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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달수 원문보기 글쓴이: 낙민
청량산유록(淸凉山遊錄) 김득연(金得硏)
1579년(선조 12) 가을 8월 26일 기해,
가야(佳野)에서 수연(壽宴)을 베풀었다.
술이 얼큰하게 취하자 내가 술잔을 잡고 여러 벗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가대인의 명을 받들어 장차 청량산에 노닐려고 하는데,
어찌 우리 동지들과 함께 하지 않겠는가?”
만좌의 손님과 친구들이 모두 입을 모아 찬성하였다.
가대인이 또 명하시길,
“너희들이 유람 가는 것은 정말로 멋진 일이다.
부디 남악(南嶽)의 고사에 의거하여 1백 편의 시를 이루도록 하여라.”
나는 삼가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수연이 다 끝난 뒤에
마침내 단양 박희고(朴希古)와 화산 권사민(權士敏),
권군앙(權君仰), 봉성 금여약(琴汝若), 단산 우계수(禹季綏),
금산 박백어(朴伯魚), 박경술(朴景述) 및 나의 아우 김숙 등과
함께 유람 가자는 약속을 단단히 맺고는
역동서원(易東書院)에서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다만,
광릉 안달원(安達遠)이 앞서 이미 같이 가기로 약속하였거늘,
지금 마침 잡다한 일에 시달려서 형편상 동행할 수가 없으니,
이것은 한탄할 만하다.
다음달 5일 계묘일에 권사민과 내 아우와 함께 1백 수의 시를 지으라는 부친의 엄명을 받들어,
닷새 먹을 양식을 지니고 한 병의 술을 차고서,
키가 석 자 되는 아동을 데리고,
필마로 가을바람을 맞으며 호탕하게 내달려 출발하였다.
쾌활하기가 마치 큰 고니가 티끌세상의 조롱을 벗어나 푸른 하늘로 솟구치듯 하였다.
김지숙(金止叔) 형제를 방잠(芳岑)의 여막(廬幕)에서 두루 찾아보고,
김달원(金達遠)과 금훈지(琴壎之) 어른을 오천(烏川)에서 방문한 뒤에,
가다가 비암(鼻巖)에 이르렀다.
비암의 형태가 기이하고 우람하기에 말에서 내려 걸어서,
그 위에 올라 보았다.
비암은 평평하게 먼 들판을 바라보고,
굽어 장강에 임하였으니,
역시 승경지였다.
길을 다시 떠나 선성(宣城)을 거쳐,
물 흐름을 따라서 말 가는 대로 가다가,
앞길을 농촌 아낙에게 묻고,
청현(廳峴)을 넘어서 낙천(洛川)에 이르렀다.
나루가 얼마나 깊은지 알지 못하였으므로,
말을 세워 두고 한참을 있었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 물을 건넌 뒤에 곧바로 월천(月川)으로 향하여 확연정(廓然亭)에 올랐다.
확연정에는 머리 땋은 아동이 하나 있는데,
외모가 단아하고, 글자 읽는 소리가 낭랑하였다.
나를 보더니 앞으로 나와 절하며 맞는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곧 권미도(權味道)의 처조카로 채간(蔡衎)이 그의 이름이었다.
이 정자는 끊어진 산기슭을 누르고 평평한 호수를 띠고 있으며,
사방으로 긴 들판이 바라보여 시야가 넓게 트였다.
곧 채간의 왕부(조부) 채상사(蔡上舍)가 지은 것이다.
확연정의 뒤에는 소나무가 열 지어 3, 4리쯤 둘러 있다.
역시 채간의 장인 권첨지(權僉知)가 손수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권미도와 함께 역동서원으로 향하였다.
솔가지를 태워 못물을 비추면서 오담(鰲潭)에서 배를 띄우니,
하늘이 강에 비친 맑은 밤에 외론 배로 돌아가는 흥취가 일어,
아득히 티끌세상을 버리는 듯한 취향이 일었다.
물은 얕고 모래밭은 앞으로 나와 있어서,
배가 막혀 더 갈 수가 없었다.
성(星)의 무리에게 등에 업고 강기슭으로 올라가게 하고는,
말을 타고 숲을 뚫고 나아가 솔숲 길로 들어가 서원에 도착하였다.
이미 밤이 한창 깊었다.
서원의 문은 이미 닫혔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한참 내자,
재노(齋奴)가 자물쇠를 열어준다.
그래서 마침내 서원으로 들어갔다.
삼성재(三省齋)에는 김명보(金明甫)와 금언신(琴彦愼)·금언강(琴彦康) 형제가
온돌에 거처하고 있으면서,
조시재(趙是齋)의 강의를 날마다 듣고 있었다.
안면은 비록 새로 사귀는 것이지만,
정은 이미 예전에 만나본 사람과도 같았다.
대개 거처하는 곳이 가까워서, 이름을 들은 지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들과 등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여 이야기를 나누다가
같은 잠자리에 나란히 누워서 잤다.
강가의 서재에서 맑은 꿈을 꿈이 신선 사는 열두 봉우리에 먼저 감도는 것 같았다.
9월 초하루 갑진일에 건과 의복을 갖추고 새벽에 상현사(尙賢祠)를 배알하였다.
물러나서 둘러보니, 당의 편액은 명교(明敎)이고,
서원의 호는 역동이며, 좌우의 서실은 정일(精一)과 직방(直方)이다.
동재와 서재는 각각 사물(四勿)과 삼성(三省)이다.
무릇 당의 서재의 편액과 벽상의 학규(學規)는
모두 우리 퇴도 선생(이황)께서 붓으로 적어 정해 주신 것들이다.
선현의 자취가 완연히 사람 눈에 남아 있으니,
소자와 후생이 배회하면서 우러러 보며 공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가 있으랴.
여러 벗들과 담론하였다.
얼마 있다가 박경술(朴景述)이 부포촌(浮浦村)에서 묵고 있다가 와서 합류하였다.
과연 그 확연정(廓然亭)에서 지점(指點:약조)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징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희고(希古), 계수(季綏), 백어(伯魚) 등이 티끌세상에 떨어져서
이 멋진 약속을 저버린 것을 깊이 욕하였다.
이에 방향을 바꾸어 도산(陶山)으로 향하였다.
거쳐 가는 길에 한 정자가 날아갈 듯이 솟아
강에 임하여 그림자를 교룡의 굴에 떨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쇄락하여 마치 신선의 집과 같았다.
배회하다가 차마 지나쳐 가기 어려워,
주인공을 만나 뵙고자 청하였다.
주인이 나와서 영접한다.
마침내 애일당(愛日堂)에 올라,
그 어른이 기록해 두신 것을 눈으로 직접 보고,
그 어른이 오르셨던 대에 직접 발로 올라가서,
그 당시 상공의 풍모를 상상하면서 감탄하고 감상하였다.
한참을 서성이다가 사직하고 떠났다.
주인은 곧 상공의 맏아들이신 상사 이숙량(李叔樑)이다.
도산에 들어가 퇴계 선생의 묘정에 공손히 배알하였다.
배알을 마치고,
완락재(玩樂齋)와 암서헌(巖棲軒)을 우러러 보고,
내려와 지숙료(止宿寮)와 관란헌(觀瀾軒)의 바깥에 멈춰 서매,
끼치신 티끌과 남은 향기가 완연히 있는 듯하다.
눈으로 접하고 마음으로 상상하매 움칫 공경의 마음이 일어나서
황연히 신발 신고 지팡이 짚은 선생을 모시고 선 듯하고
선생의 흠흠 기침 소리를 듣는 듯하였다.
물러나 당재(堂齋)를 살펴보았다.
당재는 깨끗하고 맑으며,
창과 궤안이 명랑하여,
정말로 선비가 학문에 노닐고 학문에 쉴 그런 곳이다.
아아, 나는 태어난 것이 후대라서,
시습재(時習齋) 속에서 선생의 옷자락을 추어올리고 선생을 따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것이 평생의 일대 한이 아니겠는가.
서쪽으로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에 올라 탁영담(濯纓潭)을 굽어보았다.
동쪽으로 천연대(天淵臺)에 올라 반타석(盤陀石)에 임하였다.
강가의 기이한 경승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다.
이때에 어부가 어망을 걷어 고기를 잡고 있다.
누구인가 물어보니, 곧 의인촌(宜仁村) 마을의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잡은 물고기를 버들가지에 꿰어 나누어 올려,
손님을 위한 반찬으로 제공하였다.
이윽고 채락이(蔡樂而)가 월천(月川)에서부터 뒤쫓아 와서 이르러 왔다.
밥을 먹은 뒤 함께 출발하여 동쪽으로 향하였다.
5, 6리쯤 가서,
선생의 묘소가 멀리 바라보이기에
말에서 내려 멀리 예배하였다.
그러자 산이 무너진 통탄을 이기지 못할 정도였다.
강의 모래밭을 건너,
작은 고개를 하나 넘자,
역정(役丁) 수십 명이 모여 제방을 쌓고 있다.
금참봉(琴參奉)과 오상사(吳上舍)
두 어른이 도산(陶山)의 학전(學田)을 위하여 경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김에 두 어른께 예알하고,
두 어른을 모시고 담화를 하였다.
한참 뒤에 사직하고 떠났다.
길을 차례로 거쳐 단사협(丹砂峽)에 들어가 백운지(白雲池)에 들렀다.
붉은 벼랑과 푸른 벽이 좌우에 옹위해서 늘어서 있고,
산속 집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어,
마치 도원(도화원)과 방불하였다.
여러 친구들을 돌아보면서,
“태어나 태평성대를 만나지 못해서 평소의 학문을 시행하지 못한다면,
이렇게 널찍하고 한가로운 들판과 적막한 물가에서
비록 송아지를 끌어안고 들어가 몸소 밭을 갈고
나무 열매를 따서 먹고
시냇물을 마시면서 일생을 마친다고 하여도 좋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강가를 따라서 발걸음 가는 대로 가매,
돌길이 구불구불 이어져 말이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걸음걸이는 더욱 힘들어졌다.
