터 선생님이 아이패드가 좋다고 했으니 이걸 사야겠단 마음뿐이었다.
아이패드 프로와 애플 펜슬까지 사고 딸을 데려올 필요 없이 매장을 나섰다.
사는데 가슴도 두근거리고, 우여곡절 끝에 아이패드를 사긴 했는데 사용법을 몰랐다.
그때부터 유튜버, 구글이 내 선생님이었다.
유튜브 선생님 말이 너무 빠르면 컴퓨터를 껐다 켰다 메모해가면서 날이 새도록 배웠다. 필요한 기능을 하나씩 천천히 익혀갔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기회만 있으면 무언가 배우는 걸 좋아했다.
여자는 학교 대신 시집을 가던 게 당연하던 때 였으나 부모님 몰래 익산여고 시험을 보고 합격했는데 그 때를 잊을 수가 없다.
아버지는 칭찬 한마디 해주지 않으셨지만 보리 서른 가마니를 팔아 등록금을 내주셨다.
결혼 후에도 늘 '내가 배워서 할 수 있는 게 없을까'를 고민했다. 공무원인 남편은 못된 짓을 안 해서 생활비가 부족했고 내가 뭐라도 배워서 열심히 살아야만 했다.
집을 짓고 싶어서 공사 현장의 사람을 붙잡고 물어봤다.
집 짓는 법을 배우고,
건설 허가를 받는 법,
건축 계약을 하는 법,
집을 분양하고 세놓는 법을 배웠다.
그게 커져서 분양사업이 됐다.
집이 안팔릴 때는 미싱 자수 학원에 등록했 고 기계를 사서 틈틈이 미싱 연습을 했다. 고장난 미싱 기계를 고치러 온 수리공에게 자수 공장 여는 방법 좀 가르쳐 달라 했다.
알려주는 대로 하나씩 해내다 보니 기사 열 명을 둔 공장이 됐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바뀌었다. 컴퓨터를 모르니 바보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할머니, 컴퓨터 안 배우시면 안돼요? "
컴퓨터 선생님의 말이었다. 나이 먹은 노인네가 와서 배운다니까 당황스러웠겠지 .
컴퓨터 켜는 법조차 모르던 유재순 할머니는 "수업 들을 때마다 등에 땀이 송골 송골 맺혔지만, 수업을 따라가려고 열심히 노력했다."며 "수업 후 집에 돌아와서는 그날 배운 걸 메모하고 복습했다."고 전했다.
그래도 꼬박꼬박 수업에 나가며 그렇게 3년을 버텼더니 컴퓨터도, 스마트폰도 쓸 줄 알게 됐다.
나는 파워포인트를 잘했다. 거기 있는 도형을 이것저것 쓰니, "왜 이렇게 잘하냐."며 다들 놀랐다.
컴퓨터 선생님이 나더러 그림도 잘 그릴 거라고 하셔서 그러면 한번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여곡절끝에 사가지고 왔는데 연필을 어디에 대고 어떻게 긋는지도 몰랐죠.
뭘 눌러야 지워지는지
펜 굵기, 색은 어떻게 바꾸는지.
"배우는 과정에는 늘 부끄러움이 함께 한다. 그 부끄러움을 견뎌야 배울 수 있다. "
"구글에 들어가면 그림이 많이 있잖아요. 그 그림을 다운받아서 내 머릿속에 넣어가지고 그리고, 색칠하고 이런 식으로 시작한 겁니다."
지금 내 인스타그램 계정에 올린 그림이 900개가 넘어가고 프로필 사진 밑에는 이렇게 쓰여있다.
여유재순'이라는 필명으로 활동 중인 유재순 할머니는 인터넷에서 찾은 꽃, 나무, 풍경 그림을 태블릿 PC로 그려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여유재순'은 유재순 할머 니가 최초 인스타그램 회원 가입 당시 성(性)을 적는 난에 자신의 성(性)인 여(女)를 적고 이름난에 ‘유재순'을 넣어 실수로 만들어진 필명이다.
'아이패드 드로잉 작가' 여유재순.
작가는 오늘도 서투르고 느리더라도, 한 장 한 장 그림을 그려낸다.
할머니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그림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