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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저가 이 글을 쓰는 <의도意圖>부터 나름대로 밝혀보자면.. 뭐 별다른 것은 아니고요.
나름대로 저가 알게된 것.. 또는 나름대로 짐작하고 정리된 것들을..
<실천實踐>하는 작업이다~ 라고 이해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다양한 관점들을 정리하고 스스로 검증해보는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고요.
또 저의 관점에서는 나름의 좋은 것(제 주관적 기준이지만)을 세상에 베풀어 놓아야..
더 큰 것을 마땅히 받을 것이라고 보기 때문에.. (이것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족하나마 진실에 게으르지 않은 정보를 알린다면.. 저 역시 더 좋은 진실을 얻어가는..
더 큰 진실의 문門을 열 수 있는..
말하자면 그러한 <선善순환적 패러다임>에서 성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저가 어쨋든.. 이렇게 <아침의 태양> 카페를 알게된 것도..
나름대로 저가 진실을 얼마나 알든 모르든..
나름의 진실을 밖으로 알려오는데 인색함이 없었기 때문에..
더 큰 진실의.. 빛을 접할 수 있는 기회를 받은 인연이었을 것이다~ 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튼.. 저의 취지와 의도가 대략 위와 같은 것 같습니다.
4상의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이제마李濟馬>는 1800년도 사람이고.. 1900년에 사망하였으니..
4상의학은 세상에 알려진지 대략 100년 정도된 학문이고.. 사상思象이다~ 이렇게 보면 되겠습니다.
학문이니 사상이니 좀 고답적인 표현을 썼는데 일단 기본은 <이론理論>입니다.
학문.. 사상.. 글쎄요. 단어 자체에서 다소 권위적이거나 고답적인 뉘앙스도 있을듯 해서요.
일단은 그냥 이론입니다. 단순하게 말해서.. <4상>이라는 주제로 끄집어 놓은 말들이란 것이죠.
그러니까 그냥 일종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일단 그 이론이..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끼쳐왔고..
일정부분 그 진실성이 보편적으로 한국 사회에서는 역사적으로 인정 받는 측면이 있어서..
다소 높여서 불러주는 것이죠. 학문이다.. 뭐 이렇게요.
<동방예의지국>다운 표현의 방식인 것이죠... ㅎㅎㅎ
참고로.. 인간 사회적 차원을 넘어서.. 하늘과 보다 근본적으로 깊이 연결된..
이른바 <하늘의 소리>는.. 훨씬 더 높여서 <경전>이라고 부릅니다. (ex. 황제내경. 성경. 반야심경)
일단 경전은 역사적.. 즉 인류 문명에서 오랜시간 상당한 세파를 모두 겪어왔을때 얘기죠.
소위 말하는 <짬밥 되고 인류문명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보편적 진리성>을 가리킬때..
그렇게 <경經>이라고 부릅니다만.. 상당히 역사적.. 정치적 뉘앙스가 많이 작용하는 호칭이고요.
어떤 확실한 객관적 잣대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소위 <짬밥> 안되고.. 인류 문명권에 큰 영향을 못 줬다 하더라도..
사실 충분히 더 큰 하늘의 소리.. 진리일 수 있다는 말씀이지요.
4상은... 일단 그 개념이 <사상四象>인데.. 바로 <4개의 상象>이라는 뜻입니다.
일단.. 한방에서 질병 치료 목적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의학醫學>이라고 부르는데..
그 근본 배경은 사실 <철학哲學>.. 즉 형이상학입니다.
그래서 4상의학이란 말에서.. 뒤에 붙은 의학이라는 말은 실용적 활용 측면을 표현했고..
앞을 장식하고 있는 4상이란 말은.. 이미 그 단어 자체로..
동양철학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구나~ 라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요새는 한의학계에서 따로 4상의학만으로 처방하고 그러진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의학보단 4상이라는 철학적 배경으로서 더 큰 비중을 잡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단 가장 많이 들어본.. 동양사상 중에는 <음양 5행>이란 것이 있지요.
음양은 2(음+양)고요. 음陰과 양陽. 이렇게 2개잖습니까? 그래서 2음양이라고도 부릅니다.
5행은 5(목+화+토+금+수). 4상은 4(태양+소양+태음+소음)입니다.
간단하지 않나요? 네. 어려울 거 하나 없습니다. 단순한거죠. 그런데 이게 다 별개의 관점입니다.
위의 명칭들을 무슨 실체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이해가 어렵고요.. 관점이라고 보시면 더 정확해요.
그래서 2음양이라는 관점이 다르고.. 5행이란 관점이 다르고.. 4상이란 관점이 또 다 달라요..
다 별개의 차원을 가진 세계라는 것이죠. 관찰자의 눈높이가 다 다르다는 것이죠.
그런데 언어상에 있어서는 같은 말들이 나와요.
관찰하는 눈높이는 다 다른데 말은 중복되고 섞인다는 것이죠.
그래서 한자漢字도 똑같고 말이 같아도.. 전혀 다른 뜻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차이점을 명확히 분별하는게 실전에서 그리 쉽진 않습니다만.
일단은 단순 사전적 의미로서만은.. 오의奧義에 접근할 수 없다~ 라는 정도로만..
여러분의 시야를 넙혀서 바라 보시면 되겠습니다.
별개의 세계지만 그런데 완전히 별개는 또 아니라는 것이죠. ㅎㅎㅎ 좀 이상하지요?
방과 거실의 경계처럼 연결되어 있고 또한 각립各立합니다.
연결 되고 섞여 있으나 또한 별개의 것이기도 하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특히나 동양학에 있어서는..
어느정도 깊이 들어가면 말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똑같은 글자라도.. 각각의 세계관에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됨을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말이나 글자 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관점>입니다.
어떤 세계관에서.. 어떤 시야와 초점에서 바라보는지.. 이 부분이 바로 핵심이고요.
그 다음 순서가 표현해놓은 말 또는 <문자文字>입니다.
그러나 또 그렇다고 문자의 세계를 무시하는 것도 문제가 있습니다.
이건 글자세계를 무시하냐~ 아니면 숭배하냐~ 라는 흑백논리의 초점이 아니라..
<순서順序>라는 관점에서 드리는 말씀이니까요.
재밌죠? 해석하기에 따라서 지금까지 제 이야기가..
마치 글자 세계를 존중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들리기 쉽잖아요. ㅎㅎㅎ
그러니까.. 이른바 진리 또는 빛을 표현하는 상징적 체계라고 하는 것은...
해당 관찰자의 시야와 관점에서.. 말을 가지고 빌려와서 표현한 것이지..
그 말이 처음부터 근원이 되어서 글자의 세계에서 관점이 도출된게 아니란 것이죠.
바로 이러한 순서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소리와..
인간이 상상으로 글자로서 만들어내는 흉내내기를.. 명확히 분별하셔야 합니다.
어렵다면 좀 어려울 수 있는 얘기라고 생각은 듭니다.
어쨋거나 겉으로 봤을땐.. 모두 각각의 개성을 가진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니까요.
어떤게 하늘의 소리에 가깝고.. 어떤게 인간 개성의 소설인지 자칫 구분이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서>라는 힌트에 포인트를 잡고 읽어보시면 도움이 될 듯합니다.
그래서 저는.. 글자의 힘은 위대하면서도.. 또한 위험하고 늘 부족해서..
마땅히 경계함에 있어 게으름이 있어서는 안된다~ 라는 평상시의 소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죽했으면 춘추전국시대의 <공자孔子>가 가장 먼저 해야할 최선最善의 일로서..
정명正名(말과 언어의 개념부터 바르게 정의하는 것)을 꼽았을까요...
세종대왕이 글자 즉 문文으로서 천하에 뜻을 펼치려 했던 까닭도 다 비슷한 맥락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글자의 세계를 무시하는 자들은 문맹文盲이고.
글자의 세계를 맹신하는 자들은 일개 서생書生이며.
대인군자大人君子야말로 이를 크게 바로잡아 널리 펼 수 있다. 라고 생각합니다.
(어디서 들은 말 같긴한데.. 출처가 모호하고 정확하지 않습니다. 일단은 유교儒敎 라인 같습니다.)
일단 저가 다시한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제 글을 읽을때도 말이나 언어가 아니라.. 관점을 먼저 따라오는게 중요하다는 것이예요.
그 관점에 비춰서 글자를 다시 <피드백feedback>해봐야 앞뒤 선후가 더 명확하게 잡힌다는 거죠.
그게 진짜 공부工夫인데.. 지금부터 저가 설명드릴 이제마의 세계관은 더더욱 그렇습니다.
(세계관이란 다름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란 뜻이겠죠?)
저는 나름대로 이제마의 관점을 따라가 보려고 하는 것일 뿐이고..
저의 이야기에는 또 저의 주관적 견해와 관점..
그리고 다른 한의학자들에게 영향을 받은 관점들도 많이 용해 되어 있을거예요.
어쨋거나 저는 저의 양심상 나름의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도 중요하니까요.
얼마만큼의 진실인지는 일단은.. 나중 문제죠.
얼마나 진실되게 볼 수 있느냐.. 진실로 파악하고 이해할 수 있느냐..
일단은 이게 먼저입니다. 이게 순서라는 것입니다.
이제마는 기존의 5행이라는 관점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4상을 잡았어요.
여기서 비교를 하자면.. 5행은 <시간적인 관점>이다. 그리고 4상은 <공간적인 관점>이다.
이정도는 지성적으로 분별하고 가는게 여러모로 도움이 되요.
5행이라는 시간성에서 <토土>가 빠져서.. 목화금수 4가지로만 나타나..
공간성에서 관찰.. 이를 인체에 적용하는 것이 바로 4상의 패러다임이거든요.
그러니까 일단 이제마는 지금 만물을 공간성이라는 시야에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시간적인 변화는 일단 무시하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글쎄요.. 그런데 시간적 변화를 무시한다는 말은 다소 오해의 소지가 좀 있는 표현 같네요..
