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요한 1,47-51
왜 천사는 모든 사람에게 보이지 않을까?
민수기 22장에 재미있으면서도 아리송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압 임금은 이스라엘 군대와 싸우는 게 겁이 났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예언자 발라암을 불러와
이스라엘 군대를 저주하려 합니다.
하지만 발라암은 하느님께서 가기를 원치 않으시자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하느님께서 원하시니 나귀를 타고 떠납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다시 마음이 바뀌셔서 발라암을 죽이려 하십니다.
천사가 칼을 들고 나귀가 오는 앞길에서 기다립니다.
그런데 나귀는 천사를 봅니다.
자신과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길에서 벗어납니다.
그러자 발라암은 말을 안 듣는 나귀를 때립니다. 천사가 더 위협해오자 나귀는 벽으로 붙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나귀를 더 심하게 때립니다.
이젠 막다른 골목에 다다릅니다.
피할 길이 없자 나귀는 주저앉습니다.
나귀가 미쳤나보다고 생각하고 나귀를 죽도록 때립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나귀의 입을 열어주십니다. 나귀는 자기가 칼을 든 천사를 보고 피하려고 한 것인데도 왜 죄 없는 자신을 때리냐며 따집니다. 나귀가 하는 말을 듣자 발라암은 그제야 눈이 열려
칼을 들고 자신 앞에 서 있는 천사를 봅니다. 천사는 말합니다.
“너는 어찌하여 너의 나귀를 이렇게 세 번씩이나 때렸느냐? 네가 내 앞에서 나쁜 길을 걷기에, 내가 막으려고 나왔다. 나귀가 나를 보고 세 번이나 내 앞에서 비켜났으니 망정이지, 내 앞에서 비켜나지 않았더라면, 내가 나귀는 살려 주고 너는 이미 죽였을 것이다.”(민수 22,32-33)
발라암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요? 천사를 볼 수 없는 수준까지 떨어져 버린 것입니다.
나귀가 그를 천사를 볼 수 있는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입니다.
나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천사가 보였다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자신이 어느 세상에 머무는지 보여준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군대에서 귀신을 본다는 청년에게 귀신과 대화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귀신과 대화한다는 말은 자신이 귀신의 세상에 속해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이나 하느님께서 보내신 천사들과 대화해야 합니다.
그래야 천사를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항상 신기했습니다.
당시 성당 성물방에 ‘하.사.시.’가 꽂혀 있었지만, 제가 아는 한 그 책을 뽑아 읽은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왜 저만 그 책에 관심을 가졌을까요? 저는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천사는 파견되어 파견한 사람과 누군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주님의 종입니다.
저에게는 그 책을 쓴 마리아 발토르타가 천사입니다.
그 천사를 통해 저는 신학교에 들어와 한 번이라도 그리스도를 만나 뵐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그 이유가 나옵니다.
나타나엘을 보시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요한 1,47)
예수님은 그에게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는 천사들을 볼 것을 약속하십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가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는 말을 굳게 믿고 거짓말을 안 하려 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착한 거짓말도 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 손 들라고 했을 때 저만 들었습니다.
진실한 말은 나귀의 언어였던 것입니다.
천국에 속해있어야 천국의 존재를 볼 수 있습니다.
말은 자신이 속한 세상을 알려줍니다.
천국은 거짓이 없는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거짓의 아버지는 사탄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향해 수많은 천사를 내려보내십니다.
그런데 천사를 보는 사람은 극히 일부입니다.
그 이유는 내가 천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언어란 ‘진실’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배신하고 다시 예수님을 뵐 수 있기 위해 무엇을 해야 했을까요?
자기 죄를 고백해야 했을 것입니다.
특별히 성모님께 고백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감싸는 무화과 잎들을 떼어낼 때 불칼을 든 천사를 통과하여 생명 나무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성이 높아지지 않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우리 안에 거짓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은 저급한 세상에 머물면서 기도로 자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발은 밧줄로 바위에 꽁꽁 묶어놓고 하늘을 날려는 것과 같습니다.
