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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우체국
류근
옛사랑 여기서 얼마나 먼지
술에 취하면 나는 문득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선량한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우표 한 장 붙여주고 싶으다
지금은 내 오랜 신열의 손금 위에도
꽃이 피고 바람이 부는 시절
낮은 지붕들 위로 별이 지나고
길에서 늙은 나무들은 우편배달부처럼
다시 못 만날 구름들을 향해 잎사귀를 흔든다
흔들릴 때 스스로를 흔드는 것들은
비로소 얼마나 따사로운 틈새를 만드는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는 이별이 너무 흔해서
살아갈수록 내 가슴엔 강물이 깊어지고
돌아가야 할 시간은 철길 건너 세상의 변방에서
안개의 입자들처럼 몸을 허문다 옛사랑
추억 쪽에서 불어오는 노래의 흐린 풍경들 사이로
취한 내 눈시울조차 무게를 허문다 아아,
이제 그리운 것들은 모두 해가 지는 곳 어디쯤에서
그리운 제 별자리를 밝혀 두었으리라
차마 입술을 떠나지 못한 이름 하나 눈물겨워서
술에 취하면 나는 다시 우체국 불빛이 그리워지고
거기 서럽지 않은 등불에 기대어
엽서 한 장 사소하게 쓰고 싶으다
내게로 왔던 모든 이별들 위에
깨끗한 안부 한 잎 부쳐주고 싶으다
바닷가 우체국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 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바라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서 파도 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었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 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 속 주머니에 넣어 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 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 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바다를 건너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 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 넣거나
수평선을 잡아 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가을 우체국
이기철
외롭지 않으려고 길들은 우체국을 세워 놓았다
누군가가 배달해 놓은 가을이 우체국 앞에 머물 때
사람들은 저마다 수신인이 되어
가을을 받는다
우체통에 쌓이는 가을 엽서
머묾이 아름다운 발목들
은행나무 노란 그늘이 우체국을 물들이고
더운 마음에 굽혀 노랗거나 붉어진 시간들
춥지 않으려고 우체통이 빨간 옷을 입고 있다
우체통마다 나비처럼 떨어지는 엽서들
지상의 가장 더운 어휘들이 살을 맞댄다
가을의 말이 은행잎처럼 쌓이는
가을 엽서에는 주소가 없다
별정우체국
채상우
저건 강아지풀이고 저건 참나리고 그래 오늘도 안녕
십 년 전에도 그랬듯 작년처럼 저기엔
말냉이꽃이 피었더랬는데 애기별꽃은 이미 다 숨었고 개오동나무엔 다시
꽃이 피고 있구나 붉은괭이밥은 여전히 붉은괭이밥이고
장미를 심을까 내년엔 파란 장미를
내 발톱에서 곰팡이가 피어난다
가을 우체국에서
정문규
지금까지 받은
사랑의 선물
다시 돌려드립니다
너무나 많이 받아
더 이상 저장할
공간이 없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단풍잎 제 마음도
함께 부칩니다
그 동안 다정했던
봄과 여름도
고마웠습니다
답장은 해 주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하얀 겨울로 가는
망각의 열차를 탔거든요
안-녕-히-계-세-요
우체국 앞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정윤천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군가를 기다려본 기억을 가진 사람과,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누구라도 한 사람을 기다려본 기억이 있는 사람의 인생의 무늬에는 어딘지 차이가 있을 것도 같았다.
모든 생이 바닥으로는 다른 빛깔의 그늘이 와서 깔리고, 모든 생의 그 그늘들은 다른 방식으로 스러지기도 할 것 같았다.
우체국 앞에 서 있는 은사시나무 그늘 밑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뒷등에 대고서라도, 이제라도 '그'를 한번 기다리며 서 있어보라고, 가만히 말을 건네주고 싶었던 가을날이 있었다.
우체국 앞 평상
손순미
길은 저 혼자 우체국으로 들어가 버렸고, 바람은 측백나무 겨드랑이를 부채질하다 기절해 버렸다 우체국 앞에는 한 토막의 평상이 놓여 있고 직원들은 편지를 쓰지 않는 인류의 앞날을 걱정하며 평상 위에 놓인 더위를 구경한다
한 남자가 평상을 향해 걸어온다 남자의 바지를 그대로 갈아입은 그림자를 데리고 온다 남자가 측백나무 쪽으로 평상을 옮기자 그림자는 황급히 배웅을 마치고 돌아간다 못난 남자에게서 태어난 불행한 껍데기는 가라! 노숙에 지친 남자가 겨우 헛소리를 삼키며 평상위에 눕는다 약지가 없는 남자의 손이 나뭇잎처럼 흔들린다 여름이이렇게 춥다니!