시간적 변화의 추상성을.. 좀 더 구체적인 형이하학적 공간성에서 반증하려는 것이 더 정확하겠네요.
그러니까 이제마에게서 보다 중심이 되는 것이.. 시간성 보다는 <공간적 반증>이란 것이죠.
여기서 한번 비유를 해볼까요?
음.. 글쎄요... <오라소마>에서 바틀bottle을 고르잖아요.
위에서 말씀드린 내용이 이와 비슷한 내용입니다.
영적 상태나 흐름.. 또는 에너지를 우리가 이렇다 저렇다 파악하기 힘들잖아요?
혼자만의 주관적 망상을 <영적spiritual>이거나 형이상학적 진실로서 오인할 수도 있잖아요?
그래서 바틀을 통해서 좀 더 구체적인 색깔의 세계로 영적세계의 구체적 단서를 끄집어낸다는 얘기죠.
마찬가지로 이제마는.. 기존의 동양적 관점인 5행이라는 추상적 흐름 즉 행行을..
4상이라는 좀 더 구체적 세계로 끄집어내서 검증하고 관찰하려던 것이었다~ 이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라소마에 있어서 바틀이...
이제마한테 있어서는 인체.. 즉 <사람의 몸>이었던 것입니다.
사람의 몸을 바틀(오라소마)로서 삼았다고 보시면 일단 쉽게 감이 올거예요.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는 오라소마를 보고서 상대방의 정신흐름을 읽고 상담해주듯..
이제마는 각각의 몸뚱아리를 보고서 정신흐름을 읽으려는 관점이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바틀의 색깔과 그 변화를 통해서 영적 세계의 단서와 상징들이 포착되듯..
몸의 변화.. 몸의 대소강약이나 차이.. 특히 질병이 큰 단서가 되겠죠?
질병은 좀 확실하고 뚜렷하게 눈에 띄니까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드린 특징들은..
상당히 보편적으로.. 동서양東西洋을 막론하고 다 엇비슷합니다.
4주.. 아니 세속적으로 미신화된 <상술商術>로서의 역술가 말고..
천문에 정통 뿌리를 둔 <천문사주天文四柱>와 5운6기에서도.. <감응感應>이 매우 중요한 요소거든요.
보통 4주가 다 맞거나 아니면 사기치는 거라고.. 맞거나 틀리거나로 2분적으로들 단정하시곤 하는데요..
맞는 사람있고 안 맞는 사람 있어요.
개인차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소통이 잘 안되면..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상담 자체가 무의미합니다.
물론 지금의 <4주8자> 역술이라고 하는 체계는.. 감응을 떠나서 체계 자체가 엉터리고..
제가 위에서 <천문4주>라고 구분해서 부른 것은..
대우주와 소우주의 연결과 소통.. 감응에 따른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건 뭐가 맞고 틀리고가 핵심 주제인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가 얼마나 잘 연결되고 소통하느냐가 진짜 핵심적이다~ 이 말인 것이죠.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뭐가 됬든 영적세계와 물질세계..
대우주와 소우주의 <연결상태 또는 소통상태>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는 것입니다.
주역周易도 마찬가지예요. 6효六爻라던지 기문둔갑이랄지..
뭐가됬든 모든 점괘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다 맞거나 그런게 아니예요.
반대로 다 틀렸다고 할 수도 없죠. 물론 <해석체계>가 처음부터 엉성한 엉터리도 많죠.
점괘가 다 맞으면.. 점괘대로 모든 운명이 결정되어 있게요? ㅎㅎㅎ
하다못해 타로카드를 고른달지 하는 그런 것도요..
그게 맞으면서도 또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전혀 아니라기 보다는.. 불순물이 자꾸 끼어들어간다는 것이죠.
큰 맥락에서는 바로 이런 <소통과 감응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반드시 물질세계와 그 이면의 정신세계가 소통하고 감응하는 전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통상태에 따라서 진실성이 상대적으로 나타나고.. 개인차도 있다는 것이죠.
이걸 무시하게 되면.. 오라소마든 점괘든 4주든 뭐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 맞는 것으로 <맹신猛信>하거나..
반대로.. 무조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불신不信>만 하게 되요.
맹신과 불신 사이.. 그것을 <발전적 의심>이라고 불러도 좋고요.
또는 <검증적 수용 또는 엄격한 신뢰>라고 불러도 좋고요. 어차피 표현방식이니까요?
참고로 저는 오라소마 체계가 색깔의 빛 에너지를 기준으로 함으로..
다양한 개인적 편견이나 관념적 선입견에서 벗어나..
훨씬 더 명료하게 정신세계와의 감응.. 소통의 우위를 점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높은 감응의 수준을 담보로 하고 있다고 봅니다.
다시한번 단순하게 말씀드려보죠.
바틀이든 점괘든 뭐든.. 고르는 사람이 진실되게 못 고르면? 그만큼 진실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고르는 사람이 점점 진실되게 솔직하게.. 자신과 하늘과 대우주와 소통하면요?
그만큼 믿어도 좋습니다. 그 나타나는 단서들의 상징들을요.
단순하죠? 결국 자신의 소통상태가 중요한 것이지..
소통상태를 나타내주는 시스템(해석체계)이 잘잘못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런데 체계 자체가 엉터리인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사기라고 저가 바로 짚어내는데요.
즉 사람의 인간적 지식과 얄팍함으로 체계를 급조하여 만들어내는 경우들이죠.
또는 상업적 목적 같은 것을 위해 오랜시간 인간의 상상으로 변질되고 부패한 경우들이죠.
이런건 저같은 사람한테는 바로 티가 나요. 바로 덜미가 잡힙니다.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4주를 업業으로 하는 모든 이야기들.. 이론들이 다 사기예요.
(4주를 업으로 하는 것들은 저가 위에서 표현한 천문4주랑은 전혀 다릅니다)
엉터리라는 말씀입니다. 전문용어로 <망작妄作>이라고 부릅니다. <노망난 소리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전혀 신빙성 없는.. 노망난 소리라고 보시면 되고요.
이미 동양쪽으로.. 진실성 그러니까 대우주 하늘의 흐름과의 소통이 거의 닫혀버렸습니다.
하늘의 소리를 잘 받아와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통로가 닫히다시피 되버렸다는 것이지요.
본래부터 동양학이 그런 것은 아니었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역사적으로 봤을때는.. 바로 진시황제의 <분서갱유焚書坑儒> 이후 이렇게 크게 몰락했습니다.
진시황제가 자기 비위에 안드는 계열의 학자나 하늘과 더 가깝게 연결되 있는 인물..
그리고 관련된 소중한 자료들을.. 미신으로 취급해서 싸그리 다 불태워버리고..
땅에 파묻어 죽여버렸거든요. 그 이후로 동양쪽에서는 소위 오타가 많이 나옵니다.
하늘과 연결되 진실된 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망작.. 즉 노망난 소리가 많이 나온단 얘기죠.
진시황의 분서갱유 이후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소통을 잘 못하고 인간의 상상으로서..
노망난 소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전부는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게 변질 되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현재 대중적인 역술계.. 특히 동양계통이 다 이런 노망난 소리예요.
이게 현재 동양쪽 정신분야의 현주소.. 연결상태(감응)의 성적표인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안타까운 실정은.. <로키 마운틴 미스테리 스쿨>처럼..
하늘과 연결된 지혜들과 인물들이 적절히 보호되고 관리되지 못한 것..
이 부분이 가장 큰 것 같아요. 그 누구냐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은.. 킹 솔로몬은..
의식이 깨친 인물이라 오히려 하늘의 소리에 신중하였고 보호를 했다고 하는데..
진시황은 다 죽여버렸거든요. 정반대였던 것이죠.
아무튼 그 이후로 씨가 말라서 거의 계승이 안되요. ㅎㅎㅎ
다 분서갱유 이전의 몇가지 소식이 겨우 내려온건데..
그마저도 후대에서는 해석이 안되고 못 따라가니까.. 노망난 소리만 만들고 있는 겁니다.
역술가한테 가서 4주를 보느니 차라리 나름대로 무당이 훨씬 낳습니다.
저기 어디죠? 안양이던가? 거기가면 무당촌 있어요.
거기는 도심지에 무당집이 pc방처럼 몇 집 건너서 골목 골목에 있다시피 하더군요.
한번 점보는데 3만원이고.. 젋은 새댁 무당들도 꽤 즐비합니다.
아예 그 무당촌에선 가격을 통일해서 손님맞이에 분주하더라구요.
근데 꽤 오래전 얘기라서.. 요새는 어떨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요.
어차피 이 사람들이야 어쨋든 신내림을 받았다는 부분은 인정되니까요.
저야 뭐 무당은 취급을 잘 안하지만서도.. 그래도 웬만큼 신기하게 맞추는 구석이 있어요.
무당도 말하자면 사람이 바틀이 되는거거든요. 중간 매개체 말이죠.
신내림 받는다는게.. 너가 오라소마 바틀이 되어라~ 뭐 일종에 이런 거예요...
그런데 사실 무당도 마찬가지예요.
손님에 따라 잘 통하면 잘보고.. 손님에 따라 통하지 않으면.. 또 엉터리가 되기도 합니다.
그게 다 소통이 얼마나 잘 되느냐의 문제인거죠.
게다가 무당 자신이 얼마나 투명하고 깨끗하냐도 관건이죠.
무당이란 사람바틀이 뭔가 때가 끼고 감응이 떨어지면.. 손님과는 별개로 또 당연히 엉터리가 되죠.
이런 경우가 바로 <선무당이 사람잡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 일단은 진짜냐 가짜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진짜 가짜에 대한 분별력이 중요한거죠.
진짜 가짜 분별하는 것... 글쎄요. 현실적으로 표현해서 그렇지.. 이게 다 빛의 구현이고.. 에너지거든요.
지금 저가 하고 있는게 다 이런거예요. 진짜랑 가짜 구분하고.. 분별하는 그런 거거든요.
그걸 설명하려다보니 여러 배경지식이나 관점을 가져오는 것이구요.
