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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달사지(高達寺址)
사적 제382호
요약 :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혜목산에 있는 절터.
목차
여주 고달사지 승탑(국보 제4호)
고달사지 석불좌(보물 제8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고달사지 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사적 제382호. 전신은 봉황암으로서 764년(경덕왕 23) 창건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대가람으로 왕실의 비호를 받았으며 950년(광종 1) 원감국사가 중건했다. 1233년(고종 20) 혜진대사가 주지로 취임했으며 1260년(원종 1) 절을 크게 확장하고 중건했다. 그후의 기록이 없어 그토록 융성했던 고달사가 언제 어떻게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임진왜란 때 병화를 입은 것으로 전해온다.
중요문화재인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가 절터에 남아 있으며 고달사지쌍사자석등(보물 제282호)은 경복궁으로 옮겨졌다.
여주 고달사지 승탑
국보 제4호. 높이 340cm. 8각원당형의 기본구조를 따른 승탑으로 상륜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의 보존이 양호하며 거작에 속한다. 여러 장의 판석으로 짜인 8각지대석 위에 2단의 8각 굄대가 있고, 그 위의 하대석 각 측면에는 안상이 2개씩 나란히 새겨져 있으며 안상 내부 중앙에는 귀꽃 모양을 하나씩 양각했다.
하대석 윗면에는 겹으로 된 내림연꽃[伏蓮] 16잎을 조각했다. 중대석은 정면으로 머리를 내밀고 있는 용두형의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의 용과 구름무늬가 어우러져 부조되었다. 거북의 몸체는 형식화되었으나 용머리 부분이나 구름에 싸인 용의 몸체표현은 조각이 깊고 생동감이 있다. 상대석은 8잎의 올림연꽃[仰蓮]으로 탑신을 받치고 있는데 하대석의 내림연꽃에 비해 잎이 크고 두터우며 잎 끝의 반전도 힘이 있어 중대석의 운룡조각과 조화를 이룬다.
탑신 각 면에 모서리기둥을 모각하고 문짝 모양과 사천왕상을 얕게 돋을 새김한 것은 당시 부도의 일반형을 따르고 있다. 옥개석은 비교적 두껍고 서까래나 기왓골의 모각은 없다. 지붕 윗면에는 8개의 우동선이 도드라져 있고 추녀 끝에 높은 귀꽃을 장식했다. 옥개석 정상부에 내림연꽃을 둘러 상륜부와 연결시켰으며, 현재 상륜부에는 복발과 8각의 옥개석 모양 보개석만 남아 있다.
통일신라 말기의 승탑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인 비례가 안정되고 조각 장식이 대담한 걸작으로 고달사지에 남아 있는 원종대사혜진탑과 형식이나 양식면에서 유사하여 같은 시기이거나 좀더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혜진탑은 탑비의 내용에 의해 975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달사지부도는 일설에 868년(경문왕 8) 입적한 고승 원감대사의 묘탑이라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고달사지 석불좌
보물 제8호. 높이 157cm. 상·중·하대와 지대석을 모두 갖춘 4각대좌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편이다. 상대석에는 겹으로 된 올림연꽃 24잎을 조각했고 그 밑에는 3단의 받침을 두었다. 중대석의 간석은 4각이며 각 면에 안상을 하나씩 가득차게 새겼다.
하대석에는 3단 받침이 간석을 받치고 있으며, 그 밑에 겹으로 된 내림연꽃 24잎을 상대석과 같은 배열로 새겼다. 하대석 밑에는 턱이 진 각형받침 한 단이 있는데 그 측면에는 안상을 각각 4개씩 나란히 새겼다. 넓은 지대석은 대좌 전체를 안정감있게 받쳐주고 있다.
