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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9월 23일 날씨 맑음
강원도 태백으로 떠나는 날 ~ !!! 우리의 목적지인 돌구지까지 가는 데 5시간이나 걸린다고 한다. 많은 것을 경험하러 가는데 그까짓 5시간쯤이야..ㅋ 평소 멀미를 많이 해서 걱정이 되는 나였지만 기관에 대한 기대감으로 사기 충전~ 기관에 도착하는 시간까지 지루함을 덜기 위해 민정언니와 혜림 학우가 차량 레크레이션을 맡아 진행했다. 멀미 때문에 레크레이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게 너무 미안하다. 민정언니, 혜림아~~ 미안해. 기관에 도착하기 한 30분 전에 막 일어나서 잠이 덜 깬 눈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깊고 큰 산들과 그 산 옆에서 같이 어울려 있던 안개들이 너무 운치가 있었다. 고도가 높아서이지 귀도 아파왔다. 하지만 바깥의 경치를 보느라 귀가 아픈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여차저차해서 드디어 우리의 숙소로 도착~ 도착하니 기관 식구들이 우리를 반겼다. 인사를 나눈 뒤 화이트 보드에 쓰여져 있는 문구를 봤다. “반갑습니다. 충남대.”기관의 작은 배려였지만 그것 하나에도 너무 따뜻한 인상을 받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우들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각자 배정된 방에 짐을 내리고, 필기도구를 챙긴 채 김동찬 실장님과의 잠깐 동안의 만남을 가졌다. 승민 선배님이 오리엔테이션 하실 때 봤던 사진 속에서의 모습과 똑같았다. 승민 선배님께서 익히 말씀하시던 실장님의 미소. 너무나 온화했고 아름다웠다.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너무나도 순수해 보이셨다. 좋은 환경 속에서 계셔서 그런지 더욱 빛나 보였다. 김동찬 실장님은, 우리에게 70년대의 이 지역 사진을 보여주었다. 정녕 이 사진 속 마을의 과거란 말인가..!! 도저히 믿을 수 없을 광경이었다. 그 사진을 본 우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정부의 폐광 조치로 인해 그렇게 마을이 배추밭으로 변했다니 너무 안타깝고 슬픈 현실이었다.
이렇게 잠깐 얘기를 나누고 나서 우리는 박미애 간사님과 김동찬 실장님을 따라 연탄공장을 향했다. 이슬비가 내렸지만 결코 이슬비가 우리를 막을 수 없었다.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역사회 탐방을 했다. 버스에서 내려 주위를 둘러보니 정말 지대가 높고 산도 깊고 푸른색이 많았다. 푸른색을 보니 마음이 너무 평온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걸.. 땅바닥이 다 검네..?? 왜 그럴까? 나는 그 동안 도시생활에 너무 익숙해져 연탄이란 걸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나중에 짱님의 말씀에 의하면, 석탄 재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처음에 이게 석탄인지 모르고 그냥 갔다가 신발과 옷을 버렸지만 그래도 연탄을 만드는 과정을 알게 되어서 좋은 시간이었다. 탐방하는 과정에 연탄을 싣는 아저씨들의 손놀림을 봤는데 예사롭지 않았다. 요즘 쇼프로에서 무모한 도전이라고 해서 연탄 옮기는 걸 했었는데 그때 차승원은 3분정도도 채 못하고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는데, 이분들은 그 힘든 일을 척척해내셨다. 역시 아무나 못하는 일인 것 같았다.
연탄 만드는 과정을 설명을 다 듣고 우리는 탄방동으로 향했다. 대전 탄방동?! 지금 대전 탄방동으로 갈 리가 있는가.ㅋㅋ 이 곳은 기관방문 오기 전에 오리엔테이션 할 때 승민 선배님께서 보여주신 아지트 사진 속 마을이었다. 우리는 그 아지트로 gogo 했다. 가는 길에 우리는 닭소리를 들었다. 옆에서 가는 학우 중 한명의 말 : “이야. 진짜 닭 울음소리 오랜만에 들어본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들어보는 소리였다. 할머니 댁에 가면 그 때만큼은 닭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나는 그걸 미처 알지 못했다. 글을 쓰는 이 순간 깨달았다. 너무 주위 환경에 무신경했던 내 자신을 반성해본다. 사진으로 보던 곳을 우리는 실제로 확인했다. 모두의 손길이 느껴지는 이곳 너무 따뜻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아지트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나서 우리의 버스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가는 길에 양복을 봤다. 70년 유행했던 양복들. 너무 신기하고 재미있어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여기에 빠져있는 동안 나는 너무 뒤쳐져 홀로 남겨졌지만 나는 꿋꿋이 사진을 찍고 버스를 타러 갔다.