근데 얘기가 많이 샜네요..
다시 4상으로 돌아오자면.. ㅎ 일단 타고나는 몸.. 신체는 속일 수가 없거든요.
물론 몸도 속임수가 있을 수 있어요. 하지만 거기에도 속일 수 있는 범주가 있고 없는 영역이 있는데요.
그거 다 일일히 말하려면 무지하게 피곤해져서 일단은 패스하겠습니다.
예를들면 관상觀象 같은거.. 손금 보는거.. 작명.. 부적.. 이런 것 다 사기입니다.
8상의학? 이런 것도 다 지식 쪼가리만 가져다가 만든 노망난 소리입니다.
물론 오랜 역사 속에서 전승 되다보면.. 어찌 한두마디 진실이야 없겠습니까만..
체계가 무너지고 흐름이 끊겨서.. 중간에서 다 헤쳐 먹고..
남은 것은 노망난 소리에 장시간 오염된 독극물이 대세론大勢論인 실정입니다.
그냥 재미로 보고 듣는 것이야 상관 없지만 맹신하고 광신하고 이러면 안되요.
분서갱유 이후로 씨가 말라버렸다 했잖아요.
짜잘한 씨만 겨우 남아서 돌아 댕기는 것이지 큰 씨는 잘 나오질 않아요.
진시황제가 다 죽여버려서.. 태워 버리고 파묻어 죽이고.. 기름통에 부어 끓여서 죽이고..
아무튼.. 이미 근본적인 맥이 끊긴지 오래입니다.
저가 4상의학에 대해서 말씀드리는 이유 중 하나는..
그래도.. 그나마 동방에서 이제마라는 인물이 나왔다는 거죠.
진시황 이후로 맥 끊긴 이후.. 그래도 하늘과 가깝게 소통하는 인물들이 간간히는 나오는데..
최근의 역사에서 주목할만한 인물 중 한명이 바로 이제마였다는 말씀이고요.
이제마 정도면 상당한 씨다~ 라고 말씀드릴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마가 성인聖人이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 정도 레벨은 아니예요.
성인은 하늘의 소리에 정말 가까운 것인데.. 이제마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고 봅니다.
자.. 이제마는 바로 인체.. 사람의 몸을 바틀로 보고서 세계를 풀어 가려고 했다는 거..
아무튼 대략 이 정도.. 핵심은 일단 이정도로 해서.. 맥락 위주로 잡고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저가 보는 관점에서는.. 먼저 그것이 사기인지 아닌지를 일단 분별하는데요.
여기서의 사기냐 아니냐는 주제는... 쉽게 말해서 진짜냐? 가짜냐? 얼마나 진짜냐? 라는 주제입니다.
또 진실되고 솔직하냐? 아니면 뭔가 숨기거나 꼼수로 가느냐? 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어떤 믿음이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하게 인식과 이해의 차원이거든요.
그러니까 <인식론認識論>이라는 것입니다. <도덕론道德論>이나 <윤리론倫理論>은 아니예요.
다만 <공公>에 있어서는 이 자체가 <정치政治>이며 <치세治世>이며 <경영經營>입니다.
특정 영성계열에서는 아마도 압박감을 느낄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만..
아무튼 위의 이야기가 무슨 말이냐면.. 사기치냐 안치냐를 인식하는 것이지..
도덕적으로 심판하거나 윤리적 잣대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고요..
위와 같은 인식이.. 공公(사회적차원)에 있어서는 <정치적 실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죠.
바로 인식에 대한 실천의 테마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천입니다. 내 개인적으로 나름의 사기치는지 안치는지는 분별해서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이 공적 세계로 투영되어 나타나는 것이 바로 실천이고 정치. 치세. 경영이라는 것이죠.
영성계에서 내적 자기본위적 평화와 이미지로서의 믿음들만 맹신하는..
작금昨今의 수준 그 패러다임의 한계내에선.. 처음부터 아예 무슨 말하는지 조차 이해를 못해요.
나도 이해시키기 힘들고 귀찮구요.
그래서 일단은.. 기본적으로 이것은 인식과 이해의 정도가 나타나는 것이지..
어떤 개인적 다양한 선택과 취향이 나타나는게 아니라는.. 것이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따로 논할 필요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농담 따먹기 정도의 심심풀이용 립서비스 아니면 연기실력 키우기? 뭐 그런 정도란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닙니다.
나중에 가서 언급이 될랑가 모르겠지만..
4상의 표현으로는 주책籌策으로 가늠하고.. 인식하여.. 위의威儀로 경영하고 실천한다고 할 것입니다.
자... 그럼 다시 4상으로 가볼게요.
4상에서는 일단 4가지로 분별을 합니다. 태양太陽. 소양小陽. 태음太陰. 소음小陰.
일단 이런 단어 자체는 별로 낯설지 않을 것입니다. 워낙에 많이 들어본 말들이니까요.
그럼 태양. 소양. 태음. 소음이 뭐냐. 특정한 신체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물질?
아뇨.. 일종의 <영혼靈魂> 비슷한 동양적 설정입니다. 그냥 형이상학적 <기능을 표현한 것>입니다.
일단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어떤 기능과 에너지의 세계라고 보시면 무난합니다.
기氣랑 유사한 얘기예요. 상象은 좀 더 큰 그림새.. 모양새를 가리킵니다. 좀 더 큰 바탕이랄까요?
그런데 이 에너지의 세계가 전혀 비물질적으로.. 물질과는 상관없는 무관한 것은 아니고..
물질세계와 소통하고 있다는 것이죠.
물질로 소통하면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고요.
아니면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더라도 그 자체로 흘러가고 존재하는 것이고요.
<기氣>라고 표현해도 좋고 <빛>이라고 표현해도 일단 좋습니다. 별 상관없어요.
개념적으로 정의되는 단어는 어차피 한계가 있거든요.
그래서 일단은 관점이 중요하다~ 라는 것이죠.
일단 이제마의 관점으로 들어가면.. 아마도 내부를 관찰하는 관점이라고 보여지는데요.
통상.. 심장心藏 즉 하트heart를 기준으로 하는 이야기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니까 심장을 기준으로 위로 직승. 아래로 횡강. 이런 상대적 관점이란 것이죠.
신체 자체의 물질적 장기를 가리키는게 아니라..
심장 에너지가 위 아래로 퍼져 나가는 모습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태양은 <직승直昇>이고요. (직승은 <직진으로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소양은 <횡승橫昇>이고요. (횡승은 <비스듬히 올라간다>는 뜻입니다)
이쯤에 심心이 있죠. 얘를 기준으로 위에가 상上.. 밑에가 하下가 됩니다.
태음은 <횡강橫降>이고요. (횡강은 <비스듬히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소음은 <직강直降>입니다. (직강은 <직진으로 내려간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제마는 직진하며 상승하는 기운을 태양으로 봤어요.
심장에서부터 곧바로 위로 쳐올라가는 힘이라 이겁니다. 에너지이고 기氣죠.
실제 물질을 말하는게 아닙니다. 그리고 이것을 온기溫氣(따뜻할온)라고 표현했습니다..
폐국肺局(폐를 이루는 힘. 실제 해부학적 폐가 아님). 애성哀性(슬퍼하는 선한 기운)으로 봤습니다.
직승. 온기. 폐국. 애성. 이런 말들은 별로 안 중요합니다. 정말 따지자면 아무것도 아니죠.
그냥 말을 그렇게 써놓은 것입니다.
다양한 관점에서 예쁜. 아름다운. 아리따운. 매력적인..
이런식의 대동소이한 뉘앙스 차이의 형용사일 뿐이란 거죠.
온기가 폐국을 이루고 그것이 슬퍼하는 선한 어떤 기운인.. 애성哀性으로 본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심장의 빛이 직진상승하는 것이라고 비유했구요.
자 그럼 상대적으로 태양과 대칭이 되는 태음은 어떨까요?
태음은 비스듬히 하강하는 기운으로 봤는데..
여기서 태양과 태음을 상대적으로 비교를 해야 이해가 쉽습니다.
량기凉氣(서늘할량). 간국肝局(간을 이루는 힘. 실제 해부학적 간이 아님).
희성喜性(기뻐하는 선한 기운)
일단.. 이제마는 태음의 에너지(간)로 숨을 들이마시고(들숨)..
태양의 힘(폐)으로 내뱉는다(날숨)라고 보는데요.
이걸 물리적인 물질의 관계성으로 단정해서 보시면 안되고..
에너지의 기능상태를 분별했다는 정도로.. 관점만 읽고 가시면 됩니다.
사실 저가 무슨 4상의학 지식을 강의하려는 의도가 아니니까요.
그럼 딱딱한 이야기로 각 체질별 특징을 다 비교하고 열거해야 하는데..
그건 제 이야기의 의도가 아니예요.. 소양인이 어떻고 저떻고 그거 다 언제 얘기하겠습니까. ㅎ
핵심만 살짝 정리하고 가야죠 뭐.
일단 태양=애성哀性(슬퍼하는 선한 기운). 따뜻한 온기溫氣. 직승. 폐국肺局을 이루는 힘이 강하다.
자.. 태음이 태양의 반대죠.
태음=희성喜性(기뻐하는 선한 기운). 서늘한 량기凉氣. 횡강. 간국肝局을 이루는 힘이 강하다.
그리고 소양=노성怒性(분노하는 선한 기운). 뜨거운 열기熱氣. 횡승. 비국脾局을 이루는 힘이 강하다.
근데 참고로 아직도 <비脾>를 학계에서 정확히 못 찾아내요. 위장 계열인지 췌장 계열인지...
소양의 반대가 바로 소음인데..
소음=락성樂性(즐거워하는 선한 기운). 차가운 한기寒氣. 직강. 신국腎局을 이루는 힘이 강하다.
단순히 지식적인 내용은 인터넷만 찾아봐도 쉽게 나와요.
그런거 다 열거하긴 힘들죠.. 저가 무슨 강사도 아니고요.
그러니 이제 좀 편한 얘기로 넘어가보죠.