이러한 유형의 대좌는 예천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상(보물 제425호)의 대좌 등 고려시대의 예가 몇 점 더 전하고 있어 고려시대에 일시적으로 유행했던 것 같다. 연잎의 형태가 좌우로 갈수록 비스듬히 배열된 것은 고려 초기 석물에서 보이는 연화무늬의 시대적 특징으로 같은 고달사지에 있는 부도에서도 보인다.
원종대사혜진탑과 비슷한 10세기에 제작된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며, 대좌의 규모나 제작수준으로 보아 그 위에 놓였던 불상의 규모도 짐작해볼 수 있다.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
975년작. 보물 제7호. 높이 450cm. 8각원당형 부도의 기본구조를 따랐으나 기단부가 방형인 점이 특이하다.
4매(枚)의 돌로 된 지대석 위에 24잎의 외겹 내림연꽃을 조각한 하대석이 있고, 그 위에 갑석형을 조각한 판석을 두었다. 중대석은 용머리를 한 거북을 중심으로 4마리 용이 구름 사이로 꿈틀거리는 모습을 부조했는데, 거북은 머리만 오른쪽으로 돌리고 몸은 정면을 향한 자세이다. 세부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넘친다. 중대석 위의 갑석은 팔각형이며 그 위에 잘룩한 받침대 위로 8잎의 외겹 올림연꽃을 조각했다.
8각의 탑신 4면에는 문짝을, 다른 4면에는 사천왕입상을 조각했으며 그 위로 8각의 옥개석이 놓여 있다. 옥개석 밑에 이중의 받침을 새겨 서까래를 대신했다. 추녀는 수평이나 여덟 모서리에 귀꽃을 달아 약간 위로 반전되어 있다. 옥개석의 윗면에는 기왓골의 표현이 없고 8개의 우동이 표현되었으며 정상부에 이르는 경사도 완만하다. 상륜부에는 8각 노반과 꽃 모양이 조각된 복발, 귀꽃이 화려한 팔각의 보개, 보륜과 보주를 얹었다.
비문에 의해 나말려초의 고승 원종대사 찬유(璨幽:869~958)의 묘탑임을 알 수 있고, 975년(광종 2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중대석의 조각이나 하대석의 연판 형태는 고려 초기 조각의 특색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전체 구성을 볼 때 중대석이 다소 비대해진 감이 있고, 기단부가 4각인 점은 고달사지에 있는 또다른 석조부도가 8각기단인 점과는 차이가 있다. 규모나 각 부분의 비례, 장식면에서 장중함과 섬세함을 동시에 갖춘 10세기 부도의 걸작품이다.
고달사지 쌍사자석등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자가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양의 고려시대 화강암으로 만든 이형석등. 보물 제282호. 높이 243cm. 본래 경기도 여주군 고달사지에 있던 것을 1959년 경복궁으로 이전했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돼 있다. 현재 옥개석과 상륜부는 없고 화사석까지만 남아 있다.
네모난 지대석 위에 2매(枚)의 돌로 된 장방형의 하대석이 놓여 있고 그 측면에는 각각 2구의 안상이 부조되어 있다. 중대석은 복잡한 구조로 이루어졌는데 판석 위에 서로 고개를 돌려 마주보는 사자 2마리가 웅크리고 있고 그 사이에는 구름무늬가 새겨진 네모기둥이 있다. 기둥은 위로 올라가면서 2번 턱이 져 튀어나와 있으며 그 사이로 돌의 이음새가 보인다.
상대석은 부등변8각형으로 겹으로 된 올림연꽃 받침 위에 있고 역시 부등변8각형의 화사석을 받치고 있다. 화창은 넓은 면 4곳에만 뚫려 있다. 보통 쌍사자석등의 사자는 두 발로 서서 석등을 직접 받치고 있는 형식인데 사자가 웅크리고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직접 화사석을 받치고 있지도 않아 이형 석등으로 분류된다. 지대석·상대석은 4각형이며 중대석·상대석·화사석은 부등변8각형으로 신라시대의 기본형인 8각에서 4각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 양식을 보여준다.