말에서 내려 강 머리에 앉아 물을 마셨다.
서너 개 소라 모양의 산이 멋진 모습을 보여,
그 형승이 마음을 통창하게 해 줄 만하였다.
권미도(權味道)가 손가락으로 가리켜 보이면서,
“저 푸른 협곡에 칼로 쪼갠 듯한 곳이 바로 월명담(月明潭)일세.”
라고 하였다.
하지만 험난한 것을 꺼려서 가서 볼 수가 없었다.
심진로(尋眞路)를 넘어서 일동(日洞)으로 들어가 고산도(孤山島)에 올랐다.
고산도는 강가에 서서,
푸른 소라 모양이 한 점을 이루고 있고,
물이 그 아래를 둘러 나가고 있다.
벽담은 천 길은 됨직하다.
고산도의 위는 형세가 높고 네모지며,
바위가 층을 이루어 평평한데,
작은 단을 축성하여 십여 사람이 앉을 수가 있다.
바위 면에 그 호를 적었는데,
수운대(水雲臺)라고 하였다.
이 수운대는 반공(허공)의 구름 속에 숨어 있으면서 천 인(刃) 되는 절벽을 압도한다.
물빛과 산 그림자가 모두 한 빛으로 잠겨 있으니,
그 이름과 부합한다.
고산도의 층 벼랑에는 조대(釣臺)가 있다.
바위 면에는 노선생이 손수 쓰신 필적이 남아 있어,
같이 노닌 분들을 기록하였다.
또한 시를 적었다.
일동의 주인은 금씨의 자제라,
시내 건너편으로 불러 묻던 일이 지금도 있는지.
밭 갈던 농부가 손사래 하지만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서글프게 구름 낀 산을 바라보며 한참을 앉았노라.
이는 대개 명승의 자취이다.
강 위에는 정자가 있고,
정자 아래에는 배가 있다.
강산의 승경을 감상하는 이 취미가
마땅히 적벽(赤壁)의 유람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동의 주인이 마침 재랑(齋郞)으로 나가서,
정자에는 주인이 없고 배만 멋대로 비껴 있다.
여러 벗들과 정자 위에서 유숙하려고 생각하여,
배를 강물에 띄웠으나,
양식 짐을 실은 말이 먼저 돌아가 버렸다.
말을 세우고 주저하면서 곧장 떠나지 못하길 한참이나 하였다.
그 사이에 날이 이미 저녁이 되었다.
다시 길을 가다가 1리쯤 되는 곳에 이르렀을 때
한 승려가 벽암(碧巖)에서부터 손사래를 치면서 와서,
권군앙(權君仰) 형이 고감(高鑑)에서부터 오고 있다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흔연히 소매를 떨치고 노새 등에서 채찍을 휘두르매,
석양에 강가 길에서 신선의 흥취가 재촉하여 일어난다.
구름 산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서고 원숭이와 학은 다투어 영접하니,
나도 모르게 더욱 금회(마음)가 상쾌해졌다.
한 작은 역점(驛店)에 들어갔다.
옛 이름은 나화석천(羅火石川)이고,
지금은 박석(博石)이라 일컫는 곳이다.
말을 둑 머리에 쉬게 하고,
술을 따라 서너 순배 돌리고는 주흥을 그쳤다.
장차 강 바위를 건너려고 하지만,
여울 물살이 거세어서 기마가 나아갈 수가 없어,
자빠져 죽을 염려가 있었다.
마침내 웃옷을 풀고 맨발로 걸어서 나아가며 맑은 물 흐름에 목욕을 하니,
심신이 쇄락하고 버쩍 하다.
역시 한바탕 장쾌한 일이다.
다 건넌 뒤,
흰 바위에 세 사람이 솥발처럼 버텨 앉아,
옷깃을 풀어헤쳤다.
저녁 기운이 서늘한데,
시를 읊으면서 돌아왔다.
또 소를 역점의 사람에게 빌려서 양곡의 짐을 실어 가게 하였다.
막 계곡 어구에 들어서는데,
옛 성이 빽빽한 숲 사이에 우뚝 솟아 있는 듯이 보였다.
승려에게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승려는“지난날 공민왕이 적을 피하던 곳입니다.”라고 한다.
아아, 아무 근거 없는 허랑한 전설이야 온전히 믿을 수야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전쟁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고 재앙을 입던 날에,
적병이 내몰아 쫓아오매
군주가 이런 외진 곳에 숨어서 이제나 저제나 스러질 목숨을 가까스로 부지하고 있었음을 상상하니,
일대의 황폐한 성가퀴가 만고에 수심을 품고 있는 듯하다.
지난 역사의 오류는 따질 것도 못된다.
길을 더 가서 낙수대(落水臺)에 들렀다.
시냇물이 쏟아져 나오고 바위가 이빨처럼 삐죽삐죽하여,
옥소리라 영롱하여 들어보매 사랑스럽다.
계곡의 골짝은 조용하다 못해 고요하고,
수풀은 울창하며,
첩첩 바위는 무리지어 쌓여 있다.
한 승려가 그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이 삼각묘(三角墓)입니다.
지난날에 승려가 연대사를 창건하려고 하여,
삼각의 소로 화해서 재물을 실어다가 역사에 이바지해서,
마음과 몸을 온전히 다 바치다가 어느 날 죽어가서 구덩이를 파서 묻었답니다.”
내가,“신령한 기운을 부여 받아 사람이 되는 법이니,
그 승려가 소로 화했을 리가 없다.
네가 눈으로 그 일을 직접 보았느냐?”라고 하였다.
승려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시냇가 벼랑을 따라서 골짝으로 들어가,
아스라한 돌길을 말이 가는 대로 내맡겨 두었더니,
마음과 뼈가 다 시릴 정도로 두렵다.
층층 진 허공을 고개 쳐들어 바라보매,
기이한 바위가 멋지게 튀어나와 있고,
바위벽이 1천 인 높이로 솟아서는
아지랑이와 노을 속에 숨었다 드러났다 한다.
늠름하여 마치 절의의 선비가 국가의 위기에 홀로 우뚝 서서,
몸을 빼어 도끼를 부여잡고 있는 듯하여 범접하지 못할 기상이 있다.
첩첩 산봉우리는 옥 덩이들이 모여 선 듯하고
가느다란 시내는 옥구슬을 울리듯 하며,
붉은 계수나무는 서리를 띠고 푸른 잣나무는 바람기를 머금고 있다.
마치 열두 봉우리의 뭇 신선들이 구름 비단의 병풍을 열어놓고,
운화(雲和)의 거문고(비파)를 연주하면서
죽 늘어서서 앞으로 나아가는 듯이 여겨졌다.
사자항(獅子項)에 이르자,
돌길이 위태롭게 기울어져 있다.
마침내 여러 벗들과 함께 말을 버리고,
맨 걸음으로 깊은 숲을 뚫고 지나고 층 바위를 발로 밟아 올랐다.
열 걸음에 한 번씩 쉬면서 시를 읊으며 감상하고,
천천히 걸어서 나아갔다.
그러자 경지가 더욱 기이하고 마음이 더욱 쾌활하였다.
그때 홀연 피리 소리가 구름 사이에서 명랑하게 들렸다.
마음속으로,
봉성 금여약(琴汝若)이 피리 부는 동자를 데리고 먼저 이르렀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너무 기뻐서 등 넝쿨을 부여잡고
곧바로 올라가 머리를 쳐들어 아스라하게 높은 산꼭대기를 바라보니,
권군앙(權君仰)이 홀로 요대(瑤臺)에 서서,
큰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 춤을 추매,
산 귀신이 메아리로 화답하고 지는 해가 광휘를 다툰다.
정말로 헌앙객(軒昻客)이라고 이를 만하다.
연대사에 도달하여,
금여약과 권군앙을 보고는,
서로 청안을 열고 함께 평소의 회포를 펼쳐 보였다.
편안하고 느긋하게 웃고,
화락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십 년의 옛 친구를 신선의 산에서 한 번에 만나니,
운수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금산 박춘무(朴椿茂) 경개(景盖)는 곧 권군앙의 당매부이다.
그는 우리 무리가 유람한다는 말을 듣고는 권군앙을 따라왔다.
우리들은 누대같이 생긴 바위에 열 지어 앉아서,
멀리 층층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
잔조(낙조)가 붉은 빛을 칠하고,
허공에 뜬 남기(嵐氣)가 비취빛을 짙게 머금어,
기상이 천번 만번 모습을 변화하여,
잠깐 사이에 구름 기운이 숨을 내쉬었다가 들이마셨다가 한다.
그에 따라 산의 형태가 있다가는 없어지고,
혹은 상투 모양의 모습을 완전히 드러내기도 하고,
혹은 트레머리의 모양을 반만 열어 보이기도 한다.
비록 천문에 대해 말한 추연(鄒衍)이나,
용을 조각한 추석(鄒奭)이라 하더라도
아마도 이 모습을 형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늙은 승려가 운무 속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말하길,
“저것이 축융봉이고, 저것이 금탑봉입니다.
그 다음은 경일봉이고, 그 다음은 자란봉입니다.
또 그 다음은 자소봉, 탁필봉, 연적봉입니다.
다음은 선학봉이고 다음은 연화봉입니다.
그 뒤에는 향로봉이 있습니다.
또 그 뒤에는 내장인봉과 외장인봉이 있습니다.
모두 열두 봉우리입니다.
옛날에는 이름이 없었으나,
주선생 아무개(주세붕)가 처음으로 이름을 붙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내가 한숨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지난날 주회암은 여산에서 기이한 절승처를 만나기만 하면 곧 이름을 지었다.
만약 주부자가 아니었다면,
일만 세대를 거친다고 하더라도 이름이 없을 것이 분명하다.