이제 우리 숙소로 돌아와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고도의 화력을 지닌 우리의 버너 때문에 우리의 밥은 성공적으로 잘된 밥으로 우리는 고추장 열무김치 참기름을 붓고 열심히 비볐다. 그래서 맛있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열무비빔밥 완성~!! 우리는 기사아저씨와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기사아저씨도 우리의 열무비빔밥을 보시면서 예전 생각이 많이 나신다고 하면서 맛있다고 극찬을 해주셨다. 역시. 우리 1조^^ㅋ 우리는 배불리 저녁을 먹고 우리의 목적(??)인 강의를 듣는 시간이 돌아왔다.
먼저 박미애 간사님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이 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겸손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내 자신이 남들 보다 못하면 자책하기 일쑤였다. “나는 왜 그럴까? 남들은 안 그러는데 참 못났다.”라며 우울감에 빠지곤 했었다. 하지만 박미애 간사님은 자신의 부족함이 다른 사람의 재능, 잠재력을 발견하게 해주기 때문에 자신이 사회복지를 하게 되었고, 이런 사회복지는 자신을 성찰시키고 자극한다고 하셨다. 전공이 지역사회실천이라고 하셨는데 솔직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해서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그만큼 나는 나의 그릇이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인드를 키우기 위해서 먼저 나는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릇, 역량을 키워야 되겠다고 절실히 느꼈다. 하지만 지역사회를 바라볼 때는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지역사회는 서로 같이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대하 듯 소중히 다루라는 말씀을 나는 가슴에 새겼다.
한 시간 동안 나눔을 가진 뒤 10분을 쉬었다가 우리는 큰소리로 “김동찬 실장님~~ 김동찬 실장님~~.”을 외쳤다. 드디어 환한 미소를 머금은 김동찬 실장님이 내려오셨다. 먼저 대학 시절에 쓰신 글을 우리에게 읽어주셨다. 전문직. 과연 우리는 전문직일까? 전문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좋다. 하지만 자신이 전문직이라고 해서 다른 사람과 선을 긋는 것은 문제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효율적으로 클라이언트에게 다가가기 위해 여러 전문직들이 다양한 시각으로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바라보고 해결해야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실장님은 1기 광활을 설명해 주셨는데 프로그램 자체에 나는 감동을 받았다. 아이가 주인이 되는 프로그램. 이때까지 복지라 하면 경제적으로, 심리적으로, 신체적으로 등등 불편함이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철암의 복지 방식은 내가 알던 것과는 달랐다. 철암은 지역 사회 자체, 클라이언트가 주인인 것이다. 내가 만드는 방학,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아이들 스스로 자신들의 의지에 따라 선택하는 복지. 너무나 환상적이고 매력적이었다. 이와 상반되게 일방적인 복지 혜택을 제공 하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 실장님께서는 비록 가진 것은 많이 없지만 서로 나누고 의지하고 믿던 사람들이 후원으로 인해서 서로 인색해지고 누구에게 더 많이 줬느냐에 대해서 싸우게 되면서 결국 서로 등을 돌리게 된다는 사례를 들려 주셨다. 그 사례를 들으면서 나는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클라이언트의 결정권 없이 수동적으로 복지를 제공하면 그 만큼의 효율이 떨어지는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클라이언트를 좀 더 편안한 환경에서 지내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제공한 복지가 오히려 편안하고 안락한 마을을 순식간에 삭막하고 인정 없는 마을로 변하게 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대학 시절에 자전거 순례, 극한 상황에 도전을 많이 했다던 김동찬 실장님. 자신과의 싸움? 자전거 순례를 하면서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을 때 용기를 준 것은 주변 환경, 멋진 경치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이번 여름 방학 때 무섭고 힘들 것 같다고 지레 겁먹고 해보지 못한 자전거 여행을 하고 싶어졌다.
이렇게 얘기를 마치고 김동찬 실장님께서 내일 인사를 제대로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악수를 하자고 요청을 하셨다.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김동찬 실장님과 박미애 간사님과 함께 악수를 하면서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너무 좋았다. 얘기를 할 때 항상 눈을 맞춰주시는 두 분께 너무 감사했다.
두 분의 강의를 듣고 나서 우리는 철암 ‘지킴이’ 원기준 소장님을 기다렸다. 지금 북한에서 오고 계시는 중이라고 한다. 북한...? 무슨 일로 북한까지 다녀오시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앞서 우리는 김동찬 실장님과 박미애 간사님을 통해 광산 사회사업 연구소의 비전과 목표를 어떻게 풀어내고,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드디어 원기준 소장님께서 도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매일 빡빡한 일정으로 고단함에 다소 지쳐있는 소장님을 박수로 맞이했다. 피곤한 기색을 보이시지 않고 소장님은 북한에서 가져오신 사탕을 내보이셨다. 모두들 난생 처음 보는 ‘북한산 사탕’에 신기해했다. 특별할 것도 없었다. 사탕 봉지는 촌스럽기 이를 데 없었지만 마치 어린 아이처럼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입 ? 출국 서류 확인 과정에서의 착오로 결국 허가서 없이 북한을 다녀오셨다는 소장님은 남북 분단 이후 이런 경우는 처음일 거라며 이야기의 운을 떼셨다.