그밖에 하대의 안상이나 상대석의 연판도 신라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나 구름과 사자 등 각부의 조각이 다소 둔중한 느낌을 주어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석불좌 위쪽에 위치한 귀부(龜趺: 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 돌조각)의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역동적이며,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돼 있다.
비신을 덮고 있는 두 마리 용으로 장식된 이수(螭首)는 윗 부분이 깨져 있다. 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의 비신(碑身)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져 보관돼 있다.
여주 고달사지(高達寺址)
기자명 여주=이강식 기자
금강신문 기사 입력일 : 2011.01.14.
신라 말 창건 대각국사 천태종 개창 때 흡수
대한민국 방방곡곡에 흩어져 있는 폐사지는 3,000여 곳에 이른다. 지금은 주춧돌 하나, 스러진 탑 부재 하나만 남은 곳도 있고, 수풀에 뒤덮혀 흔적만 남은 곳, 논두렁에 당간지주 하나만 달랑 남은 곳도 있다. 여기서도 불교의 향기를 느낄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이도 있지만, 폐허가 됐어도 불법(佛法)의 향기는 은은하게 흐른다. 한국 천태종은 고려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개창한 후 맥을 잇다가 조선시대에 이르러 끊기다시피 했다. 이를 대한불교천태종이 중흥, 현재까지 천태 법맥을 이어오고 있다. 폐사지 중에서 한때 천태종의 법향이 흘렀던 성지를 1년 간 연재한다. 편집자
이번 연재의 시작은 여주 고달사지다. 유적지는 사적 382호로 지정돼 있고, 국보ㆍ보물로 지정된 석조 유물이 있어 고고학도나 문화재에 관심있는 이들에겐 잘 알려진 곳이다. 지난 6일 고달사지를 찾았다. 사지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몇몇 석조 유물만 눈에 띨 뿐, 건물터는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번성했던 사찰이 폐허로 변한 모습과 그 폐허가 눈 속에 묻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 닮았다.
학자들은 남아 있는 유물과 유적, 당시 고달사를 무대로 활동했던 선사들의 비문을 통해 고달사 창건연대를 통일신라시대로 추정한다.
고달사는 신라 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봉림산문의 개조인 원감대사 현욱(圓鑑大師 玄昱 : 787~868)이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주석하던 9세기 무렵 번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종대사 주석 사세 일어나
원감대사의 제자 진경대사 심희(眞鏡大師 審希 : 854~923)가 고달사에 거주하다가 김해 봉림사로 옮기자, 진경대사의 제자인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 : 869~958)가 주석하면서 사세가 일어났다.
그러나 원종대사가 중국으로 유학간 뒤 후원세력을 찾지 못해 잠시 사세가 위축됐으나, 원종대사가 921년 귀국해 고달사에 주석, 혜종ㆍ정종ㆍ광종의 후원을 받으며 최대 전성기를 맞는다.
태조는 원종대사에게 가납의(霞納衣)와 좌구(座具)를 보냈고, 이어 혜종과 정종도 법의를 보내 후의를 표시하였다. 광종은 대사에게 증진대사(證眞大師)의 호를 내리고 궁궐로 불러들였다. 국사로 봉해진 원종대사는 왕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하사받고 혜목산으로 물러나 후학양성에 힘쓰다가 958년(광종 9)에 입적했다.
원종대사 입적 후 광종은 971년 고달원(고달사), 희양원, 도봉원을 문하제자들이 주지를 맡아 대대로 끊어지지 않게 하라는 부동선원을 선포했다. 이 내용은 원종대사비문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乾德九年歲次辛未十月二十一日, 於元和殿開讀大藏經時, 皇帝陛下詔曰,
國內寺院唯有三處只留不動門下弟子相續住持代代不絶, 以此爲矩.
所謂高達院曦陽院道峯院.