이 산의 여러 봉우리들은 천 년 동안을 쓸쓸하게 지내다가
한 번 주신재(주세붕)를 만난 이후로 이름을 얻었으니,
이것도 역시 이 산의 행운이다.
하늘이 저물려 하였으므로 지장전(地藏殿)에 들어갔다.
여러 승려들이 따라와서는 등잔불을 사르고 자리를 펼쳐 두었다.
친구들을 불러서 자리에 앉게 하고는,
술병을 열어 잔에 가득 부어 마시면서,
피리 부는 동자에게 피리를 불게 하고
노래 부르는 자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단란하게 밤이 다하도록 지내노라니,
크게 취하여 흥이 일어났다.
문을 밀어 열어젖히고 홀로 서 있자니,
하늘이 고요하고도 드넓어서,
마치 광한전에 있으면서 인간세계를 굽어보는 듯하였다.
이날 밤에 권사민(權士敏)이 장난스럽게,
함께 온 여덟 사람을 여덟 신선에 비유하고,
한사람의 채씨를 청동(靑童)에 견주어,
그 연치(연령)에 따라 열을 짓게 하되,
반드시 아무개 신선이라고 일컫게 하고,
이름이나 자를 부르지 못하게 하였다.
족히 한 번 크게 웃을 만하였다.
마침내 여러 신선들과 함께 베개를 나란히 하고서 잠이 들었다.
을사일에 아침을 먹은 뒤 지팡이를 짚고 절간을 나섰다.
절간의 승려 희조(熙祖)와 계당 (戒幢) 등이 앞을 인도한다.
또 어린 승려가 붓과 벼루를 가지고 뒤에 따라온다.
동쪽으로 작은 오솔길에 올라,
중대에 들어가니,
곁에 새로 만든 불사(佛舍)가 있다.
물어보니,
“시왕전(十王殿)입니다.”
라고 한다.
여러 부처가 법당에 가득한데,
흡사 사람 모습과 같다.
나는 이에 눈을 부릅뜨고 노려보다가,
노하여서 내리치려 하였다.
승려들이 억지로 만류하였다.
나는 말하였다.
“천축의 설이 한 번 말폐(末弊)를 천고에 흘려보내어
인간세상을 속이고 헷갈리게 해서 민심을 구렁텅이에 쳐 넣고 물에 빠뜨리고 말았구나.
누가 선왕의 도리를 밝혀서
불가에 빠진 사람들을 제대로 된 사람으로 만들고
그들이 사는 불사를 사람이 사는 집으로 되돌리겠는가?
불상을 훼손하고 승려를 지팡이로 때리다니,
호영(胡穎)의 정직함에 깊이 느끼는 바가 있도다.”
고도암(古道庵)에 이르자,
병든 승려가 있는데,
요사(寮舍)가 몹시 누추하였다.
결국 들어가지 않고서 곧바로 보문(普門)에 이르렀다.
승려가 포도를 따서 바쳤다.
여덟 신선이 함께 먹었다.
그러고 나서 남쪽으로 금탑을 향하였다.
가느다란 길이 위태롭고 미끄러웠다.
수목을 붙잡으면서 바위에 의지해 가며 거듭 쉬었다.
청동 채군이 피리 부는 자와 함께 먼저 가서,
이미 반야대(般若臺)에 올라서는 몸을 숨기고 간간히 맑은 음향을 자아내매,
쟁글쟁글 하는 옥 소리가 멀리 구름 하늘 속으로 뚫고 들어간다.
마치 왕자진(王子晉)이 구산(緱山)에 올라 피리(笙)를 부는 것 같았다.
치원대(致遠臺)에서 쉬면서 총명수(聰明水)를 마셨다.
치원대는 절벽 위에 있어,
멀리 층층 하늘에 임하여 있다.
늠름하기가 허공으로 치솟는 듯하다.
총명수는 거꾸로 매달린 듯한 벼랑 밑에서 나와,
절구같이 파인 바위에 맑게 뭉쳐 있다.
영롱하기가 빙설과 같다.
역시 하나의 기이한 경관이다.
치원대와 총명수라고 이름 지은 이유를 물었더니,
“유선(유학자이자 신선) 최치원이 이곳에 노닐면서 이 물을 마셨습니다.
그래서 누대는 치원의 이름을 따게 되었고,
물에는 총명이란 호가 있게 되었습니다.”
라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최치원은 열두 살에 당나라에 들어가
스물여덟에 고국으로 돌아와 그 이름이 천하를 뒤흔들어 동방 문장의 비조가 되었거늘,
어느 겨를에 여기에 거처하면서 책을 읽으며 이 물을 마셔서 총명한 기운을 기를 수 있었겠는가 하였다.
혹자는 말하길,
최치원 공이 가야산 해인사에 숨어서 치류(승려)들과 노닐었다고 한다.
최치원 공이 쌓았다는 영주(瀛洲) 등 삼산(三山)의 홍류동(紅流洞) 봉하석(鳳下石)에는
서암(書巖) 유적이 지금도 완연하다.
더구나 지리지와 국사에는 모두,
최치원의 청량사는 곧 합천군 가야산의 월류봉(月留峰) 아래라고 하였다.
어찌 후인이 이 산을 떠받들기 위해서 외람되게
이 산의 이름을 갖다 붙인 것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여기에 실제로 노닌 일이 있었는데,
내가 듣지 못한 것일까?
전설이 의심스럽지만,
짐짓 기록해 두어서,
지혜로운 분이 바로잡아 주길 기다린다.
치원암에 들어갔을 때는 거처하는 승려가 없어,
선탑(禪榻)이 무척 고요하였다.
다만 회나무 그늘이 뜰에 가득하였을 따름이다.
다시 극일암(克一庵)에 들어가서 돌사다리를 따라 올라갔다.
늙은 소나무가 1천 자는 되고 크기는 열 아름은 된다.
극일암 뒤에는 풍혈(風穴)이 있다.
풍혈의 앞에는 목판이 있다.
극일함은 넓고 풍혈은 깊으므로,
비바람이 천년을 내리쳤어도 판목이 썩지 않았다.
옛날부터 전하길,
최치원이 바둑을 두던 널판이라고 한다.
비록 그 설을 믿지는 못하겠지만 치원암에 들어가고 대(臺)에 직접 올라 보고는,
역시 최고운의 사적을 추모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안중사(安中寺)를 거쳐서 상청량사(上淸凉寺)에 이르렀다.
승려가 산과일을 바친다.
곧바로 하청량사(下淸凉寺)로 내려와 고대(古臺)에서 배회하였다.
기이한 경지를 유람하니,
동부(洞府:골짝 세계)가 깊고도 그윽하여,
신령한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들쑥날쑥하게 중첩한 봉우리는 비취빛으로 사방의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고,
높고 낮은 단풍나무는 비단 장막을 일천 장 펼쳐 둔 듯하여,
가을 산의 아름다운 감상을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고대의 뒤에는 샘물이 있어,
졸졸거리며 맑고 시원하게 쏟아져 너무도 사랑스럽다.
한 움큼 움켜쥐어 마시매 가슴속의 맺힌 백만 섬 티끌을 시원하게 씻어 준다.
절의 동쪽에는 작은 암자가 있어,
오두막 서너 칸 집을 엮어 두었다.
초라하고 늙은 승가 홀로 거처하는데,
더러워서 가까이 할 수가 없다.
다시 듣자니 동쪽에 초암이 있다고 한다.
승려가 하는 말이,
길이 험하고 먼데다가 암자가 비어 있어 지키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결국 가지 않기로 하였다.
점심을 든 뒤에 걸음을 오던 길로 되돌려,
김생굴(金生窟)로 향하였다.
맨다리로 벼랑의 잔도를 밟아 오르고
손으로는 등 넝쿨을 붙잡으면서 몸을 기울여 들어갔다.
굴은 층층 벼랑의 아래에 있다.
봉우리는 용약하여 용이 춤추듯 하고
바위는 웅크려서 호랑이가 웅장한 모습을 하고 있는 듯하다.
교묘하게 깎아서 잘 모셔 두었으니,
정말로 천연으로 이루어졌다.
거꾸로 매달린 듯한 벼랑에 폭포가 드리워서,
그 물이 허공에 흩어지며 떨어지니,
푸른 하늘에 우레가 울부짖는 듯하고
백일 아래 빗방울이 드날린다.
지팡이에 의지하여 보매 맑은 상상이 늠연하게 일어난다.
은하수가 거꾸로 흐르고,
석실은 맑고 깨끗하니,
설령 신령한 신선이 있다면 필경 이곳에 거처할 것이다.
나는 말하였다.
“김생은 신라의 원성왕 대 사람으로 필법이 동국에서 제일이다.
일찍이 그의 글자를 보았더니 자획이 초경(峭勁:엄하고 굳셈)하여,
바라보매 마치 암석이 빼어남을 다투듯 하였다.
지금 이 산을 보니,
곧 엄하게 솟은 봉우리와 중첩하여 빼어난 산들이
김생의 붓끝의 정수로 이입(移入)하였다는 것을 알겠다.
지난날 장욱(張旭)은 공손대낭(公孫大娘)의 춤을 보고서 초서를 잘 써서,
그 묘리가 신기한 정도에 도달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그 한 증거가 되겠다.
그렇거늘 세상에서는 김생의 서법이 산에서 얻어 온 것을 모른다.
그래서 특별히 천명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다시 대승사(大乘寺)로 향하였는데,
나무 잔도가 썩어 끊어져 있다.
바위 모서리를 간신히 붙잡고 소매를 떨치면서 건넜다.
몸을 웅크리고 마음을 졸이며,
두려워 벌벌 떠는 듯이 하여 경계를 하였다.
상대승사는 텅 비어서 승려라고는 없었다.
결국 들어가지 않고,
마침내 하대승사에 이르렀다.
한 조각 암대에 일만 그루 나무가 그늘을 이루고 있었다.
여덟 선녀가 흩어져 앉아서 사방을 조망하여 시선을 여기저기 두었다.