십자가를 짊어지듯 남자는 평상을 짊어지고 예수처럼 누워있다 영원히 오지 않을 부활을 꿈꾸지 않으며. 각도를 조금만 비틀면 폭염에 순교한 자로 기록될 광경이다
남자를 태운 평상은, 생각하면 눈물이 핑∼도는 모양이다
나팔꽃 우체국
송찬호
요즈음 간절기라서 꽃의 집배가 좀 더디다
그래도 누구든 생일날 아침이면 꽃나팔 불어준다
어제는 여름 꽃 시리즈 우표가 새로 들어왔다
요즘 꽃들은 향기가 없어 주소 찾기 힘들다지만
너는 알지? 우리 꿀벌 통신들 언제나 부지런하다는 걸
혹시 너와 나 사이 오랫동안 소식이 끊긴다 하더라도
이 세계의 서사는 죽지 않으리라 믿는다
미래로 우리를 태우고 갈 꽃마차는
끝없이 갈라져 나가다가도 끊어질 듯 이어지는
저와 같은 나팔꽃 이야기일 테니까
올부터 우리는 그리운 옛 꽃씨를 모으는 중이다
보내는 주소는, 조그만 종이봉투 나팔꽃 사서함
우리 동네 꽃동네 나팔꽃 우체국
우체국을 가며
황규관
다시 이력서를 써서
서울을 떠날 때마다 추레해진
사진도 붙이고, 맘에도 없는
기회를 주신다면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로 끝나는 자기 소개서를 덧붙여
우체국을 간다
컴퓨터로 찍힌 월급명세서를 받으며 느낀 참담함이 싫어
얼빠진 노동조합이나
제 밥줄에 목맨 회사 간부들과 싸우는 것이
마치 아귀다툼 같아서 떠나온 곳에게
무릎을 꿇는 것이다
밥 때문에
삐쩍 마른 자식놈 눈빛 때문에
이렇게 내 영혼을 팔려는 짓이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
왜 그럴까, 알고 싶지가 않다
나는 이렇게 늘 패배하며 산다
조금만 더 가면 여기서 한 발짝만 더 가면
금빛 들판에서
비뚤어진 허수아비로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것마저 내게는 욕심이었다
이력서를 부치러 우체국을 간다
한때 밤새워 쓴 편지를 부치던 곳에
생(生)의 서랍을 샅샅이 뒤져
1987년 포항공고 졸업 1991년 육군만기제대
이따위 먼지까지 탈탈 털어서 간다.
철산동 우체국
황규관
내가 너에게 편지 부치러 갈 때
한가한 우체국 입구에 나와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 인사하던 우체국장 아저씨
꼭 나의 비밀을 아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뚱뚱한 우체국 아가씨가 볼까봐
얼른 편지를 부치고,
그리고 얼마나 후회했던가
내 뜨거운 편지가
지구를 삼천댓 바퀴 돌다 도착했으면 싶었다
사랑한다는 구절에 세월의 곰팡이가 슨 채
이쁘게 늙은 너의 손주 손에 배달되어
노인대학 야유회 간 너를 기다리든지, 아니면
먼지가 더께로 낀 너의 창문을 기웃거리다
수취인 불명이 찍혀
바람이 내 무덤 앞 넓적바위에
일몰 직전 햇살처럼 쓸쓸히 반송해주길
나는 정말 얼마나 꿈꾸었던가
셔터가 내려진 철산3동 우체국
어둠 속에서 넋없이 바라보다 돌아선 날
내 방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십억 광년쯤 떨어진 별에 들렀다 갈
편지를, 너에게 쓰기로 했다
김설하
소리 없이 쏟아지는 눈송이처럼
닿으면 녹아 없어질 것만 같은
긴긴 겨울밤 잠 못 이루고 애태웠던
수줍어 말 못한 고운 사연을 엮어
장문의 편지를 썼습니다
시린 겨울바람이 묻지 않게
따스한 가슴에 대고
손금으로 꼭꼭 누르며 우체국 가는 길
당신 손에 받아 들고
환하게 웃는 모습이 떠올라
연지 볼이 빨갛게 달아오릅니다
지난 가을을 건너온
섬유질뿐인 마른나무가지도
저 홀로 부끄러워 옆구리를 비비더니
몇 잎 남은 잎새를 수줍게 흔들어줍니다
받아보기 전에 많이 궁금하실까봐
마지막 구절만 읽어 드릴게요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름 모를 풀꽃의 향기 같은
수줍은 내 사연을
고스란히 당신께 전하기 위해
하늘이 맑고, 청한 바람 부는 날
내 지문이 묻어있고
내 사랑이 가득 밴
편지를 부치러 우체국에 갑니다
오늘도 우체국에 간다
서경원·
오늘도 난 우체국에 간다
마른 잎 수북히 추억처럼 쌓인 길
홀로 걷는 외로움도 축복이라며
하늘 호수에 담근 흰 구름
청량한 햇살에 말린 단풍잎과
그늘 한 점 없는 구절초의 보랏빛 미소
잔가지 눈물처럼 흔드는 방울새 울음소리
하나도 새지 않게 쪽빛 한지에 싸서
네 이름 꽃씨처럼 새긴 봉투에 넣고
떨리듯 기도를 하지
네 품에 안길 이 편지 바로 나였으면...