4상의 태양에 대해서 좀 더 쉬운 비유를 한번 들어볼께요.
어린 아이가 태어날때 어떻게 하죠? 웃으면서 태어나나요?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아기도 웃거나 히히덕 거리면서 태어나지 않아요.
웃거나 히히덕 거리면서 태어나는 거 본 적 있나요?
장담하건대 절대 없을 것입니다. 공감하죠?
모든 생명은 태어날때 반드시 <울면서cry> 태어납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이건 실제로 그렇고.. 또한 분명한 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웃거나 히죽거리면서 안 태어나고... 꼭 울면서 태어날까요?
이 동서고금을 막론한 진실... 바로 그것이 최초의 시작하는 기운.
애성哀性(선한 슬픔의 본성) 즉 태양 기운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냥 본래 그런거예요. 감정적인 슬픔 이전에..
그것을 이루는 바의 어떤 힘이고 에너지인데..
그것이 무언가 시작하는 에너지예요. 시작의 힘이고 빛이란 것이죠.
그래서 모든 아기들은 탄생을 울면서 하는 것인데..
그것은 겉모습은 우는 것이지만..
어떤 의미에선 본성에 의해 에너지를 습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기가 처음 자궁에서 태어나면 스스로 울지 않는 경우..
간호사들이 먼저 뒤집어서 엉덩이를 때립니다.
왤까요? 가만 내버려두면 죽기 때문입니다.
그게 숨 쉬라고 때리는 거거든요. 아니 숨 안쉬고 살 수 있어요?
뒤집어서 때리면 그때 비로소 아기가 첫호흡을 해요.
이때 우주의 천지기운이.. 말하자면 정신계의 시간적 질서 속에서..
무언가 물질세계로 아기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바로 의식이죠..
동양 천문의 관점에선 그래요. 그래서 소小우주의 탄생은 태아가 뱃속에 있을때가 아니라..
태어나서 첫 울음소리와 함께.. <처음으로 호흡을 했을때>가 바로 기준이 됩니다.
여기서 비로소 생년월일시의 소위 4주라는 것이 성립하게 되요.
바로 첫 호흡과 함께 울음을 터트린 시점에서.. 의식이 들어가는 것이죠.
물론.. 무의식적으로는 훨씬 전에..
이미 혼이나 영이 작용을 하고 태아의 상태로 육체적 생명이 존재하지요.
그런데 저는 <의식의 탄생>이란 측면에서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의식의 실질적 빅뱅은 아기의 출생 후 첫 호흡이 기준이 됩니다.
물론 이 기준으로.. 천문 즉 시간질서와 아기의 의식상태를 연결해서 관찰하기도 합니다.
저가 소위 영성인 티 팍팍내는 사람한테.. 당신이 최초로 기억하는 것이 뭐냐? 라고 물어봤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 대답이... 엄마 뱃속에 있을때래요.
정말 어이가 없더군요. 사기죠. 거짓말 친 겁니다. 그땐 의식이 없어요.
무의식적 혼돈의 감각적 느낌은 있을지언정... 의식적 기억이라고 볼 수 없는 상태거든요.
그것이 태아 때인지 아닌지도 분별이 없는 그런 상태란 말이죠.
그런데 태아 때를 기억한다니... ㅎㅎ 둘 중 하나인거죠.
일부러 거짓부렁을 쳤거나..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은연 중에 자신도 자신에게 속은거죠.
어쨋거나 굳이 나눠 말해서 둘 중 하나지.. 사실은 하나입니다.
결국은 사기치는거죠. 이런거 누가 옆에서 캐주면 바로 이실직고 해야되요.
어설프게 마음으로 애매모호하게 믿고 있는거 계속 뻐팅기면 그게 그만큼 아둔하다는 증거입니다.
사람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요..
새해.. 즉 지구가 천문적으로 한살 더 먹는 시점을 잡는 방법도 나온김에 말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원래는 동지冬至에서 다음해의 기운이 잉태가 되요. 말하자면 이때가 태아 상태인거죠.
그러니까 2012년이 임진壬辰이거든요. 용띠요. 임진왜란 알죠? 그런 뜻이예요.
그런데 2011년 12월 말.. 양력기준으로 대략 22나 23일쯤 되요.
이때도 예전엔 <설>이라고 불렀어요. 왜냐하면 동지부터 새해의 기운이 태아처럼 잉태가 되거든요.
이걸 영靈 또는 하늘의 입장이라고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용띠해가 2012년 2월 초. <입춘入春>을 기준으로 바뀌는거예요.
즉 영혼의 입장에선 동지때 새해의 기운이 태동하나.. 이건 미비한 무의식적 상태구요.
실질적인 현실의 의식이라는 관점에선 입춘에서 비로소 빅뱅~ 탄생하는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지금 태어나는 애들은 이미 2012년이지만.. 전부 다... 아직 토끼띠예요.
아까 말씀드린 태아가 울음을 터뜨리는 시기.. 즉 태양기운의 시작은..
그 기준이 한해의 지구로 따지면 바로 입춘입니다. 입춘이 넘어야 용띠란 말이죠.
위 입춘이니 뭐니 하는 24절기가 사실은 <태양의 각도>거든요. 15도씩 24개로 잘라놓은 것인데.
그러니까 좀 더 엄밀하게 말하면.. 달력상의 입춘이 중요한게 아니라 태양의 각도가 중요해요.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그런 기준이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사회 문화적 맥락이 중요하니까요.
일단 절기가 거의 맞아 떨어지게 만들어져 있어서.. 입춘이 진정한 새해의 시작이다..
라고 상식상 알아두시면 되고.. 그 이전은 태아의 상태다..
네.. 이 정도면 정리가 될 거 같습니다.
이쯤에서 갑자기 혹 이런 궁금증이 생기시는 분이 있을 거예요.
왜 저가 이렇게 4상의학이니 태소음양이니 얘기를 하는 것일까?
물론 서두에 이미 이 글의 의도를 말씀드렸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서...
보다 더 깊은 심층적 의미가 궁금하신 분도 있을지 모릅니다.
눈치가 빠른 분들은 느꼈겠지만.. 저는 실용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럼 그 부분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볼게요.
영성계에서 고정관념처럼 고착화된 선입견들이 있어요.
예를들면 즐겁고.. 기쁘고.. 평화롭고.. 희희낙락한.. 내면의 무언가는 좋은 것이고..
그것이 진정한 깨달음의 영성의 길을 가는 것이고..
뭔가 화내고.. 슬프고.. 외부와 관련되고.. 부정적인 것은 나쁜 것이다는... 그런 뉘앙스 말이죠.
근데 이것은 대단히 조심해서 꿰뚫어 보아야할 말입니다.
물론 일단 큰 맥락에서는 맞아요. 그런데 저 말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단순히 백면서생 수준에서 받아들이면.. 상당히 편협한 흑백논리의 망상이 의식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일단 언어적으로 저렇게 내뱉어진 부분에 엄청난 생략관계가 있어요.
또한 거기에는 매우 깊숙한 의식의 함정이 있습니다.
그것을 전부 살펴보면 괜찮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 저 말들이 이제와서는 상당히 정치적으로 오염이 되버렸습니다.
즉 자신의 행동은 합리화하고.. 타인을 비방하거나 온갖 핑계와 구실을 대는 용도가 되버렸단 것이죠.
그러니까 누군가가 화를 내면 그 사람의 수준을 저런 이해부족의 논리로 재단하고..
자신을 합리화하고 핑계대는 용도로서 말이지요.
저가 지금 태양기운 조금 이야기하면서.. 애성의 중요성을 말하다 말았습니다.
그럼 여기서의 애성... 슬퍼하는 선한 기운.. 슬픔을 이루는 에너지.. 태양 기운..
이런 개념에 대해서 소위 영성계에서 보편적으로 뭐라고 생각할까요? 인정하는 부분일까요?
아니요. 천만에요. 아마 <부정적인 에너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자신의 머리나 몸으로 인정할만한 어떤 즐거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일단 언어가 가져오는 뉘앙스가.. 슬픔과 연관되니까.. 그렇게 지레짐작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내면의 평화를 추구하며 뜬구름 잡는 몽상적 감성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겐..
기쁨.. 사랑.. 평화.. 이런 영성적 단어 이외의 것에 대한 거부감과 압박감도 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히려 이것... 바로 이런 직승하는 태양의 본성이.. 중요하다고 보는 겁니다.
의식의 성장이나 진화와 관련해서도요.
좋은 말들이야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 말들만 가지고는 절대 성장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냥 말들의 세계에서 허우적 거리고.. 언어가 만들어내는 논리들에 휩쌓일 뿐이란 거죠.
아기가 태아의 상태에서 최초로 생명을 시작하는데 있어서..
애성哀性이 없으면 절대 출생을 할 수가 없어요. 그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선한 기운입니다.
태양의 힘이 없다면 나아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이런 것이 바로 보다 구체적으로 제가 포착하려는 빛입니다.
이런 기운이요. 애성이란 말은 별로 중요하지 않죠. 이런 에너지.
이런 에너지가 없으면..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지도 못해요.
<희희락락>하면서 아침에 일어날 수 없습니다.. 이건 생각을 떠나서 기氣라는게 그래요.
만물이 탄생할때는 반드시 애달프고 애씀의 수고로움이 머리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우울함이나 고통.. 치우친 애절함은 아닙니다.
이것은 보다 형이상학적인 어떤 기운의 상태인 것이죠.
우리가 반가운 사람 만나서 즐거워하듯... 그 에너지로는 아침에 시작을 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반가워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보편타당하게 자리잡는 빛의 세계가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 에너지는 그 에너지 나름대로의 희락의 선한 본성이지만..
그것과는 또 별개로.. 애성은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애哀의 인자因子>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마는 애성이 <원산遠散하다>고 표현했습니다.
물론 어떤 깊은 정적과 고요함의 미묘한 느낌의 상태와도 연관이 될 것입니다만.
일단은 시작하는 기운. 뭔가 뚫고 나오는 빛의 직진성. 직진하면서 상승하는..