멍하니 숲 사이를 바라보니,
가느다란 길로 흰 옷을 입고 술을 가지고 오는 사람이 있었다.
곧 권미도(權味道)의 사위 집에서 보내 온 것이었다.
일행이 크게 기뻐하면서,
술병을 열고 찬합을 벌여 놓고,
술을 따라 마시고 음식을 잘라서 씹었다.
역시 산중의 한 가지 기이한 흥취이다.
어스름에 문수사(文殊寺)에 들렀다.
여러 승려들이 문밖에 나와 영접한다.
또 보현암(普賢庵)에 들어갔다.
보현암 앞에는 기이한 바위가 있고,
바위 가에는 단풍나무가 있어 사랑스럽다.
보현암의 서쪽에는 고대(古臺)가 있어,
일천 인(仞) 아래를 압도하듯 내려 보면서 만고 오래도록 뚝 떨어져 서 있다.
역시 이 산의 승경지로 이름 하길 중대(中臺)라고 하는 것이다.
나는 금여약과 함께 더욱 술을 마셔대어 소나무에 아래 취해 쓰러져서는
산 속의 해가 이미 어두워진 것도 몰랐다.
깨어나 둘러보니 뭇 신선들은 모두 내려가고,
신선 한 사람만 있었다.
마침내 서로 취한 몸을 부추겨 일으켜서 함께 문수암으로 돌아갔다.
그때에 한 승려가 대승대(大乘臺)에서 와서 알려 주길,
“조봉성(趙鳳城)이 이미 연대(蓮臺, 연화대)에 이르러 계십니다.”
라고 한다.
즉시로 쫓아가서 배알하고 싶었으나,
다음날 서암(西庵)에서 서로 만나자는 분부가 계시므로 가지는 않고,
그곳에 머물러 묵었다.
창을 하나 사이에 두고 밤이 다하도록 쟁글쟁글 마치 옥이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곧 자란봉(紫鸞峰)의 동쪽과 경일봉(擎日峰)의 서쪽에서 시내가 합하여 내리 쏟아서 비폭(飛瀑)을 이루는 것이다.
한밤의 소리가 고요하고 선방의 베개 맡에는 아무 꿈도 이룰 수 없었다.
홀연 이 몸이 세간 바깥에 초월하여 천모(天姥) 아래에 앉아서 귀로 맑은 원숭이 울음을 듣는 듯하였다.
병오일에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이부자리에서 밥을 먹고는 걸어서 문수암에서부터 보연암을 거쳐 중대에서 쉬었다.
절벽을 돌아들어서 몽상암(夢想庵)으로 향하는데,
길이 끊어지고 벼랑에는 서너 개 나무가 걸쳐서 작은 잔도를 통해 두었을 따름이다.
발을 한 번 헛디디면 일천 장(丈) 아래로 떨어질 판이라,
나의 혼백을 두렵게 하고 나의 마음을 겁나게 하였다.
한 신선이 세 신선으로 하여금 석벽에다가 유람록을 적게 하면서 말하였다.
“지난날 소장공(소식)의 무리도 역시 산 바위에 이름을 적었으니,
거쳐 지나는 곳에 이름을 남기는 것은 이미 옛날부터의 관습이다.”
라고 하였다.
층 바위를 발로 올라가서 고암(古庵)에 들어갔다.
돌문이 반쯤 닫혀 있고,
승려는 거처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고암은 일천 인(仞)이나 되는 높은 곳에 있어서,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골짝을 굽어보고 있다.
곧 연대사의 상계(上界)로 이 산의 가장 기묘한 곳이다.
돌아오는 길에 돌길을 경유하여 나왔다.
다시 바위틈을 통해서 원효암(元曉庵)으로 향하였다.
돌길이 위험하여 마치 벌이 붙어 가듯이 하면서 오르는데,
두 다리가 쥐가 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게다가 갈증이 심하여,
목구멍에서 연기가 날 정도였다.
바위 밑을 보니 차가운 샘이 있기에 한 움큼 떠다가 마시자,
오장이 마치 씻은 듯 상쾌하였다.
층 벽의 아래에 고암의 유적지가 있다.
그것에 대해 물어보니,
“신라 때 원효 승려가 거처하던 암자라서 그렇게 이름을 부릅니다.”
라고 하였다.
또다시 원효암으로부터 동쪽으로 깊은 골짝을 뚫고 나아가 매달린 벼랑을 따라가는데,
칡넝쿨이 뒤얽혀서 하늘의 태양을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어떤 승려가 인도하여 가서 만월암(滿月庵) 앞의 석대(石臺)에 앉아서 다리를 쉬면서 산보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보면 볼수록 더욱 기이하였다.
그 암자에 들어가자,
암자 벽에는 선조의 존함이 마치 어제 쓰신 먹 글씨처럼 완연하게 눈에 들어왔다.
서글픈 감정을 차마 억누를 길이 없었다.
정오 뒤에 다시 백운암(白雲庵)에 올랐다.
백운암의 방은 정갈하고 경지가 맑고도 확 트여 있다.
지팡이를 내던지고 쉬었다.
마침내 상봉으로 향하였다.
까마득히 높은 곳을 올려다보면서 한 치,
한 푼씩 힘을 내어 나아갔다.
이르는 곳이 차츰 높아갈 수록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 점점 멀어진다.
이에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은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
는 가르침이라든가
“위로 찾아 올라간다.”
는 공력이 지닌 의미를 모퉁이 하나를 들어보아
전체를 알듯이 온전히 알 수가 있을 듯하다.
몇 번이나 위성류 나무 그늘에서 쉬면서 탁필봉(卓筆峰) 아래에 이를 수 있었다.
탁필봉은 뾰족하게 깎아 세운 듯하여 오를 수가 없다.
마침내 연적봉(硯滴峰)에 올라,
잠깐 절정에 의지하여 만 리 멀리 평평하게 바라보았다.
학가산(鶴駕山)이라든가 공산(팔공산)이라든가 속리산이라든가 하는 여러 산들이
모두 시선 아래에 떨어져 있다.
공자가 동산에 올라 노나라를 작게 여겼다는 심리와 태산에 올라 보고 천하를 작게 여겼다는 기상이 역시 상상되었다.
돌아와 탁필봉을 거쳐,
돌사다리를 더위잡으면서 올라가,
다시 자소대(紫霄臺)에 올랐다.
푸른 벼랑과 붉은 벽이 구름 바깥으로 우뚝 솟아나, 하늘과의 거리가 한 자도 되지 않으며,
늠연하여 아래를 굽어볼 수가 없다.
북쪽으로 소백산과 죽령의 산들을 바라보고,
동쪽으로 작은 산과 작은 시내의 지역을 조감하면서
거대한 폭원과 장엄한 산하를 한 번 쳐들어 바라보는 시선 속에 모두 넣었다.
자소대를 나는 듯이 내려가 백운대와 만월암을 거듭 탐방하고,
곧바로 서암(西庵)에 이르렀더니
조시재(趙是齋)가 먼저 와서 한참을 기다리고 있었다.
삼가 배알하고 흔연히 모시고 하루 종일 담소를 하였다.
마침내 조시재 어른을 따라서 가서 사람이 다니지 않아 거친 길을 그윽하게 찾아보고,
왕왕 앉아서 쉬기도 하면서,
차츰 돌아나가서 아래로 내려가 연대사를 지나 진불암(眞佛庵)에 들어갔다.
철벽이 그 뒤에 옹위하고 있고,
가파른 봉우리가 앞에 압도하여 마치 항아리 속에 있는 듯하였다.
하늘이 밝아오자,
불당으로 돌아가 조시재 어른을 모셔 풍모를 받들었다.
학문의 이야기와 덕스러운 말씀을 하시고
고금의 사실을 이것저것 토론하여 어리석은 나의 정신을 깨우쳐 주셨다.
마치 굶주린 뒤에 배불리 먹어 더욱 더부룩한 것과 같았다.
밤이 깊은 뒤에 물러나서 지장전(地藏殿)에서 묵었다.
정미일에 아침밥을 먹은 뒤 말 끄는 종을 먼저 보내어 동구 문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조시재 어른을 모시고 걸어서 어른을 따라 암대(巖臺)를 나섰다.
두 사람의 승려를 대동하고 출발하여 금강굴로 향하여,
자비암(慈悲庵)을 거쳤다.
오랫동안 석탑(石榻)에 의지하여 섰는데,
이윽고 해가 솟아나는 것이 보였다.
붉은 빛이 찬란하여 이리저리 쏘고,
붉은 노을이 천 겹으로 층지었으니,
역시 신선 산의 한 가지 기이한 경관이다.
길은 연화봉을 거쳐 아래로 내려갔다.
돌계단이 위험하고
사람의 자취가 완전히 끊어져 이끼가 붙은 벼랑을 엉금엉금 기어갔다.
별스런 경지를 그윽하게 탐방하느라
아침 해가 이미 높이 솟고 풀 이슬이 옷깃을 적시는 것도 몰랐다.
구불구불 길을 따라 가서 5, 6리 쯤 가다가
깊은 계곡 사이에 들어가 시내 바위에 앉았다.
옥 같은 시냇물이 쟁글쟁글 울리면서 흘러온다.
곧 도수암(道修庵)의 열천(冽泉)의 하류이다.
승려가 말하길,
“도수암은 내장인봉(內丈人峰)의 깊은 골짝 속에 있는데,
사면이 험준하여 사람이 다닐 길이 통해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바위 벼랑 사이로부터 줄을 드리워 그것을 타고 내려가야 하므로,
위태하기가 이보다 더한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라고 하였다.
가보고 싶기는 하였으나, 가볼 길이 없었다.
마침내 서쪽으로 향하여 벼랑길을 따라서 갔다.
바위에 의지하여 쉬면서 계곡의 골짝을 굽어보니,
흰 안개가 잔뜩 들어차 있다.