건덕 9년 세차 신미 10월 21일, 원화전에서 대장경을 독경할 때, 황제폐하께서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국내의 사원 중에 오직 세 곳만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이 상속으로 주지하여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할 것이니, 이 규정을 꼭 지키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 세 곳이란 이른바 고달원·희양원·도봉원이다.
고달사가 부동선원으로 정해진 다음해에 지종(智宗)대사가 중국에서 귀국하자 광종은 법안종에 관심을 기울였다. 이후 고달사는 법안종계 선원으로 법맥을 잇다가 대각국사 의천 스님이 천태종을 개창할 때 천태종으로 흡수됐다.
천태종 5대 산문 중 한 곳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는 고달사를 비롯해 거돈사ㆍ신령사ㆍ영암사ㆍ지곡사 등 선종 5대 산문의 선승 1,000명과 덕린ㆍ익종ㆍ경란 등 자신의 문도 300여명이 기반을 이루었다. 이 5대 산문은 대부분 중국 법안종에서 유학했던 광종대의 선승들과 관련이 있는 사찰들이다. 이 때 선종의 승려 60~70%가 천태종에 흡수됐다. 천태종 창종의 기반이 법안종 선풍을 유지하면서 천태학을 지속한 선종 5대 산문이었다는 사실은 선봉사 〈대각국사비〉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5대 산문은 의천 스님의 문도들과 주도권 싸움을 벌이다 분열, 의천 스님이 입적한 뒤 천태종 중심사찰로서의 기능을 하지 못하게 됐다. 이후 고달사는 천태종 주도세력에게서 밀려나 지방사원으로서 명맥만 유지했을 것으로 보인다.
조선초 1530년(중종 9)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달사가 취암사ㆍ상원사와 더불어 혜목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1799년(정조 23)에 쓴 《범우고》에 고달사가 폐사지로 기록되어 있어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할 뿐, 정확한 폐사 시기는 알 수 없다.
국보·보물 등 문화재 산재
고달사지에는 국보 제4호로 지정된 고달사지 승탑이 있다. 이 승탑은 신라말 또는 고려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3.4m이며 재질은 화강암이다. 이밖에도 고달사지에는 고달사지석불좌(보물 제8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혜진탑(975년작. 보물 제7호),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제6호), 석조 2기, 귀부 1기가 있다. 보물 282호 고달사지쌍사자석등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사지는 불좌대를 중심으로 남쪽으로 넓게 펼쳐져 있다.
석불좌(보물 제8호)는 높이 1.57m, 가로 2.01m, 세로 2.39m로 상·중·하대와 지대석(地臺石)을 모두 구비한 거대한 사각대좌다. 대좌의 규모로 보아 불상 또한 거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석불좌 위쪽에는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龜趺) 및 이수(보물 제6호)가 있다. 거북머리는 눈을 부릅떠 정면을 바라보고 있고 다리는 마치 땅을 밀치고 나가려는 듯 역동적이고, 발톱의 사실적 표현은 땅을 꼭 누르고 있는 듯하다. 등에는 2중의 6각형 벌집 모양이 정연하게 조각돼 있다.
원종대사혜진탑비(975년)의 비신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 비문에 의하면 원종대사는 869년(경문왕 9)에 출생, 958년(광종 9) 8월에 90세로 입적한 고승이었다. 비문에는 원종대사의 가문·출생·행적 그리고 고승으로서의 학덕 및 교화·입적 등에 관한 내용이 기록돼 있다.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제7호, 977년 조성)은 사지 뒤쪽 산기슭에 있다. 원종대사혜진탑에서 계단을 따라 50m 정도 올라가면 고달사지부도(국보 제4호)가 있다.
우두산(牛頭山)
요약 :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과 여주시 대신면·북내면에 걸쳐 있는 산.