이제마가 직승한다고 표현한.. 폐국. 온기. 내쉬는 힘. 계절에 비유하면 봄기운.
하루에 비유하면 아침기운. 이런 태양기운이 바로 모든 생명이 태어날때 품고 나오는..
바로 이러한 것이.. 보편적인 <빛의 성품性品>입니다.
그러니까 스스로를 향했던.. 세상을 향했던.. 좀 사기치지 말라 이겁니다.
내가 이런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이유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이유 때문이예요.
현실적이고 정치적인 목적이라는 말입니다.
아까 위에서 언급한 정치. 치세. 경영의 실천 테마이기도 합니다.
내 주변에서.. 영성계에서.. 이상한 헛소리 하는 사람들 좀 깔려고요.
뭐가 되었든 간데 맹신猛信하고 광신狂信하고..
그냥 제멋대로 사기쳐서 아무거나 가져와서 <보편적 일반화>하려 들고..
아는 척하려고 설레발치고.. 이건 개인적 취향 차원이 아니라..
기초부족.. 이해부족으로 주화입마에 빠지는 거다 이런거죠.
그런거 좀 까고 몰아세워서 의식의 진정한 압박을 느끼게 하려고요.
그게 의식 성장에선 어느정도 피할 수 없는거 아니겠습니까?
사적인 원한과 같은 미움에서 그러는게 아니라.. 의식에 대한 것이라서 그렇습니다.
저가 개인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서로 싸우고 증오하고 까겠다는게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더 넓은 세계에 대하여.. 그런 망상에 허우적 거리는 사람들에게 좀 알려주려고..
그리고 혹 이해되고 받아들일만 하다면 마음대로 가져다 쓰라고.. 뭐 그런 취지란 것이죠.
그래서 저의 글은 상당히 정치적입니다. 또 현실적입니다.
기존의 어떤 또는 특정 영성 패러다임.. 그 고정관념을 깨는데 목적이 있단 얘기입니다.
사회적 공적 차원에서는.. 치세와 경영의 정치적 비전을 실천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개인 내면 공간이나 인식의 세계와는 또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게 바로 <실천하는 현실現實 세계>라는 것이겠죠.
이제마는 태양의 애성을 <뭇 사람들이 서로 속임에 슬퍼하는 것>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재밌는 점은..
태양인은 속이는 것을 쉽게 분별할 수 있지만..(선천적으로 타고났습니다)
그것을 대對 사회적으로 실천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인식기능으로만 존재하는 것이죠..
그러니까 속임수는 읽을 수 있는데.. 오히려 자신은 또 남을 속이기 쉬운거예요.
이제마는 자신이 태양인인데.. 평생 남을 속일 궁리만 하다가 큰 병을 얻었었다고 고백합니다.
태양인은 <애성원산 노정촉급>이라고 하여 애성을 선천적으로 타고나 잘 인식하지만..
실제 힘 쓰는 것은 노정怒精으로서 <교우交遇> 라는 소양분야를 실천하게 됩니다.
거꾸로 소양인은 노성怒性이 발달하였으나 사회적 실천은 태양분야인 <사무事務>가 됩니다.
태음인의 경우 희성喜性이지만 역시 사회적 실천은 소음분야인 <거처居處>가 되고..
소음인의 경우 락성樂性이지만 역시 사회적 실천은 태음분야인 <당여黨與>가 됩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사회적 실천은 정精이고.. 애노희락의 성性은 개인적 차원의 인식입니다.
그런데 위의 사무. 교우. 당여. 거처.. 이런 용어들이 이제마가 만든 말입니다.
물론 한자니까 어느 정도 개념적인 보편성의 뜻은 있지만..
워낙에 이제마 특유의 표현이라서.. 자칫 저가 풀다간 오해의 소지가 큽니다.
단정적이 되버릴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일단 단어의 개념보다도.. 각 분야의 인사人事.. 즉 사회적 기능을..
태소음양의 분야별로 분류한 것으로 보는게 중요합니다.
애성으로 인식하고(개인적) 소양분야인 교우를 비脾로서 실천(사회적) 이게 태양인이구요.
노성으로 인식하고(개인적) 태양분야인 사무를 폐肺로서 실천(사회적) 이게 소양인이구요.
희성으로 인식하고(개인적) 소음분야인 거처를 신腎로서 실천(사회적) 이게 태음인이구요.
락성으로 인식하고(개인적) 태음분야인 당여를 간肝로서 실천(사회적) 이게 소음인입니다.
그럼 위의 교우. 사무. 거처. 당여가 뭐냐. 사람 사이의 일이죠. 인사人事입니다.
나중에 언급할 <독행獨行>에 비해서는 다소 좁은 개념의 <사회적 실천>입니다.
이제마는 위 정精에 해당되는 내용을 <자업資業>이라고 했습니다.
한자만 보더라도 대략 흐름은 나옵니다.
너무 이 말들을 개념적으로 가져가실 필요는 없어요.
예를들어 소음인의 정精은 태음분야의 당여黨與입니다. 또한 이것이 자업이죠.
소음인의 경우 소음분야가 본래 락성樂性으로 발달되어 있는데..
실제로 소음인 자신이 힘쓰는 일은 <태음분야>예요.
소음인은 소음분야인 <락성樂性>을 타고나는데.. 이것은 인식기능이고..
바깥으로 일할때는 태음 분야에서 일한다는 것이죠. 이것이 소음인의 간肝입니다.
당여라는 것은 무언가 동아리.. 모임..
이런 뭔가 동질적 사람들의 모임이죠.
일단은 그냥 동아리라고 표현할께요. 동아리를 단속할 수 있고.. 꾸릴 수 있는 힘입니다.
이제마는 이것을 <당여를 세운다>라고 표현하고요.
인체에서 허리가 원만히 세워지는 것에 비유합니다.
소음인들이 그래서 당여를 좋아해요.
친숙한 사람들과의 모임을 좋아하고..
또 그런 친숙한 사람들과의 모임을 이루고 통솔하는 재주가 있습니다.
이건 모든 소음인들이 다 그래요. 그런데 원래 이 분야가 태음분야인데..
태음인은 이것을 성性으로서 인식만하지.. 실제로 행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여黨與>는 무언가 동질성에서 무리 짓고 그 안에서 통일성을 단속하는 힘이죠.
소음인의 간肝이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늘 하고 있는 일입니다.
성性과 정精이라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잠깐 짚어야 되겠습니다.
성性은 외부에 대한 인식과 <인풋input>의 기능이고..
정精은 내부에서 외부로.. <아웃풋output>하는 측면입니다. 즉 실천이죠.
그래서 小우주가 大우주로부터의 받아들이는 소통성을 성性으로 보고..
반대로 小우주가 大우주로 내보내는 소통성을 정精으로 봅니다.
다시 얘기가 나오겠지만.. 성정性精은 의식적 노력이 아니라 그냥 되어지는 타고난 자동적 측면이예요.
그래서 성정 그 자체는 지극히 모두가 보편타당하고 선善합니다.
하지만 정精이 치우치면서.. 상대적으로 등한시 되는.. 즉 편차가 생기게 되죠.
이제마는 이목비구 그러니까 귀눈코입으로 인식한다고 봤어요.
이게 대우주와의 소통을 물리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소우주가 대우주와 귀눈코입으로 소통한다..
모든 사람들이 하늘로부터 귀눈코입을 받아서 그것의 힘으로 인식한다고 본거죠.
이건 단지 표현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실제 눈코입귀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예요.
그래서 애노희락의 성性은.. 외부 세계를 귀눈코입으로 <받아들이는 측면>이고..
애노희락의 정精은 내부 세계 즉 폐비간신으로 늘 <자동적으로 실천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폐비간신이라는 내부의 형이상학적 기운으로 늘 실천하고 있고..
이목비구라는 기능을 통해 외부세계에서 에너지를 흡수한다(인식)고 본 것이죠.
예를들어서 <신장腎藏>이 하는 일이 뭔가요? 우리 몸에서 필요없는 것을 분별해서..
소변이나 뭐 이런 것들로 배출하는 것 아닌가요? 폐나 간도 각기 기능들이 있잖아요?
신장이 제대로 분별해서 배출을 못하면 죽습니다.
이런 기능들에 문제가 생기면 병이 생기고.. 심하면 죽는다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마는 인간 정신분야와 흐름에도 이런 각 분야에서의 기운과 기능들이 있다고 본거죠.
무언가 동질적인 친숙한 사람들과의 만남인 당여黨與가 있다면..(이게 소음인의 희정이죠)
반대로 이질적인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인 교우交遇가 있습니다.. (이게 태양인의 노정이죠)
그런데 당여는 희정喜精이예요. 기쁨으로 통솔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기쁨으로 이룬다는 것이죠.
그러나 교우는 노정努精이예요. 분노로서 이루고 만들어가는 세계예요.
여기서 분노라고 하면 막 화내고 싸우고.. 타인을 원망 투사하는 그러는 것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그런 개념이 아니라 이건 그 분야의 에너지 상태..
그 세계에서의 <보편타당한 질서와 힘>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태양인의 노정>은 일단.. 이유도 없이 분노하는? 의 언어적 착시가 아니라..
무언가 과감성 있고 굳게 꾸릴 수 있는.. 어떤 그런 특징의 소통력으로 보는게 차라리 더 정확해요.
물론 이것은 소양분야에서 태양인의 비기脾氣가 발휘하는 빛의 능력이고..
태음분야에서는 또 이런 소통력으로 통솔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표현상 이렇게 표현되서 그렇지 이것이 바로 <빛 에너지>입니다.
좀 더 가까운 구체적 일상으로 나타나는 그런 빛 에너지인 것이죠.
아무튼 그래서 태양인이 과감성 있는 노정으로 친숙한 사람들과 교우하다가..
(그 세계는 그렇게 통솔이 안되거든요)
나중에 분노가 간기肝氣(태음분야)에 치밀어 크게 기운이 상합니다.