머리 위에는 태양이 떠 있고,
발아래에는 비바람이 치니,
더욱 이 산이 높고 험하여서
이 몸이 세간 밖에 초월해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중첩하고 험준한 곳을 하나하나 거쳐 마침내 금강굴에 이르렀다.
금강굴에는 작은 암자가 있고,
암자는 끊어진 골짝에 임해 있다.
바위를 걸쳐서 기와를 대신하여,
층층 구름 속으로 숨어 들어가 있다.
곧 정안(靜安)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라고 한다.
정안 승려는 산을 내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이때는 지키는 사람이 없었다.
바위 모서리에 지팡이를 짚고서 가까운 곳과 먼 곳을 두루 전망하매,
벼랑이 열리고 협곡이 터져 한 강줄기가 그 가운데를 쏟아져 나와,
넘실넘실 푸른빛을 일렁거리며,
옥환처럼 물 흐름이 그 아래를 둘러 나간다.
이 암자의 경승은 정말 멋진 구경거리였다.
또 듣자니 방장굴(方丈窟)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있다는 설만 전할 뿐이고,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한 번 찾아보고 싶으나 길이 나 있지 않았다.
다만 범상한 골(骨)이 아직 허물을 벗지 못하여서
신선의 구역이 아득히 멀리 동떨어진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다시 외장인봉을 따라서 내려와 엽광동(葉廣洞)으로 내려왔다.
걸어서 강 머리로 나아가 권군앙(權君仰)와 박경개(朴景盖)가 돌아가는 것을 전송하였다.
봉성 조시재(趙是齋)는 비로소 말을 타고서 큰 강을 건넌다.
다시 박석(博石)의 모래 둑에서 쉬었다. 머리를 돌려 첩첩 산봉우리를 바라보니,
구름과 안개가 어슴푸레하게 덮여 있다.
마치 유(劉)와 완(阮)이 천태산에서 내려온 듯하다.
강에 임하여 점심을 먹었다.
서녘의 해가 점차 뉘엿뉘엿하기에,
조시재 어른 및 권미도와 작별하고, 먼저 길에 올랐다.
대개 조시재 어른은 심진로(尋眞路)로 가시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작은 고갯마루를 넘어서 온계(溫溪)에 도착하였다.
거기서 박경술(朴景述) 및 채낙이(蔡樂而)와 이별하였다.
구름 산이 차츰 멀어지고, 동행이 전부 흩어졌다.
말을 세우고 머리를 긁적이면서,
입속으로 시를 웅얼웅얼하기를 한참 동안 하였다.
조시재 어른과 권미도를, 마침 날이 저물었으므로 지름길로 해서 쫓아갔다.
마침내 그들과 함께 귀로에 올랐다.
가다가 송현(送峴)에 이르러 월천(月川)을 전송해 보내드렸다.
그리고 차례로 여러 곳들을 들러 선성(宣城)으로 향하였다.
말이 가는 대로 내맡겨서 귀로에 올라 열 걸음에 아홉 번씩 되돌아보면서 갔다.
신선경의 열 두 봉우리들 모습이 똑똑히 심목(心目)에 남아 있기에
진토의 첩첩 산들은 올망졸망 개미 언덕 같이 낮은 구릉들일 뿐이다.
바다를 본 사람에게 웬만한 물은 물이 되기 어렵다고 하였더니 그 말이 어찌 빈말이랴.
황혼에 달이 바야흐로 나오자 사민(士敏),
여약(汝若)과 함께 더욱 정신이 맑아졌다.
가야(佳野)에 이르러 어르신께 반면(返面:귀택을 보고함)을 하고서 물러났다.
이군거 사행(李君擧 士行) 등이 술을 가지고 왔으므로 크게 마셔대고는 술자리를 파하였다.
태백의 한 줄기가 동으로 뻗어 나와서 청량산이 되어 맑은 기운이 힘차고 드넓게 퍼지고,
정수의 맥이 맺히고 모여서 뭇 봉우리들이 빼어남을 다투고 있다.
늠름하기가 푸른 죽순이 어지럽게 뽑혀 나 있고,
결단코 범접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큰 강을 옥환처럼 띠고 있고,
그 발밑이 곧 황지(黃池)의 하류이다.
바위가 표한하고 여울이 급해서 배를 띄울 수가 없다.
오랫동안 가물어서 수위가 떨어져야 비로소 사람이 통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산이 더욱 빼어나고 기이함이 많으며,
길이 더욱 험하여 어지러이 겹겹으로 에워싸여 도달하기 어렵다.
어지럽게 에워싸인 협곡이 일백 번이나 돌아나가고 긴 못이 일천 번이나 굽어간다.
아득하여라,
티끌 쌓인 평범한 세상과 거리를 두어 함부로 찾아오는 길손의 말고삐를 막고 있다.
완연히 약수(弱水)를 건너야 봉도(봉래섬)로 들어갈 수 있는 것과 같다.
대개 이 산은 그 기반의 뿌리는 그 둘레가 불과 백여 리 일 뿐이다.
그리고 모여선 봉우리와 첩첩 산봉우리가 모두 누대 모양의 바위로 흙을 이고 있으면서 깎아 세운 듯 일만 인 높이로 솟아나 있다.
수목은 울창하고,
아지랑이와 남기는 골짝에서 물씬 일어 숨을 내쉬어서 허공에 나오듯 하며
기이한 외형과 이상한 모습이 마치 병풍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다.
정말로 조물주가 별도로 교묘하게 만들어 낸 것이다.
내가 일찍이 산수에 특별한 취미가 있어서
아름다운 산과 좋은 물을 만날 때면 번번이 흔연히 즐거워하여 세속으로 돌아가는 것을 잊고는 하였다.
동쪽으로는 읍령(泣嶺)을 넘어 관어대(觀魚臺)에 올라서 창명(푸르고 큰 바다)의 호한한 바닷물을 굽어보고,
물고기와 용이 춤을 추는 것을 보았다.
서쪽으로는 조령(鳥嶺)을 걸터타 보고 종남산(終南山)에 올라 보아
궁궐의 위엄스런 모습을 우러러 보았으며, 인물이 풍성하게 많은 것을 보았다.
비록 감히 사마자장(사마천)이 천하를 두루 유람한 것에 비길 수는 없다고 하더라고
자장(사마천)처럼 하기를 바란 것은 오래되었다.
다만 사는 곳이 천하에 비교할 때 편벽되고 멀리 떨어져 있어서,
자취가 바닷가 구석에 묶여 있으므로
천하의 장대한 모습을 두루 다 구경하지 못하여 흉중의 호연지기를 양성하지는 못하였다.
이것이 내가 평소 크게 한탄하는 바였다.
아아, 천하의 명산을 이루다 열거할 수 없으니,
중국은 정말로 논외로 할 수밖에 없다.
우리 동국의 명승이라 일컫는 것의 경우에는 반드시 금강산을 가장 으뜸으로 삼는데,
금강산은 곧 해외 삼신산의 하나로 중국인이 상상하고 흠모하여 한 번 보기를 바라는 승경이었다. 금강산으로부터 오대산이 되었고,
오대산으로부터 청량산이 되었기에 세상에서는 청량산을 소금강이라고 여긴다.
청량산이 신선의 산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어찌 중국의 천태산이나 영취산보다 뒤지랴.
나는 열 살 때부터 이미 청량산이 있음을 알아서 한 번 발걸음을 내디뎌 올라가고 싶어 했으나,
그러지 못한 것이 벌써 15년이 되었다.
나의 집은 청량산에 불과 하루 일정의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거늘,
속세의 하찮은 일에 구애되어 벗어나지를 못하니,
기갈증에 걸린 듯이 서글피 바라보기만 하다가 어느덧 세월이 가고 말았다.
가을바람이 부는 오늘,
한 번 청려장을 내던지고,
비로소 열두 봉우리에 의지하여 서 보았다.
열두 봉우리의 이름은 모두 주신재(주세붕) 선생이 정하신 것으로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지금 그 봉우리를 보고 그 이름을 상상하여 보니,
정말로 형상을 잘 이름 지었다고 하겠다.
그 외봉 가운데 긴 것은 장인봉(丈人峰)이라 한다.
멀리 태산의 장악에 비긴 것이다.
그 내봉 가운데 으뜸 되는 것은 자소봉(紫霄峰)이라 한다.
그것이 하늘에서 가장 가까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황금 오리처럼 뚝 떨어져 서 있는 것은 향로봉(香爐峰)이라고 한다.
부용처럼 빼어난 것은 연화봉(蓮花峰)이라고 한다.
연대사의 서쪽 봉우리로 승가에서 말하는 의상봉이란 것이다.
자소봉으로부터 서쪽으로 가다가 오십 보가 채 되지 않는 곳에 우뚝하니 빼어나 있는 것은
탁필봉이라고 한다.
탁필봉에서 또 서쪽으로 가서 스무 걸음도 안 떨어진 곳에 돌립하여 있는 것을 연적봉이라고 한다. 연적봉의 앞에 봉우리가 바싹 여위어 있는 것은 선학봉이다.
동쪽으로 빙 돌아나간 것은 경일봉이다.
아침 해를 맞는다는 뜻을 취하였다.
남쪽에 턱 버티고 있는 것은 축융봉이다.
형산(衡山)의 이름을 모방하였다.
금탑봉은 경일봉의 아래에 있고, 자란봉은 경일봉의 위에 있다.
안쪽의 형세와 바깥쪽의 형세가 조화를 이루고,
왼쪽과 오른쪽 산들이 서로 공읍을 하면서 서쪽에 있는 것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에 있는 것은 서쪽으로 향한다.
자소봉은 모두 9층인데, 일곱 절 가운데 백운사가 가장 높다.
그 다음은 만월사, 그 다음은 원효사, 그 다음은 몽상사, 그 다음은 보현사, 그 다음은 진불사, 그 다음은 중대사이다.
경일봉은 모두 3층에 다섯 절이 있다.