편지를 물고 가는 흰 제비도
기쁘게 날갯짓하겠다
오늘도 나는 우체국에 간다
너에게 나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
이생진
현명한 바도 아니고
섬 하나를 시멘트로 뒤집어씌우는 사업
오늘은 바람 때문에 일손을 놓은 인부들이
어디서 낮술을 들고 있을까
어젠 우체국 문도 아예 닫아 버렸더니
오늘은 문만 열어 놓고 무엇들을 할까
배가 들어오지 않으니 들어올 행낭이 없고
배가 뜨지 않으니
나갈 행낭이 없어
이런 때 우체국 직원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우체국에서
이향아·
우표를 산다.
11월 해풍에 엽서를 쓴다
아슬한 고향의 열차를 타듯
저 창구에는 숱한 사람들이 뿌리고 간
세세한 통사정
내가 또 두고 갈 쓸쓸한 고백
우주의 귀퉁이
협소한 주소에
당신은 내가 아는 땅 위의 한 사람
벌거벗은 목숨 곤곤한 물살을
순수의 바가지로 길어 올려서
떠나 보내야지,
속죄하듯
풀어서 전해야지
오늘도 흐린 날씨
자욱한 먼지 속에
창천에 파묻힐라
매운 눈물
한 방울
우체국
탁영완·
손바닥 둘만한 행복
하나로 접어 규격봉투에 넣어
네게 부치마.
하늘로 넘나드는
마음 묶어
되도록 작게 여미어 싸 무게를 달면
그토록 엄청나던 무게
가장 작게 오그려
수취인 분명한 소포로
네게 부치마.
계절의 사태진 숲에서
아직도 집이 없어
눈물 어린 감정, 그러고 있거든
허공세계 돌아온 바람등에 실어
너만이 알아볼 듯
물들인 낙엽으로 그렇게
네게 띄우마.
우체국의 라일락
강은령
·
우체국을 들어서는데
어디서인가
사과씨 내음이 풍겨왔지요
나오면서 보니
연보랏빛 라일락이 부풀어 있었어요
거리엔 연한 순 돋은
가로수가 사열하는 동안
달려가는 자전거 양철통 안의 솜사탕처럼
달콤하달 수만은 없는
당신의 막무가내인 프로포즈 마냥
라일락은 즐거운 편지로
하늘에 씌어져 있었답니다
우체국 계단
김충규
우체국 앞의 계단에
나는 수신인 부재로 반송되어 온
엽서처럼 구겨진 채 앉아 있었다
빨간 우체통이 그 곁에 서 있었고
또 그 곁에는 늙은
자전거가 한 대 웅크려 있었다
여름의 끝이었고 단물이 다 빠져나간 바람이
싱겁게 귓불을 스치며 지나갔다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기 위하여
나는 편지 혹은 엽서를 안 쓰고 지낸 지
몇 해가 지났다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애써 기억의 밭에 파종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길 건너편의 가구점 앞에서
낡은 가구를 부수고 있는 가구점 직원들,
그리움도 세월이 흐르면 저 가구처럼 낡아져
일순간 부숴 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는 낡은 가구처럼 고요하게 앉아 있었다
정 그리워서 미쳐버릴 지경에 이르면
내 이마에 우표를 붙이고 배달을 보내리라
우체국의 셔터가 내려가고 직원들이
뿔뿔이 흩어져 갔다 여름의 끝이었고
나는 아직 무성한 그리움의 계절을
맞이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정호승
바다가 보이는 장승포우체국 앞에는 키 큰 소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그 소나무는 예부터 장승포 사람들이 보내는
연애편지만 먹고 산다는데
요즘은 연애편지를 보내는 이가 거의 없어
배고파 우는 소나무의 울음소리가 가끔 새벽
뱃고동소리처럼 들린다고 한다
어떤 때는 장승포항을 오가는 고깃배들끼리 서로
연애편지를 써서 부친다고 하기도 하고
장승포여객선터미널에 내리는 사람들마다 승선권 대신
연애편지 한장 내민다고 하기도 하고
나도 장승포를 떠나기 전에 그대에게 몇통의
연애편지를 부치고 돌아왔는데
그대 장승포우체국 푸른 소나무를 바라보며 보낸
내 연애의 편지는 잘 받아보셨는지
왜 평생 답장을 주시지 않는지
이팝나무 우체국
박성우
이팝나무 아래 우체국이 있다
빨강 우체통 세우고 우체국을 낸 건 나지만
이팝나무 우체국의 주인은 닭이다
부리를 쪼아 소인을 찍는 일이며
뙤똥뙤똥 편지 배달을 나가는 일이며
파닥파닥 한 소식 걷어 오는 일이며
닭들은 종일 우체국 일로 분주하다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는 다섯이다
수탉 우체국장과 암탉 집배원 넷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열심이다