요즘, 고유가 시대에 지친 국민들이 점차 연탄 보일러로 눈길을 돌린다는 소식. 이렇듯 우리나라 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던 ‘연탄’은 또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더 재미있는 것은 철암에서는 연탄이 북한에 무상으로 지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소장님은 지금 막, 96만장 째 연탄을 북한 주민들의 감사함과 맞바꾸고 돌아오신 후 뿌듯한 숨을 가쁘게 내쉬셨다. 소장님은 통일이 가까워진 느낌이라며 밝게 웃으셨다. 이곳에서 일을 하게 되면 많은 도전적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하셨다. 사회적 문제와 개인적 가치간의 갈등을 고집스럽게 극복해 내며 이 곳 철암에 젊은 날의 열정을 ‘올인’ 하셨다는 말씀에 뭉클해짐을 느꼈다. 경제를 살리기 위해 시작한‘카지노 사업’ 이후 오히려 지역 사회 간 그리고 주민 간 갈등만 초래했다는 이야기에서는 씁쓸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가시밭길 이었지만 즐거웠고, 가치 있었던 철암에서의 생활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씀에 전율이 느껴졌다.
“소명감, 열정, 순수함을 가져라.”, “지식은 사람을 바꾸기 힘들다. 삶에 대한 진지함이야말로 진정한 깨달음을 줄 것이다.”라는 소장님의 말씀처럼 이보다 더 살아있는 인생 교훈이 어디 있을까? 이 말씀 한마디만큼은 우리 사회복지학과 학우들 모두의 가슴에 오래 오래 남아있을 것이다.
원기준 소장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우리는 인형사 세트 안으로 공포체험을 하러 3명이 1개 조로 나누어 들어갔다. 상철이와 유미와 함께 세트장으로 들어가서인지 별로 무섭진 않았지만 평소 개를 무서워하는 나는 공포체험보다 개들이 더 무서웠다. 왜 그렇게 개들이 무서운지. 정말 개를 예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할 정도이다. 그래서 힘들었지만 무사히 공포체험을 마친 나와 학우들은 잠을 청했다.
2005년 9월 24일 날씨 : 진짜 맑음
7시 기상. 짱님의 알람을 듣고 힘들게 일어난 우리는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산책을 나갔다. 얼굴을 찌푸리며 나갔지만 우리를 반기는 상쾌한 공기는 우리의 기분을 들뜨게 했다. 도시의 일상에서는 맡아볼 수 없었던 향기. 너무나 상큼했고 향긋했다. 산책이라는 명목 하에 나갔지만 완전 산행. 평소 운동량이 부족했던 터라 나에게는 너무 먼 거리였지만 높은 곳에 올라가서 밑을 내려다 본 경치란 최고였다.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나는 그 정경이 너무 아름다워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었지만 그때의 생생함과 감동까지 찍히지 않아서 안타깝다. 너무 많은 걸 바라는 건가??ㅋㅋ 산책을 마치고 우리는 간단하게 씻은 다음 아침을 준비했다. 아침은 맛있는 짜장밥^^ 역시 아침밥은 꿀맛이다. 우리는 밥을 먹고 나서 롤링페이퍼를 쓰고, 우리가 이 방을 썼다는 흔적이 없도록 방을 깨끗이 치웠다. 평소 때는 항상 빗자루로 쓸었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히 청소기로 청소를 했다. 역시 청소기가 편하긴 편하다. 깨끗이 정리한 다음에 우리는 소장님과 함께 단체 사진을 찍고 선물 증정식을 한 다음에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버스에 다시 올랐다. 철암으로 올 때의 활기차던 버스의 분위기와는 달리 다들 잠에 취한 버스. 그래서 버스 안이 고요하다. 공포체험을 하느라 피곤했던 지라 모두들 피곤했던 모양이다.
우리는 이렇게 기관 방문을 마쳤다. 이번 기관 방문을 통해 세상은 참 넓고, 우리가 모르는 많은 일이 진행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철암의 연탄 공장은 크지 않고 일하는 노동자 분들도 평범하지만 이곳에서 생산되는 연탄은 우리나라 전국 각지는 물론이고 북한에까지 보내어져 우리네 아랫목을 따뜻하게 덥혀주고 있다. 이 곳 철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활동도 작게는 지역사회를, 나아가서는 우리 국토 전체를 따뜻하게 밝히고 있었다. 그 온기가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복지학과 학우들 가슴 속에도 전해진 느낌이다. 뜻 깊은 방문이었고, 앞으로 사회복지 학도로서 사회복지의 진정한 가치를 추구함에 있어서 정말 큰 경험이 된 듯하다. 다만, 학우들의 사전 공부 미흡으로 쌍방향적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우리는 소장님, 실장님, 간사님의 설명을 듣기만 했을 뿐, 좀 더 활발한 토론이나 질문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진행 방식과 토론 방식을 모색해 보아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