김생사, 상대승사, 하대승사, 보문사, 고도사이다.
금탑봉은 역시 3층에 다섯 절이 있다.
산의 모습이 탑 같다.
다섯 절은 모두 그 산의 가운데층에 설치되어 있다.
치원암, 극일암, 안중암, 상청량사, 하청량사가 그것이다.
문수사는 자란봉의 동쪽에 등을 두고 있으며 어깨에는 연대를 끼고 선학봉의 남쪽 이마 부분을 멍에 매듯 하고 있다.
그리고 연적봉의 아래로는 서초막(西草幕)이라고 한다.
연화봉의 아래로는 자비암(慈悲庵)이라고 한다.
여러 절들이 위로는 가파른 절벽을 지고 있고,
까마득히 끊긴 골짝에 임하고 있다.
죽 늘어서 있는 뭇 봉우리들은 모두 층탑을 이루고 있다.
여러 봉우리들에 시선을 주면 겁쟁이는 족히 떨쳐 일어설 것이다.
뭇 폭포에 귀를 기울이면 탐학한 사내는 염치가 있게 될 것이다.
총명수를 마시고 만월암에 누우면 이것이 바로 신선의 경지일 것이다.
하필 단사를 만든다든가 둥굴레를 먹는다든가 하여 백일에 하늘로 솟아올라야만 신선이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가.
다만 괴이한 것은 치원이라는 이름을 대(臺)에도 붙이고 절에도 붙였으며,
김생이란 이름을 굴에도 붙이고 절에도 붙였다는 점이다.
역사의 기록으로 고찰할 만한 것이 없거늘,
이러한 옛 자취들이 어찌 이렇게 마치 어제의 자취인양 한단 말인가.
아아, 만일 이 산이 중주(중원)에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이백과 두보의 읊조림과 한유와 유종원의 기록과 주자와 장식(張栻)이 등반을 받느라 겨를이 없어서 당연히 천하에 이름이 났을 것이다.
그렇거늘 천고의 우주 간에 다만 최고운과 김생에 의지하여 한 나라 안에서만 일컬어진다고 하니, 정말로 한탄할 만하다.
이 산은 그 땅이 안동에 속하여 있으나 지경은 예안에 가깝다.
그러므로 송재(松齋)와 농암(聾巖)이 앞서서 일어나고 퇴계 선생이 뒤에 이어서 태어나셨다.
명유와 석사들이 빈빈하게 물씬 나왔으니,
인걸이 지령에 힘입는다는 설을 어찌 불신하겠는가.
이 유람 길은 왕래하는데 모두 닷새가 걸렸고,
그때그때 읊어서 얻은 시가 97수이다.
전후 청량에서 내키는 대로 읊조린 1백여 편을 한데 기록한다.
그로써, 부디 한 번 유람 길에서 거쳐 지나간 내력을 기록하고 1백 수를 지으라고 하신 부친의 엄명에 답해 드리는 바이다.
방 하나로 돌아가 펼쳐 보면서 음미한다면,
역시 신선 산의 우아한 감상을 상상하기에 넉넉하고 평생의 와유(臥遊) 바탕이 되는 데 충분할 것이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이 유람 길은 그저 경물에 부림을 당하려고 한 것만은 아니다.
장차 기이한 경승을 보아서 나의 기운 양성을 돕고,
또한 경계하는 바가 있고자 한 것이다.
지난날 주회암(주희)과 장남헌(장식)은 남악에 노닐어
갑술일부터 경진일까지 모두 7일간 창수하여 얻은 시가 149편인데,
기묘일 밤에 화롯불을 뒤적이면서 서로 마주하여 그 황탄함을 경계하고,
약속을 정하여, 그 후로는 시로 읊지 않기를 하였다.
그러다가 장차 저주(櫧州)에서 이별할 때에 장남헌이 고작 시 한 수를 주자,
주회암도 역시 답으로 시를 지었을 따름이었다.
그렇건만 마침내 「남악유산록」의 후기에서 말하길,
“계미일에서부터 병술일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흘이고 악궁(嶽宮)에서부터 저주에 이르기까지 또한 180리인데,
그 사이의 산천과 임야와 풍연과 경물로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시로 만들지 않은 것이 없되,
이미 서로 도리를 토론하고 깊은 이치를 찾아가기로 한 약속이 있어서,
시에 있어서는 정말로 아직 겨를이 없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또한 「남악유산록」 후기에서, 그 뒤를 이어 이렇게 말하였다.
“시를 짓는다는 것은 본디 불선(不善)한 일이 아니지만,
우리들이 통렬하게 끊어버리는 것은 그것이 흘러가서 생병을 나을까 봐 염려하기 때문이다.
뭇 사람들과 함께 거처한다면 보인(輔仁)의 보탬이 있지만 그래도 혹시 말류로 흐를까 염려함을 면하지 못하거늘,
하물며 동지의 무리를 떠나 홀로 거처하게 된 이후에는 사물의 변화가 무궁하기에,
기미의 사이와 아주 미세한 차이의 사이에 눈과 귀를 어지럽히고 마음과 의지를 감촉시켜 변화시키는 것을
장차 어떻게 그것을 막겠는가?”
지금 나와 동행하는 벗들이 어찌 그 밝은 가르침을 경건하게 외워서 반우(盤盂)와 궤장(几杖)의 경계에 충당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사실을 친구들에게 알린 뒤,
다시 내 몸에 반성하려고 옷 띠에 그 내용을 적고 스스로를 질책하는 바이다.
그 다음달 7일 갑인에
광성 김득연(金得硏) 여정(汝精)은 적노라.
淸凉山逰錄
萬暦己卯秋八月二十有六日己亥。設壽酌于佳野。酒旣半。余。執爵而諗于諸友曰。余受家大人命。將有淸凉之行。盍與吾同志共之。滿座賓朋。含辭賛成之。家大人。又命之曰。汝等之行。誠佳矣。其依南嶽古事。成百篇詩。可矣。俯受命訖。遂與丹陽朴希古。花山權士敏。權君仰。鳳城琴汝若。丹山禹季綏。錦山朴伯魚。朴景述。及舍弟䃤等。牢結同逰之約。期待易東之院而獨廣陵安達源。前旣有約。今適冗魔。勢未同行。是可嘆也。越五日癸卯。與權士敏。及舍弟。奉百詩之命。持五日之糧。佣一壺之酒。帶三尺之童。匹馬秋風。浩然馳發。快如鴻鵠。出塵籠而凌靑㝠也。歷見金止叔昆季於芳岺廬所。又訪金達遠甫。琴壎之丈於烏川。行到鼻巖。巖形奇峻。下馬步上。平看遠野。俯臨長江。亦一勝處也。行過宣城沿流。信轡問前路於田婦。踰㕔峴到洛川。不知津渡淺深。立馬久之。日已夕矣。旣渡直向月川。登廓然亭。亭有一丱童。形貌端雅。讀字琅然。迎拜於前。問之。乃權味道妻甥。蔡衎。其姓名也。是亭也。壓斷麓。帶平湖。四望長郊。眼界軒豁。乃衎之玉父蔡上舍所構也。亭後。有松。列圍三四里許。亦蔡之婦翁權僉知。手植云。余與味道。曾有此行之約。卽使人邀之。則味道聞卽步屣而来。蘓話良久。有一客過墨峀入浮浦村。疑是朴景述之來而遠不可詳也。卽以味道。爲介。謁趙是齋於芙蓉峯下昭明軒。旣與之坐。又賜溫顔。仍問來由。謹對以實則。欣然吿之曰。此最好事。吾當從君軰而共之。君軰先徃而待之。敬奉嘉命欣躍不已私以爲入名勝之區而陪丈人之後。眞此行之幸也。日暮辭退。夕飯于味道家。昏黑。與味道。向易東炬松明棹鰲潭。江天淸夜。孤舟歸興。渺然有遺世之趣也。水淺沙出。舟礙不能行。使星軰。負上岸。騎馬穿林。入松逕到書院。則夜已深矣。門已閉矣。剝啄聲久。齋好啓鑰。乃入三省齋。金明甫。琴彦愼彦康。兄弟。棲榻有日。