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의 딸도 아니라니요?
무릇 모든 사람에겐 반드시 엄마가 있는 법인데, 이 엄연한 사실을 부정하는 듯한 제목을 정한 감독이 말하고자 한 바는 무엇일까요...
인간이란 어떤 근원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주어지는 사건속에서 새롭게 생성되어지는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라고 저는 해석하고 싶은데요....
정작 홍상수 감독은 자신의 영화에 대하여 너무 많은 해석과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전작 ‘잘 알지도 못하면서’ 라는 작품 제목이 말해 주듯이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세상사를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려고 하는 점을 홍상수 감독은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실 그런 뉘앙스의 대사가 영화 ‘하하하’에서도 두 차례 나옵니다.
영화속 시인으로 나오는 김강해가 자신에게 문소리가 선물로 준 꽃 화분을 보면서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당신은 잘 알지도 못 하면서 이 꽃의 상투적 이미지를 보려고 하는데 정말 이 꽃의 본질을 아느냐고 화를 내지요.
또한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창 밖의 거지를 보면서 우리가 정말 저 거지를 제대로 알 수 있느냐고 목소리를 높이지요.
그러고 보니 영화 초반부에서 주인공 해원(정은채 분)은 길거리에서 우연히 유명한 프랑스 여배우를 만나서 굉장히 기뻐하는데요... 특히 그 여 배우가 해원에게 자신의 딸과 닮았다는 말에 감격하며 너무나 행복한 표정을 짓습니다. - 극중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입니다 -
이렇듯 해원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많은 갈등을 보여 줍니다.
엄마 김자옥이 과거를 회상하며 변치 않는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것과는 대비를 이루지요. 그런면에서 영화의 배경이 된 서촌 마을은 제격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장소에서 어떤 우연한 영감을 느끼고 그것을 작품의 모티브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컨대 ‘강원도의 힘’이라는 제목을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품었을 강원도 여행에서의 불온한 욕망의 카니발 같은 것이 연상되지 않나요... 아님 말고요^^*
해원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혹은 무의식의 욕망을 찾기 위해 제도와 관습의 알레고리인 빗장을 열고 저 너머의 세계로 들어 섭니다.
영화에서는 사직단의 빗장을 열고 들어가 보는 모습으로 그런 욕망을 은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빗장 저 너머의 세계는 그렇게 달콤하지 많은 않습니다.
그 곳 역시 아픔이 배어있습니다.
해원과 사랑에 빠진 성준(이선균 분)도 고통스러워 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의 제자 해원을 보면서 예쁘다고 너무 예쁘다고 하면서도 그녀가 같은 학과 친구랑 사귀었다는 말을 듣고 분노하기도 합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상대방이 언제든 자신을 떠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애틋해 하면서도 두려워 하는 법이지요.
내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무조건 나를 따르기만 한다면 거기엔 어떠한 설레임도 없고 고통도 없을겁니다.
그래서 홍상수 영화속에서 불륜의 사랑을 하는 주인공들은 늘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라면서 투정을 부립니다.
남자 주인공 성준은 제자인 해원을 배려하기 보다는 자기만족에만 빠져 있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봅니다. 그리고 무책임하게 여기를 벗어나자고 제안도 합니다.
그러면 여자 주인공 해원은 갈등하는 성준에게 잘 생각해 보라고... 아이도 생각하라고...넌지시 충고(?)를 합니다.
그래서 ‘여자는 남자의 미래’ 인가 봅니다. -‘여자는 남자의 미래’는 홍상수 작품임 -
너무 예쁘다고 했다가 또 금새 티격태격 싸우는 모습을 보면 저건 삶의 부조리도 아니고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인 한 그것은 사랑의 본성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질투와 상처는 남녀간 사랑의 엄연한 속성일 테니깐요.
홍상수 감독은 남녀간의 사랑을 결코 신비화해서 그려내지 않으면서 이상하게 다시 한번 반추하게 하는 점이 있는데요...
나는 이 점이 홍상수 감독의 탁월함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소한 일상에서 정직하게 삶의 본성과 대면시키는 것.
그런데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점 때문에 홍상수 영화는 영화 같지 않고 시시하고 지루하고 맨날 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고 하면서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면 취향의 문제일 수 있을 겁니다.
박찬욱 감독 영화처럼 미쟝센과 편집이 뛰어나서 영화 장면마다 스타일리쉬한 부분이 많아 보는 맛도 있고 미학적으로 완성도가 뛰어나게 느껴질 것이고, 그런 면을 좋아할 수 있을 겁니다.
홍상수 감독은 투박하게 있는 그대로 보라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영화를 통해 전달하는데요... 매번 비슷한 이야기에서 조금씩 변주되는 것이 오히려 울림을 줍니다.
그러니까 스토리 텔링은 조금 지루할지언정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네 삶이 반복되는 일상속에서 작은 차이들이 늘 존재하고 생각들도 조금씩 변해가고, 그렇게 우리를 어떤 고정된 틀에 가두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라고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카톡 프로필 글귀도 ‘아이들을 있는 그대로 보자’로 바꿨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교사 연수를 가면 오락시간에 사회를 보는데요...
콘티를 완벽하게 짜서 그대로 하는 것 보다는 그 때 그 때 분위기에 맞게 애드립을 치며 사회를 보는데, 훨씬 자연스럽고 분위기를 재미있게 끌고 갑니다.
학교 수업도 내 이야기를 녹음기 틀 듯이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반응에 따라 적절히 변주를 가하는데 훨씬 자연스럽게 진행됩니다.
홍상수 영화의 대사를 보면 일상적인 것 같은데, 반복과 변주가 있고 묘하게 철학적인 냄새가 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건지는 건 영화를 보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겠죠^^*
그런면에서 나는 홍상수 감독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러움을 느끼면서도 무언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번 영화에서도 홍상수 감독은 꿈을 통하여 빗장 너머의 세계를 현실과 자연스럽게 포개어 놓는데요.. 그 연출 솜씨가 한층 업그레이드 된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번 홍상수 영화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도 역시 홍상수스러운 영화인데, 특별히 제목이 끌리어 한 동안 제목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결론은 ‘인간은 새로운 배치에 의해서 끊임없이 생성되어진다‘입니다.
그래서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첫댓글 노자의 道가 만물을 낳은 절대적 근거로서 우리가 순응해야 할 자연의 질서이고
장자의 道는 우리가 만들어 나가는 것으로서 타자와의 사건을 중시합니다.
홍상수 감독은 노자와 장자의 道를 고민하다 우리에게 해원이를 보냈나 봅니다
참 심오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