이는 태음분야에서 써야할 <희喜> 에너지가 약해서 친숙한 사람들과의 세계에서 함정을 겪는 것입니다.
물론 소음인은 반대 경우로 상하구요.(소음인은 소양분야에서 당합니다)
소음인의 <노怒>가 약하여 생기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늘 자기가 타고난 능력으로만 해석하고 관찰하기 때문에..
자신의 기氣가 부족한 세계에 대해선..
그 보편타당한 힘을 분별하지 못하고.. 또한 걸맞게 쓸 수도 없습니다.
여기서 게으름과 교만이 나오게 되고.. 제멋대로의 아집과 망상이 생겨나는 것이죠.
지금 저가 말씀드린 부분들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기능이예요..
머리로 계산해서? 또는 의식적으로? 하는게 아닙니다.
그냥 늘 일하고 있어요. 폐비간신과 눈코입귀는 늘 소통하고 있습니다.
눈코입귀는 늘.. 외부세계를 인식하고 받아들이고 있고..
폐비간신도 인체의 내부에서 바깥으로 뭔가 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특징들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폐비간신이 늘 인체내에서 일하고 있듯이.. 사람의 정신적 기능 역시 관련성을 가지고 본 것입니다.
그러니까 폐가 하는 일에 대응되는.. 인간의 정신 사회적 어떤 기능들이 있다는 것이죠.
그러니까 간肝이 하는 일에 대응되는 <인간 정신의 무언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러한 물리적 측면과 함께 정신적 측면의 연관성을 분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능 역시 상대적으로 실천의 아웃풋 기능인 정精과..
이목비구의 성性으로.. 하늘을 인식 즉 소통하는 인풋 기능으로서 다시 분별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이제마의 관점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다 성인과 같이 대등하게 잘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물론 문제는 편차가 생겨 치우칠 때인데.. 정精이 편차를 가지고 발달하여..
다른쪽에 불균형이 생겨 일어나는 문제입니다만.
일단 그 얘기는 패스하고요..
후반부에는 얘기가 다소 이론적으로 흘러서 딱딱하게만 느껴졌을 수도 있겠네요.
일단 저의 이야기는 무언가 설명하고 가르치는데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상당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며 정치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지금 저가 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영성계 전반에 걸쳐 알게 모르게 설정된..
여러 이론적 고정관념이나 선입견.. 또는 세뇌에 가깝게 고착화된 교리적 에너지를..
상대적으로 해체해체하고 느슨하게 하기 위한.. 그런 <구체적 실용성>에 그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어떤 지식적인 부분을 위주로 전달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죠.
하지만 어느정도 이야기가 소통 되려면 기본 지식과 합의된 바탕이 있어야 함으로..
또 설명이라고 하는 것을 전혀 안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핵심만 말해버리면 좋은데.. 문제는...
단순 간결하게 말하면.. 독자들이 아예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한다는 것이죠.
이런 주제로 우리가 교류할 수 있음은 나름의 큰 즐거움이며 빛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봅니다.
물론 정치적 의도라고 말씀드렸지만.. 정치적 의도가 없다고 순수하거나 또 뭔가 잘되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러한 정치적 의도가 어떤 것이냐~ 는 질적인 문제겠죠.
저가 드리는 말씀의 엑기스 중 하나는.. 바로 애노희락이 모두 성정性精으로 <빛의 성품>이란 것입니다.
성性은 내게 들어오는 빛 에너지이며.. 정精은 나로 인해 퍼지는 빛 에너지 입니다.
애노희락의 성정性精이 모두 각각의 개성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차등없이> 모두가 다 그런 빛을 받아들이고 내보내며.. 세계에 나타내고 있습니다.
친숙한 사람들과의 반가움.. 기쁨.. 또 무언가 깊이 몰입하는 즐거움..
그런 것들은 우리가 늘 경험하는 삶의 <빛과 사랑>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때때로 자주.. 우리가 익숙한 부분으로만 치우친 정精을 발해..
상대적으로 어떤 세계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경시하며.. 등한시하여..
또는 정말로 잘 이해를 못하고 힘이 떨어져서.. 또한 어둠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주고 받음의 연속하는 삶의 한 가운데서..
우리는 우리가 알게 모르게... 우리의 치우친.. 그 부족한 분별력으로..
나름대로 여기저기서 가지고 온 합리화 논리와 깊은 <의식의 족쇄>를 발견하기도 합니다.
저의 실용적 목적이란.. 바로 그 <의식의 족쇄>를 최대한 벗겨내고 해체하는데 있습니다.
의식이 빛이라면 언어는 족쇄입니다. 그러나 언어라는 족쇄가 모두 나쁜 것은 아닙니다.
언어가 족쇄라는... 그것 역시도 빛을 둔갑한 어둠의 족쇄가 될 수 있으니까요.
족쇄로 작용하는 언어와 논리들이 제가 바라보는 <의식의 족쇄>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저가 <정치적 의도>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일단 지금까지 풀어놓은 저 얘기가 너무 길기도 할 것입니다.
나름대로 호기심이 생기신 분들이나 관련한 피드백 요청들도 있을 수 있으니까요.
이쯤에서 이야기는 잠시 끊고.. 다음 기회에 또 후속편으로서 마무리를 지을까 합니다.
고맙습니다..
첫댓글 읽는 내내 마음 속으로 박수 열심히 쳤습니다! ^^
여기 저기서 4상의학에 대한 글을 많이 읽었지만 이런 내용은 정말 처음인데요...ㅠㅠ
한번만 읽어서는 솔직히 제가 다 이해를 못하겠고, 몇번 더 읽어야 겠어요.
공부를 깊이 하셨네요.
그냥 지식이 아니라 많이 생각해 보시고 자기화 하신 걸 알겠습니다.
빛을 여러 각도로 이렇게 배우니 너무 좋은데요,
저도 공부를 더 해서 ... 오라소마와 동양의 음양 오행 더 나아가 사상의학의 관계를 풀어보고 싶은 욕구가 마구 생깁니다.
실은 오라소마를 알고 나니 내 것이 더 보이더라구요,,,
우리 민족이 가진 정신적, 영적 유산 말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맥이 거의 끊겨있죠 ㅠㅠ
슈엔님의 덧글을 보니 저도 욕구가 생깁니다..
그래서 나머지 4상 관련 이야기도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다면 참 다행입니다. ^^
오라소마에서 왼손으로 바틀 잡는 방법도 5행과 연관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오라소마에서는 빛의 색깔로 에너지를 구분하는데 5행에서의 구분은 시간성과 관련됩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오라소마가 좀 더 공간적 관점이라고 표현할 수 있고 5행이 더 시간적 관점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시간성은 변화하는데 초점이 더 맞춰져 있고.. 공간성은 변화하는 측면보다는 그 가운데서도 변하지 않는 면에 무게중심을 두게 됩니다. 아.. 그리고 슈엔님의 말씀을 곱씹어보니 다비드의 아들, 킹솔로몬이 자꾸 생각이 납니다. 혹시 바틀 중에 솔로몬 바틀은 없습니까?
초인시대님의 답글을 읽다보니 저도 갑자기 생각이 떠오르네요.
동양인과 서양인을 음과 양으로 구분한다면 동양인이 양이고 서양인이 음이죠.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을 음과 양으로 구분한다면, 시간은 양, 공간은 음이고...
양의 동양인이 양의 시간성에 바탕을 둔 음양오행을,
음의 서양인이 음의 공간성에 바탕한 오라소마를 만들고 사용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결과네요.
지나치게 단순화했습니다만, 한번 끼워 맞춰봤습니다 ^^;;;;
중간부분에 글을 읽다가 생각이 난 것이 있어 댓글을 달아봅니다.
이전에 제가 좋아하던 영성 공부하시던 할머니 한 분께서 태아 때 기억을 잘 지니고 계시더라구요.
옆에 계시던 아주머니께서도 자신도 스트레스를 받아서 손 꽉 쥐고 있던 기억이 있다고 맞장구를 치셨던 적이 있어요.
과학자들에게 추가 또는 새로운 표본사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http://www.we7942.or.kr/aboard/index.php?doc=program/board.php&bo_table=sung01&sselect=ca_id&stext=7&page=1&wr_id=653
http://www.kormedi.com/news/article/1200471_2892.html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omatoell&logNo=80150527503
http://www.docdocdoc.co.kr/news/newsview.php?newscd=2009071600017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teentopia&logNo=10054301581&parentCategoryNo=33&viewDate=¤tPage=1&listtype=0
http://k.daum.net/qna/view.html?qid=3qkBc&l_cid=QJB&l_st=1&returl=%2Fqna%2Flist.html%3Fcategory_id%3DQNS%26
<스티븐슨교수의 연구> http://blog.naver.com/don0860/50002929294
아.. 아흑..ㅎ 꽤 긴 글인데.. 생각보다 꼼꼼히 읽어 보셨나보군요. ㅎㅎㅎ 올려주신 자료는 잘 찾아봤습니다. 물론 태아도 기억이 있습니다. 몸을 가지고 있고 감각기관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것은 육체적인 기억입니다. 또 육체적 수준의 반응들이죠. 이것을 의식적 기억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예를들어서 지금 이드님의 생식세포도 뭔가 기억하는게 있을 겁니다. 육체적인 수준에선 말이죠. 또 그 세포에 어떤 자극을 가하면 반응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의식적 존재로서의 기억은 아닙니다. 의식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출생 후 첫호흡과 함께 탄생합니다. 그래서 태아의 상태를 기억한다는 것은 사기입니다.