聽講於趙是齋矣。面雖新知。情若舊見。盖以所居之地。近而聞名之日。久也。與之對燈而話。聯枕而宿。江齋淸夢。先繞於仙山之十二峯矣。九月初吉甲辰。具巾服。晨進謁于尙賢祠。退而巡視。則堂扁曰。明敎。院號曰。易東。左右室曰。精一。直方。東西齋曰。四勿。三省。凡堂齋扁額。及壁上學規。皆我退陶先生所筆定也。先賢遺躅。宛在人目。小子後生。徘徊瞻仰。能不起敬慕也哉。與諸友。談討少頃。見朴景述。宿浮浦村而來。果驗其廓然亭。指㸃之不差而深唾希古季綏伯魚䓁之落塵塹。負佳約也。於是轉向陶山。歷路。見有亭翼然。臨江影落。蛟窟灑然。若神仙宅也。彷徨不忍過。請見於主人公。主人公。出而迎。遂登愛日堂而目其記。躡其䑓。想當年相公之風。歎賞夷猶。久而辭去。主人。乃相公之胤李上舍叔樑也。入陶山。祗謁于先生廟庭訖。瞻仰乎玩樂齋。巖棲軒下。佇立乎止宿寮觀瀾軒外。遺塵剰馥。宛然如在目接心想。竦然起欽。怳如陪杖屨而聽謦欬也。退省堂齋。堂齋蕭灑。窓几明朗。眞士子逰息處也。嗟呼吾生也。後未及摳衣於時習齋中。豈非平生之一大恨也。西登天光雲影䑓。俯濯纓之潭。東上天淵䑓。臨盤陀之石。江上奇勝。不可殫記。時有漁人擧綱得魚。問之。則乃宜仁村民而穿枊分進。以供客饌也。俄而。蔡樂而自月川。追到飯後偕發。東向行五六里許。望見先生丘隴。下馬遥禮。尤不勝山頹之痛也。渡川沙踰小岾。有役丁數十。聚石築堰。乃琴叅奉吳上舍兩丈。爲陶山學田而經畧也。仍謁兩丈。陪話移時而辭去。歷入丹砂峽。過白雲池。丹崖翠壁。擁列左右。山家成村。彷彿桃源。顧謂諸友曰。生不逢太平晠世。而不得施平生之學。則如此寬閒之野。寂寞之濱。雖抱犢躬耕。木食澗飮而終身可也。沿江信行。石路屈曲。馬不前步。益艱下坐。江頭飮水。數螺快覩。形勝。亦可暢懐也。味道指示之曰。彼蒼峡劈開處。乃月明潭也云。而憚險不得徃觀焉。踰尋眞路。入日洞。登孤山島。島立江干。靑螺一㸃。水環其下。碧潭千尋。島之上勢。高而方石層而平。築成小壇。可坐十餘人矣。於石面。題其號曰。水雲䑓。是䑓也。隠半空之雲而壓千仞之壁。水光山影。共涵一色。稱其名也。島之層崖有釣䑓。巖面有老先生手筆錄同逰。又題一詩曰。日洞主人琴氏子。 隔溪呼問今在否。耕夫揮手語不聞。悵望雲山獨坐久。盖勝迹也。江上有亭。享下有舟。江山勝賞。當不下赤壁之逰。而日洞主人。時爲齋郎。亭無主而舟自橫矣。與諸友。思欲留宿。亭上泛舟江中而糧駄。適已先歸。立馬躊躇。不能去者。久之。日已夕矣。行至一里許。一髠。自碧巖。揮手而來。報君仰兄之自高鑑來。欣然聳袂。振䇿驢背。斜陽江路。仙興催發。雲山。如待猿鶴。爭迎。尤不覺襟懐之爽然也。到一小店。舊號。羅火石川而今稱博石者也。憇馬堤頭。酌酒數巡而罷。將涉江石灘。駛悍騎不能行。恐有顚僵之患。遂觧衣徒涉。 沐浴淸流。心神。灑惺。亦一快也。旣渡鼎坐白石。披襟夕凉。吟咏而歸。又借牛於店人。使輸糧輜。始入洞門有古城。隠嶙於亂樹間。問諸僧則曰。昔恭愍王。避敵所也。噫。無稽傳說。不可盡信而想其戰爭擾攘之日。亂兵驅逐之君。偸朝夕於一隅也。一帶荒堞。萬古含愁。徃事。謬悠不足論也。行過落水䑓。澗㵼石齒。玉聲玲瓏。聴可愛也。洞壑。寥閴。林莾。蓊欝。亂石積聚。有一衲指之曰。此三角墓也。昔。有僧。欲創蓮䑓寺。化爲三角牛。輸財供役。殫盡心力。一日死坎而痉之也。余曰。禀靈爲人。必無化牛之理。汝目見其事耶。衲。不能對。循澗崖入谷中。信馬危磴。心骨。悚惕。仰面層空。奇巖。秀出。壁立千仭。隠見烟靄中。凛乎若節義之士。特立。危亂挺身。鈇銊而有不可犯之氣也。疊巘攅玉。細川鳴璆。丹桂帶霜。翠栢。含風。依俙然十二峯羣仙子。開雲錦之屏。奏雲和之瑟。羅列而前進也。到獅子項。石逕。欹側。遂與諸友。舍馬而徒穿深林。躡層巖。十步一息。吟賞徐行。境益奇心益快也。忽有笛聲。嘐喨雲間心知其鳳城琴汝若。帶笛童先到也。喜深攀蘿直上。仰視危巔。權君。仰獨立瑶䑓。高聲亂舞。山鬼響答。落日。爭輝。眞可謂軒昂客也。達蓮䑓寺。見汝若君仰。相開靑眼。共叙素抱。晏晏而笑。款款而語曰。十年故舊。一會仙山。無乃有數存於其間耶。錦山朴椿茂景。盖乃君仰兄之堂妹夫也。聞吾黨之逰。從君仰而來。列坐巖䑓。遥望層巒。殘照抹紅。浮嵐濃翠。氣像。萬千變態。須臾雲氣噓吸。山形有無。或有全露髻者。或有半開鬟者。雖談天之(彳+冫+亍)。雕龍之奭。殆不可形容於是。老衲。指㸃雲霧中曰。彼祝融峯。彼金㙮峯。次擎日峯。其次紫鸞峯。又其次紫霄峯。卓筆硯滴峯。此仙鶴峯。此蓮花峯。其後有香爐峯。又其後。有內丈人外丈人峯。凡十二峯。舊無名稱。周先生某。肇名之。余喟然歎曰。
昔朱晦庵。於廬山。遇絶奇處。輒名之。若非朱夫子。則歷萬世而無名。必矣。是山諸峯。寥寥千載。一遇周愼齋而後得名。則此亦玆山之幸也。天欲昏入地蔵殿。衆髠隨之。燃燈設席。呼朋就坐。開酒滿酌。使笛者吹之。歌者歌之。團欒終夜。大醉發興。排戶獨立。天宇寥廓。如在廣寒而俯視世界也。是夜。權士敏。戱以同來八人。爲八仙。以一蔡。爲靑童。隨其齒列。必稱某仙。使不得呼名字。足一天(口+處)也。仍與諸仙共枕而宿。乙巳早食後。䇿杖出寺。寺僧煕祖戒幢等。爲前導。又有小髠。持筆硯隨後行。東躋小逕。入中䑓。傍有新造佛舍。 問之則曰。十王殿也。諸佛滿堂。太似人形。余於是。瞪目睨視。怒欲撃之。僧徒强止之。余曰。天笁一使流獘。千古誣感人世。陷溺民心。夫孰能明先王之道而人其人廬其居乎。毀佛像杖僧人。深有感於胡頴之正直也。到古道庵。有病僧寮舍。陋麁遂不果入。直抵普門。有僧。摘葡萄以進。八仙共啖之。迤南行向金㙮。細路危滑。攀縁樹木。依巖屢息。蔡靑童。以笛者。先行已登盤若䑓。隠身閒弄。淸響。戞玉遠徹雲霄。怳如子晉登緱山而吹笙也。憇致遠䑓。飮聦明水。䑓在絶壁之上而逈臨層空。凛若凌虛。水出懸崖之底而凝淸石。
臼瑩如氷雪。亦一奇也。問其所以名。則曰。儒仙崔致遠。逰此地。飮此水故。䑓得致遠之名。水有聦明之號。余謂崔孤雲。十二。入唐。卄八。還國。名動天下。爲東方文章之祖。奚暇。居此而讀書。歃此水養聦明耶。或云隠於伽倻山海印寺。與緇流。逰公所。築瀛洲䓁三山紅流洞鳳下石書巖遺迹。至今宛然。且地誌及國史。皆云崔致遠淸凉寺。卽陜川郡伽倻山之月留峯下也。豈非後人欲尊是山而誣引此名耶。盖有之。我未之聞歟。傳說。可疑而姑記之。以俟如者。入致遠庵。時無居僧。襌榻。岑寂。但有檜蔭。滿庭而已。又入克一庵。 登石梯。有老松千尺。大可十圍。巖後。有風穴。穴前有木板巖广而穴深故。風雨千年。板木。不腐。自古傳云致遠圍碁之板。雖不信其說。而入其庵。躡其䑓。亦不能無追感於孤雲也。歷安中寺。到上淸凉。有僧。進山菓直下。下淸凉。徘徊古䑓。逰賢異境。洞府深邃。靈籟自生。叅差亂峯。翠擁四屏。高低楓樹。錦排千帳。秋山佳賞。不可談悉。寺後有泉。琮琤。淸洌可愛。掬飮一勺。快㵼胷中塵萬斛也。寺東。有小庵。結茅數間。殘衲獨居。䙝不可近。又聞有東草庵。而僧。云。去路險遠。庵空無守。遂不果行。午㸃後。旋步來路。還向金生窟。足躡崖棧。手挽藤蔓。側身而入窟。在層巖之下。峯踊龍舞。巖蹲虎碓。巧削回護眞天成也。懸崖垂瀑。散落半空。靑天吼雷。白日飛雨。倚杖看來。淸思凛然。銀河倒流。石室凈灑。倘有靈仙必棲于此矣。余曰。金生。新羅元聖王時人。筆法。爲東國第一。嘗見其字畫峭勁。望之若巖石竸秀。今觀是山。乃知峭峯疊頴。移入于生之筆精也。昔。張旭。見公孫大娘之舞而善草書。其妙入神。是其一驗也。而世不知生之書法。得之山。故特闡而記之。又向大乘寺。木棧朽絶。攀縁石角。振袂而度。竦身小心。惕然可警。上大乘。空無僧。不果入。遂抵下大乘。一片巖䑓。萬木成陰。八仙。散坐。四望逰目。佇見林間細路。有白衣持酒來。卽權味道。贅家所送。一行。大喜。開壺排榼。酌而飮之。切而㗖之。亦山中一奇興也。薄暮過文殊。諸髠。