높이 : 480m
문화재 : 고달사지부도(국보 4),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6), 고달사지석불좌(보물 8),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7)
높이 480m로, 동쪽의 고래산(543m)과 능선으로 이어져 있다. 지도상에는 높이가 480m로 되어 있으나 정상 푯말에는 높이가 359m로 되어 있다. 산행은 곡수리에서 시작한다. 정상에는 숲이 우거지고 고래산으로 이어지는 길로 곧장 들어설 수도 있다. 하산은 뺑치고개에서 고달사로 내려가는 남쪽 길로 가다가 동쪽 주암리로 내려간다. 산행 시간은 4시간 정도 걸린다.
산의 남동쪽 자락에 고달사지가 있다. 고달사는 764년(신라 경덕왕 23)에 창건되었다고 하며, 신라 이래의 유명한 삼원(三院), 즉 도봉원(道峰院)·희양원(曦陽院)·고달원(高達院) 중 하나로 고려시대에는 국가가 관장하는 대찰이었다. 고달사지부도(국보 4)를 비롯하여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귀부 및 이수(보물 6), 고달사지석불좌(보물 8),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보물 7) 등의 문화재가 남아 있다. 창건 당시에는 지금의 상교리 일대가 모두 사찰에 속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래산
높이 : 541m
위치 :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여주군 북내면
경기 양평의 고래산은 높지 않고 산세도 아담해 봄맞이 가족산행지로 찾으면 좋다. 산자락에는 신라 때 대사찰로 알려진 고달사지가 있어 불교유적 및 문화유적 탐방 코스로도 인기가 높다.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용문산과 양자산, 서쪽으로 여주읍과 남한강 물줄기가 가깝게 보이고 원주 치악산도 어렴풋이 보인다.
신라 경덕왕 때(764년) 창건된 고달사는 한때 2천여평이 넘는 넓은 절이었다. 이곳 저곳에 보이는 주춧돌이며 기왓장, 돌부처와 돌조각들이 옛 절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원종대사 해진탑비귀부(보물 제6호)와 원종대사 혜진탑(보물 제7호), 석불좌대(보물 제8호), 고달사지 부도(국보 제4호) 등이 있다.
산행 길잡이
고래산 가는 길은 양평에서 곡수리를 거치는 것과 여주에서 고달사지로 가는 것 2가지가 있다.
곡수리를 산행기점으로 하는 코스는 일단 대평저수지까지 가야 한다. 저수지 입구에서 동쪽을 보면 고래 등줄기처럼 완만한 곡선을 이룬 주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정상까지는 육산의 완만한 길이며 정상에는 큰 바위로 구성되어 있다.
저수지를 끼고 500m쯤 걸으면 평론마을. 마을을 지나 대광사까지 간다. 대광사를 지나면 수렛길이 갑자기 좁아지면서 오른쪽으로 계곡을 끼고 돌게 된다. 500m 정도 더 가면 통나무다리가 나온다. 통나무다리를 건너 소나무 숲속 길을 따라 오르면 고래산 주능선과 만나게 된다.
지능선에서 동쪽을 향해 30분쯤 가면 주능선. 이곳에서 20분을 더 가면 사방이 확 트인 고래산 정상이다. 정상에 서면 북쪽으로 용문산과 양자산, 서쪽으로 여주읍과 남한강 물줄기가 가깝게 보이고 원주 치악산도 어렴풋이 보인다.
하산은 올라왔던 주능선을 따라 다시 갈림길까지 내려와 국사령을 거쳐 대평저수지나 상교리 고달사지로 내려간다. 국사령에서 고달사지 까지는 40분 가량 소요된다.
교통 안내
승용차로는 여주읍에서 여주교- 천송 경원리조텔앞 검문소 3거리-북내(당우리)를 거쳐 상교리 고달사지까지 간다.
대중교통은 상봉터미널에서 20분 간격으로 운행하는 양평행 버스, 양평에서 하루 18회 운행하는 곡수리행 시내버스 이용, 대평저수지 입구나 곡수초등학교 앞에서 내린다.
여주 [고달사지&우두산&고래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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