물론 육체적인 정보들은 몸이나 세포에 기억될 수 있습니다. 의식이 없어도 몸은 그 자체로 육체수준의 정보를 간직하니까요. 그러나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육체적 경험에 가까운 것이고요. 분별을 통한 기억이 아닙니다. 태아 때를 기억한다는 것은 의식이 없는 마취 상태를 기억한다는 것과 같은 거짓말입니다. 마음 속에서 상상한 부분들과 동일시되는 심리적 현상이겠죠. 일정부분 몸의 반응이 마음에서 환상식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긴 합니다. 소위 말하는 환상 말이죠. 하지만 육체적 차원의 기억은 지극히 단순한 세포적 반응과 물리적 감각정보 뿐... 차라리 전생을 기억해냈다는 것이 훨씬 더 신빙성 있는 이야기가 될것입니다
예를들어 몸이 만들어내는 환상을 들어본다면... 영양실조나 큰 육체적 상처 등으로 헛것을 본다던지.. 시각적으로 이상한 것들을 본다던지.. 눈을 감아도 이상한 것들을 본다던지 할 수 있고요. 이것은 감정이 의식을 속이고 무언가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나타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태아때 역시 육체적인 차원의 반응과 기억은 있겠죠. 세포차원에서도 그런 것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음 즉 심상으로 어떤 이미지들을 그려내면.. 그와 같은 부분을 의식적인 기억으로 착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육체적 경험과 의식적 기억은 전혀 다르다고 봅니다. 태아는 물론 이미 생명이지만.. 의식을 가진 존재는 아닙니다.
'의식은 위에서 말씀드린대로 출생 후 첫호흡과 함께 탄생합니다.'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의식이란 무엇이기에 첫호흡과 함께 생겨나는 것일지?
전생(죽기전)과 현생(출생후) 사이에는 의식이 없는 것인지?
태아가 의식이 없다면, 죽은 후에 영혼은 의식이 없는가? 이런 질문거리도 생각이 납니다.
왜 밑에 댓글에 답글을 달 수 없는지 모르겠군요. 원화한 진행을 위해서 질문을 압축해서 해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위의 아줌마와 할머니의 경험담은.. 글쎄요. 저가 보기엔 상상과 분위기가 많이 가미된 심리적 결과물인 것 같습니다. 특히 나이가 많아질 수록 기억력이 노쇠지기 십상입니다. 노인성 치매를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바로 몇일전의 일은 기억을 할 수 있을가요?? 저런 사람일수록 실제 가까운 과거나 뚜렷한 사실 관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즐비하답니다. 깊은 참고를 요망할 일입니다.
의식이 첫호흡과 함께 갑자기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첫호흡을 통해 의식이 육체로 들어갑니다. 즉 호흡을 통해 의식이 육체와 연결됩니다. 또는 깨어난다고 표현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래서 태아 상태에서는 육체와 감각의 반응.. 또는 세포차원의 경험의 단위들만 있을뿐.. 의식은 없습니다. 실제로 아주 어린시절.. 이를테면 생후 2개월의 의식이 어떤 상태인 것 같습니까? 저는 기어다닐 정도의 어린시절의 기억이 있습니다만. 그때의 정보들이 나중에서야 의식적으로 이해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그 기어다닐때의 기억은 의식의 상태가 매우 미발달된 상태였습니다. 거의 시각과 청각 그리고 약간의 촉각적인 정보들 뿐이었습니다.
태아도 호흡을 한다고 하는데
http://translate.google.co.kr/translate?hl=ko&langpair=en%7Cko&u=http://www.ncbi.nlm.nih.gov/pubmed/7001636
http://tipinfo.tistory.com/3597
그렇다면 수정란이 태아형태를 갖추어 어느 순간에서인가는 첫호흡을 하니까
태아상태에서 의식이 육체로 들어갈 순 없을까요?
만약 태아가 의식이 있다면.. 혹은 이미 태아상태에서 의식이 깨어났다면 그 의식은 자신이 태아 상태이며 엄마 뱃속이라는 등을 의식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문화적 개념이 출생 이전의 태아인 상태에서 잉태될 수 없습니다. 엄마 뱃속. 태아라는 상태. 시간성에 대한 이해. 모두 인간이 출생 이후 의식적으로 배우고 개념적으로 가져간 의식의 흔적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태아 상태라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나 기준이 없으며.. 모든 분별 기준은 출생 이후 인간 의식이 시간속에서 만들어낸 것들입니다. 저가 기어다닐때를 확신하는 이유는 시각과 청각 정보가 모두 추후에 이해되고 나서였습니다. 의식이 발달된 후의
정보일뿐.. 그곳에 시간성은 극히 미비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의식 출현 이후에도 그만큼 무의식에 가까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한 사회문화적 개념이 출생 이전의 태아인 상태에서 잉태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씀해주셨는데
↑
만약 출생 후에 인간 의식이 시간 속에서 만들어낸 것이라 태아상태를 그리 말한다면 전생도 자기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도 가능하진 않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깁니다. 위에 링크해논 스티븐 이안 박사가 여러 사례를 조사한 걸 보아도, 여타 아이들은 출생 이후 의식적으로 배우고 개념적으로 가져간 의식의 흔적 없이도 태아상태나 이런 저런 전생의 것들을 말하는 경우가 있어서 <영혼/전생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진 않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댓글들이 좀 난잡하게 되는 경향이 있군요. 질문을 좀 모아서 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태아는 정상적인 호흡을 하지 않습니다. 혈액으로 모태에서 산소를 운반하지요. 전생을 기억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식 탄생 후 의식이 어느정도 성장했을 경우 입니다. 즉 출생 후 의식이 성장하다 이전 의식을 떠올릴 수는 있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무의식인 태아 상태에서는 불가능합니다. 태아는 의식이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생이든 전전생이든. 말씀입니다. 마치 죽은 육체가(이미 의식이 떠나간) 의식적으로 생각한다는 것만큼이나.. 의식이 출현하기도 전을 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이 거짓인 이유가 이와 같습니다.
'출생 후 의식이 성장하다 이전 의식을 떠올릴 수는 있을 수도 있다' 라고 말씀해주셨는데요.
태아때를 기억한다는 사람들은 말씀하신대로 출생 후 의식이 성장하다 이전 의식을 떠올린건 아닐까요? 라고 질문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생각해보니 초인시대님 논지대로라면 이 질문도 무의미해지는게 태아의 첫 호흡을 출생 때를 잡기 때문에 태아 기억은 의식이 존재하지 않을때라서 거짓이란 답변이 돌아올 것 같네요.
'의식이 출현하기도 전을 의식적으로 기억한다는 것이 거짓인 이유' 라고 말씀해주셨는데...
그렇다면 인간의 영혼은 인간이 출생해서 첫 호흡을 할 때 의식과 영혼이 육체에 들어온다고 보면 될까요?
초인시대님 주장대로라면 태아 때 기억은 거짓이지만, 태아로 들어오기 전의 공중에 붕붕 떠다닌 기억은 진실이 될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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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인간의 의식 등장 시기가 기준점이 되는 것 같아요. 출생 때 첫 호흡이냐 아니면 태아 때or그때 호흡이냐...
이야기를 듣고보니 이거에 따라서 태아 때의 기억이 진실이냐 거짓이냐가 되는 것 같네요.
참고로 출생 후 아기들은 의식이 막 들어온 상태라.. 비록 의식은 있지만 아직 성장을 하지 않아서 거의 동물 수준입니다. 육체와 감각의 정보들이 여전히 우위인 그런 시절이라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이미 의식이 깨어난 상태이지만.. 시간개념이나 부모개념.. 장소나 공간에 대한 모든 인지능력이 떨어집니다. 하물며 태아에 있던 시절에 그 태아가 의식을 가지고 아... 여기가 엄마뱃속이구나를 기억했다는 것은 이미 그 태아가 사고기능을 하고 있던 의식체였다는 이야기인데... 누누히 말씀드리지만.. 태아 시절엔 시간. 공간. 부모. 개념 등이 전무한.. 단순 세포차원의 경험들 정도만 겪지.. 의식체로서의 경험들은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누히 말해드린바와 같이 의식이 탄생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그러한 개념들은 이드님이 출생후 배우고 성장한 의식상태이지 그 이전의 의식이 아닙니다. 그럼 이드님은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시간을 묻고 산수를 할 수 있어야겠지요. ㅎ 엄마뱃속이구나~ 생각하는 태아가 어찌 한글을 깨칠 수 있었겠습니까. 전생에 한글을 깨쳤을까요? 아니요. 사기라고 봅니다. 태아는 의식 상태가 아니지요. 종종 우리는 개꿈 꾸고 현실과 분간 못하는 경우들이 있긴 합니다. 꿈은 커녕 술이 좀 취해도 의식이 반쯤 나가기도 하구요. 술먹었을때를 기억 못하는게 우리들의 의식상태이기도 한데요.
영혼(의식)이 3개월지난 태아로 푸슝~하고 들어오는 순간부터 '망각의 강'이란걸 거쳐서 서서히 잊어가서 출생후 다시 시작해야한다는 얘기가 있어서. 책을 본 적은 없지만, 스티븐슨말구 마이클뉴턴의 영혼들의 여행 참고하시면 연구/조사자료가 있다더라구요.
음...용어를 조금 정리를 할 필요가 있겠군요. 의식(意識)에는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에도, 인간의 사고나 인식작용이 나타나기 전에도 존재하는 본래의 의식(블루)이 있습니다. 한편 그와는 별도로 태아가 스스로 사고작용을 하여 나타나는 自意識(옐로우)이 있습니다. 그 自意識은 태어날 때 그 원형이 만들어지고, 성장과정을 통해 아기의 두뇌를 통한 사고와 인식의 에너지가 점점 활성화되면 그때 비로소 "나"라는 의식이 생기게 됩니다. 즉 "나"라는 의식은 지금의 인생이 그 출발점이지만, "나"의 본래의 의식은 태어나기전에도, 인간이란 생명의 진화사이클에 들어오기 전에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아주 단순하게 정리하자면... 태아가.. 아 여기가 엄마의 뱃속이구나. 그리고 지금은 내가 태아로 있구나... 이런 의식상태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제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태아가 생명체로서 혼과 영등 어떤 에너지 상태를 체험하는 것은 저 역시 인정합니다. 특히 육체적 차원에서의 경험은 분명하고 그 자체가 에너지 차원의 경험이라고 봅니다만. 의식이 나타나고 출현하는 것은 출생 이후 입니다. 여기서의 의식이란 여러 인지와 분별기능에서의 의미로 쓰겠습니다. 태아인 상태에서 산수를 했다고 한다면.. 태아인 상태에서 노래를 불렀고 테레비전의 개그맨의 이야기에 웃음이 났다면.. 믿으시겠습니까?