왜 거짓말하면 천사가 보이지 않을까요? 천사는 천국의 존재인데, 천국에서는 거짓말이란 언어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먼저 내 안에서 거짓이 사라지지 않으면 나를 하늘로 이끌어줄 천사를 만날 수 없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9일 [성 미카엘, 성 가브리엘, 성 라파엘 대천사 축일]
요한 1,47-51
상대방에게 천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바로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역사 안에서 천사(天使)들의 존재는 교부들과 신학자들 사이에서 잦은 논쟁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 존재 자체가 근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애매모호함으로 인해 명쾌한 설명이나 해석이 힘든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천사들의 존재와 활동에 대해서는 신구약 성경 몇 군데에 드러나고 있는데, 대체로 그들은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에 개입하실 때 매개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천사들은 하느님의 사자(使者), 하느님의 사신(使臣), 하느님의 심부름꾼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은 하느님 편에 서 있는 영적 존재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봉사합니다.
더불어 하느님의 명으로 인간 세상에 파견됩니다.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합니다.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을 인간에게 알려줍니다.
‘하느님의 권능’이란 이름의 의미를 지닌 가브리엘 대천사는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파견됩니다.
그녀의 삶에 개입함을 통해 구원의 기쁜 소식을 모든 인류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베푸시는 치유’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닌 라파엘 대천사는 눈먼 토빗에게 파견됩니다.
그의 병을 낫게 함을 통해 인류의 치유자이신 사랑의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누가 하느님 같은가?’라는 이름의 의미를 지닌 미카엘 대천사는 곤경에 처한 이스라엘에 파견되어 악을 물리치시는 승리의 하느님 이미지를 전달했습니다.
척박한 이 세상살이지만 가끔 천사의 모습을 지닌 동료 인간들을 만납니다.
말투나 사고방식, 행동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천사가 따로 없습니다.
한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코로나19 바이러스의 창궐로 집에서 게임만 하는 아이들이 안타까우셨던 선생님은 주말만 되면,
아이들에게 문자를 보내 접선 장소로 모이게 했습니다.
보통 대여섯 명, 많게는 열 명 내외까지, 생계로 바쁜 부모를 대신해서 아이들을 동반했습니다.
영양가 만점인 맛있는 간식도 직접 준비해서 산으로 들로, 그렇게 다니면서, 아이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쐬게 해주었습니다.
당신 숙소로 아이들을 데려가서 저녁까지 해먹이고, 집으로 데려다 주곤 하셨답니다.
따지고 보니 제2의 돈보스코가 따로 없습니다.
날개 없는 천사가 분명합니다.
솔직히 세상의 좋은 것에 죽고 그리스도 안에 살겠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이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서약한 우리 수도자들, 사제들은 신원의 속성상, 맡고 있는 직무에 따르면 천사의 역할을 해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천사는커녕, 평범한 한 인간 존재로서 가장 기본적인 역할과 도리에도 소홀하고, 자기 앞가림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자책감에 참 많이 부끄럽습니다.
오늘날 이 천사의 역할은 누구에게 주어졌다고 생각하십니까?
하늘을 아무리 올려다봐도 날개 달린 천사는 더이상 찾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우리에게 천사의 역할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천사의 역할을 요구하지 마십시오.
바로 내가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09.29성 미카엘,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 축일.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한 1, 51)
하느님의
모든 창조는
아름다운 섭리와
질서로 드러납니다.
영적여정으로
불리움 받은
우리의 삶입니다.
가장 높은
하늘을
바라봅니다.
가장 높은
하늘에서부터
가장 낮은 땅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의 뜻은
간절하며
아름답습니다.
우리를 악으로부터
지켜주시는
하느님의 대천사가
있습니다.
악이 아닌 선이
승리함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를 치유하시는
하느님의 대천사는
분명 존재합니다.
아픈 삶을 치유하시어
건강한 영혼으로 다시
살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시는 하느님의
대천사가 있습니다.
기쁜 소식을 통해
우리의 삶은 희망을
되찾게됩니다.
이와같이
대천사의 역할은
가장 좋으신 하느님을
우리들에게 알려주는
아름다운 직분을
맡은 분들입니다.
우리또한
하느님의 뜻을
올바르게 실천하는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영적 여정이
참된 힘과 참된 겸손
참된 기쁨으로 새로이
채워지길 기도드립니다.
대천사들이시여
매일의 여정에
충실할 수 있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소서.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