出門外候之。又入普賢庵。庵前。有奇巖。巖畔。有楓樹可愛。庵之西。有古䑓。壓臨千仞。斗立萬古。亦此山之勝地。而號曰中䑓者也。余與汝若益精。醉倒松下。不知山日之已瞑。覺而視之。羣仙皆下。一仙獨在。遂相扶醉共還文殊。時有一衲。自大乘䑓。來報曰。趙鳳城。已到蓮䑓矣。卽欲趍謁而有明日西庵相邀之命。故不果徃。仍止宿焉。隔窓終宵。鏘鏘然有碎玉聲。卽紫鸞之東。擎日之西。溪流合瀉而爲飛瀑者也。夜籟岺寂。襌枕無夢。忽覺此身。已超乎世外而如坐天姥下。耳聴淸猿呌也。丙午。蓐食。步自文殊。歷普賢。憇中䑓。繞絶壁向夢想庵。路斷巖崖。架數木通小棧。蹉跌一足。墮落千丈。悸余魂。怵余心也。一仙。使三仙於石壁。題逰錄曰。昔。蘓長公軰。亦嘗題名於崖石上。留名所歷。自是古事云。躡層巖入古庵。石扉半閉。無僧。久矣。庵在千仞之上。俯臨不測之壑。卽蓮䑓寺之上界而是山之最奇妙處也。還由石磴出。又從巖隙上。向元曉庵。石磴。危險。蜂附而登兩脚。生酸。遍身起粟。加以渴甚。喉吻生烟。見石底。有寒泉。一掬飮來。五內如洗也。層壁下。有古庵遺址。問之。則曰。新羅時。元曉僧所居之庵。故仍名焉。又由庵東。穿深壑。緣懸崖藤葛骨。連不見天日。有僧引去滿月庵前。坐石䑓休脚力。散步周覽。看看益奇。入其庵。庵壁中。有先祖名諱。宛然如昨。遺墨。入目。難堪感愴之懐矣。日卓後。又登白雲庵。雲房窈窕。地界淸曠。投杖久憇。遂向上峯。仰視峻極。力進分寸。所到漸高。所見。益遠於此。登高自卑之喩。尋向上去之功。可反隅矣。累息檉陰。得抵卓筆峯下。尖銳削立。不可登。遂上硯滴峯。乍倚絶頂。平看萬里。如鶴駕公山俗離諸山。皆落眼底。東山小魯之心。泰山小天下之氣像。亦可想矣。還過卓筆峯。攀躋石梯。又上紫霄䑓。蒼崖丹壁。聳出雲表。去天無尺。凛不可俯。北望小白竹嶺之山。東瞰才山小川之地。幅員之大。山河之壯。盡入一擧目之間矣。飛下紫霄。重揬白雲。滿月。直抵西庵。趙是齋先到而待之久矣。奉謁欣抃。陪話竟日。遂從杖屨而行。幽尋荒逕。徃徃坐息。推轉而下。過蓮䑓寺。入眞佛庵。鐵壁。擁後。峭峯。壓前。如在甕中。天旣明。還佛堂。奉是齋丈。仰承風儀。文談德言。雜討今古。警發憃愚。若飽飢而愈疚也。夜分。退宿于地蔵殿。丁未早朝後。先遣馬㒒。要於洞門。陪是齋。步隨西出巖䑓。帶兩髠。發向金剛窟。歷入慈悲庵。久倚石榻。俄見出日。朱暉散射。紅彙千層。亦仙山一奇觀也。路由蓮花峯下。石磴危險。人跡。頓絶。匍匐蘚崖。幽探別境。不如朝日之高舂而草露之沾衣也。迤行五六里許。入深谷間坐。溪石上。玉澗鏘鳴而來。卽道修庵洌泉之下流。僧云庵在內丈人絶壑之中。四面。險隔。人未通路。必從巖崖間垂繩而下。危莫甚焉。雖欲觀之。末由也已。乃西向緣崖而去。依巖而息。俯視洞壑。白霧深鎻。頭上天日。脚下風雨。更覺玆山之高峻而此身之超出也。歷重險。遂到金剛窟。窟有小庵。庵臨絶壑。架巖代瓦。隠入層雲。乃靜安僧所棲而下山不返時無守也。柱杖巖角。展眺遐邇。崖開峡坼。一江中注。溶漾藍碧。環流其下。尤爲此庵之勝賞也。又聞有方丈窟而徒傳其說。不知其處。欲尋無路。只恨凡骨之未蛻而仙區之逈隔也。又循外丈人峯下。下葉廣洞。步出江頭。別權君仰。朴景盖之歸鳳城。始騎馬渡大川。又憇博石之沙堤。回首疊巘。雲烟晻靄。怳若劉阮。從天台而來也。臨江午飯。西日欲晡。辭別趙是齋。權味道而先行。盖是齋。欲向尋眞路故也。踰小峴。到溫溪。與朴景述蔡樂而別。雲山漸遠。同行盡散。立馬掻頭。沉吟久之。趙是齋。權味道。適縁日暮。從間就路而追及矣。遂與共還。行至送峴。奉送月川而歷向宣城。信轡歸路。十步九顧。十二仙峯。了了心目而塵土亂山。纍纍丘垤。觀於海者。難爲水。豈虛語哉。黃昏新月。與士敏汝若益精。抵佳野。返面。堂下而退。李君擧士行䓁。持酒大酌而罷。太白之一支。東出而爲淸凉山。淑氣磅礡。精脉。結聚。衆峭。竸秀凛若碧筍。亂抽截然不可犯也。有大江。環帶其趾。乃黃池之下流也。石悍灘駛。不得容舟。久晹 水落。始可通人。故山益秀而多奇。路愈險而罕到。亂峡百轉。長淵千迴。邈乎隔塵凡而杜妄轡。宛如涉。弱水而入蓬島矣。大抵是山。其盤根周圍。不過百餘里而攢巒疊巘。皆巖䑓戴土。削立萬仭。樹木暢蔚。烟嵐蒸壑。噓出半空。奇形異狀。如屏如盡。信乎造物者之別樣底巧作也。余嘗有山水之癖而每遇佳山好水。欣然樂而忘返也。東踰泣嶺。躡觀魚之䑓而俯滄溟之浩汗。窺魚龍之掀舞。西跨鳥嶺。登終南之山而仰宮闕之巍峩。見人物之殷盛。雖未敢妄擬於子長周逰而夙願。亦云久矣。第以地偏遐。荒跡。繋海陬。未盡 天下之壯觀。以養胷中之浩氣。是乃吾平生所大恨者也。噫。天下名山。不可殫擧。中國。固不論。至稱我東國之名勝。則必以金剛爲首。金剛卽海外三神山之一而中國之所想慕願見者也。自金剛而爲五䑓。自五䑓而爲淸凉。而世以淸凉。爲小金剛。淸凉之以仙山見稱。豈下於中國之天台靈鷲也哉。余自十歲時。已知有淸凉山而願一躡。不可得者。十五年矣。余家去山。僅止一日程而塵冗所掣。擺脫不得。飢渴悵望。淹延歲月。秋風今日。一擲靑藜。始得倚立于十二峯矣。十二峯名。皆周愼齋先生所定而流傳。至今觀其峯。想其名。則眞可謂善名狀也。其外峯之長者。丈人遠擬泰山之丈岳。其內峯之宗者。曰紫霄。以其去天之至近也。鵠立如金鴨者。曰香爐。擢出若芙蓉者。曰蓮花。卽蓮䑓寺之西峯。而僧家之所謂義相峯者也。由紫霄西行未五十步而峭頴者。曰卓筆。由卓筆。又西行未二十步而突立者。曰硯滴。硯滴之前。有峯。癯瘦者。仙鶴也。斡東者。擎日取賓旭之義。鎭南者。祝融倣衡山之名。金塔。在擎日之下。紫鸞。在擎日之上。內外合勢。左右拱揖而西者東。東者西也。紫霄峯。凡九層而七寺。白雲最高。其次滿月。次元曉。次夢想。次普賢。次眞佛。次中䑓。擎日峯。凡三層而五寺。曰金生。曰上大乘。曰下大乘。曰普門。曰古道。金塔峯。亦三層而五寺。山形。如塔五寺。皆架中層。曰致遠。曰克一。曰安中。曰上淸凉。曰下淸凉。是也。文殊背紫鸞之東脇。蓮䑓。駕仙鶴之南額。而硯滴峯之下者。曰西草幕。蓮花峯之下者。曰慈悲庵。諸寺。上負峭壁。下臨絶壑。立立羣峯。皆是層塔。目諸峯。則懦者足以立。耳諸瀑。則貪夫可以廉。飮聦明之水。卧滿月之庵。是亦仙人而已。何必丹砂服食。白日冲天而後。謂之仙也哉。獨怪夫以致遠。名䑓名寺。以金生。名窟名寺。無史傳之可考 而何舊跡之如昨也。噫。使是山。在於中州。則必不暇於李杜之所吟哢。韓枊之所記叙。朱張之所登賞。當有名於天下而千古宇宙。只憑孤雲金生。見稱於一國。良可嘆也。是山。地屬於安東。境近於禮安。故松齋聾巖作於前。退溪先生繼於後。名儒碩士。彬彬蔚出。人傑地靈之說。豈不信哉。是行徃來。凡五日而所得雜詠。九十七首。並錄前後。淸凉散吟。百餘篇。庶可以記一行之所歷。而返百首之家。命歸一宣。披而玩之。亦足以想仙山之雅賞。而資平生之卧逰也。雖然。是行也。非直爲景物役也。將欲觀奇勝。以助吾氣而亦 有所儆焉。昔。朱晦庵。與張南軒。遊南嶽。自甲戌。至庚辰。凡七日。唱酬所得。百四十有九篇而己卯中夜撥灰。相對以戒其荒。乃定要束。是後。終不詠於詩。將別於櫧州也。南軒。只以一詩。贈晦庵。晦庵亦不過答賦而已。遂爲南嶽遊山錄後記曰。癸未至丙戌。凡四日。自嶽宮至櫧州。又百有八十里。其間山川林野風烟景物所見。無非詩者而旣有約。相與討論。尋繹於詩。固有所未暇云。又繼之曰。詩之作。本非不善也。而吾人之所以痛絶。懼其流而生患也。羣居。有輔仁之益。猶或不免於流。况離羣索居之後。事物之變。無窮幾
㣲之間。毫忽之際。其所以熒惑耳目。感移心意者。又將何以御之哉。今我同行之友。敢不敬誦明訓。以當盤盂几杖之戒哉。旣吿之友。又反諸身。書紳而自訟焉。越七日甲寅。光城金得硏汝精。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