도라지 밭길로 부추 밭길로 녹차 밭길로
흩어졌다가는 앞다투어
이팝나무 우체국으로 돌아온다
꽃에 취해 거드름 피는 법이 없고
눈비 치는 날조차 결근하는 일 없다
때론 밤샘 야근도 마다하지 않는다
빨강 우체통에 앉아 꼬박 밤을 새고
파닥 파다닥 이른 우체국 문을 연다
게으른 내가 일어나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일을 나가거나 말거나
게으른 내가 늦은 답장을 쓰거나 말거나
이팝나무 우체국 우체부들은
꼬오옥 꼭꼭 꼬옥 꼭꼭꼭, 부지런을 떤다
빨간 우체통 앞에서
신현정
새를 띄우려고 우체통까지 가서는 그냥 왔다
오후 3시 정각이 분명했지만 그냥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지만 그냥 왔다
난 혓바닥을 넓게 해 우표를 붙였지만 그냥 왔다
논병아리로라도 부화할 것 같았지만 그냥 왔다
주소도 우편번호도 몇 번을 확인했다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그대여 그 자리에서 발길을 돌려서 왔다
우체통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알 껍질을 톡톡 쪼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그냥 왔다
그대여 나의 새여 하늘은 그리도 푸르렀건만 그냥 왔다
새를 조각조각 찢어버리려다가
새를 품에 꼬옥 보듬어 안고 그냥 왔다.
장생포 우체국
손택수
지난 밤 바다엔 폭풍주의보가 내렸었다
그 사나운 밤바다에서 등을 밝히고
누구에게 무슨 긴 편지를 썼다는 말인지
배에서 내린 사내가 우체국으로 들어온다
바다와 우체국의 사이는 고작 몇미터가 될까 말까
사내를 따라 문을 힘껏 밀고 들어오는 갯내음,
고래회유해면 밖의 파도 소리가
부풀어오른 봉투 속에서 두툼하게 만져진다
드센 파도가 아직 갑판을 때려대고 있다는 듯
봉두난발 흐트러진 저 글씨체,
속절없이 바다의 필체와 문법을 닮아 있다
저 글씨체만 보고도 성난 바다 기운을 점치고
가슴을 졸일 사람이 있겠구나
그러고 보면 바다에서 쓴 편지는 반은 바다가 쓴 편지
바다의 획순을 그대로 따라간 편지
수평선을 긋듯 반듯하게 접은 편지를 봉투 속에 집어넣고
뭍에 올랐던 파도 소리 성큼성큼 멀어져간다
뿌- 뱃고동 소리에 깜짝 놀란 갈매기 한 마리
우표 속에서 마악 날개를 펴고 있다
명자나무 우체국
송재학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태지(苔紙)도 여전하다
화두(花頭) 문자로 씌어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 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 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불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별돌에서 피어나는 건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 간다 *
가을 우체국
문정희
가을 우체국에서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인보다 때론 우체부가 좋지
많이 걸을 수 있지
재수 좋으면 바닷가도 걸을 수 있어
은빛 자전거의 페달을 밟고 낙엽 위를 달려가
조요로운 오후를 깨우고
돌아오는 길 산자락에 서서
이마에 손을 동그랗게 얹고
지는 해를 한참 바라볼 수 있지
시인은 늘 앉아만 있기 때문에
어쩌면 조금 뚱뚱해지지
가을 우체국에서 파블로 아저씨에게
편지를 부치다가 문득 시인이 아니라
우체부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다
시가 아니라 내가 직접
크고 불룩한 가방을 메고
멀고 먼 안달루시아 남쪽
그가 살고 있는
매혹의 마을에 닿고 싶다고 생각한다
우체국 가는 길
이해인
세상은
편지로 이어지는
길이 아닐까
그리운 얼굴들이
하나하나
미루나무로 줄지어 서고
사랑의 말들이
백일홍 꽃밭으로 펼쳐지는 길
설레임 때문에
봉해지지 않는
한 통의 편지가 되어
내가 뛰어가는 길
세상의 모든 슬픔
모든 기쁨을
다 끌어안을 수 있을까
작은 발로는 갈 수가 없어
넓은 날개를 달고
사랑을 나르는
편지 천사가
되고 싶네,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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