인간의 두뇌를 통한 언어나 개념화 작용이 일어나기 전에, 본래의 순수한 의식의 자리가 있습니다. 그 순수한 의식이 육체를 입게 되면, 이제 대뇌를 통해, 3차원이라는 만들어진 세계를 실제로 있는것처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순수한 의식이 느끼고 체험한 것은 태아 때도 존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만 [엄마]나 [뱃속]이나 이런 언어화,개념화를 하지 못할 뿐, 그 느낌은 충분히 각자 안에 간직되고 있다고 생각되는군요. 그리고 실은 이런 느낌이 기억의 좀더 본질적인 부분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서 태아일 때, 자신의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을 체험한 분이 있었죠. 그 경우 의사의 집게를 피하기 위해 이리지리 숨고 도망친 기억이 깊은 잠재의식 가운데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성장 후에도 그러한 경향성, 웅크리고 숨고 도망치는 것을 다시 경험하는 예가 있었습니다. 태아일 때 아기의 의식은 어머니와 함께 경험을 시작합니다. 다만 그것은 우리가 아는 개념이나 공부를 통한 것이 아니라, 순수한 의식상태에서의 체험이이지요~
초인시대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인간의 두뇌를 통한 인식과 사고작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의 자의식("나"라는 의식)을 가리키시는 것 같군요. 그런 자의식은 저의 경우도 유치원 이후에야 완전히 확립이 되었죠. 그자의식은 옐로우의 레벨이라, 어느정도의 학습을 거쳐야 겠지요. 다만 의식이란 측면은 옐로우의 자의식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국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왜 술을 먹고 필름이 끊긴다고 보십니까? 의식이 점점 들락날락 하니까 그렇거든요. 이드님이 태아 때의 기억을 믿겠다면.. 나도 별로 할말은 없네요. 하지만 태아는 의식이 없답니다. 태아랑 시체는 의식이란 면에서 보면 크게 다를바가 없습니다. 단지 생명체냐 시체냐의 차이죠. 둘 다 의식은 없습니다. 공동묘지의 뼉다구도 영혼이 있어서 자신의 전생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죠.
지금 아태님의 견해에 2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첫째로 순수의식이 육체생성 뒤.. 즉 태아 때도 이미 있어서 경험을 한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순수의식이 체험하는 내용은 무엇일까요? 엄마? 뱃속? 이건 거짓말이죠. 이건 그 단어를 나중에 알게된 의식체가 그렇게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연결시키는 그 시점이 과연 태아 때인지도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순수의식이 당시 태아로서 체험한 내용은 말씀하신 순수한 느낌이나 에너지 상태이고.. 저는 이 부분을 영혼은 있으나 의식은 없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태아때 라는 근거를 어디서도 가져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설령 순수의식 속에서 느낌 상태로
하하^^ 바로 그렇죠. 순수한 느낌이나 에너지상태..사랑받고 있다는 느낌.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 감싸여지고 있다는 느낌.. 실은 이러한 느낌이, 사고가 일어나기전의 순수한 의식이 교류하고 체험하는 방식이지요!! 저는 그러한 부분이 의식의 좀더 본질적인, 높은 레벨의 순수한 생각의 에너지라 보고 있습니다. 인간이 개념으로 만들고 언어화한 것 이전에 말이지요^^ 초인시대님이 어떤 [의식]을 말씀하시는지는 잘 압니다.
체험을 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태아 때라는 판단은 순수의식에서 내릴 수가 없습니다. 나중에 인간으로서 성장한 의식체가 내리는 언어적 표현력일 뿐이죠. 태아 때 목숨이 위협받는 상황을 체험했다는 그 사람의 경우.. 잠재의식 가운데 실제 그런 세포나 육체적 기억이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그러한 육체적 느낌들이 아마도.. 의사의 가위질이었을 것이다 라고 보는게 더 정확합니다. 마치 그때 당시로 회상하고 연상하여 들어가 의사의 가위질이나 이런걸 이해할 수는 없거든요.. 그때 당시의 정보는 어떤 두려움이나 자극적인 육체적 감각으로 남아있었을 것이고.. 그것을 언어적으로 끄집어내는 과정에서 의사가 가위
질을 했다.. 이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내가 그 가위질을 기억한다? 아니죠. 이건 거짓말입니다. 그 느낌들을 지금에 와서 지금의 상식과 의식수준에서 비춰보니.. 대략 그런 것으로 묘사하는 것이며.. 또한 그때의 회상이 정확한 것인지도 사실 알 수가 없습니다. 그 말만 들어선요. 일단 그 말이 진실이라고 가정하고 넘어가겠습니다만. 순수의식이라는 표현은 제식의 표현으로는 육체적인 것과 거의 같은 상태의 개념인 것 같습니다.
실시간댓글을보며열정들이대단하시다싶네요^^전요즘 생각하다가도 모르쇠가 되어버리거든요^^ 열띤토론중에 제댓글이찬물이되어 시원함느끼시라고 퍼부어보아요^^* 쉬었다가입시더~
문제는 거짓말이냐 아니냐에 있습니다. 어떤 깊은 기억과 느낌들이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태아 때. 여기서 시간개념이 나옵니다. 그리고 엄마뱃속. 공간개념도 나오죠. 과연 태아 때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이렇게 분별적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있다고 보십니까? 전 그 말을 한 사람이 거짓말 했다고 봅니다. 물론 어떤 느낌이나 추상적인 에너지 형태의 필이야 있을 수 있죠. 이를테면 어제 저녘 꿈을 꾼뒤 느끼는 느낌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태아라던지. 모태의 자궁이라던지 하는 의식은 태아 상태에 있을 수 없다고 봅니다.
꼭 그런 사람만 있는건 아닙니다. 아기로서 체험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히 그렇게 연결할 수 없지만, 나중에 본인의 의식으로, 관찰자의 관점에서 당시의 상황을 통합하여 이해하는 분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런 경지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요..우리가 기억을 할 경우, 당사자의 입장에서 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의식이 성장하면 당시의 상황에서 상대편의 입장도 느껴질 수 있고, 그 전체의 상황을 관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단계는 "나"라는 개체의식의 관점을 벗어날 때, 제3자의 대우주의 관점으로 나아갈 때 생기게 되지요~
하지만 초인시대님 말씀처럼 최종적으로는 본인의 진실성의 문제로 귀결되지요. 자신이 그렇게 믿고 상상한 것을 각색하여 기억으로 만드는 예가 굉장히 많으니까요. 하늘의 도움 없이, 자신의 의지로 태아 때의 명료한 기억이나, 에마네이션의 기억, 지구에 오기 전의 기억 등을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다만 가능성은 열어두고 싶군요~
뭐 이드님이 그렇게 태아 상태를 기억한다는데 저가 그걸 뭐라 할 수는 없고요. 뭔가 연결된 느낌이나 감정적 차원에 가까운 의식의 에너지는 있겠지요. 다만 저가 보기에는 태아가 출생이전에는 감각기관조차 제대로 열리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자궁이라는 공간성과 태아시절이라는 시간성은 도저히 분별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가 탄생한 이후에도 그런 분별기능은 없습니다. 단지 숨쉬고 눈만 껌뻑이는 정도입니다. 그 아기 역시 영혼과 연결되있고 순수의식의 공간에서 체험이야 하고 있겠지만.. 그 아기가 시간성과 공간성을 의식적으로 인식하진 못한다고 봅니다
아무튼 이 이야기는 그만하겠습니다.. 저야 물론 태아 때는 의식이 없다고 보지만.. 실제로 기억하는 분도 있을 수 있는 것이겠죠. 다만 그 느낌들이 자칫... 언어로 전달되면 마치.. 태아때 나는 산수를 했고.. 노래를 불렀으며.. 자장가를 따라 불렀다는 식처럼 오해의 소지도 큽니다. 설령 그렇게 말한다 한들... 자기가 태아 때 기억했다는데 뭐라고 하겠습니까. 물론 엄마뱃속에 있을 때를 기억했다는 것이 위의 그런 종류의 과장은 아닙니다만... 저가 원래 그런 간증체험담 같은 이야기는 신뢰를 안합니다. 그런거 한두개 믿어주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체험담이 기다리고 있거든요. 일단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 믿지 않은 것으로 봐주시고
그렇죠~ 실은 나도 십여년전에 마음수련원에 몰입한 친구가, 자신이 [마음수련]을 하니 갓난아기 때, 엄마에게 무슨 소리를 들었다는 것까지 기억이 나더라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별로 신뢰가 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기억에서 정작 중요한 느낌은 빠져 있었으니까요^^ 마찬가지로 전생에 내가 어디에서 누구였고, 무엇을 했는지 그런 기억을 공공연히 말하는 분들은 진실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왜냐하면 자의식이 개입된 상태로서, 순수의식으로서의 느낌의 영역을 말하는 것은 모순이니까요~ 최소한 집착이나 아상이 개입되지 않은 상황에서 의식의 체험과 성장이란 관점에서 그것을 말한다면 신뢰할 수 있을 겁니다.
아마 태아때의 체험담을 가지고 싸우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죠. 저는 태아가 당연히 영혼이 있다고 봅니다. 의식이 없다고 한 것은.. 말하자면 육체와 영혼 사이의 마음과 같은 기능을 하는 분별의식이 없다는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글쎄요. 저는 그렇게 보고 있지만.. 또 아닐 수도 있겠죠. 그리고 이런 이야기가 별로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다만 저로선 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일단 봅니다. 즉 사기치는지 아닌지요. 이 정도로 이 주제는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차피 답이 나오는 얘기도 아니고.. 언어적인 오해도 좀 있을 수 있으니까요. 저가 느끼는 진실성이 늘 증거가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